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2.가 을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3.갈대꽃
유안진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4.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5.구절초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6.꽃 지는 날에
유안진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7.꿈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8.낙엽 쌓인 길에서
유안진님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9.눈사람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10.동백꽃
유안진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