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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1-3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 칼빈
본 시편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다윗은 자기가 체험한 심각한 시험과 자기가 사울에게 박해받는 동안 처해 있던 비참한 불안 상태를 나열합니다.
둘째 부분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해 자축하며 세상을 의롭게 통치하는 하나님의 의를 강조합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본문 1절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입니다.
1)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이것을 다윗이 동족에게 토로하는 불평으로 생각합니다.
다윗이 곳곳에서 은신처를 찾지만 아무데서도 흔한 인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 다윗이 사울의 잔인성을 피해 도망 다니던 그의 전체 방황 기간에 안전하게 쉴만한 곳을 발견할 수 없었고 최소한 얼마동안 괴롭힘을 입지 않고 지낼 만한 장소를 찾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동족 중에 누구도 자신이 도망다닐 때 그를 숨겨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보다 높은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절망시키려고 서로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을 때 그는 육신의 연약성 때문에 거의 마음을 압도하는 엄청난 고통을 맛보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앙으로 무장되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끈기 있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으며 이렇게 해서 그가 당하고 있던 시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극심한 위험 속에서 단련시키셨던 영적 갈등을 나열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경건한 자들을 보존하시는 데서 드러나는 의를 찬송하기 전에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었으나 신앙과 올바른 양심을 통해서 어떻게 승리를 쟁취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시편 11 편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자기 나라를 떠나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망명의 길을 나설 것을 권했는데 이것은 그가 자기에게 약속된 왕국을 포기하기 전에는 도무지 살아날 가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시편 서두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의 방패를 들어 이 그릇된 충고를 반박합니다.
2) 그러나 주제를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단어를 좀 살펴봅시다.
우리가 '도망하다'로 번역하는 (누드)라는 단어는 복수로 되어 있지만 단수로 읽는데 우리 생각에 이것은 잘못된 독법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자신에게만 해당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 유대 율법학자들은 복수가 여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생각하여 이 단어를 단수로 읽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려 하면서 왜 '너는 도망가거라'가 아니고 '너희는 도망하거라'로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에 스스로 고민하여 마침내 다윗에게 도망갈 것을 권한 사람들이 그의 영혼과 신체를 두고 말한 것으로 옹색한 해석합니다.
그러나 전혀 어려움 없는 문제로 그처럼 괴로워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다윗에게 조언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윗 혼자서 도망할 것을 권한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위기에 처해 있던 모든 수행원들과 함께 도망갈 것을 권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히 다윗을 상대로 말을 했지만 거기에는 그와 같은 명분을 갖고 있고 같은 위기에 처해 있던 동료들을 거기에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주석가들 간에는 다음에 이어지는 것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견해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히브리 원문이 (메하르켐)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네 산으로"라고 번역합니다.
그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에 인칭 변화가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다윗에게 '너는 우리들의 산으로부터 도망하거라' 라고 말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은 매끄럽지 못하고 억지입니다.
또 유대를 산으로 부르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의 견해 역시 어울리는 것같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하르 케모 치포르)를 대명사없이 '새처럼 산으로'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한 것을 따른다면 이 구절의 의도와 썩 잘 어울리게 되는데 너희들은 너희 나라에 거하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기에 "네 산으로 도망하라" 로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는 특정한 산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우연히 발 닿는 대로 가게 되는 광야의 바위로 쫓겨난 것으로 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이런 충고를 한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처럼 망명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11 편
당시 다윗의 처지가 이와 같았으므로 극심한 곤경에 처하자 모든 사람들은 그를 배척했으며 광야로 멀리 내쫓았던 것입니다.
