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
유몽인은 불일암에서 내려와 말을 타고 화개로 이동한다. 화개를 지나며 악양에 은거하였던 일두 정여창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한 탁영을 회고한다. 재목으로 쓰이지 못한 일두와 탁영 죽음을 애석해한다. 점필재와 탁영은 천왕봉에 올라 유람하던 날 모두 비․바람, 구름, 안개를 만나 낭패를 많이 당하였다. 용유담에서 신령스러운 용의 노여움으로 잠시 비가 내렸지만 날씨가 좋아 유람이 순조로웠다고 진술한다.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와룡정에 쉬는데, 와룡정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4월 7일 병자일 (불일암을 유람하고 쌍계사를 출발하여 화개를 지나),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취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
☞ 최온(崔蘊, 1583~1659) :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며,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을 지낸 최상중(崔尙重)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대북파(大北派)의 전횡(專橫)으로 벼슬을 단념,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심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사업(司業)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653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배향되었다.
유람록을 정독하고 답사를 하면서 옛 지명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 섬진강변에 용호정이 있다. 나는 용두리의 지명과 용호정이라는 정자 이름에 주목하였다. 1611년 4월 7일 아침 유몽인은 일행인 승주(순천) 수령 유영순(柳永詢)과 재간당 김화(金澕)와 쌍계사에서 작별을 한다. 두 사람을 전송한 뒤 생질 신상연(申尙淵), 신제(申濟)와 함께 불일암을 유람한 후 쌍계사를 출발한다. 화개를 지나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어간다. 여기에서 와룡정(臥龍亭)의 위치를 토지면 용두리에 있는 용호정(龍湖亭)으로 추정한다. 이번 답사에서 섬진강 물속의 바위가 내 눈에는 '물에 잠긴 용(潛龍)의 형상'으로 보였다. 문득 용유담과 용담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몽인은 이곳에서 와룡정 시를 남긴다.
▶ 어우집 후집 제2권 시(詩) 두류록(頭流錄)
와룡정(卧龍亭)-유몽인(柳夢寅)
巖居寥落兩三家 : 바위는 두어 집뿐인 쓸쓸한 곳에 위치하고
臺下江聲繚白沙 : 높은 대 밑 강물소리 백사장을 둘러 흐르네.
地暖南溟饒翠篠 : 남쪽 지방 따뜻하여 푸른 조릿대가 무성하고
山高方丈足靑霞 : 높고 높은 방장산엔 푸른 노을이 넉넉하네.
舟人捩柁叉銀鱖 : 뱃사공은 키를 틀어 은빛 쏘가리를 낚아채고
村女持鑱擷玉椏 : 시골 여인은 칼을 들고 옥빛 나물을 뜯는구나.
堪笑龍城五斗米 : 녹봉 위해 남원에서 벼슬하는 신세 우습구나
堆床朱墨鬢成華 : 책상에 위 공문에 귀밑머리 허옇게 세었다네.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 강정화)
注 용두리의 유래 : "용두"라는 지명은 전국에 많이 있고 대부분 산맥에서 물로 이어진 곳에 지명이다. 노고단의 기운이 월령봉 능선을 타고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끝자락에 자리 잡은 용두리 또한 그런 지명에 부합되는 곳이다. 길지(吉地)라 그런지 배틀재 이후로는 고금의 봉분이 산재되어있고 섬진강변까지 이어진 평지에 용두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용두재 저수지와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토산 칠성님)
첫댓글 귀인을 만나 용호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카페에 오서서 자료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