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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3) 의미
삶의 의미는 목표지향적 삶을 살아갈 때 발현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야스퍼스(1883~1969)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은 ‘로고테라피’로 유명한 프랑클(1905~1997)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실존적 공허’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일까? 의미는 어휘적으로 운동의 방향성을 뜻하는 말에 그 어원을 둔다. 코레트(1919 ~2006)에 의하면 의미는 이론적-의미론적으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뜻’과 실천적으로 목표 혹은 합목적성의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방향’의 두 가지 근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행위는 그것이 움직이는 일정한 방향성에서 의미를 얻게 된다. 삶의 의미는 무엇보다 우리가 목적을 갖고 방향을 잃지 않는 목표지향적 삶을 살아갈 때 발현된다. 따라서 삶의 목적 설정과 방향 잡기는 의미 충만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의미 발견은 이미 세계가 의미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전제한다. 후설(1859~1938)에 따르면 의미 발견은 지향적 의식 주체의 의미 대상(노에마, Noema)과 의미 작용(노에시스, Noesis)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 부여의 행위다. 그런데 하이데거(1889 ~1976)는 이런 지향적 의식 주체의 의미 부여 행위는 근본적으로 ‘존재’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의미 부여는 인간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는 존재자(사물)와 관계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자기 존재 가능성을 향한 ‘유의미성’에로의 기획투사를 말한다. 결국 의미는 인간 현존재가 그때마다 바로 자기 존재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서 발현된다. 이때 사물들은 오로지 현존재의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유의미성을 가지면서 일정한 사용 사태 속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세계가 이미 의미로 가득 채워져 있음은 세계 자체가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이런 기획투사를 통해 이루어진 ‘앞서’ 이해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이해된 유의미한 세계 안에서 자기 존재 가능성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행위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에서 발견하는 의미는 결코 고립되어 개별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의미 전체’의 의미 연관 속에서 파악된다. 여기서 의미는 의미 전체의 ‘의미 지평’뿐 아니라 절대적 존재 혹은 하느님과 같은 의미의 ‘최종 근거’로 나아간다. 하나의 개별적 사태는 의미 전체와 관련하여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한계상황 속에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는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죽음·우연 등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삶과 존재는 그 자체가 신비로운 만큼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스퍼스는 “모든 상황은 의미를 넘어선 초의미 안에 의미를 지니지만, 그 의미는 자주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은 절대적인 한계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의미에 헌신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초월자와 관계하는 실존적 결단을 통해 자기의 존재 의미를 그때마다 드러낼 뿐이다.
철학상담은 내담자의 자기 실존과 존재 의미를 밝히는 삶의 테스트 이해와 해석에 특히 관심을 가진다. 내담자의 고유한 삶의 경험이 의미 있는 텍스트로 전환될 때,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고 부여될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1) 희망
절망 속에서도 희망 잃지 않으려면 ‘역설적 신앙’ 필요
“여기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1265~1321)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문에 적혀 있는 문구다. 희망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희망이 없는 삶은 지옥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희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 신들의 기원(계보)을 묘사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있는 ‘판도라의 항아리(상자)’는 ‘희망’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제우스가 자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로 강력해진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라는 여인을 선물로 보낸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열지 말아야 할 항아리를 열어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닫자 미처 나오지 못한 희망만이 항아리에 남게 된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말은 무엇일까? 마치 ‘희망 고문’을 하듯이 본래 희망은 재앙의 하나라는 것일까? 아니면 재앙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일까?
프랑스 실존철학자 마르셀(1889~ 1973)은 희망(espérance)은 욕망(désir)이나 염원(souhait)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 주장한다. 욕망과 염원은 내 존재 밖에 근거하고 있는 기대 가능한 소유에 속하지만, 희망은 소유 불가능한 존재에 속한다. 다시 말해 희망은 한계 상황 속에서 실존적으로 느끼는 존재의 감정이자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인 존재에의 응답이다.