3) 그러나 다윗의 말 속에는 만약 자신이 도망한 거기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했다면 그것은 불신의 증표일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가 도망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종종 억지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며 이리저리 쫓겨다녔고 때때로 동굴 속에 숨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물론 그가 벌벌 떠는 가련한 새처럼 안정되지 못하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 다녔으며 억지로 서로 다른 길목을 찾아다니고 자기 원수들의 올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방황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다윗의 신앙은 철두철미했기에 그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끝장난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의 일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썩어빠진 가지 이상의 가치를 그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결코 자신을 교회의 몸에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도망가거라' 라는 말은 확실히 그를 더 없는 절망으로 굴복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마치 일의 결과가 불확실한 것처럼 생각하여 이러한 공포에 굴복하거나 도망의 길을 택했더라면 큰 잘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말이 자기 영혼에게 말해진 것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러한 말이 자신의 신앙을 동요시키고 약화시킬 분이라는 점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굴욕적인 배척을 통해서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참된 종답게 항상 정직하게 살았지만 이 악한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그를 영원히 본국으로부터 떠나 망명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구절은 제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박해한다 해도 마땅히 우리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고수하며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이 약속이 우리에게서 미끌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이 아무리 많고 또 그 기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믿음으로 항상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2. 본문 2절은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보라 분명하다 불경건한 자들이 - 칼빈) 입니다.
시편 11 편
혹자는 이것을 다윗이 도망하여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란 사람들이 일종의 핑계로서 덧붙였다고 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자기에게 사방에서 위협해 오는 죽음을 보면서도 은신처 제공을 거부하는 동족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처한 고달픈 상황을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의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위험을 우리 앞에 제시할 뿐 아니라 자신이 죽을 지경에까지 처해 있었다는 점을 보이려는 데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가 어디로 숨으려고 했든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께서 후에 그에게 베푸신 구원에서 드러나는 은혜를 더욱더 두드러지게 묘사합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은밀히 쏘려-칼빈)라는 말을 다윗의 원수들이 술책과 올가미로 그를 기습 공격한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간단한 해석을 더 좋아합니다.
곧 다윗의 원수들의 화살이 침투하지 않은 은밀한 곳이 아무데도 없었으며 그러므로 어떤 동굴에 숨으려고 피신해도 죽음은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수행원처럼 따라올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3. 본문 3절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참으로 터가 무너졌도다) 입니다.
혹자는 (하샤토트)를 '그물들'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을 악한 자들이 다윗을 대항해서 시행한 사악하고 기만적인 술책이 좌절되었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은 다윗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힘이나 재주 때문이 아니라 약간의 힘도 기울이지 않았고 그는 잠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원수들의 그물과 올가미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터'라는 단어가 본문의 의도와 더 잘 어울립니다.
다윗은 분명히 자기가 얼마만큼 곤경에 처해 있고 또 봉쇄되어 있었던지 이제 자신의 보존이 어느 모로 보나 절망적이었다는 점을 계속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 편
하지만 이 단어를 '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 사이에서도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혹자는 그것을 그의 발을 디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는 뜻으로 설명하고 또 다른 사람은 신실하게 지켜짐으로서 안정을 유지했어야 할 언약들이 사울에 의해서 수치스럽게 깨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을 풍유적으로 이해하여 그 땅의 기둥들이었던 하나님의 의로운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기초가 붕괴될 때 넘어지며 폐허더미로 변하고 마는 건축물에서 온 비유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졌기에 그가 세상적으로 바라볼 때 전적으로 전복되고 말았다고 불만을 호소합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다시 '의로우신 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라고 말해서 그처럼 잔혹하게 박해당한 것은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고 반복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선한 양심의 증거를 통해서 재난에 직면한 자신을 위로하려는 뜻에서요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용기를 내려는 뜻에서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격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게 한 것은 자신의 명분의 정당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시며 자신에게 호의롭게 나오실 것이라는 점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시편 11 편
시11:4-7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이 시편은 견고히 서 있는 신앙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극한 난관을 당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굳게 서서 요동치 않습니다(1-3).
"여호와께 피하였다" 는 것은 하나님을 인하여 안전감을 느끼는 심리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안전감을 느끼게 되니 그것이 신앙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이 성도에게 친구들의 충고는 새같이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2, 3절이 밝혀줍니다.
그것은 곧 악인이 이 시인을 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당한 난관은 "터가 무너진 것같이" 할 수 없이 된 역경이었습니다.
"마음이 바른 자"가 음모를 당하는 사회는 터가 무너진 사회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역경에서 도망하라는 친구들의 충고까지 일축(一蹴)하고 신앙을 사수합니다. 사람이 위험을 당하여 혹시 피할 때도 있으나 그런 위기에도 신앙의 새 힘을 얻어 마음이 확정되었을 때에는 그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도망하라고 함은 "어찜인고"라고 하였습니다.
