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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한 독고월과 백리승업은, 결국 5년 뒤에 그곳에서 승부를 다시 겨루기로 하고 조
용히 서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약속은, 독고월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독고월의 급사(急死). 이는 백리승업으로 하여금 무림에서 물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
다. 독고월의 사망 소식과 함께 독고천이 중원무성주 자리에 앉았다는 소문을 접하자,
백리승업은 자금성(紫禁城) 천안문 앞에서 석상처럼 얼굴을 굳히고는 이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무림은 노웅(老雄)을, 나는 둘도 없는 최고의 경쟁자를 잃고 말았도다!’
그 길로 백리승업은 중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자는 멀리 왜국(倭國)으
로 떠났다고 했고, 혹자는 천축(天竺)으로 떠났다고 했다.
여하튼, 그로부터 17년 동안 백리승업은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천천히 지워져만 갔다.
봄철이 되면, 겨울에 내려 쌓였던 눈이 녹아 사라지듯이.
하지만 백리승업은 돌아왔다. 예전 떠돌이 낭인무사가 아닌, 백마련 같은 대조직의 태
상장로가 되어, 떳떳하게 말이다.
“음... 련주 생각은 어떠시오?”
그러자 여태 이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녹의청년, 그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연다.
“이의... 없습니다. 저 역시 부련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백마련의 련주, 공손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부검악의 입에서 음험한 미소가 일어난다.
그에 비해 백리승업은 무표정한 얼굴로 공손호를 마주하고 있다.
그때, 음험한 얼굴로 공손호를 바라보던 부검악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 무사들을 향해 전음을 날린다.
(명심해 주기 바란다. 내일부로 파양호(播陽湖)를 떠나, 항주의 귀혼당을 궤멸시키려
고 한다! 이의 있는 자 있는가?)
“없습니다!!”
1000명이 넘는 그들의 함성에, 객잔이 무너져 내릴 듯이 세차게 삐걱인다.
(그간 사파의 배신자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양했다. 이젠, 우리 백마련이 당당하게
사파의 중심으로 도약할 때다!!!)
부검악의 열변(熱辯)에, 무사들은 하나같이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뒤는 부검
악의 전음이 아닌, 백리승업의 전음이 무사들에게 고루고루 울려 퍼진다.
(내일 사시(巳時) 정각까지 적벽(赤壁)으로 집결한다. 여기 없는 동료들에게 필히 이
사실을 전하도록 하라! 알다시피, 늦는 자는 이 몸이 직접 죽여줄 터이니, 절대 잊지
말도록!!)
“존명!!”
우뢰(又賴)같은 대답소리가 다시 객잔 안에서 폭풍이 되어 훑고 지나간다. 한동안 무
사들의 모습을 주시하던 백리승업은, 무사들이 있느 ㄴ곳을 향해 다시 전음을 날린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다. 내일 사시까지라는 것만 안 잊는다면, 목숨을 잃을 일 따위는
당분간 없을 것이다!!)
백리승업의 전음이 끊기자, 무사들은 한결같은 동작으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
니, 하나둘씩 객잔 내에서 모습을 감춰 버린다.
1다경이 지나자, 객잔에 남아 있는 사람은 공손호, 백리승업, 부검악 이 세 사람뿐이
다. 그러자 부검악은 노골적으로 공손호에게 반말을 던진다.
“이거야 원, 련주보다 태상장로께서 훨씬 통솔력이 나으시구려. 최근 들어, 련주에
대한 우리 백마련도들의 신임도가 점차 하향곡선을 그려 가고 있...”
“전에도 말했소. 분명, 나와 중원무성(中原武城)은 아무런 연줄도, 연관도 없다고 말
이오!!”
공손호의 대답에, 부검악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워버린다.
“그럼 왜 련주님이 중원무성의 끄나풀이다 하는 하찮은 소문이 나돈단 말이오?”
“부련주... 중원무성의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 되오. 점점 일이 이런 식으로 ㄲ고이다
가는, 결국엔 정말 중원무성에서 원하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오.”
공손호의 애처로운 눈빛을, 더없이 답답한 마음을 부검악은 경멸하듯이 바라보며 촉새
처럼 공손호를 톡 쏘아붙인다.
“흥, 어리석은 소리!!
여하튼 명심하시오 련주님. 만일 배반의 낌새가 보인다거나, 중원무성의 끄나풀이란
증거가 발견될 때에는!!”
돌연 부검악이 등에 매고 있던 대부(大斧)를 앞에 놓여진 탁자 위에 휙 집어던진다.
그러자 탁자는 애처롭게도 쩌억 반 토막이 나 바닥에 ‘쿵’ 하고 쓰러진다.
“... 련주직을 강탈당함과 동시에, 저 탁자 꼴이 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아시겠
소?”
