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앙은행이 가파른 금리인상 흐름에 급제동을 걸었다.
코메르산트와 포브스 등 현지 경제 매체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은행은 20일 금리 결정 이사회에서 러시아 금융권의 인상 전망과는 달리 기준금리를 연 21%로 동결했다.
중앙은행은 올해 들어 4차례나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연 16%로 유지했으나, 7월 2%포인트(P) 인상을 시작으로 9월 1%P, 10월 2%P 등 5%P 올려 기준금리는 역대 최고인 연 21%가 됐다. 이번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동결한 덕에 기준금리가 새로운 기록을 세우지 않았다.
러시아의 기준 금리 추이/자료 출처:러시아 포브스
러시아 중앙은행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재정 지출 확대에 따른 누적 효과와 지난 달의 대규모 대출, 루블화 약세 등으로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대출 금리가 크게 오르면서 실질 금리의 상승, 금융권의 엄격한 대출 기준 마련, 신용 충동(대출을 받으려는 심리/편집자)의 둔화 등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냉각시킬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고 동결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금융권의 엄격한 대출 조건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은 앞으로 몇 달 동안 감소할 것"으로 기대했다.
◇예상을 뒤엎은 금리 동결 결정
현지 경제 전문지들은 중앙은행의 금리인상 중단 조치를 '플랜B' 혹은 '금융권 대출 환경 변화' 등에 따른 것으로 분석하는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현재의 높은 인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은 기업 부문을 포함한 금융권의 엄격한 대출 조건과 이에 따른 신용 둔화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결과"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사진출처:위키피디아
유력 경제일간지 코메르산트는 금리 결정에 대한 엘비라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의 '플랜B'를 소개했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빨리 인플레이션이 둔화되는 것을 보고 싶지만, 우리 경제는 특별한 상황(우크라이나 전쟁)에 처해 있다"며 "기준금리에 인내심을 더하는 게 우리의 플랜B"라고 말했다. 그녀는 "금리를 낮게 가져가면 인플레이션이 20% 이상으로 오를 수 있지만, 금리가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복잡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중앙은행의 금리 동결 발표가 나오자, 현지 언론과 금융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경제 전문가 중 어느 누구도 금리인상 외에 다른 시나리오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도 이사회에서 1%P와 2%P 인상안을 고려했지만, 제 3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중앙은행은 금리의 추가 인상을 시사했던 지난 10월 이사회와는 달리, 내년(2025년) 첫 이사회(2월 24일)에서는 금리 인상의 타당성을 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비울리나 총재도 중앙은행이 다음 이사회에서 금리를 인상하거나 동결할 수 있다며 원점에서 재평가할 것임을 시사했다.
◇시장 흐름을 거스른 조치, 이유는?
러시아 금융시장이 이번 금리 동결 조치에 더욱 화들짝 놀란 것은, 중앙은행이 지난 11월 초 발표한 금리 결정 요인에 관한 보고서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금리 동결의 조건으로 인플레이션이 크게 둔화되거나 이를 위한 여건이 조성되는 경우로 제한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실물 경제는 동결 조건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플레이션 압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10월, 11월 계절 조정 물가 상승률은 11.3%(연평균 11.1%)를 기록했고, 인플레이션은 7.6%에서 10.9%로 올랐으며,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도 연초 이후 최대치인 13.9%를 찍었다. 국내 수요가 여전히 공급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중앙은행이 금리를 동결한 것은, 인플레이션 둔화 여건이 조성된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금융권의 높은 대출 금리와 엄격한 대출 심사로 대출 둔화(신용 경색)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2~3%에 불과했던 기준 금리와 대출 금리 간의 차이가 무려 5~6%로 벌어지면서, 금융시장에서는 기준 금리 24%에 버금가는 실질 금리가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게 나비울리나 총재의 설명이다.
엘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사진출처:중앙은행
그녀는 "금융권 자체의 긴축 정책(대출 축소)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 효과를 평가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일부 산업 분야에서는 인플레이션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인 '노동 수요'가 증가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현지 경제전문가들의 해석도 얼추 비슷하다.
경제학자 예고르 수신은 "중앙은행은 현재의 고(高)인플레이션 현상에 계속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거나, 실질 금리를 고려한 장기적인 대응 방안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두 번째 방안을 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경제학자인 드미트리 폴보이는 중앙은행의 놀라운 동결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며 "내년(2025년)에 나타날 수 있는 투자와 경제 부문의 급격한 냉각을 피하기 위한 선제조치"로 분석했다. 또다른 전문가는 "그동안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겨냥한 재정 지출 확대와 신용(대출) 심리가 결합하면서 경제가 과열됐으나, 앞으로는 재정 지출 효과의 상대적 감소와 고금리에 따른 대출 둔화에 방점을 찍은 금리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또 연 4%의 인플레이션 달성 목표를 2026년으로 연기함으로써 통화정책 조정의 시간을 확보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치적 압력은 없었을까?
정치적인 해석도 물론 나온다.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올리가르히'(재벌)들의 압력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철강 재벌 알렉세이 모르다쇼프, 방산업체 로스테흐의 세르게이 체메조프 최고경영자(CEO) 등은 최근 고금리 탓에 기업 운영과 산업 발전에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다고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을 비판했다.
19일 열린 푸틴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서도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나비울리나 총재가 미리 금리 인상 여부를 귀띔해줬느냐는 물음에 푸틴 대통령은 "나비울리나 총재 본인도 금리 결정 이사회에서 어떤 결론이 나올지 모를 것"이라면서 러시아 경제를 위한 합리적인 금리 결정을 주문했다.
금리 동결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나탈리아 오를로바 알파뱅크(Alfa Bank)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은 올해 상반기 금리를 16%의 고금리를 유지한 뒤, 금리를 인하하기는 커녕 금리를 가파르게 올려왔다"며 "이번 동결 조치가 내년 상반기에 비슷한 금리 인상 흐름으로 확 바뀔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