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를 앞둔 초봄 수은주가 초여름 급이다. 어느새 연둣빛으로 삐죽 내민 나뭇잎들의 입술이 더욱 길어졌다. 이러다가 덜컥 여름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는 주말이면 등산을 즐기는 내 벗에게도 장애가 되었던 모양이다. “산에 오르는데 더워서 등골에 땀이 흐르고 숨이 차더라”면서 이젠 보양식 먹어야 할 계절이 왔다며 침을 튀겼다. 여름을 대비한 보양식이라면 그 친구 말대로 지금쯤 먹어두면 좋을 것 같다. 대전 <바다황제>는 해물요리와 활어회 전문점인데 보양식인 이른바 해신탕(海神湯)으로 유명하다.
육·해·공 보양 식재료 망라한 높은 버전 해물탕
겨우내 모은 달걀 가운데 실한 것만 골라 암탉이 품게 해서 얻은 병아리들. 지금은 그 병아리들이 한참 철없이 집 안팎을 부산스럽게 쏘다닐 때다. 장독대에 돋아나는 어린 싹을 쪼기도 하고, 누렁이에게 쫓기기도 하고, 멀쩡한 앞마당 흙을 헤집기도 하며, 부엌 솥뚜껑에 물찌똥을 갈기기도 한다.
제 세상 만난 듯한 저 가여운 철부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새까맣게 모른다. 할머니 생신이 돌아오고 서울에서 고모부들이 내려오면 중닭으로 자란 그들 중 일부는 황천 행이 예정돼있었다. 머잖아 고모부들의 입을 즐겁게 해줄 운명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솜털 같은 날개를 펄럭거리며 독수리라도 된 양 활개를 치는 햇병아리들 모습이라니···.
이른바 몸보신 음식은 전통적으로 멍멍이와 토종닭이 전담했다. 그러나 보신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음식문화가 발달하면서 보양식이 다양해졌다. 이 집의 해신탕(海神湯)도 그중 하나. 몸에 좋은 재료로 조리한 일종의 고급형 해물탕이다.
우선 닭 뼈와 15가지 한약재를 10시간 정도 우려 육수를 낸다. 여기에 오리 한 마리와 ‘육·해·공’의 각종 보양 재료를 넣고 끓였다. 기본은 9만9000원, 능이 해신탕은 12만원, 바닷가재 해신탕은 13만5000원이다. 한 그릇에 4명 정도가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대충 어림잡아 봐도 5명이 먹어도 남을 양이다.
냄비는 마치 태평양 축소판 같다. 크기도 크거니와 온갖 재료들이 들어있다. 자세히 보니 전복과 문어 등 고급 해산물 외에 미더덕, 키조개, 동죽, 새우, 딱새우 등의 해산물이 듬뿍 들어앉아있다. 능이버섯 외에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송이버섯, 인삼, 더덕, 밤 등 몸에 좋은 뭍의 식재료도 망라했다.
다양한 해산물 즐기고 몸에 좋은 보양식 맛보고
처음, 직원이 세숫대야보다 큰 대형 냄비에 오리와 기본 재료를 넣고 탕을 앉히더니 ‘맛있는 시간 10분’이라고 적힌 타이머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나갔다. 시한폭탄처럼 타이머 숫자가 ‘0’을 향해 움직였고 냄비는 점차 열기로 뜨거워졌다.
냄비 속 국물이 끓고 타이머가 멈추자 주인장이 준비한 재료들을 정성스럽게 탕 속에 투입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새로운 신입들을 받아들인 냄비는 다시 본분에 충실하며 열을 냈다. 들어가는 식재료 가짓수만큼이나 조리 시간도 오래 걸렸다.
“바다의 신께 바치는 음식인데 대충 만들 수야 읎지유!”
촐싹대며 얼른 먹고 싶어 하는 우리 표정을 낚아챈 주인장이 견제구를 날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산 낙지가 어느 정도 익자 먼저 꺼내서 얼른 키조개 껍데기 위에 먹기 좋게 잘라줬다. 방금 전 운명한 낙지에겐 안 됐지만 쫄깃쫄깃 씹을 때마다 감칠맛 나는 뜨거운 국물이 혀를 희롱했다.
낙지를 먹으며 탕이 더 끓기를 기다렸더니 잠시 후 ‘태평양’에 해일이 일고 종전보다 더 부글부글 끓으면서 온갖 해산물과 버섯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우선 국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생각보다 한약 냄새는 나지 않았다. 대신 온갖 종류의 단백질들 우러난 국물 맛이 깊고 진했다. 능이와 송이에서 나는 버섯 향이 은은했고 푹 고아진 오리고기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미식을 즐겼던 청나라 황제들도 이런 보양식은 구경 못 했을 것이다. 닭 한 마리를 혼자서 독차지했던 그 옛날의 매정했던 고모부들이 하나도 안 부러웠다.
날치알에 속는 즐거움과 시원함이 색다른 ‘황제물회’
이 집에는 해신탕과 함께 여름용 보신음식으로 황제물회가 있다. 물회를 주문하면 국수, 밥, 매운탕이 함께 딸려 나온다. 전복, 소라, 포항 대왕문어, 광어, 농어, 도미 등의 해산물에 블루베리와 감말랭이 등 과일이 가세했다. 원래 멍게와 낙지도 들어갔었는데 맛의 조화가 맞지 않아 요즘엔 뺐다고 한다. 또한 다른 재료의 향미를 뺏어가는 상추와 깻잎도 넣지 않는다고 한다.
잠시 후 무수히 많은 ‘날치알’과 각종 재료들을 버무렸다. 그런데 이 ‘날치알’은 알고 보니 슬러시 형태로 양념 과일육수를 얼린 얼음 알갱이였다. 양념 과일육수를 날치알 형태의 입자로 얼린 것이다. 주인장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잠깐의 깜짝 눈속임(?)과 반전이 즐거웠다. 우리의 눈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눈에 보이는 세계라고 해서 모두 진실이 아님을 또 한 번 절감했다.
오이와 배 등 과일로 낸 육수는 자연스러운 단맛이 난다. 미리 밥 한 술을 물회 국물에 담가 두면 나중에 물회 양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꼬들꼬들하게 언 ‘물회밥’을 먹을 수 있다. 재료들을 이리저리 뒤섞은 황제물회 한 숟가락 떠서 먹었다. 차가운 청량감이 이내 온몸에 퍼졌다. 육회 국물 특유의 진한 단맛은 나지 않았다. 당도를 일부러 낮춘 것 같다.
“황제물회는 차가운 상태이므로 장이 냉한 사람은 따뜻한 밥이나 매운탕을 곁들여 먹으라”라고 주인장이 귀띔해줬다. 규격에 따라 2인(5만원), 3인(7만원), 4~5인(9만원)용 등 세 가지. 1만5000원 단품으로도 판매한다.
‘해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포세이돈이다. 삼지창을 휘두를 때마다 지진과 거센 폭풍우를 동반한 물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는 모습! 그 무한대에 가까운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포세이돈도 해신탕과 황제물회를 즐겨 먹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