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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역의 지형 및 지질
산지
한반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영남지방은 북쪽과 서쪽에 위치하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중부 및 호남 지방과 분리된다.
태백산 - 소백산 - 속리산 -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따라 산지의 폭은 50~100km에 이르고,
특히 구미 - 김천 - 추풍령 - 영동을 연결하는 지역 이남에서 대단히 넓다.
남-북 방향으로 분포하는 태백산맥은 영남분지와 영남 동해안 지역을 분리한다.
이것은 영남분지 중앙부에서 태백산맥을 횡단하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호강 유역 분지에 의해 영남 북부
태백산맥과 영남 남부 태백산맥으로 나누어진다.(그림3)
영남 북부 태백산맥은 봉화, 울진, 영양, 청송, 영천, 포항, 대구로 연결되면서 폭 30km 내외를 유지한다.
영남 남부 태백산맥은 대구, 경산, 경주, 청도, 창녕, 밀양, 울산, 양산에 걸쳐 동 - 서 폭 50~70km, 남북 길이 50~70km의
마름모 형태를 취한다.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은 해발고도가 높고 산지 사면의 경사가 급하다.
이 산지를 흐르는 하천은 유역 분지의 규모가 커서 유량이 많고 하상 경사가 급하여 깊은 하곡을 형성한다.
영남분지의 서쪽과 북쪽 분수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은 고생대 화강편마암, 동쪽과 남쪽 분수계인 태백산맥과 대구, 창녕,
청도, 밀양 지역은 경상누층군의 최하부에 속하는 유천층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릉지와 충적평야로 이루어진 분지저는 주로 중생대 퇴적암이다.
분지의 중앙은 남류하는 낙동강에 의해 형성된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영남분지 중앙부는 동서 방향으로 대구 - 경산 - 영천 - 안강·건천 - 포항·경주로 이어지는 퇴적암 지역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구릉지와 금호강의 충적지가 펼쳐진다.
영남분지는 보현산 - 팔공산 - 금오산 - 가야산 - 비슬산을 연결하는 산지에 의해 북부 분지, 중앙 분지, 남부 분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영남 북부 분지에는 동쪽으로 영주, 안동, 의성, 군위군이, 북서쪽은 영주, 예천, 문경, 상주, 구미가
포함된다.
영남 남부 분지에는 달성, 창녕, 함안군이 포함된다.
영남 중앙 분지는 보현산, 팔공산, 비슬산, 금오산, 가야산, 구룡산에 의해 둘러싸인 금호강 유역으로 동 - 서로 긴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琴湖江 유역 분지에는 구릉지, 선상지, 충적평야가전개되고, 영남 남부 분지와 영남 북부 분지
그리고 동해안 및 남해안 지방을 연결하는 결절지역이 된다.
그러므로 고려의 건국으로 한반도 중부로 중심이 이동되기 전까지, 영남 중부 분지는 교역 및 군사적 관계에 관한 모든
측면에서 핵심 지역이었다.
하천
영남분지는 대부분 낙동강 유역 분지에 해당하며 하천도 대부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영남지방에는 대규모 산지들이 폭넓게 분포하기 때문에 낙동강 본류뿐 아니라 지류들도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지 못한다.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남대천, 왕피천, 병곡천, 형산강, 태화강은 하류부에 충적평야가 다소 넓지만, 발원지의 해발고도가 높아서 하상경사가 급하고 유로가 상대적으로 짧아서 범람원 규모는 작은 편이다.
다만, 하천 양안에는 하안단구가 흔하게 분포한다.
동해안으로 직접 유입하는 하천들은 최종 빙기 동안 낮은 해수면에 대응하여 현재 하천의 하류부에 깊은 침식곡을 형성
하였으며, 이후 해수면이 현재 수준에 도달하는 홀로세(Holocene) 중기에는 침식곡이 익곡되었다.
이때 해안선은 상류쪽으로 전진하였고 현재 하천 하류부의 일부는 내만환경이었다.
