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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나는 누구인가?
잠언 9: 11-12
11.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더하리라
12.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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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 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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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환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나는 누구인가'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이 질문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선인들이 물어오던 수수께끼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자신에게 꼭 한번 물어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수수께끼를 잘 압니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다가 낮에는 두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 질문했을 때 나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아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요.
나를 아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통해서 아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내가 아는 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아를 정당화하고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곡된 자아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 하거나 아니면 과소평가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두 번째 자신을 아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것을 통해 아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들 즉, 친구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한 사람들이 아는 나를 통해서 서 나 자신을 아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친한 친구는 나에 대해서 좋은 것만 말해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친구는 항상 나의 장점만 보고 나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적이 아는 나를 통해 아는 방법입니다.
나와 원수된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나,
그러나 이것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나에게 단점만 끌어내서 나쁜 이야기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나를 통해 아는 방법입니다.
'내가 아는 나'도 잘못되었고, '친한 친구가 아는 나'도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원수가 아는 나'도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참된 자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어서고 앉음까지도 아십니다. 우리의 과거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고 나에 대해서 전부를 아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로 알려면 곧 하나님을 알아야만 나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알 수 없으면 인간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나의 나됨을 알 때만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에 의해서 지어졌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란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다는 사건을 우리가 안다면 더 이상 진화론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진화론에 귀를 기울이며 많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 앞에 지어진 내 자신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알면 허황된 학문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알면 이 세상에서 은혜가운데 살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 목표가 무엇입니까?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하는 그 푯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인생목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나를 지어주셨음을 알았고, 나를 죄가운데서 건져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더욱 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려고 열심히 인생길을 달려갑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라면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엄청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못 깨달을 때 우리는 가치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참 온전하신 그분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 손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손을 여러 가지로 사용합니다. 이제는 손을 한번 사용해도 이 손을 지으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손가락이 몇 개입니까? 손가락이 5개인지 다 알고 있지만, 크기나, 굵기, 길이가 다 틀립니다. 그런데 이 손가락으로 못 잡을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유익하게 쓰면서도 이 손이 그러게 신비롭고 귀중한 줄을 잘 모릅니다. 신비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에 의해서 지어졌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만 해도 여러분 대단한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평생 이 땅에서 가르치는 모든 학문을 공부해도 이것을 깨닫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깨닫고 나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꼭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실 때 어떤 재료를 사용하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필이면 왜 우리를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원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고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라도 그분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에 원망을 안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원망과 불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금가루로 우리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보석으로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흙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전도서 3장 20절을 보면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왔음을 알면 우리가 흙으로 가는데 있어서 전혀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흙으로 왔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흙으로 가는 것이 큰 축복임을 아십시오. 이것을 못 깨달은 사람은 사람이 죽고나면 하늘에서 물고 가라고 나무에 걸쳐놓는다든지, 천장 위에 얹어 놓는다든지, 아니면 바위 위에 얹어놓습니다.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와서 뜯어가도록 합니다.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범하는 실수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흙으로 없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왜 흙으로 만드셨습니까? 흙의 특성을 알면 우리를 왜 흙으로 만드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흙에 여러 가지 특성이 있지만 4가지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특성입니다.
둘째는, 생명의 특성입니다.
셋째는, 정직의 특성입니다.
마지막으로, 도구됨의 특성입니다.
아무리 금이 좋지만 금가루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납니까? 안 납니다. 그러나 흙에는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잖아요. 놀라운 일이잖아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흙은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흙 자체도 살아있지만 흙은 생명을 낳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도 생명가운데 살지만 우리 자신도 다른 생명을 낳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어떻습니까? 서로 살리기 위한 삶이 아니라 서로 죽이기 위한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경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경쟁의 시대는 서로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시대입니다.
첫 번째 흙의 특성은 생명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신 이유는 흙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낳는 일을 해야 합니다. 흙의 특성은 생명에 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알고나면 금보다도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이 생명이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모하는 어떤 것 보다도 귀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흙입니다. 흙은 생명을 자라게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흙이 없다면 아무 것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물고기조차도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된 사람은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생명의 언어를 합니다. 생명의 행동을 합니다. 생명운동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는 사망의 행동을 합니다. 사망의 언어를 할 것입니다. 즉 회복되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낳고 죽음의 언어를 하고 죽음의 행동을 할 것입니다. 재난의 예언자들입니다.
두 번째 특성은 정직의 특성입니다.
흙에 콩을 심으면 무엇이 납니까? 콩이 납니다. 얼마나 정직합니까? 감나무를 심었는데 배가 열리지 않습니다. 심은 데로 거둡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심는 데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흙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오늘 세상은 정직으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거짓으로 세상이 충만합니다. 원래 지어진 특성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세상을 보십시오. 속여먹고 사는 세상입니다. 요즘 비리를 들추어내고 그러지만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파내어 보십시요. 그 가운데서도 계속 속고 속이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창조의 섭리에서 벗어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세 번째 특성은 사랑의 특성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한마디로 오물과 같은 더러운 욕심으로 타락한 모습입니다. 사람이 가는 곳에는 항상 쓰레기가 남아있습니다. 만약 그 쓰레기를 썩혀주는 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쓰레기 더미로 가득할 것입니다. 앞으로 흙이 죽고 나면 우리는 쓰레기 더미에 묻혀 살아갈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모든 것들을 덮어서 썩혀주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우리는 죄로 썩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서 우리의 죄를 하나도 보이지 않도록 다 감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덮으신 것을 우리가 일부로 파고 자꾸만 끌어내어서 그것을 보고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다 덮어졌고 씻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질 때 처음 그렇게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남의 작은
이지 않는 허물까지도 우리는 헤쳐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면서 살기 원하는 것이오늘 인간의 모습입니다.
흙은 그 더러운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품고 깨끗이 정화시켜줍니다. 참된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잃어가고 미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흙의 특성은 도구됨의 특성입니다.
로마서 9:20-21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정말 우리가 피조물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도록 내어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데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도구됨의 특성을 깨달으면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도구됨을 깨달으면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 나름대로 다 가치 있게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상이 모두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비교는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교회 생활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면 깨닫게 되어집니다. 잃었던 생명과 잃었던 정직과 잃었던 사랑과 잃었던 도구됨의 특성을 회복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우리는 잃은 존재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정직을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다 가치 있게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우리는 비교하면서 좋다고 하는 한쪽으로만 치우쳐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격려하면서 살 것입니다. 서로 도와가면서 살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심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나를 아는 지식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떠났던 존재였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렸고, 사랑과 정직과 하나님의 뜻을 져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서로 비교하고 평가해서 소외시킨 사람들에게 와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그 예수 생명의 피가 우리가운데 흐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회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을 낳는 일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가게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 것입니다. 사랑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다 가치 있는 존재들로 인정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행복할 것입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셨고 다시 하나님께서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그 큰 은혜로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의 그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져서 정말 인간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