인간은 비극적이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기에 이를 견디어 낼 수 있다. 마르셀은 역설적이지만 시련이 없는 곳엔 희망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희망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시련이 있기에 희망이 싹트며, 그 희망은 비대상적이고 비소유적이며, 오로지 자기 존재 자체에서 근원하는 ‘존재에의 용기’이자 ‘존재에의 기쁨’이다. 그렇기에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확신이나 신념과 다르게 당위성을 넘어서 있는 비약이자 도약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인간에게 희망은 언제 올지 모를 구원의 손길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존재를 지탱하고 견디는 인내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시련 속에서 자기 존재 전체를 감당하는 인내가 쉬울 수는 없기에 우리는 절대적 존재(하느님)에 기대곤 한다. 그래서 칸트(1724~1804)는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희망의 부재는 절망을 낳는다. 키르케고르(1813~1855)에 의하면 절망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엇갈림’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함으로써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보듯이 부조리한 ‘역설적 신앙’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희망은 절망의 대립 개념이지만 절망에 대한 반항이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항이나 도피는 또 다른 절망의 모습일 뿐이며, 오히려 희망은 절망 속에서도 자기 됨을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에 근거한다. 믿음은 희망을 싹트게 하며, 희망은 믿음을 견고하게 하며 자라게 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0) 행복
행복하려면 행운과 불운에도 긍정적 태도 필요
프랑스 철학자 알랭(Alain/Emile-Auguste Chartier, 1868~ 1951)은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랭은 그의 「행복론」(1928)에서 잎이 무성한 100년 묵은 느릅나무에 송충이가 번식할 것을 걱정한 청년이 결국 비관하여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평소 불행해지기는 쉽지만, 행복해지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소소한 일상에 숨겨진 행복을 찾는 일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낙관적 태도보다는 비관적 태도에 더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는 ‘에우(εὖ/좋은)’와 ‘다이몬(δαίμ ων/신, 신령)’이 결합한 단어로서 어휘적으로 ‘좋은 신령이 깃든 상태’, 다시 말해 ‘좋은 삶’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ἀγαθό ν, 아가톤/선)’을 원하며, 다른 것이 아닌 그 자체 때문에 원하는 것을 ‘최고선(τὸ ἄριστον, 토 아리스톤)’이라 하고 이를 ‘행복’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때의 최고선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최고선(τὸ ἀγαθὸ ν, 토 아가톤)이기보다는 삶의 목적과 자기완성과 관련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최고선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활짝 꽃피우는 것, 즉 인간의 본성적 기능을 충만히 발휘하는 데 있다면서 이를 ‘관조적 삶’이라 정의한다. 최고선으로서 행복은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기에 필연적으로 자족적이어야 하며, 탁월성(덕)·완전성·지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사유활동인 관조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육체적으로 한계를 지니지만 자기 고유의 본성인 정신 활동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육체적 결함으로 인해 순간 불행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정신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삶에서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우선 자기 본성과 관련하여 탁월함의 상태, 소위 덕스러움을 최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이런 완덕을 이룰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행복을 뜻하는 독일어 ‘글뤽크(Glück)’는 흥미롭게도 ‘행운’의 뜻도 가지고 있는데, 행운은 어원적으로 좋거나 나쁜 어떤 일이 우연히 ‘이루어짐’을 뜻하는 ‘게뤽케(Gelücke)’에 뿌리를 두고 있다. 행운을 뜻하는 라틴어 ‘포르투나(fortuna)’ 역시 행운이나 불운을 모두 가져오는 로마 신화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원적으로 이런 중의적 의미를 지닌 행운이 행복과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와 관련하여 ‘삶의 기예 철학’으로 유명한 현대 독일 철학자 슈미트(Wilhelm Schmid, 1953~)는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려면 이렇게 운과 관련해 부정적인 경우에서조차 긍정적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행복을 위해 지나치게 ‘행복한 우연’(행운)에 기대거나 혹은 반대로 ‘불행한 우연’(불운)을 탓하기보다는 어느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운명을 거슬러 싸우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치유를 위한 행복의 본질이다.