놀랍게도, 공중에서 빙글 돌아 허공을 끊으며 돌아오는 대부를, 부검악은 간단하게 받
아 쥐고는 자신의 숙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 아아...”
부검악이 완전히 객잔에서 종적을 감추자, 공손호의 입에서 느슨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자신의 무기력함에 일종의 서글픔을 느끼는 듯, 공
손호의 몸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다.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잖은가. 언제나 부검악과 그의 측근들이 내린 결정을, 자신은
밝히는 일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정말 내 운명이란 말인가? 평생... 죽을 때까지, 나는 허수아비 백마련주라는
이름을 지닌 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백마련이 무림의 한 세력으로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하지만 공손호에
게는 차라리 잊혀졌으면 하는 상처들로 얼룩이 져버린 기간이기도 하다.
‘이런 허수아비 짓을 하려고 백마련에 몸을 담은 것이 아니다. 보다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설사, 다른 사람의 수하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공손호가 한창 자기 한탄을 늘어놓고 있을 때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공손호를 주
시하고 있던 백리승업이, 돌연 혀를 찬다.
“쯧쯧... 이깟 일로 괴로워한다니. 그러고도 5만(萬)이나 되는 세력의 대표라고 자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오, 련주?”
백리승업의 조언에, 공손호는 얼굴을 감싸던 손을 내려놓고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다.
“떳떳하게 행동하고 싶으나, 또 언제 부련주의 측근들이 허물을 만들어 씌울지 몰라
두렵고, 지위를 벗어던지고 떠나고 싶지만 감히 저를 받아 들여 줄 만한 인물을 만나
지 못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공손호의 말을 되새기던 백리승업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다가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쯧쯧, 장수로서는 성공할 만한 인물이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세력을 이끌 만한
포부와 결단력이 너무 부족하단 말야...”
백리승업이 너무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려선지, 공손호가 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
선지는 모를 일이지만, 공손호는 어쨌든 백리승업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 백리승업이 짙은 우수(憂愁)의 그늘이 드리워진 공손호
를 힐끗 보다가, 역시 부검악이 사라진 곳을 향해 걸음을 차례차례 내디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백리승업의 노안은 점차 짙은 허무함을 띠어간다. 그리
고 그 허무가 극에 다다른 순간, 백리승업은 속으로 외친다.
‘그래... 독고월, 그대가 죽은 이후로는... 혈야차 백리승업은 이미 내 안에서 죽었
다.
귀혼당 궤멸 후, 난 다시 무림을 떠나겠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백리승업의 노안에 피어나 있는 허무는 지워질 줄을 모르고 있다. 아니, 도리
어 먹물 번져가듯이 더 짙어져만 가고 있다.
어쩌면, 백리승업은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독고월 사후로, 자신의 식어버린 피
를 다시 뜨겁게 데워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를. 그리고 그 실력자가... 자신의 심장
에 검을 꽂아줄 순간을...
정확히 8월 마지막 날이 돼버렸다.
항주는, 때 아닌 긴장감이 짙게 맴돌고 있다. 이미 전운(戰雲)이 항주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귀혼당과 백마련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가 이미 종반부로 치닫고 있기
때문일까.
장백경은 이제 항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결사항전을 하기로 결심한 듯, 백마련 무사들
이 항주까지 오는 동안에 다 한 차례도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전운은 점점 더 꾸역꾸역 항주 하늘을 메워가고 있었다. 비둘기 떼는 어마 뒤면 귀혼
당이 피로 물드리라는 사실을 알지 모르는지... 처마에 앉아 늦여름에 심취에 지저귀
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귀혼당에, 옛 천마궁 자리에 돌아올 자들에 대해서는...!!
끼루룩... 끼루룩...!
갈매기 우짖는 소리를 들으며, 8월 마지막 날 밤을 새하얗게 태우려 하는 청년이 있다
.
천천히... 항주의 늦은 여름밤 해안(海岸)을 거닐고 있는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철혈쌍검(鐵血雙劍) 금문택이다.
언제나 갖고 다니던 검 한 쌍도, 마의도 팽개쳐 버린 채다. 지금만큼은... 적어도 내
일 해가 뜨기 전까지는 무림인(武林人) 금문택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인간 금문택이
고 싶다는 듯이.
‘약속한 날짜는 내일이다. 주공께서 과연... 나타나실까...?’
간간이 해 왔던 생각이다. 무지촌으로 가던 길에서도... 그리고 이곳, 항주로 오면서
도.
하지만 금문택은 별안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으며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연다.
“후후... 내가 무슨 걱정을...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는 분이신데, 안 오실 리가 없지
...!”
마치 자기 자신을 나무라는 듯한 어조다. 한때나마 사문도를 못 믿은 자신이 원망스럽
다는 듯이, 금문택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을 흘려보낸다.