이후 해수면이 안정된 가운데 하천이 운반한 퇴적물로 쌓여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대에는 해안선이 여전히 현재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여 하구부에서 내륙쪽으로 어느 정도 떨어진 곳까지는 수
심이 있는 환경이 유지되었고, 수로를 통해 교통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분지
한반도 남동부 영남지방 산지에는 산간 분지가 다수 분포한다. 기반암의 차별 침식과 지질구조선이 교차하여 형성된
산간 분지는 높은 산지 지역에서 인간 활동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주거지와 경지를 제공하므로 일찍부터 인간 생활에
중요한 공간이었다.
분지에 입지한 도시로는 거창, 가조, 초계, 고령, 창원, 고성, 청도, 산청, 성주, 문경, 봉화, 대구, 신광, 경주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여러 개가 서부 경남에 분포하고 있으며, 동쪽은 낙동강, 북쪽은 금오산, 가야산, 감천에 의해 자연적 경계가
되고 있다.
이 범위는 옛 가야 연맹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해안
한반도 남동부의 해안 지형 특성은 경주의 입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영남지방은 동부와 남부의 가장자리가 해안으로 열려 있어 해안선이 대단히 길다.
한반도 경동지형 융기축에 해당하는 태백산맥이 동해안에 인접하여 해안과 평행하게 분포하므로 해안충적평야는 매우
협소하고, 포항, 영해, 울산 등에 소규모로 분포할 뿐이다.
이 해안은 융기작용을 받고 있으므로, 현재 해수면보다 높은 위치에 여러 단段의 해안단구가 나타난다.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해안단구는 대략 해발고도 25m 이하인 저위면이며 동해안 거의 전 구간에서 확인된다.
형성된 지 오래되지 않아 매우 평탄하고 해안과 비고도 작아서, 경지, 주거지, 교통로 등이 입지한다.
저위면 가운데 가장 낮은 고도에 분포하는 해안단구는 해발고도 10m 내외인데 보존상태가 대단히 양호하다.
저위면은 특히 해안선을 따라 매우 연속적으로 분포하므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을 통합하는 데 활용된다.
또 동해안에는 산지가 해안까지 돌출한 곳에 수직의 높은 해식애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형은 교통로를 통제하기 용이하고 군사적으로 활용 가치가 대단히 크다.
아울러 산지가 해안에 인접하므로 해안에 사는 사람들도 산지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임산자원을 얻을 수 있다.
하천 중심의 제4기 후기 환경 변화
신생대 제4기는 기후변화의 시대이다.
빙기와 간빙기가 교대하면서 식생환경에 변화를 초래하고, 해수면이 승강하였다.
최종 빙기(7만년~1만 년 전)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낮았으며, 낙동강의 하구는 현재보다 휠씬 더 바다 쪽으로 전진하
였다.
최종 빙기에서도 가장 기온이 낮았던 최종빙기극상기(LGM)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거의 140m 정도 아래까지 하강
하였으며, 침식기준면인 해수면의 하강에 대응하여 하천이 하방침식을 하면서 두부침식을 하였으므로 하류부에는
깊은 침식곡이 형성되었다.
낙동강의 경우 현재 김해평야 일대에는 낙동강의 하상이 현재 지표면보다 40~60m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남지에서는 해발고도 -20m 부근에 있었으며, 대구 부근에서는 해발고도 0m에서 하천이 흘렀다.
최종빙기극상기 이후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이에 대응하여 해수면도 상승하여 대략 7,000년 전에 현재 수준에
도달하였다.(그림4)
이때 낙동강 하류부에는 빙기에 형성된 침식곡이 상승한 바닷물에 의해 익곡되었으며, 해안선은 대구 부근까지 내륙
으로 깊숙이 전진하여 내만환경을 만들었다.
이후 해수면이 안정된 가운데 낙동강이 상류와 중류부로부터 운반해온 퇴적물에 의해 하구부가 메워지면서 해안선은
신석기 초기의 낙동강 하류부는 내만이었으며, 고대에는 신석기시대에 비해 해안선이 바다쪽으로 상당히 많이 후퇴
하였으나, 낙동강 하류부는 여전히 수심이 현재보다 휠씬 깊었으며, 중류부도 언제나 수운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경주 지역의 지형 특성
경주가 신라의 수도로 입지하는 데 영향을 미친 자연환경 요소들은 산지 지형, 단층선, 분지, 선상지, 하천, 해안과의
인접성 등이며, 이 요소들을 중심으로 지형 특성들을 논의하기로 한다.(그림5)
그림 5. 영남지역 중부와 북부의 지형
산지
경주의 서쪽에는 남 - 북 주향의 단층운동을 받아 넓은 단층선곡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경주는 형태적으로 다소 불완
전한 분지이다.
