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에 유명한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설화의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경기도 용인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던 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자고
있던 남편을 덮쳐서 그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혼례를 치른 지 1년도 되지 않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아내는 ‘남편을 살려 달라’며 하늘을 향해 대성통곡을 하였다. 죽은 남편은 저승에서
아직 죽을 때가 안 됐으니 다시 이승으로 가라하여 자신의 몸에 접신을 하려 하였으나 큰 바위
때문에 접신이 되지 않아 영혼이 떠돌게 되었다.
그 무렵 충청북도 진천에 살던 부잣집 아들이 나이 마흔이 안 돼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혹시나
아들이 다시 살아날까 하는 마음에 장례를 일주일이 되도록 치르지 않고 있었다. 접신을 못하고
있던 용인 남편은 죽은 진천 남편의 몸에 접신하여 살아났으나, 매일같이 진천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자신은 ‘용인에 아내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자 실제 그곳에 가보니 똑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진천의 어머니는 용인의 아내를 데리고 진천으로 가서 진천 아내와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죽고 나서 용인 아내의 아들과 진천 아내의 아들이 서로 아버지의 혼백을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관으로 이름난 진천군수는 “살아서는 진천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판결을 내리자 용인 아들이 혼백을 모셔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
이라는 말이 생겼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일명 ‘쌍유혈(雙乳穴)’이라 불리는 두 묘가 나란히 있다.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와 조선조 명재상인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그것이다. 특히 정몽주 선생의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애국충절의 단심가(丹心歌)는 오늘날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출세와 권력만 탐하는
정치가와 권력가에게 꼭 필요한 산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말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이자 충신으로서 유명한 위인임. 경상도 영천에서
1337년에 출생하였으며 아버지 꿈에 주나라 건국 유공자인 주공(周公)이 " 나중에 커서 훌륭한 충신이 될
것이다"라고 해서 몽주(夢周) 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함. 성리학의 석학으로서 그의 스승였던 목은 이 색도
"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라고 칭찬할 만큼 높은 수준의 학문적 경지를 이룸. 明 태조 홍무제를 만나는
고려 정부의 외교사절로서 南京에 파견된 적이 있을 뿐만아니라 일본에 가서 왜 정부와 담판을 통해 왜구들
에게 잡혀간 고려인 포로들을 송환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음 .
이성계의 부장(副將)으로서 지리산 근처인 남원 운봉의 황산 전투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하였으며 함경도
길주에서는 이성계를 수행하여 여진족 호발도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함. 1389년 고려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守門下侍中으로서 이성계를 지지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것을
알게되자 적극 반대함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서 시해당한 후 방치된 시신을 산중의 스님들이 은밀히 개성
인근 해풍군 풍덕(豊德)에 매장하였다. 그러나 태종(1400~1418년)은 집권 이후 정치적 목적을 갖고 정몽주를
충신으로 선양하게 되는데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하사 후 고향으로 이장(移葬)을 허락하였다.
황해도 풍덕(豊德)에서 경상도 영천으로 내려가던 면례(緬禮 :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냄) 행열이 경기도
용인의 경계지점을 지나면서 잠깐 쉬는 동안 이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명정(銘旌 : 장사지낼 때 망자의 신분을
기재하여 상여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붉은 천의 깃발)이 하늘 높이 날아가 현재 묘지에 떨어지자 모든 사람이
이곳이 명당자리라 하여 그곳을 유택(幽宅)으로 정했다고 함(면례 행열이 멈춘 곳 → 豊德來 : 면례행열이 개성
풍덕으로 부터 왔다는 뜻) ♣ 출처 : 영일 정씨 포은공파 홈페이지
* 이석형(1415~1477)은 고려말까지 안변 일대 세거(歲居)하다 용인으로 옮긴 연안(延安) 이씨의 후손으로서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세종 때 왜구의 소굴였던 쓰시마를 정벌한 이종무의 손자임. 세종 때 사마시, 문과에
세번이나 장원급제한 인재로서 집현전 학사로 선발된 이후 글씨와 문장실력이 뛰어나 당대 8대 문장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 이 개, 하위지, 최 항)에 손꼽힐 정도였음.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
황해도 · 경기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호조참판, 8도 도체찰사를 역임 후 성종 때는 판중추부사에 오름.
그는 당시 실력자 한명회와 사돈 관계에 있던 정몽주 손자 정 보의 사위로서 부인 영일 정씨(정보의 딸)가
산후조리중 사망하게 되자 장인(정 보)이 자기 묏자리에 딸을 묻게 하였는데 나중에 이석형도 사망 이후
그곳에 합장하게 됨으로써 명당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함(이석형의 집안 연안 이씨가 용인에 세거지 터를
잡게 된 것은 이때 부터 이며 그는 당시 처가 였던 영일 정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측됨)
* 한편 정몽주 가문은 태종에 의해 입신양명하게 되어 왕실과 결혼하는 등 후손들의 前途가 洋洋하였으나
손자 정 보(鄭 保 : ?~?)가 사육신을 옹호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귀양갔다가 죽게 된 이후 약 200여년 동안
관직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었음. 이후 숙종代에 들어와 정 보가 신원(伸寃)되면서 후손 중 영의정, 대사성에
오르는 뛰어난 인재들이 나오게 됨 (우암 송시열이 쓴 정몽주 신도비 내용 참조)
두 묘를 ‘쌍유혈’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후손 발복(發福)으로만 판단한다면 이석형 선생의 묘가 단연 좋은 자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석형 선생 집안에서는 조선시대 부원군 3명, 정승 8명, 대제학 6명, 판서 42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 문과급제자 120명을 배출하였다. 게다가 선조 때에 선생의 신도비를 찬(撰)한 4대손 문충공 월사 이정구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면서 연안 이씨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이석형 선생의 직계 후손들이 벼슬을 많이 하게 되자 정몽주 선생의 묘보다 더 명당이라는 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주산에서 뻗어 내려온 용맥(龍脈·산줄기)은 좌우요동과 상하굴곡을 하면서 힘차게 전진을 하고 있다.
용맥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고갯마루라 불리는 ‘과협(過峽)’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혈처(穴處)가 있음을
가늠케 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를 고서에서는 ‘진룡지과협다(眞龍之過峽多·혈을 형성하는 참된 용은 과협이
많다)’라 한다. 정몽주 선생과 이석형 선생 묘를 포함한 주변은 인작(人作·사람에 의해 꾸밈)으로 조성한 부분이
많지만, 용맥이 직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몽주 선생 묘를 향한 용맥은 마지막 혈을 맺기 위해 방향을 틀었으나 튼 지점 부근은 반발력으로 인해 두툼하게 살이 찌는 현상인 ‘귀성(鬼星)’이 뚜렷하지 않은 반면 이석형 선생 묘를 향한 용맥은 ‘귀성’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또한 정몽주 선생 묘는 방향을 튼 후의 용맥이 묘소까지 변화 없이 뻗어 가는 직룡(直龍)인 데 비해 이석형 선생 묘까지 도달하는 용맥은 꽤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풍수적인 비교분석에도 불구하고 지근거리에 있는 두 묘는 한 뿌리에서 나온 전형적인 ‘좋은 자리’임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