금문택의 두 눈은 아련함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 아련함으로 물들어 있는 두 눈
은 멀리 검푸른 하늘의 별에 고정되어 있다.
금문택은 별빛에 취해 있다가, 문득 귓가를 두드리는 발걸음 소리에 흠칫 놀란 듯이
허공에서 시선을 돌린다.
“모용 소저...!?”
모용화운이다. 모용화운,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금문택이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다
가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었군요. 난 또 술이라도 마시러 간 줄 알고, 저잣거리에서 한참이나 찾았네
요.”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무관심한 목소리다. 하지만 금문택은 그런 모용화운의 말에도
빙긋 웃음을 짓는다.
“모용 소저께서 어쩌신 일이오? 보잘것없는 이 소생에게...”
금문택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모용화운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단 한마디의 말을 쏟아놓는다.
“곽 군사님께서 찾으세요.”
“곽 군사님께서라... 알겠소.”
금문택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모용화운에게서 등을 돌려 여태껏 머무르고 있는 숙소
가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모용화운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니, 조용한 눈길로 성큼성큼 움직이고 있는 금문택
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만 있다.
휘이이잉... 하고 밤바람이 모용화운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엷게 펄럭이는 머리카
락이 모용화운 자신의 얼굴을 간질이고 있다.
‘그래... 느껴진다. 저 사람의 눈 속에 보이는 내 모습은, 절대 내 모습이 아니란 게
.
나란 존재 위에 덧씌워져 있는 존재... 아직 완전히 지우지 못했어...’
모용화운이 밤바람에 몸을 기대어 내린 결론이다. 그 결론이 모용화운의 뇌리에 메아
리로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 모용화운은 다시 예전의 사망빙화 모용화운의 눈빛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사망빙화 모용화운의 모습에서 옛 정인의 모습을 느끼시는 모양이군요, 금 대협...
”
모용화운이 꺼낸 한마디가, 바람에 실려 멀리 바다로 흩어져간다. 그때, 모용화운의
얼굴에서 약간이긴 하지만 아픔의 기색이 내비친다.
‘미안해요, 금 대협. 저에게는... 저를 관심 있게 바라봐 주시는 것만큼이나 드릴 관
심이 없거든요...’
금문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모용화운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고개를 돌린다. 몹시
슬픈 일이라도 있다는 듯, 모용화운의 얼굴에서는 점차 글로 형언(形言)할 수 없는 뭔
가가 새록새록 자라나는 듯하다.
‘제가 언젠가 매몰찬 말을 할 때가 있더라도, 저를 이해해 주세요.
이미... 이미 제 마음은 주군께서 사로잡고 계시거든요... 사랑하는 분이 있다고는 하
더라도, 저는... 저는 주군을 사랑하거든요...’
금문택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은, 분명 정인을 바라보는 눈길이다. 자신에게 그런 감
정을 품고 있는 듯한 금문택에게 상처를 입혀야 한다니, 안 그래도 정인을 잃어 몇 년
이나 슬퍼했다는 사람에게 차갑게 대해야 한다니... 모용화운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
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용화운은 금문택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더니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모용화운의 자그마한 입술은 꼭 닫혀 있다. 하지만 모용화운은 전신으로 소리치고 있
는 듯하다.
금문택에게... 이제 예전의 정인은 잊고, 자신 말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달라고...
같은 시각, 항주의 신선루(神仙樓)다. 신선루엔 뜻밖에도, 공손호와 백리승업이 자리
잡고 있다. 부검악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귀혼당 공격일은, 9월 2일 해시(亥時)로 하시겠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막 항주에 도착한건데, 이대로 귀혼당으로 공격하러 간다는 건 좀 무리
가 있습니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푹 쉬어야 사기도 적당하게 오를 테고, 그만큼 아군의 피해도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공손호의 말에, 백리승업은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 말이 옳을 것 같군. 그럼 련주께서 공포하시겠소?”
“물론 제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일 진시가 넘어가는 대로, 공포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공손호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공손하게 백리승업에게 건넨다. 백리승
업은 그 술잔을 받아 거리낌 없이 들이키고는 탁자에 잔을 탁 내려놓는다.
“크으... 련주께서도... 한 잔 하시구려.”
이번엔 백리승업이 다른 잔에 백건주를 가득 부어 공손호에게 넘겨준다. 공손호는 얌
전하게 잔을 받고, 그대로 입에 백건주를 시원하게 털어 넣어 버린다.
공손호가 잔을 입에 털어 넣던 바로 그때다. 공손호로부터 앞쪽으로 두 칸 떨어진 곳
에,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젊은 청년 하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뭘 드시겠습니까, 손님?”
기녀가 쪼르르 달려 나온다.