이 지역의 산지는 태백산맥과 불국사 산맥, 그리고 남쪽의 남산이다.
태백산지는 해발고도가 높을 뿐 아니라 산지의 폭이 30km 이상으로 매우 넓어서 경작지가 부족하고 인구밀도가 낮다.
다만, 영천 남부와 경주 사이 지역에서 태백산맥의 폭이 대단히 좁아진다.
이는 기반암의 차이에 기인하는데, 보현산 지역과 경주 서쪽에서 남쪽과 서쪽으로 전개되는 유천층군 지역 사이에
분포하는 경상누층군의 퇴적암 지역 산맥을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류하면서 자르기 때문이다.
금호강은 영남 내륙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로서 매우 유리하다.
현재 영천시 고경면과 경주시 안강읍 사이에 시티재, 영천시 아화면과 경주시 건천읍 사이에 아화고개가 있다.
경주시 남쪽과 동쪽에는 남산과 불국사 산맥이 길게 뻗어 있다.
이 산지들은 단층선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특히 동쪽의 불국사 산맥은 경주의 동쪽에서 북 - 남 방향으로 분포하여 경주분지를 동해안과 격리시키고 방어하는
기능이 있다.
이와 같은 산지의 분포는 영남 지역의 교통로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림 6>은 낙동강 좌안 영남 지역의 교통로를 나타낸 것이다.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에 조성된 고개와 하곡을 따라 형성된 길을 통해 취락들이 연결된다.
평지에서 교통로는 자연적 장애물이 없는 경우 최단거리 경로를 취하지만, 산지에서는 능선 가운데 해발고도가 낮은
고개 등의 안부에 조성된다.
고개는 도로와 철도 등 현대적 교통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유용한 교통로였다.
선사 및 고대에도 소규모 인원이나 물자의 이동에는 기복이 크더라도 가장 짧은 거리로 왕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교통로는 대규모 이동이나 물자의 교류에는 장애가 되었을지라도, 소규모 이동이나 거래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고개 중 현재에는 전혀 이용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대동여지도가 편찬된 18세기 이전에도 이
통로는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산지, 구릉지, 하천 주변 등에서 선사시대 주거지나 유물들이 발견된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당시 산지에는 현재와 달리 많은 통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의 동해안 지방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내륙을 연결되는 통로로서 울진 - 옥방 - 현동 - 봉화 - 영주, 평해 - 온정 -
수비 - 영양 - 진보 - 안동, 영해 - 창수 - 영양 - 진보 - 안동, 강구 - 영덕 - 황장재 - 진보 - 안동, 청하 - 상옥 - 부남 -
청송 - 안동, 청하 - 신광 - 안강 - 고경 - 영천, 포항 - 안강 - 고경 - 영천, 경주 - 건천 - 아화 - 영천, 언양 - 산내 -
밀양 - 청도 - 창녕, 경산, 낙동강을 거슬러 삼랑진 - 창녕 - 고령으로 이르는 대략 10개 정도가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중 경주 - 건천 - 아화 - 영천 노선, 강구 - 영덕 - 황장재 - 진보 노선, 낙동강을 거슬러 삼랑진 - 창녕 - 고령의
세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내륙에 도달하며,
언양 - 산내 - 밀양 - 청도 - 창녕, 경산을 제외하면 영남 북부 분지의 영주와 안동을 연결하고 있다.
특히 안동, 의성 - 안강 - 경주로 연결되는 통로는 산지가 높고, 곡이 좁아 거의 드물게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 영천은 팔공산지 북쪽으로 신령 - 효령 - 해평 - 낙동, 선산 - 상주 - 문경 - 충주, 신령 - 의흥 - 의성 - 안동 -
영주 - 단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동해안에서 영천에 이르는 통로 중 안강 - 고경 - 영천을 연결하는 교통로에는 영천군 고경면에 거의 400m에 이르는
높은 고개(시티재)가 있는 데 비하여, 건천과 아화 사이의 고개는 해발고도 200m 이하이다.
