古方[6248]復齋복재,한종유(韓宗愈)-한양촌장(漢陽村莊)
漢陽村莊한양촌장
한양 별장
- 한종유(韓宗愈, 1287 ~ 1354))
十里平湖細雨過
십리평호세우과
잔잔한 십 리 호수
보슬비 지나더니
一聲長笛隔蘆花
일성장적격로화
한 줄기 긴 피리 소리
갈꽃 너머 들려오네
直將金鼎調羹手
직장금정조갱수
금 솥에 국 끓이듯
나라 경영하던 손
還把漁竿下晩沙
환파어간하만사
도리어 낚싯대 들고
석양 모래밭으로 내려 서네
*漢陽村莊:한강상류 '저자도'(楮子島:과거 옥수동과 금호동 사이에 있던 모래섬)에
있었던 한종유의 별장.
*韓宗愈(1287~1354):한양출신. 고려말 관리. 찬성사, 좌정승 등을 역임.
은퇴 후 향리에 은거 함. 자 師古(사고) 호 復齋(복재).
*細雨:가랑비 .이슬비. 안개비.
*隔:막다.격리. 간격(거리)이 있다.
*直:곧다.바르다.곧.즉시.
*將:장수.장차.문득.만일.한편.오히려.
*金鼎調羹:금솥의 국 간을 조절하다.
재상으로서 임금을 도와 國事(국사)를 보필함을 의미.
☞'書經' 殷(은)의 高宗(고종)이 傅說(부열)을 재상으로 등용하면서
'짐이 만약 국을 만들면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라('若作和羹 爾惟鹽梅')는
고사('염매은정':鹽梅殷鼎)를 인용.
*手:손.재주.솜씨.손수.스스로.
*還:돌아오다.다시.또.도리어.
*下:아래.밑.나중.<동사>내리다, 내려가다.
*沙:모래.모래톱.백사장
單衫短帽繞池塘
단삼단모요지당
홑적삼 모자 쓰고
연못 언덕
거니는데
隔岸垂楊送晩涼
격안수양송만량
버들 늘어진 언덕 넘어
저녁 서늘함 보낸온다
散步歸來山月上
산보귀래산월상
거닐다 돌아오니
산달은 떠오르고
杖頭猶襲露荷香
장두유습로하향
지팡이 끝 맺힌 이슬
연꽃 향기 감도는구나
동문선 제21권 東文選卷之二十一
漢陽村莊한양촌장 -한종유(韓宗愈)
1.
十里平湖細雨過。一聲長笛隔蘆花。
直將金鼎調羹手。還把漁竿下晚沙。
십 리 펀펀한 호수에 부슬비 지나가고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한 소리는 갈대꽃을 격하였다 / 一聲長笛隔蘆花
곧 금솥에 국 끓이는 솜씨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낚싯대 들고 저문 모래밭으로 내려가노라 / 還把漁竽下晩沙
2.
單衫短帽繞池塘。隔岸垂楊送晚凉。
散步歸來山月上。杖頭猶襲露荷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 언덕을 돌다가 / 單衫短帽繞池塘
언덕너머 늘어진 버들 밑에서 저녁 서늘함을 보낸다 / 隔岸垂楊送晩涼
흐트러진 걸음으로 돌아오매 산달이 오르나니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는 아직 이슬 맞은 연꽃의 향기 감돈다 / 杖頭猶襲露荷香
[주-D001] 금솥[金鼎]에 …… 솜씨 :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국을 끓이면 너를 소금과 매실[鹽梅]로 삼아
국맛을 조화(調和)시키겠다.” 하였다.
이 말은 정승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솜씨란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復齋복재,한종유(韓宗愈) 한종유(韓宗愈, 1287년~1354년)
충숙·충혜·충목왕 때 벼슬을 한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복재(復齋)이고 본관은 청주. 한양에서 태어났다.
심왕 왕고(瀋王暠)의 무고로 사촌 충숙왕이 원나라로 불려가 유폐되자,
한종유는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왕의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원나라에 올렸다.
왕이 귀국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왕고의 모함으로 충숙왕은 재위 내내 원나라에 압송되었다 풀려났다를 반복했다.
왕고는 스스로 고려왕을 자칭하기도 하는 등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왕은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한종유(韓宗愈)와 대신들의 반대로 이를 취소되었다.
충숙왕은 1330년 충혜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는 충혜왕의 막장 짓을 보다 못한
원나라는 2년 만에 충혜왕을 폐위시킨다.
그 뒤 충숙왕이 복권되나, 정사에 흥미를 잃은 충숙왕은 8년 만에 별세한다.
충혜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자 조적이 왕고와 작당하여 난을 일으키는데,
한종유, 김륜 등이 이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원나라에 끌려간 충혜왕을 변호하러 시종의 신분으로 같이
원나라 조정에 가서 그를 변호한다. 이로 인해 그는 공신이 된다.
하지만 곧 충혜왕은 원나라 순제의 명으로 강제로 압송당했다.
귀양 가던 중 악양(岳陽)에서 급사한다. 충혜왕의 폭정과 악명에도
귀향길을 따라간 신하는 한종유와 이조년 정도였다.
1344년 원나라의 조칙으로 아직 8살이었던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한종유는 정사를 보필하며 좌정승에 제수되지만 곧 충목왕이 12살에 요절하고
충정왕이 즉위한다. 한종유는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봉해진다.
하지만, 어린 충목왕 재위 말 때부터 심각해진 환관과 외척의 전횡에 질려버린 한종유는
조정에서 물러난 한종유는 저자도에 별장을 두고 노후를 보냈으며,
이때 저서로 '복재집(復齋集)'을 짓는다.
공민왕 1년(1352)에 서연(書筵)에 들어가니 왕이 예우하였다.
2년 뒤 68세에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이 문절공(文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復齋복재. 아버지는 밀직 영(英)이다.
1304년(충렬왕 30)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史館修撰)이 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예문관 응교로 대언 안규(安珪),
우상시(右常侍) 임중연(林仲沇) 등과 함께 정방(政房)의 전주(銓注)에 참여했다.
1322년 심왕 고(瀋王暠)의 무고로 충숙왕이 원나라 황제에게 불려가
국왕인을 빼앗기고 유폐되자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왕의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원나라에 올렸다. 1324년 왕이 귀국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임명되었다. 1327년에는 왕이 심왕 고에게
고려왕위를 넘겨주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저지시켰다.
1331년(충혜왕 1) 밀직제학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주빈(周斌) 등을 뽑았는데, 이때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경(瓊)을
부정으로 합격시켜 간관들의 반발을 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 때 정승 김윤(金倫)과 함께
이 난을 처리했다가 왕과 함께 원나라의 승상 백안에게 소환되어 옥에 갇혔으나
마침 백안이 죽자 풀려나 이듬해에 돌아왔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충절로써 왕을 변호한 공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고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왕이 원나라 순제(順帝)에 의해 악양(岳陽)으로 유배되자 다른 이들은
모두 도피하고 이조년과 그만이 시종했는데, 충혜왕과 이조년이 죽자
순제의 명으로 원나라에 가 있던 원자(元子 : 뒤의 충목왕)를 보살폈다.
1344년(충목왕 즉위) 충목왕과 함께 귀국하여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충정왕이 즉위한 뒤 1349년(충정왕 1)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진봉되었으나
권신들이 정치를 좌우하자 향리로 물러났으며.
1352년(공민왕 1) 서연관(書筵官)이 되니 왕이 극진히 예우하고 재상으로 삼고자 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복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