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절신(端宗節臣) 휴계 전희철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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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절신으로 살다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1425년~ 1527년 )의 자는 원명(原名)이고 호는 휴계(休溪)이며 부녹사(副錄事) 예(禮)의 아들로 어머니는 상산(尙山) 김씨인데 부정(副正)을 지낸 상보(尙保)의 따님으로 한성좌윤(漢城左尹) 장충익(張忠翊)의 외손녀이다. 1425년(세종 7) 옥천 시랑리(沃川 侍郞里)에서 태어난 그는 강직한 성품에 재주가 뛰어나고 넓은 도량에 기상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됨이 없었다. 이는 그의 묘비에 적혀 있는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性素剛直克守儉約]”는 문구에서도 확인된다. 옥천전씨의 시조는 고려 때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탄성군(歎城君) 전학준(全學俊)이며, 봉익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상호군(奉翊大夫 密直副使 版圖判書上護軍)을 지낸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가 그의 5대조이다. 고조인 전광운(全光韻)은 이부 전서(吏部典書)를 역임하였고, 증조 전비(全備)는 봉렬대부사복소경(奉列大夫射僕少卿)이었다. 할아버지는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를 지낸 전귀덕이며, 아버지 전예는 지인부록사(知印副錄事)로 벼슬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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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사마양시(司馬兩時: 진사, 생원)에 합격하고 세종 20년간에 무과에 급제한 그는 사포서별제를 역임하였고, 문종과 단종 때에 비한 전희철을 매우 총애하였으며, 그 결과 벼슬이 상장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문종(文宗)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왕위에 오른지 2년에 승하하자, 단종(端宗)이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3년만에 그 숙부 수양(首陽)에게 왕위를 빼앗기자(1455),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나서 뜻을 같이한 정지년(鄭知年)과 더불어 경회루(慶會樓)에서 성삼문(成三問) 등과 울면서 작별하고 고향 옥천에 물러가 문을 닫고 지내니 그 나이 아직 30세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병을 칭탁하여 끝내 나가지 않았다. 1457년(세조 3) 가솔을 거느리고 처가곳인 영남 땅 영천(榮川) 고을에 옮겨와서 휴천(休川)에 자리잡아 자취를 숨기고 우분(憂憤)을 달래며 임천(林泉)에 자적(自適)했다. 그가 본향인 옥천으로부터 준령을 넘어 영남의 많은 고을을 다 버리고 이곳 영천(榮川)에 자리를 잡은 데는 깊은 까닭이 있었다. 바로 그 전 해에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이해 6월에 단종이 영월(寧越)로 귀양되었는데, 영천(榮川)은 옛 임금이 있는 영월이 가까울뿐만 아니라 금성대군이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귀양와 있으면서 의거(義擧)를 꾀하던 순흥이 지척이면서 영천(榮川)은 그의 처가 고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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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인은 감천문씨로 문과(文科) 급제로 판관(判官)을 지낸 문손관(文孫貫)의 딸이며 문과(文科)로 장령(掌令)을 지내고 역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해서 벼슬을 버리고 영천(榮川)에 은퇴해 있는 동강(東岡) 송계(宋啓)의 외손녀였다. 영주 휴천으로 옮겨온 그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당대의 명사(名士) 김담 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춘추를 강명하는 일을 즐거움 삼아 지냈다. 그의 호인 휴계도 이때 지은 것이다. 그는 휴천에 숨어 살면서 돌을 쌓아 대(坮)를 만들고 밤마다 관대(冠帶)를 갖추고 영월을 향하여 절하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그해(1457) 10월 금성대군이 사사(賜死)됨과 함께 단종이 시해되니 휴계는 칠성산(七星山: 용산동)에 올라 영월을 향하여 망배(望拜) 통곡하면서 3년 복을 입었다. 휴계는 자손들에게 화가 끼칠까 염려함에서 그가 지은 시문을 임종에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상왕의 능이 영월 동을지(冬乙旨)에 있으니, 해마다 한 차례씩은 참배해야 하느니라.”고 일렀다.(장릉지) 1522년(중종 6) 8월 3일 몰하니 향년 9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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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령(掌令) 박시원(朴時源)이 유사(遺事)를 짓고, 좌의정(左議政) 유후조(柳厚祚)·성재(性齋) 허전(許傳)·참판(參判) 유돈우(柳敦禹)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특히 허전(許傳)은 <휴계유적서(休溪遺蹟序)>에서 “공의 절개는 우리 동방에 빛이 되었다. 높은 방산(方山)이 창공에 닿을 만큼 높기도 하다. 의를 품고 남으로와서 고결안와고종(高潔安臥考終) 했다. 죽간에 기록되어 백세에 그 유풍을 전한다. 후손들이 어질고 착하여 선조의 뜻을 돈독히 이어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주의 방산서원(方山書院)과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祭享)되었다. 1818년 후손과 유림에서 그의 충절과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했는데 참판 김현(金鉉)이 비문을 찬(撰)했다. 