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_새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햇순이(이사 11,1)
새싹을 떠올리면 미뉴에트 곡이 머릿속에 피어오르면서 심장이 간질간질해진다. 바흐든 보케리니든 모차르트든. 소프라노로 굴러다니며 나풀거리는 멜로디에 기분이 말랑해진다. 우아하고 뽀얗고 귀엽고, 그것을 둘러싼 밝은 기운과 따스함도 함께 느껴진다. 이런 걸 제대로 표현하려면 노래나 시를 창작해야 할 텐데 그런 재능은 바닥이다. 하는 수 없이 맨송맨송한 글을 써볼 수밖에.
히브리 성경에서 ‘새싹’, ‘새순’, ‘햇순’ 등으로 번역 가능한 단어는 세 개 정도 된다. 또는 ‘어린 묘목’, ‘작은 나뭇가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단어들은 출현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생명의 시작, 새로운 가능성,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그 문맥 안에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아가서에서 새싹은 우거진 식물들과 과실나무들과 어울려 남녀가 사랑을 완성할 때 거기서 흘러넘칠 풍요로운 생명력을 묘사하며(아가 4,13), 미래에 꽃피울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가리키기도 한다(아가 6,11).
그런데 새싹이 성경 안에서 어떤 대상을 표상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보편적 상징성에 더해 특별한 성경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식, 후손’을 표상할 때와 하느님의 ‘메시아’를 가리킬 때다.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3)와 “너의 후손(직역: “씨앗”)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부어 주리라”(이사 44,3)에서 “새싹(햇순)”은 후손을 의미한다. 시편 본문의 문맥에서 “햇순들 같은 자식들”은 하느님이 축복을 내리신 결과다. 후손 번성 축복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성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 12,1-3)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시인이 행복하다고 감탄 중인 그 주인공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시인은 그 사람의 현재 아들들뿐 아니라 그 후손들도 번성하기를 기원한다(시편 128,6).
한편, 자식 복 터진 이 주인공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보장받은 축복의 개별적 실현이다. 그렇다면 이 햇순들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예루살렘의 번영과 함께 거기 대대로 이어질 후손들을 모두 배태한, 영속하는 이스라엘의 표상이 된다. 곧 하느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는 표지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후손들은 하느님 약속의 수혜자로, 그분의 축복과 돌보심이 모든 민족에게도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주는 새싹이 된다(이사 60,21; 61,11; 창세 12,3ㄴ 참조).
새싹이 메시아(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구원자의 도래를 표상하는 경우는 이사야와 즈카르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주님의 뜻에 따라 대속의 사명을 짊어진 종의 등장을 메마른 땅의 뿌리에서 새순처럼 솟아났다고 묘사한다(이사 53,2). 다른 곳에서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를 기대하며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고 예언한다. 즈카르야가 예언하는 주님의 ‘새싹’(즈카 3,8; 6,12)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두 구절에서는 그 새싹이 돋는 위치인 ‘메마른 땅’과 ‘그루터기’를 함께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메마른 땅은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새싹이 솟는다면 이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곳, 절망이 모든 재생의 가능성을 말려버린 상황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아주 작은 새싹일 뿐이지만 그 상황 전체가 뒤바뀔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루터기는 나무에서 큰 줄기가 부러지거나 통째로 잘려나가고 남은 부분이다. 베인 상처 정도가 아닌, 완전히 절단되어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사야의 이 예언이 본격적으로 편집된 때는 다윗 왕조의 남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패망하고 백성들이 그 정복자의 땅으로 끌려간 유배 시대다. 사실상 다윗 혈통이 다스리는 왕정의 종말, 예배의 중심인 성전의 파괴, 약속의 땅(영토)의 상실로 인해 하느님 백성이라던 무리는 완전히 결딴났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이사이는 다윗의 아버지로, 이 예언이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부여했을 희망을 정확히 알려준다. 곧 단절된 다윗 왕조의 후손이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이인 왕으로 돌아와 하느님 백성의 영화로운 왕국과 그 주권을 회복한 것이다. 이 회복은 이스라엘에게 성조 때부터 약속되었던 후손의 번성과 직접 연결된다. 다윗의 후손이 새싹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면 하느님의 약속을 다시 상기한 이스라엘 후손들도 주권 회복의 희망을 새싹처럼 틔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싹’ 예언은 단순히 현실 속에 이루어질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그 도래의 양상만을 그리지 않는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언젠가는 하느님이 약속하셨던 것들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상징이다. 