따라서 고경과 안강을 연결하는 시티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에 태백산맥을 경계로 영남 내륙 분지 지역과 동해안
지방은 분리되었으며, 교류할 수 있는 교통로가 제한되었다.
태백산맥을 동 - 서 방향으로 자르고 있는 금호강 유역에서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아화고개로 단일화되는
점은 경주로 하여금 군사적 측면에서 대단히 유리한 입지를 갖도록 만든다.
삼한시대 영남분지에는 진한 및 변한의 수많은 소국이 있었다.
동해안과 평행하게 달리는 태백산맥은 산지의 폭이 넓어서 군사적으로 자연적인 방벽이 된다.
그러므로 영남 내륙 지방에서 사로국이 장악한 동해안으로의 침입은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영남 내륙의 소국인 청도 이서국의 침입을 받았다.
이서국은 유천층군으로 이루어진 영남 남부 태백산맥의 하곡을 따라 건천을 통해 경주로 침입한 것이다.
안동지역의 소국이 경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진보 - 황장재 - 영덕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동해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영덕에서 경주 사이는 거의 68km에 달하고, 청송에서도 청하 지역까지 높고 험준한 산지를 통과해야 하므로
침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영남 내륙 지방에서 경주분지를 공격하는 최적의 교통로는 태백산맥의 폭이 좁아지고 산지의 해발고도가 낮아지는
금호강 유역을 통해 경주로 들어오는 영천 - 아화고개 - 건천 - 경주 노선이다.
그러므로 사로국은 이 노선을 따라 방어망을 구축하면 국가적 위기를 피할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국방에 대한
부담이 적다.
이처럼 영천의 골벌국은 경주세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사로국은 치밀한 계획 아래 이곳을
복속하였다.
경주 세력은 힘이 강성하지 않은 초기에는 골벌국을 통합하지 않고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동해안 지역을 통합하였다.
영남 내륙 지방으로 진출하던 시기에도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청도 이서국, 대구, 경산 지역을 통합하고 이후 골벌
국을 병합하였다.
고대 전 시기를 통해 영남 내륙에서 경주로 침입하거나 진출하는 거의 모든 세력은 영천–아화고개–건천 노선을 이용
하였다.
삼한시대를 포함하여 고대 초기 북쪽의 고구려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백제는 고구려와
사로국 사이에 있었으므로, 신라를 공격 할 가능성이 낮았다.
다만, 백제는 왜, 가야와 연합하여 399년 양산단층선을 통해 경주를 침입하였다.
이와 같은 교통로와 군사적 입지 특성은 사로국이 낙동강 좌안 영남지방을 통합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경주의 사로국이 한반도 남동부에서 여러 소국을 통합하여 신라로 성장하는 데는 정치, 경제, 군사적 비교 우위를 차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로국의 주변 소국 복속은 정치·외교적 방식이 아닌 군사적인 우위를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경주 세력은 초기 국가 형성에 있어서 주변 지역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먼저 동해안 지방을 통합하고 영남 내륙으로
진출한다.(표1;그림7)
가장 먼저 울산, 동래 방면으로 진출하며, 이후 안강, 신광, 삼척을 병합하여 태백산맥 동쪽 동해안 지역을 통합하였다.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긴 지역을 통합한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경주를 중심으로 교통로가 되는 단층선이 발달하므로 경주는 동해안 도로 교통의 결절점이 된다.
영남 내륙지방과 해안을 연결하는 두 개의 교통로를 장악하면 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같은 생산물의 교역을 통제
할 수 있다.