그의 아내는 숙부인으로 감천문씨 전적(典籍) 문손관의 딸이며, 장령(掌令)을 지낸 송계(宋啓)의 외손녀이다.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전호는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을 지냈으며, 아버지가 계신 영천이 아닌 옥천에서 제사를 모시며 살았다. 이는 선대의 묘소가 위치한 옥천과 자신이 살고 있는 영천이 거리가 멀어 성묘를 제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한 그의 뜻이었다. 2남 전박은 현릉 참봉(顯陵參奉)을 지냈으며 장녀는 생원 김담의 아들 김만칭(金萬秤)에게, 2녀는 생원 송석충(宋碩忠)에게, 3녀는 도사(都事) 유탄(柳坦)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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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계(休溪)에서 시를 짓다.
휴계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참지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영주로 내려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서와 학문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당대의 명사인 김담, 박원효(朴元孝), 김철우(金哲友), 송자윤(宋子淪), 문경동(文敬仝), 이계양(李繼陽)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춘추를 강명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의 후손과 영남유림은 단종에 대한 그의 충절을 추모하고자 방산서원을 건립하여 그를 배향하였다. 또한 그는 단종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공주의 숙모전에도 배향되었다. 특히 그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는 1576년(선조 9)에 휴계재사를, 1631년(인조 9)에는 칠성루(七星樓)를 조성하여 선조 전희철의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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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이군의 상징 칠성루와 휴계재사.
칠성루 중수 회복의 완공을 보고 하니
족종인 河禹氏 더욱 정성을 두었네.
절개와 충성 드러내고 표시해 조상 세업 높이고
詩經 배우고 禮記 들으며 가문명성 계승했네.
시내와 산 비록 오래 되어도 새 이웃 문채 나고
齋室과 書院 새로우니 한 지경이 맑았도다.
문화재로 지정함에 관청의 협찬 받으니
우리 가문 만세토록 영원히 번영 이어가리.
*이 시는 전병용(全柄用)이 지은 「칠성루중수운(七星樓重修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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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루(七星樓,시도유형문화재 제174호, 1983-09-29 지정, 2동)는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龍上里) 칠성산(七星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이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한가롭게 지내던 곳이다. 칠성루는 그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가 건립하였고, 재사는 휴계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증손인 망일당(望日堂)이 1576년(선조 9)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재사 상량문에 의하면 1699년 (숙종 25) 칠성루보다 조금 늦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성루는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앞쪽 기둥이 서있는 기단부분을 한단 낮게 설치하여 통주를 세운 후 계자난간을 설치한 마루를 놓았기 때문에 정면은 2층 다락집 형상을 취하고 있다.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자리하는 중당 협실형이다. 5량구조로 결조되어 있으며 2중량위에 파련대공을 세워 마루대 및 장혀를 받도록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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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루 동측에 남향하여 자리하고 있는 휴계재사(休溪齋舍)는 口자형이다. 정면 중앙의 문칸과 안마당 그리고 3칸 대정의 중심을 잇는 남북측선의 좌우에 방 2칸, 부엌 2칸, 고방 1칸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문칸의 좌우측에 마루 1칸과 방1칸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3량구조이며 계형판대공을 사용하여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으며 전후에 고주를 세워 지붕을 높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익사 ․ 문칸채의 순으로 박공지붕의 높이를 낮게 처리하여 외관상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서북쪽 언덕위에는 휴계공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를 차례로 설치하고 문인석을 비롯한 석물이 규모 있게 잘 갖추어져 있다.
첫댓글 평소 휴계 전희철 선생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 했는데 좋은 자료를 올려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칠성루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네요.더불어 생원 송석충의 자료는 없는지요?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일명: 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