[과학과 신앙] (28) 어른의 머리, 어린이의 눈, 어린이의 마음
5월 5일은 24절기 중 여름의 시작을 의미하는 입하(立夏)이며 어린이날이다. 어린이의 어원은 ‘어리다’이며 훈민정음에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라 표현했듯이 중세 국어에서는 ‘아직 깨우치지 못하다’란 뜻이었다. 그 후 ‘어린 사람’의 의미로 바뀌고 아동 문학가인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사람을 높여 ‘어린이’란 단어를 새롭게 만들었고 1923년에는 최초의 어린이날이 생겨났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며 어린이를 존중했다.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이와 어른은 무엇이 다를까? 우선 생물학적으로 몸의 크기가 다르다. 이것은 몸을 이루는 세포의 수, 뼈의 개수 및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2023년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수학연구소가 중심이 된 독일·미국·영국·캐나다·스페인 국제 공동 연구진은 성인 남녀와 어린이의 세포 크기·수·질량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국제학술지인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몸무게 70㎏ 기준 성인 남자의 평균 세포 수는 36조 개, 몸무게 60㎏인 성인 여자는 28조 개, 몸무게 32㎏인 10살 어린이는 17조 개였다. 뼈의 개수도 달라 해부학적으로 20대 성인 은 평균 206개이지만 갓 태어난 신생아는 305개 정도이며 성장하면서 100여 개의 뼈가 합쳐져 단단해지며 그 수가 줄어든다.
우리말에 ‘잔뼈가 굵어지다’란 표현과 딱 들어맞는다. 이 표현은 여러 사전적 의미가 있지만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잔뼈가 굵어진 만큼 어른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지혜는 어린이보다 많다.
따라서 어른은 아이들에게 올바르고 건전한 지식을 교육할 의무가 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잠언 22,6)라는 말씀처럼 어른은 어린이들의 지식이 경험을 통해 상식이 되고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또 사회적 책무를 다하며 어린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것처럼 어른이 어린이에게 배울 점도 있다. 세상을 대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태도, 거짓 없이 타인과 소통하는 맑은 마음은 세속의 때가 묻은 어른이 배워야 할 점이다.
어른으로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지혜로운 어른의 머리,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이의 눈, 그리고 꾸밈없이 타인을 대하는 어린이의 마음이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른이 되십시오.”(1코린 14,20)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9) 용서
화해 · 회심은 용서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
철학상담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주요 방법으로 이해되는 용서는 전통적으로 종교성이 짙은 개념인데, 철학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프랑스의 두 철학자 얀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논쟁을 통해서다.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를 두고 ‘처벌’과 ‘용서’ 사이에서 고뇌했던 두 철학자는 ‘세상에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얀켈레비치는 1967년에 출간한 「용서」(Le pardon)에서 ‘용서의 절대적 무조건성’을 주장하지만, 1971년 출간한 「공소시효 없음」(L’imprescriptible)에서는 유다인 대량 학살과 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근본 악)’도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악이 존재하며,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데리다는 “용서란 이름에 합당한 용서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면서 “용서에 관한 담론은 역설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용서란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배분의 균형을 이루는 행위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정의와 구별된다. 용서의 본질은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함으로써 부정적인 사건을 긍정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이때 우리가 용서를 통해 부정적인 일 혹은 사건을 부정하거나 망각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히 우리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거나 영혼을 파괴한다면 그 영향은 더욱 크게 미칠 것이다. 우리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부정적 사건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며, 특정한 상황 속에서 반복되어 기억되거나 불현듯 떠올라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함으로써 서로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리스도교는 용서의 근본적 가능성을 믿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경우 고해성사를 통해 이를 제도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용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의미한다. 문제는 용서가 상처를 주고받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성립되어야 함에도 간혹 당사자들 사이의 화해 없이 용서를 언급하곤 한다는 것이다. 영화 ‘밀양’으로 잘 알려진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이 문제를 다룬다.
화해와 회심은 용서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용서의 주체(용서하는 자)와 객체(용서받는 자) 상호 간의 화해와 회심없이 용서를 기대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쌍방 간의 화해와 회심이 전제되더라도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며, 그로 인한 상처 또한 영원히 영혼의 흔적으로 남는 만큼 용서는 결코 일회적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처를 치유하는 용서는 거듭 반복되어야만 하는 행위로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절대적 긍정의 절대적(초월적·은총적) 사랑이다.