표 1.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로국의 주변 소국 병합 시기(이희준, 2007)
국명 기록연대 전거 복속 형태
우시산국(于尸山國) 탈해왕대(57~ 80) 열전 4, 거도전 정복
거칠산국(居柒山國) 탈해왕대(57~ 80) 열전 4, 거도전 정복
굴아화촌(屈阿火村) 파사왕대(80 ~112) 지리 1, 임관군 정복
음즙벌국(音汁伐國) 파사왕 23년(102) 본기 1 정복
실직곡국(悉直谷國) 파사왕 23년(102) 본기 1 내항
압독국(押督國) 파사왕 23년(102) 본기 1 내항
다벌국(多伐國) 파사왕 29년(108) 본기 1 정복
압독국(押督國) 지마왕대(112~134) 지리 1, 장산군 정복
소문국(召文國) 벌휴왕 2년(185) 본기 2 정복
감문국(甘文國) 조분왕 2년(231) 본기 2 정복
골벌국(骨伐國) 조분왕 7년(236) 본기 2 내항
사량벌국(沙粱伐國) 첨해왕대(247~261) 열전 5, 석우로전 정복
이서국(伊西國) 유례왕 14년(297) 이전 본기 2 정복
그림 7.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로국의 주변 소국 병합 순서(번호는 병합 순서)
이와 같은 유리한 지리적 입지를 바탕으로 경주 세력은 먼저 동해안을 통합하고 영남 내륙지방의 통합에 나섰다.
파사왕대에는 경산의 압독국을 복속하였으며, 창녕으로 비정되는 비지국, 불확실하지만 내륙지방인 대구로 비정되는
다벌국, 합천으로 추정되는 초팔국을 통합하였다.
벌휴니사금대에는 의성의 소문국, 조분니사금대에는 김천의 감문국을 병합하였으며 영천의 골벌국이 내항하였다.
첨해왕 때에는 상주의 사량벌국이 병합되었으며, 유례왕대에 이서국을 정복하였다.
사로국은 대략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에 걸쳐 압독국 등 진한 지역의 소국들을 모두 정복하면서 고대국가 신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단층선
한반도 남동부에서는 지질구조선의 연장성이 탁월하고 다양한 주향의 것들이 다수 확인된다.
양산단층선과 울산단층선이 교차하는 경주 일대에서 가장 특징적인 지형은 단층선과 관련된다.
양산단층선은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활단층이며, 다대포, 양산에서 언양, 경주를 거쳐 안강과 신광 그리고
영덕군 영해에 이른다.
양산단층선을 중심으로 이에 평행하는 여러 단층선들이 북북동 - 남남서 주향을 갖는다.
양산단층선은 수직 변위가 미약하지만, 동쪽 지괴는 현재도 융기운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약 25km 이동한 우횡
변위단층이다.
양산단층선에는 현재 고속전철과 고속국도가 통과하며, 폭 넓은 단층선곡은 취락, 경작지와 같은 인간 활동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울산단층선은 서북서 - 동남동 주향을 하며 경주에서 울산만으로 연장되고, 이와 약간 어긋난 형태로 북서 - 남동방향
으로 경 주- 건천 - 영천을 잇는 단층선이 지난다.
지질구조선의 관점에서 태백산맥 동쪽에서 구조선이 가장 많이 지나는 곳은 안강이다.
이곳에는 전술한 양산단층선뿐 아니라 서북서 - 동남동 방향의 단층선을 따라 기계, 의성으로 연결되고, 서남서 - 동북동
방향의 단층선은 영천과 대구를 연결한다.
울산단층선은 동해 쪽에서 오는 횡압력에 의해 동쪽 지괴가 서쪽 지괴 위로 밀고 올라가는 역단층이다.
이 역단층은 제4기층을 변위시키고 있는 활단층이다.
산지의 고도를 검토하면 이와 같은 단층운동의 결과가 더욱 뚜렷하다.
즉 울산단층선 동쪽산지인 불국사 산맥의 분수계가 울산단층선에 인접하여 단층선과 평행하게 분포한다.
이 지괴는 평면적으로 양산단층선의 동쪽에 있는 지괴와 같이 남쪽으로 밀려가는 우횡변위운동을 받고 있다.
울산단층선은 경주분지와 울산만 사이를 연결하며 양산단층선보다 폭이 더 넓다.
이 두 단층선이 형성한 단층선곡은 기복이 거의 없어 고대에도 내륙과 해양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므로, 경작지와
취락이 높은 밀도로 분포하였을 것이다.
