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7. 06;00
지갑이 사라졌다.
그제도 어제도 누군가의 지갑이 산속 의자에 있었는데 사라진 거다.
주인이 찾아간 걸까, 아님 누군가 가져갔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나흘 전 산모퉁이에 있는 의자에서 여성용 지갑을 발견했다.
웬 지갑일까?
지갑의 소유자가 의자에 놔두고 숲 속으로 볼일을 보러 갔겠지라고
생각을 하며 무심히 지나쳤다.
꼭대기까지 올랐다고 내려왔는데도 지갑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어제도 있었으니 무려 3일 이상을 손타지 않은 거다.
누군가 실수를 가장한 유혹일까,
아님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인내를 시험하는 걸까,
초등학교 시절 남의 물건이나 불온전단을 습득하였으면 파출소나
경찰서에 갔다 주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어떻게 할까.
얼마 전 길에서 주운 지갑을 경찰서에 제출하였더니 당초 들었던
액수와 다르다고 시비를 걸어 애를 먹었다는 사연이 매스컴에 방영이
되었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린다는 옛날 속담도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 치안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민도(民度)도 높아졌으니 남의
지갑을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겠지.
나야 자유롭게 상상을 할 수 있지만 누군가 잃어버린 사람은 며칠간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그런데 그 지갑이 사라졌다.
사라진 지갑을 생각하다가 내 사유(思惟)는 1984년 겨울로 시간과
공간 이동을 한다.
주택은행 성내동 지점에 근무할 때 화장실에 장지갑을 놔두고
나왔음을 인지(認知)하고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내 지갑은
불과 수분만에 흔적없이 사라졌다.
당시 은행내부에는 CC TV가 없었기에 확인이 불가능했고,
내 지갑 속엔 동생 결혼자금으로 줄 자기앞수표, 면허증, 신분증과
함께 3급 비밀취급인가증이 들어있었다.
그때 3급 비밀취급 인가를 받으면 비밀문서인 '전시 충무계획'의
생산, 수정과 관리를 하며 대외비인 '음어자재'를 취급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수표는 Real time으로 현금지급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엔 타 은행 발행 수표는 어음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다음
영업일 결제시간 후에 지급이 가능했고, 같은 은행 본지점 간에는
전화로 사고유무, 결제 여부를 확인 후 선지급이 가능했다.
부랴부랴 수표 번호를 찾아 분실신고를 하고 대기를 한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주택은행 명일동지점에서 수표조회가 들어오는데,
마침 내가 아는 책임자라 간단히 설명을 하고 달려가 수표 습득자를
잡았다.
수표는 분실신고로 지급정지를 하였으니 안전하고,
수표 제시자에게 신분증이 든 지갑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니 수표만
버스에서 주웠다며 거절을 하기에 112 신고를 해 강동경찰서로 신병을
넘겼다.
담당 형사가 '점유이탈물 횡령죄'로 처벌을 받는다고 추궁을 하자,
그제야 잡혀간 아주머니가 남편이 은행 화장실에서 주웠다고 이실직고를
하며 남편이 은행으로 지갑을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
하루가 지나자,
담당 형사가 "아기가 울어 미치겠다"며 검찰로 넘길 거냐고 묻는다.
아기 눈동자를 보며 고소, 고발의 취하와 함께 '신병인도서'에 서명을
하고 풀어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바람에 인연이 된 담당 고 형사는 후일 은행에 들렸다가 그 사람들은
내가 고소, 고발을 취하하고 선처를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액수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고 전한다.
누군가의 지갑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점유이탈물 횡령죄'와 함께
수십 년간 은행에서 쓰던 실무 법률용어가 생각난다.
삼자변제, 대위변제, 대물변제, 근저당권, 질권, 압류, 가압류와 가처분,
지급명령, 추심명령, 전부명령, 취소와 무효, 소멸시효, 취득시효, 물권,
소유권, 전세권, 지상권, 유치권, 양도담보,
연대채무, 보증채무, 채무인수, 공탁, 상계, 갱개(更改), 소비대차,
임대차, 위임, 임치, 부당이익, 친권과 후견, 배서, 횡선, 공시최고,
제권판결, 채무명의, 가등기, 환어음과 약속어음, 유체동산, 강제경매와
임의경매, 신경매와 재경매 등이 떠오르는데,
생각이 많고 옛날 일이 새록새록 기억 나니 치매에 걸리긴 틀렸나 보다.
예보에 없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물 웅덩이에서 맹~♬하며 마구 울어대는 맹꽁이 소리가 성긴 숲 속으로
사라진다.
2022. 7. 17.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