[인공지능과 인간 11]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궁극적 두려움은 결국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의 등장과 더불어 그것이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반인공지능이 등장하기까지 어떠한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현재의 모습을 보면 인간이 만든 수많은 자료를 학습하여 인간이 원하는 답을 찾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자료들을 만들고, 인간이 스스로를 무엇이라 규정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는 실험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것들 외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 육체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지만, 과학적 입장은 인간의 중요한 한 측면인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영혼의 측면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저 육체적이기만 한 존재라면, 그저 자연적 물질이기만 한 존재라면, 미래의 발전된 과학은 인간의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인간의 지적 능력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노화되고 죽음에 이르기 마련인 육체 전체를 바꾼 포스트휴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지능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과 동일시하지 않듯, 이러한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을 진정한 인간이라 하긴 어려울 겁니다.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의 말대로 “하느님 없는 인간은 비인간화”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성,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하는 과학적 입장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 이 인간이라는 사실도 부정하게 되며 결국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여 하느님께 다가가고 결합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영원한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창조된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장 다니엘루 추기경은 이러한 인간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는 여러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동물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원, 지적이고 인간적인 차원,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과 삼위일체의 심연에 자리한 궁극적 차원까지 말입니다.”
생물학적인 차원과 지적인 차원까지만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과학적 입장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마저도 실험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의 고유한 가치마저도 생산성과 효율성 판단 아래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 버립니다. 인간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일치를 닮아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인격적인 친교를 맺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오직 생존을 위해 기능하고 진화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결합이 아니며, 사랑으로 완성된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하느님 자녀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새로운 기술들의 발전 속에서 인간이 비인간화되거나 도구화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어 하느님 사랑의 일치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8) 정의
하느님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용서와 사랑에 근거
정의는 양날의 칼과 같다. 누구에게 정의로운 일이 다른 누구에게는 불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이며 절대 긍정으로서의 사랑과 달리 정의는 항상 앞에 ‘무엇을 위한’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정의 자체는 진리나 선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일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조건적인 행위인 만큼 간혹 정의 구현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첨예한 이념적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하기 때문이다.
정의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법조인은 법적 정의를, 정치인은 정치적 정의를, 종교인은 신적 정의를, 시민운동가는 분배적 정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이라는 ‘권리’와 관련된 고대 라틴어 격언은 정의의 기본 이념이 돼왔다.
정의는 어휘적으로 ‘올바름’ 혹은 ‘올바름의 상태’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카이오시네’(δικαιοσυνη)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물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관장하는 여신 디케(Dike)도 이와 관련 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정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한 플라톤(기원전 428/7~348/7년경)이 정의를 지혜·용기·절제의 덕목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인간이 올바름의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는 특별히 대인 관계의 탁월성과 관련지어 타인에게 좋고 유익한 것을 행하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품성 상태로 규정한다.
‘권리(ius)는 정의(iustitia)의 대상’이라는 아퀴나스(1224/6~1274)의 주장처럼 정의는 권리의 문제와도 직결되는데, 권리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ius)가 법의 뜻을 지니고 있듯이 정의는 권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정한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정해야 할 법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정의의 한계를 드러내곤 한다. 이는 정의와 관련해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결하는 자에게 더 높은 도덕적 양심과 무한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와 관련해 잘못된 법을 교정하는 ‘공정성’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정의에서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보편적 정의의 실현보다 윤리의식과 도덕성이다. 정의의 본질적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다. 선(좋음)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며, 악(나쁨) 또한 항상 그른 것도 아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공정한 것인가?’의 물음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성경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아니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한 유다인들의 행위가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구약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권리와 채무의 계약 관계로 규정하고, 이것의 공정한 이행을 정의로 묘사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메시지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회심하는 인간을 항상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다. 하느님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용서와 사랑에 근거한다. 이런 정의야말로 인간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인공지능과 인간 10] 노동의 의미 회복
9주에 걸쳐 인공지능에 대한 저의 성찰과 교회의 입장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2주에 걸쳐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 앞에서 기억하여야 할 중요한 가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인공지능 발전사를 보면 두 차례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기대를 모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나 방법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한계점이 드러났던 시기들입니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기법을 통해 세 번째 황금기를 맞이한 지금도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한계점이 드러나며 또 한 번의 암흑기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나라와 기업들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공지능 개발에 온갖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입니다. 눈덩이는 이미 구르기 시작했고, 윤리적 문제들과 개인 정보 보호와 같은 여러 제약을 통해 잠시 그것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진 몰라도 멈추게 하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결국 미래 인공지능의 모습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을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바라보느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미래 인공지능도 우리와 함께 연결되어 공존하는 존재가 되느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느냐가 정해질 거란 생각을 합니다.