동해안 지방은 충적평야와 해안단구로 이루어진 평지가 좁고 긴 형태를 하고 있으나, 내륙의 경주 지역에는 양산단층선과 울산단층선의 단층선곡이 넓은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들 단층선에 형성된 합류선상지에서는 선정부에서 선단부를 향해 낮아지는 지형면의 경사진 방향이 모두 동일하
므로 선단부가 선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용수를 구할 수 있는 선단부에는 취락이 입지하고 이들을 따라 도로가 만들어지므로 단층선에는 직선상의 교통로가 조성되어 형태적으로 길고 좁은 동해안이 교통로에 의해 효율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경주에서는 양산단층선이 경주를 통과하여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김해와 영해를 연결하고, 북북서 - 남남동 방향의 울산단층선, 건천을 통과하는 북서-남동 방향의 단층선이 양산단층선과 교차한다.
따라서 경주에는 해안과 연결되는 세 개의 교통로와 내륙의 영천으로 통하는 노선이 만나는 결절지가 되었다.(그림6)
특히 건천을 통과하는 단층선은 경상누층군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금호강 유역과 해발고도가 대단히 낮은 아화고개를
통해 연결된다.
분지와 선상지
남-북 방향으로 자리잡은 태백산맥 동쪽에는 북북동 - 남남서 주향의 양산단층선과 이에 평행하는 수많은 단층선이
분포한다.
그 영향으로 남-북 방향으로 열린 분지들이 영해, 영덕, 신광, 안강, 경주, 언양 일대에 분포한다.
이 분지들은 양산단층선과 동해안의 좁은 회랑을 통해 연결된다.
경주분지는 동쪽으로 불국사 산맥의 토함산(745m), 서쪽은 구미산龜尾山(594m), 남쪽은 남산(494m) 등의 산지로 둘러
싸여 있는데 양산단층선과 울산단층선이 교차하고 있다. 따
라서 단층선이 통과하는 방향, 즉 북쪽의 안강분지, 울산방향인 남동쪽, 양산으로 연결된 남남서쪽으로 크게 열려 있다.
경주 지역에는 선상지가 형성될 수 있는 지질 및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경주분지는 배후의 높은 산지와 여러 열列의 단층선이 지나고 분지를 서류하면서 관통하는 북천(알천)의 유역
분지가 비교적 넓으며 지질구조선 전면에 넓은 하곡이 형성되어 있어 큰 규모의 경주선상지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배후산지는 융기하고 있기 때문에 자갈, 모래와 같은 퇴적물이 상당히 많이 생성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에의해 형성된 것이 울산단층선 동쪽 불국사 산맥 서쪽 산록에 형성된 일련의 합류선상지이다.(그림8)
고대의 영남지방에서 경지로 사용된 지형면은 선상지, 하안단구, 해안단구, 곡저평야이다.
융기축에 해당하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하천의 양안에 분포하는 하안단구는 하천을 따라 세장한 형태로
분포한다.
해안을 따라 계단상으로 분포하는 해안단구는 해안충적평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고대에 동해안에서 경작지를 조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형면이었다.
곡저평야는 구릉지 지역의 하곡에 형성된다.
이 지형면들에서 제공되는 경작지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고 산발적으로 분포한다.
특히 태백산맥 동쪽 동해안을 따라서는 이와 같은 경향이 더욱 분명하다.
한편 선상지는 영남지방에서 단층선과 연계되어 규모도 크고 분포 밀도도 높다.
선상지는 단독으로도 분포하지만 단층선을 따라 횡으로 연결되어 합류선상지를 이룬다.
경주 지역에서 선상지는 산지 전면의 산록부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선상지는 홍수의 범위를 벗어나 수해의 위험이 적고, 자갈 사이에 대부분 모래, 실트, 점토가 혼합되어 농사에 적합하다.
다만, 퇴적층에 자갈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경작을 위해서는 이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 빙기와 그 이전 빙기에 퇴적되었으므로 토양이 부드럽지 않고 치밀하여 철제로 된 농기구가 유용하다.
농부들은 선상지에서 골라낸 자갈을 경작지들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는데 사용한다.
한편 선상지의 선정, 선단, 선측부에서는 용수를 구할 수 있으므로 주거지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선단부를 따라 주거지가 연속적으로 입지하였을 것이다.