난관에서 피하라는 친구들의 충고에 대하여 이 시인은 답변합니다(4-7).
그 답변은 곧 성전에 계신 여호와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 여호와는 의로운 자를 좋아하시어 교제하신다고 하였습니다(5, 7).
"얼굴을 뵈오리로다"란 말씀은 교제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할 수 있게 된 것 그 이상 없는 복입니다.
1. 본문 4절 상반은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입니다.
시편 저자는 앞서 우리가 말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보장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도움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온 사방에 흑암으로 에워싸일 때 우리를 구원의 소망으로 인도할 빛을 하늘로부터 취하고 빌려오는 것은 믿음의 뛰어난 증거입니다.
신자들마다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점은 모두 인정합니다.
시편 11 편
그러나 그들이 비참하고 혼란한 일을 만나 불안해지고 궁지로 몰리게 될 때 이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을 마음에 간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다윗의 본을 따라서 사태가 더없이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빠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서 나오는 처방만 바랄 정도로 하나님의 섭리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말에는 하늘과 땅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다윗의 관심이 이 세상에 속한 일에 고정되어서 감각과 이성의 눈에 비치는 그대로밖에 보지 못했더라면 당시 위험스런 상황으로부터 구원을 도무지 내다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이 세상에서 모든 공의가 짓밟혀지고 신실성이 사라져버릴 때 그는 하나님께서 요지부동하게 하늘에 앉아 계시며 이 비참한 혼란 상태로부터 질서 회복을 찾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바랄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합니다.
다윗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늘에 거하신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곳 왕궁에서 통치하시며 자신의 심판대를 그곳에 두고 계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가 고통 중에 있는 자들과 불의로 압제받는 자들 모두를 위한 성소라는 점을 온전히 확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존귀를 돌리지 않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기만, 술책, 배신, 잔학, 폭력, 토색이 이 세상을 지배할 때, 또 만사가 불의와 악에 의해 무질서와 흑암에 내던져질 때 신앙으로 하여금 하나의 등불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하늘 보좌를 바라보며 그 광경을 보고 일이 더 나은 상태로 회복될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거룩의 성전' 또는 '그의 거룩한 성전'(그 성전)이란 말은 흔히 '시온'으로도 보지만 여기서는 틀림없이 하늘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다는 점은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는 다음 문장의 반복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은 틀림없이 동일한 내용을 두 번 반복합니다.
2.본문 4절하반은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입니다
다윗은 앞 문장에서 아무것도 하나님에게서 숨겨지지 않는다는 점과 인간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회계를 하나님께 바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추론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그의 보좌가 거기에 자리잡고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인가 인간들에게 심판하기 위해 인간사를 필연적으로 보살피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 11 편
에피큐러스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할 일없이 소일하며 수면 중에 계시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심판의 보좌를 세우려 하기보다는 그를 위해서 잠자리를 펴려 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처음 세워놓은 질서를 무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의 자랑거리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당분간 연기하더라도 오직 이 한가지 진리, 남아있습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하감하신다는 점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그의 사법권 행사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스리고 계시며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이 위로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3. 본문 5절은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빈둥거리는 방관자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신다는 내용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다'(감찰하다)로 번역하는 (바한)이라는 히브리어는 종종 '심사하다'(examine), '단련하다'(try)의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악인들 중에서 구별하려고 각 인간의 속셈을 파헤치신다는 단순한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악을 더하고 해독만을 일삼는 자들을 하나님이 미워하신 사실이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것을 파기하지 않고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스럽게 정하신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며 괴로운 존재들인 악인들에 대하여 원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악인들의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불법에 대한 사랑-칼빈)가 대조됩니다.
또 악인들이 자신들의 못된 습관을 두고 허울좋은 말만 늘어놓는 자들이 그 감언을 통해 얻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스스로를 기만할 뿐이라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시편 11 편
4. 본문 6절 상반은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그가 악한 자들에게 비로 내리시리라-칼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입니다.