이런 가운데,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두려움 즉,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하고 되살려야 할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흔히 하나의 상품처럼 여겨집니다. 생산성과 효율성에 따라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고 시장에서 경쟁력 없는 상품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취급됩니다. 노동의 의미가 생산성과 효율성에만 머물러 있다면, 인공지능의 발전은 거의 모든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보다 생산적이며 효율적임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부터 늘 강조해 왔던 노동의 진정한 의미는 생산성이나 효율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며 사람에게 땅을 일구고 돌볼 책임을 부여하십니다. 자칫 인간의 원죄 이후 벌로 부여받은 것이 노동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죄로 인해 변화된 것은 땀을 흘려야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며 노동 자체는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이며 사명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듯 사랑으로 이 세상을 돌보고 일구어야 할 책임을 지닙니다. 또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존재이며,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함으로써 타인과 세상과의 연대를 키워나갑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실현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동의 본질적 가치는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며, 오히려 뛰어난 생산성을 가진 인공지능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물질적 차원의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기실현과 연대를 위한 노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7) 불안
불안은 삶에서 무조건 제거해야 할 질병인가
현대사회를 ‘불안사회’라 한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여러 이유로 불안을 느낀다.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1931~)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불안이 현대사회의 병폐인 ‘만연한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자유의 상실’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 또한 「불안사회」에서 현대사회를 불안으로 특징짓고, 그 근본 원인이 ‘희망의 상실’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은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 증상을 인간의 병리학적 현상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진단한다.
과연 불안은 삶에서 무조건 제거해야 할 질병인가?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병리학자였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에 의하면 불안은 인간에게 빈번히 나타나는 매우 고통스러운 정서적 느낌이지만 어떤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피해갈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근본 조건이자 한계상황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존재의 근본 상태다.
이런 실존적 불안과 관련해 야스퍼스보다 앞서 깊은 통찰을 했던 철학자는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다. 그는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이 “인간 본성의 완전성에 대한 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대상지향적 특성을 가진 ‘공포’와는 달리 대상이 없는 ‘무규정성’의 특성이 있다. 이는 불안이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함으로써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불안은 인간 정신의 자유에 근거하며, 인간이 자기 실존의 본래성을 획득하기 위한 계기다. 이런 불안을 우리가 회피하려 한다면 이는 인간 실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불안의 근본 원인은 인간 정신의 ‘자유’에 있다. 인간이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홀로 자유롭게 결단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 앞에 선 인간은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바로 ‘자유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을 키르케고르는 ‘불안’이라 불렀다.
예측 불가한 무한한 자유의 순수한 가능성 앞에 각자가 홀로 책임 있게 설 때 얼마나 불안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불확실성 앞에서 선택의 가능성이 무한히 클수록 역설적으로 결단은 그만큼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오직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무’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결단하는 그 순간은 바로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는 것은 곧 자유의 순수한 가능성 앞에서 용기 있게 선다는 것이며, 이를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불안을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문제 삼는 현존재가 ‘무’ 앞에서 느끼는 ‘정황성(情況性)’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한 기본적으로 불안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으며, 이를 결코 피할 수 없다. 불안은 자기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절대적이며 최종적으로 무화시키는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안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향해 기투(企投, 나아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이란 본래의 자기를 찾는 계기인 만큼 우리는 불안을 내치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