경주와 울산 사이에는 동쪽의 불국사 산맥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형성한 합류선상지가 단층선곡을 흐르는 남천과 동
천을 서쪽으로 밀어내어 선단부를 따라 주거지가 입지하고, 이와 평행하게 도로가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상지에는 주거지와 경지가 함께 있어서, 이동하는 데 시간과 큰 에너지 소모 없이 도로가 개설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농경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변부에서 중심지인 왕경으로 곡물을 운송하는 데도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선상지 지형은 하천이 형성된 선정과 용천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선단을 제외한 선앙부에서는 용수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토양은 자갈과 모래와 같은 조립질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으므로, 배수가 양호하고 강수는 대부분 복류하여 지하수로
흐른다.
그러므로 논을 만들기에는 부적합하여 주로 밭으로 이용되었다.
양산단층선, 울산단층선의 선상지 외에 기계, 건천, 안강에도 넓은 선상지가 단층선을 따라 횡적으로 연속하여 합류선
상지가 분포한다.
이렇게 볼 때, 경주를 중심으로 대단히 넓은 경작지가 공급되었을 것이다.
단층선을 따라 넓게 형성된 선상지는 곡물 생산의 기반이 되어 경주 지역의 인구 부양력을 높이고 인구 증가의 기초가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재된 신라 전성기 인구에 대한 기사 ‘17만 8천호’에 대해 호戶를 인人의 오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경주 지역의 선상지와 여기서 생산되는 곡물량을 고려하면 여러 문헌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17만여 호라면 대략 70 내지 80만 명인데, 선상지에서 취락과 경작지를 조성하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경주로 공급되는 곡물까지 포함하면 경주 지역의 인구 부양력 범위 내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성기 이전인 삼한시대에는 이보다 인구가 휠씬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5세기 중엽 왕경에 방리제를 적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 증가의 속도가 대단히 빨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 단일 선상지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경주선상지가 거대한 도시가 입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선상지이므로 홍수의 위험이 거의 없으며, 선상지를 형성한 북천뿐 아니라 형산강과 남천이 풍부한 지하수를 함양하여
선상지 내에 많은 지하수를 함유하고 있으므로 용수 공급에 문제가 없었다.
특히 선상지 지형면 경사가 대단히 완만하므로 선앙부에서도 지하수위가 높아서 우물을 얕게 만들어도 용수를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경주 선상지 전체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선상지를 형성한 북천은 하천의 규모에 비해 하폭이 대단히 넓고, 평시에는 건천을 이루어 인구가 많았던 시기에는
북천의 하상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었다.
하천
경주의 하천은 형산강, 북천, 남천이 있으며, 형산강은 동해로 유입한다. 그러므로 최종 빙기에는 하구부가 바다 쪽으로
연장되었고, 하류부에는 침식곡이 상당히 깊게 형성되었다.
경주 부근에서는 최종 빙기 최성기 동안 침식곡 하상의 해발고도를 알 수 없으나, 북천과 형산강이 합류하는 곳의 형산강
하상에는 두께 35m의 자갈층이 존재하므로, 형산강은 최종 빙기의 낮은 해수면에 대응하여 다른 하천에 비해 훨씬 쉽게
두부침식을 하여 침식곡이 상류 쪽으로 연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침식곡이 경주 부근까지 도달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서 논의에 한계가 있으나, 하상이 자갈로 되어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
홀로세 중기 해진극상기에는 이 침식곡을 따라 바닷물이 침입하여 우리나라의 다른 하천에 비해 한층 더 내륙쪽으로
깊게 내만이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경주 부근까지 해안선이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형산강은 홀로세에 들어와 상류와 중류부에서 운반되어온 퇴적물에 의해 매적되면서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후퇴하고,
하천 양안에 범람원을 형성하였다.
경주 지역에서 형산강 하상의 해발고도를 파악한 연구는 없으나 경주시 용장동의 청동기시대 유구가 현재 형산강 수면
보다 낮은 위치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당시의 형산강 하상고도가 현재보다 현저하게 낮았고, 고대에는 이보다는 약간 더 높았으나 현재 보다는 낮았으며, 수심도 현재보다는 더 깊었다고 본다.
고대에 형산강을 통해 수운이 가능하였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소규모 선박의 수운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현재 형산강의 하상은 고대 이후 인간 활동이 본격적으로 증가하여 식생이 파괴되고 토양 침식이 발생하면서 중세, 근세,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형산강 하상비고가 높아져 형성된경관이다.
북천과 남천도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하상비고가 높아졌다.