다윗은 이제 마지막으로 비록 하나님께서 당분간 잠잠하시며 자신의 심판을 지연하시더라도 심판은 확실히 오고야 말 것이라는 점을 명확한 사실로 단언합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차츰차츰 자신의 현재 고통에서부터 행복한 결과에 대한 소망을 향해 일어서며 그의 주변에 횡행하고 있던 사회적 도덕적 무질서가 자신의 신앙을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은 확고부동하여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부터 이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감하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지탱하며 위로합니다.
다음에 다윗은 재판관의 직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눈의 감찰을 벗어날 수 없으며 당장에는 그들의 악한 행동을 처벌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모든 악인들을 미워하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은 능력으로 무장하시고 있으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증오가 헛되거나 효력 없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처벌을 연기하시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요 결국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인간의 행위를 내려다보는 망대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께서 부과하는 처벌을 '비'에 비유한 것은 아주 적절합니다.
비는 항상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원하실 때만 보내는 것으로 날씨가 더없이 맑고 고요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폭풍우나 무서운 소나기를 일으키십니다.
마찬가지로 악인들에게 부과될 보복이 결국 그들이 환희에 빠져 쾌락에 도취된 나머지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할 때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에게 닥칠 것입니다.
동시에 다윗은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을 넌지시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선지자들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고자 할 때면 하나님께서 옛날 백성을 위해 이루신 출애굽 사건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그들은 악인들을 경고하고자 할 때는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졌던 파멸로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며 그들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훌륭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가 그의 서신에서 이 도시들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7)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불과 유황 앞에 '그물'을 놓는데 이것은 아주 아름답고 적합한 표현입니다
시편 11 편
우리가 보는 대로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실 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넓은 벌판에 고삐풀린 말처럼 제멋대로 갈 수 있는 길이 광대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역경이 닥쳐오면 스스로 피난할 길을 강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로잡아 덫에 꽁꽁 묶기 전에는 자신들이 잡힐리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계속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덫(그물)을 이용해서 자신의 보복을 시작하시며 악인들의 피할 길을 사방으로 봉쇄하시고 그들을 단단히 묶어 놓은 다음에 소돔과 인근 도시를 하늘에서 불로 사르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천둥을 퍼붓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태우는 바람'으로 번역한 (질라포트)를 혹자는 '불을 지핌' 또는 '화재'로 번역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소요' 또는 '극심한 공포'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은 우리가 제시한 해석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폭풍우란 먼저 폭풍으로 시작되며 다음에 천둥과 벼락이 따릅니다.
5. 본문 6절 하반은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비록 악인들이 기만적인 감언이설로 자신들을 속이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꼭 실시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법을 성경에서 자주 대합니다.
육적인 마음이란 우연한 것으로 보이는 재난과 불행이 하나님의 공정한 분배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신을 자기 식구들에게 각자의 몫을 할당하는 가장(家長)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의미는 악인들에게도 마련된 보상이 분명히 있으며 주께서 그들에게 그 진노의 잔을 마시라고 내밀 때 그것을 거절해 봤자 헛일이며 그들에게 준비된 잔은 그들이 한 모금 한 모금 빨아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겔3:34)라고 한 선지자의 경고처럼 그 모두를 마셔야 하는 그러한 잔입니다.
6. 본문 7절은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이고,
칼빈 사역은 "의로우신 여호와는 의를 좋아하시나니 그 얼굴은 정직한 자를 인정하시리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직분을 통해서 악인들을 처벌할 것이라는 점을 추론했습니다.
시편 11 편
여기서는 하나님의 본성을 통해서 선하고 정직한 자들의 변호인이 되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만큼 그분은 의를 사랑할 수 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시는 셈이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모두 은혜롭게 소유하고 게시며 세상의 통치를 통해서 이것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신다는 점에 대해 확고부동한 결론에 이르지 않는 한 의를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냉담한 사색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의'라는 추상명사가 '의로운 사람들' 대신 사용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견해로서는 문자적 의미가 더 여기에 적합합니다.
곧 의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선한 명분을 좋게 여겨주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정직한 자들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곧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조금 앞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곧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또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내려다보신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신실한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합니다.
본 시편의 이 결론은 이 모든 내용의 의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진지하게 의를 좇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안전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합니다.
이 시편 저자 자신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일 으뜸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라는 구절은 여러 뜻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참된 의미는 하나님께서 항상 정직한 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시며 결코 그들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정직한 자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은 억지입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반박은 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