패망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분의 계명을 저버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 파기를 초래했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계약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계약의 상대자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체급이 엇비슷해야 그나마 이쪽 능력으로 내밀어 볼 수 있는 카드가 있을 텐데 그런 건 없다. 대신 이스라엘은 계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돌이켜본다. 하느님은 계약을 맺기 훨씬 이전부터 일방적으로 그들의 조상을 축복하며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다. 그들의 현존재가 온통 하느님께 의존해 있었다. 예언자들은 이제 이 하느님이 자의로 당신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고자 하신다고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셔서 이를 이루시리라 설파한다. 새싹-메시아의 표상은 결국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믿으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기서 드러나는 더 깊은 차원이 있다. 앞서 완전한 파괴와 단절에 대해 말했지만, 사실 새싹은 완전한 영점에서 돋아나오는 것이 아니다. 메마른 땅 밑에는 더 깊은 곳에서 수분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는 씨앗이 있었고, 잘려나간 그루터기에는 땅속 어둠과 물기를 움켜쥔 뿌리와 말라버린 껍질 속 싹눈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회복 불능의 상태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럼 저 씨앗은 뿌리는, 싹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분 자신이시다. 인간의 패악질이 모든 것을 망쳐놓아 가망 없이 보일 정도로 인간의 파괴적인 반항은 강고하고 하느님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당신 신실하심을 거두지 않으신다. 또한 세상을 만드실 때 시간도 지어내신 하느님은 새싹이 돋아날 어느 시점도 배치해 두셨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잿더미 속을 구르며 그제야 하느님께 구해 달라 외친다.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응답하셔야 할 때인데, 곧 죽을 것만 같은 지금이 하느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셔야 할 때인데.” 대답 없는 하느님 앞에 지쳐간다
하느님의 응답은 이스라엘이 가늠하는 적당한 시기나 그 외침의 크기에 전적으로 달려있지는 않다. 엄동설한에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봄바람이 불기 전에는 새싹이 올라오지 않는다. 수분이 모두 타버린 돌투성이에는 우기가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싹트지 않는다. 메시아의 도래 역시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하느님이 정하시는 때에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성취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왕국 패망 후 유배의 땅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이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길과 인간이 예상하는 길은 다르다는 것, 인간은 하느님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 의지로 인간에게 가없이 신실하시며, 당신 백성에게 하신 약속에 스스로를 속박하신 채 그들을 위한 구원을 계획하시고, 당신이 생각해 두신 때에 인간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이 두 번째 깨달음이다.
새싹에 대해 뭘 쓸까 고민하며 구약성경을 뒤적여 보았다. 맨 앞에서 떠올렸던 새싹의 첫인상을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겉보기엔 어린 고양이 앞발처럼 그저 보드랍고 앙증맞지만, 사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깨달음을 미칠 듯한 심정으로 외치는 생명의 승전보다. 하느님의 계획과 때가 정해져 있어도, 새싹 쪽에서는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내며 죽음의 위기를 견뎌야 했다. 절망과 치른 전투에서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며 더 이상 못 해먹겠다 싶을 즈음,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때가 닥쳐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지에 승전기를 세운다. 이 나부끼는 생명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미뉴에트는 그만 안녕이다. 적어도 베토벤의 「합창」이나 말러의 「부활」 종결 악장만한 대관현악 합창곡이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넘는 대하 서사시 정도는 써줘야 한다. 그 정도 분량은 되어야 연둣빛 피철갑을 한 개선장군의 키득거림 한 조각이 간신히 그려질까 말까 하다.
수녀원 정원의 나무들에 새싹이 올라오면, 나도 이글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가 게네들을 보려고 한다. 엄청난 승리의 때가 닥쳐왔음을 묵상하면서 그 작은 것들이 내 눈앞에 올라오게 하도록 온 우주가 하느님의 의지로 지금 여기 몰려들었다. 게네들이 생명을 걸고 하느님과 함께 써낸 서사시는 생각 못 하고 그 외양에 속아 귀엽게만 여기고 있었다. 반성한다.
* 이현미 보나벤뚜라 수녀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수녀이며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과 교황청립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구약 성경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과 대구대교구 가톨릭신학원에서 구약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2년 봄(Vol. 57), 이현미 보나벤뚜라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