경주 선상지를 형성한 북천은 형산강에 합류하는데, 자연상태에서 하류부 하폭이 500m 내지 800m에 이른다.
고대 문헌 기록과 퇴적상 검토 등 지형학적 고찰을 합쳐서 보면 이 하천은 고대 동안 범람하지 않았다.
현재 북천의 하상은 왕경 구역 선상지 지형면과 비고차가 그리 크지 않으나, 고대 및 그 이전에는 더 컸을 것이다.
이는 본류인 형산강의 하상 변화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경주 왕경 지역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흘러 형산강에 합류하는 남천은 유량이 많지 않은 데다가
하상이 모래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경주 선상지에 홍수를 일으킬 수 없는 하천이므로 경주인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은데, 다만 형산강과 만나는
하류부에는 범람원이 넓게 형성되었다.
해안
사로국이 통합한 동해안은 산지가 해안에 가까워서 해안 충적평야가 좁지만, 해안단구가 비교적 연속적이며 넓게 형성
되어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다.
또 고대 시기 동해안에서는 인간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염을 할 수 있었다.
자급자족 경제사회였던 소국 시기에도 일부 생산품은 교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임산물이나 농산물, 토기, 의류와 같이 영남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생산되는 물품은 부가가치가 낮아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생산지가 한정된 철제품이나 금세공품, 소금, 어물과 같은 것은 교역의 대상이 된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익을 창출한 것은 철제품과 소금이었다.
소금은 생존에 필요한 식품으로 매일 일정량을 섭취해야 하며 대용품이 없다.
그리고 농경사회에서 철제로 만든 농기구는 누구나 갖추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물품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생산지가 해안과 철광석 생산지로 제한된다.
현재까지 동해안에서 소금을 만든 유구나 유물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동해안에서 선사시대부터 소금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크다.
내륙에서도 동물의 내장과 피에서 얼마간의 염분을 얻을 수 있으나, 낙동강 좌안 영남 지방의 주민들은 대체로 동해안
에서 생산된 소금을 통해 염분을 섭취하였을 것이다.
고대에는소금을 염전에서 천일염으로 생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간수를 만들고 이것을 소형 토기에 넣어 가열
하는 자염법으로 생산하였다.
이때 사용된 토기는 일본에서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으나, 한반도에서는 아직까지 보고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방식은 막대한 연료와 토기가 필요하지만, 이를 이용하면 간석지가 거의 없는 동해안에서도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천일제염보다 생산량은 적지만 연중 생산이 가능하다.
근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소금의 부가가치가 워낙 커서 국가가 전매를 하여 생산과 가격을 조절하였다.
아마 고대 초기에도 소금은 생산량이 제한적이고 운송비가 높아서 대단히 고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염법을 통한 소금 생산은 많은 연료를 요구한다. 연료는 울산 태화강, 포항 형산강, 울진 왕피천, 평해 남대천, 영해
송천, 강구 오십천 등 규모가 큰 하천의 하구부에 넓게 분포하는 습지의 갈대와 주변 산지의 신탄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연료는 운송 거리가 짧아서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해안에서 생산된 소금을 거래하는 시장이 경주에 조성되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 소지마립간 12년(490) ‘초개경사시이통사방지화初開京師市以通四方之貨’, 지증마립간 10년(509) ‘치경도
동시置京都東市’라는 기사는 5세기경에 경주에 두 개의 시장이 설치되어 상업 중심지가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염노로 불리운 하층 계급민이었다.
이 제품에 대한 가격 결정은 공급자가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공급 물량을 조절할 수 있었다.
아마 소금은 국가에서 전매하여 가격을 결정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통해 경주 세력은 충분한 부를 축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는 동해안에서 가장 결절율이 높은 곳이다.
그러므로 경주에서는 5세기말, 6세기 초보다 훨씬 이전에 시장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사시대에도 교역의 장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도 소금은 대단히 중요하였으며, 영남 내륙지방 사람들은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 지역과 교역을 하였을 것이다.
동해안 지역을 통합하면서 잘 발달된 교통로를 따라 교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면서 경주는 가장 고차원의 기능이 입지
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영남 내륙 지방의 중앙부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결절점으로서 교역에 있어서 대단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황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