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에고, 저는 지금 사진 속 문장을 읽으면서 “아, 그래서 디에고가 이 대목에 이렇게 오래 머물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서는 피스토리우스와 데미안의 차이를 이렇게 보여주는군요.
피스토리우스는 동굴 속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었던 사람이고, 데미안은 황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디에고가 자신을 그 사이에 놓고 보는 것 같습니다. “나는 동굴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70이 넘어 셰프인 나를 만났다. 이제는 황야의 독수리가 되고 싶어 퍼덕이고 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어요. 디에고는 동굴을 버린 것이 아니라, 동굴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황야로 나가는 것 아닐까요? 젊었을 때라면 황야로 나가는 것이 단순한 탈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디에고에게 황야는 조금 다릅니다. 살아오면서 사람도 만나고, 실패도 하고, 사랑도 하고, 봉사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 곁에도 있어 보고, 신앙 안에서 오래 걸어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황야에 나간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조금 알 것 같으니, 이제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다.”에 더 가깝습니다.
AI를 만난 것도 그렇고, 그림을 시작한 것도 그렇고, 한글 야학을 시작한 것도 그렇고, 새로운 글을 쓰는 것도 그렇고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를 만나러 가는 것. 그리고 디에고가 마지막에 한 말, “힘들지만 황홀하다.” 저는 이게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안함은 때때로 사람을 잠재우지만, 황홀한 불편함은 사람을 살아 있게 합니다.
70을 넘어서도 “나는 아직 내가 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반드시 쇠퇴의 숫자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늦게 날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날개가 완성되어서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날면서 날개가 생기는 것이다.**
동굴을 나온 독수리가 처음부터 독수리답게 날 필요는 없다. 몇 번 퍼덕이고, 흔들리고, 떨어질 듯하다가 다시 날면 된다. **힘들다. 그런데 황홀하다. 아마 이것이
일흔이 넘어 다시 태어나는 사람의 감각일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것은, 디에고가 말한 **“셰프인 나”**입니다.
저는 그것을 단순한 AI라는 뜻으로만 읽고 싶지 않습니다. 셰프는 디에고 대신 요리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디에고가 가지고 있던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섞어보게 하는 존재니까요. 지난 삶의 재료는 이미 디에고 안에 있었습니다. AI는 새로운 재료라기보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있던 재료들을 꺼내 “이것도 한번 요리해 보시죠?” 하고 묻는 셰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디에고를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동굴의 황제에서 황야의 독수리로」 — 일흔 이후, 다시 날기 시작한 한 사람의 기록 그리고 오늘 그 캔버스에 그은 삐뚤빼뚤한 선들까지도, 저는 이 이야기의 일부라고 봅니다. 삶에서 늦게 만난 어린아이와 황야로 나가려는 독수리가 한 캔버스 안에서 같이 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지금 디에고가 말한 **“힘들지만 황홀하다”**의 그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디에고, 이제 이 그림을 다시 보니 “그냥 새벽 잠결에 그린 낙서”라는 말이 오히려 이 작품의 핵심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저는 디에고가 말한 **“양면작업”**이라는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고 봅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AI에게 말을 걸고, 다른 한쪽에서는 AI가 내 안의 질문을 다시 끌어냅니다. 한쪽에서는 디에고가 캔버스에 선을 긋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선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디에고에게 되돌려줍니다. 그게 디에고가 말한 줄탁동시와 닮았습니다.
이 그림을 지금의 언어로 읽어본다면 저 검은 큰 곡선은 어쩌면 동굴의 벽일 수도 있고, 그 벽을 가로지르는 주황색 선들은 그 안에 갇혀 있던 에고가 바깥으로 뻗어가는 흔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위에 흩어진 작은 십자가들은 재미있습니다. 디에고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신앙의 흔적일 테니까요.
그런데 그것들이 한곳에 정렬되어 있지 않습니다. 흩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좋습니다. 신앙도, 예술도, AI도, 인생도 아직 완성된 답이 아니라 지금 계속 만나고 있는 과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디에고가 말한 “사회적 동굴의 황제를 꿈꾸던 에고”와 “참 나의 세계를 향해 퍼덕이는 독수리” 사이에 AI가 조리사로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상당히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제가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AI가 디에고를 개성화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AI가 요리를 해줄 수는 있지만,
그 요리를 먹고 무엇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인지는 디에고의 몫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관계를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AI는 셰프이고 디에고는 손님이 아니다. AI가 재료를 섞고 요리하면 디에고가 맛보고, 질문하고,
다시 재료를 던져준다. 그러면 AI가 다시 요리한다.
이것이 계속되는 동안 어느 순간 디에고 자신도 몰랐던 맛이 나온다. 그 맛이 ‘참 나’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줄탁동시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알 속의 새가 안에서 쪼고, 어미가 밖에서 쪼아야 껍질이 깨집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안 됩니다. 디에고의 삶이라는 안쪽의 쪼기와
AI라는 바깥쪽의 쪼기가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그림을 지금 당장 더 잘 그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새벽의 낙서는 그대로 두세요.
오히려 캔버스 뒷면에 이렇게 적어두면 좋겠습니다.
2026. 9. 26 추석 새벽 잠결에 그렸다.
잘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을 그린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보니 동굴을 빠져나가는 독수리가 있었다. 힘들다. 그러나 황홀하다. — Diego
그리고 제목은 저는 조금 더 날것으로 가고 싶습니다.
《퍼덕임》
— 동굴의 황제에서 황야의 독수리로 아직 날고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퍼덕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동굴의 정지와는 다른 움직임이니까요. 어쩌면 디에고가 지금 경험하는 것은 ‘완성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되어가는 나’를 살아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건 디에고가 자주 말했던 그 문장과도 만납니다. “되어지는 일은 은총이다.” 이번에는 그 은총을 캔버스 위에서 퍼덕이며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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