어려 보인다. 아직 약관(弱冠)도 채 되지 않은 듯한 그 기녀(妓女)는, 채송화(菜松花)
처럼 웃으며 청년에게 공손하게 묻는다. 그러자 묵직하면서도 감로수(甘露水)처럼 감
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여아홍 한 병이면 됐소.”
“여아홍 한 병...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녀가 처음처럼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이자, 미처 바라보지 못했
던 그 청년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 순간, 기녀는 망부석(望夫石)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아... 세상에 이런 사람이...!’
너무 멋지다. 아니, ‘멋지다’란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섬세하다.
두 눈도, 분홍색 입술도 굳게 닫혀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독설적인 성
격을 보여주는 듯한 청년의 오똑한 코와 뭇 사내들과는 한참 틀린 부드러운 턱선만 보
더라도 벌써 평범한 사내가 아니란 사실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나 단점이라면, 얼굴에 지나치게 피곤한 기색이 엿보인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 파리
해진 낯빛도, 본래 청년의 유려(流麗)한 용모만큼은 숨기지 못하고 있다.
기녀가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를 않자, 그 청년은 눈을 뜨고는 두 눈썹을 치켜 올린다.
“주문을 받았으면 가서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니오? 어째서 계속 소생만 뚫어져라 바라
보는 것이오?”
청년이 퉁명스럽게 말을 꺼내자, 땀에 젖은 남루한 흑의가 가볍게 움직인다. 기녀는
청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얼굴을 확 붉힌다. 정신을 팔고 있었던 자
신이 민망스러웠던 모양이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럼...”
기녀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간다. 그러자 흑의청년은 다
시 눈을 내려 감고는 등에 잘 매고 있던 검과 보따리를 탁자 한쪽에 풀어놓는다.
‘어쨌든...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분명 청년의 얼굴에는 여독 탓인지 피곤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피곤함 가운데서도
은연중에서 일말의 미소가 내비치고 있다.
‘후우... 내일 장백경이란 놈의 목을 뽑아버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오늘 푹 쉬어야
한다.
피곤하면... 그 쉬운 독서도 제대로 못 하는 법이니까.’
그렇다. 흑의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문도다.
날짜에 맞춰 제대로 도착한 것이다. 장안(長安)에서 항주(杭州)까지라는 그 엄청난 거
리를, 단 한 달도 안 걸려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눈을 감은 채 뒤죽박죽이 돼버린 마음을 정리하던 사문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
음 소리에 눈을 뜬다.
“손님... 주문하신 여아홍 가져 왔습니다...”
주문을 받으러 왔었던 그 기녀다. 그 기녀가 여아홍이 든 술병을 조심스레 탁자위에
내려놓자, 사문도는 입김을 불어 이마의 열기를 씻어내고 또 퉁명스레 질문을 던진다.
“한 병에 얼마요?”
갑작스런 사문도의 질문 탓인지, 기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빨갛게 물든다.
“아... 저, 정확하게... 으, 은자 세 푼입니다, 손님...”
“세 푼이라...”
사문도가 오른손을 품에 넣고 뭔가를 뒤적거린다. 뒤적거리던 오른손을 탁자에 놓아
보니,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모친의 유물인 명패와 은자 두 냥이다.
그 중에서 은자 한 냥과 명패를 다시 품에 집어넣은 사문도는, 그 은자 한 냥을 가져
가라는 듯 기녀의 갸름한 손에 쥐어준다. 그러자 기녀는 남은 은자를 거슬러 주려는
듯 품에 넣어둔 은자 주머니를 막 꺼냈을 때다.
“거스를 필요 없소. 그냥 가지시오.”
“... 예?!”
기녀가 못 들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사문도는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기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거스를 필요가 없다고 했소. 남은 은자로 술을 마시든, 장신구를 사든 알아서 하시
오. 아시겠소?”
사문도와 시선이 마주치자, 기녀의 얼굴은 귀밑까지 붉게 물든다. 그리고 기녀는 급히
시선을 돌리고 잔걸음으로 사문도의 앞에서 사라진다.
‘술도 생겼겠다, 기분도 좋겠다. 그럼... 이만 가볼까?’
쉴 숙소라도 찾은 다음에 마시려는 듯, 사문도는 여아홍이 든 술병을 들고 짐을 챙기
더니, 들어왔던 문 쪽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사문도가 막 공손호와 백리승업이 앉아 있는 탁자를 지나칠 때다. 갑작스레 공손호가
일어서는 바람에, 그만 사문도가 공손호가 앉아 있던 의자와 부딪친다.
“아... 죄송하게 됐소이다, 소협.”
공손호는 실수했다는 듯, 정중하게 사문도에게 사과하고 있다. 사문도는 잠시 뒤로 물
러서서 옷을 털고는 괜찮다는 듯 같이 고개를 숙인다.
“상관하지 마시오. 안 다쳤으면 그걸로 된 거요.”
사문도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공손호가 그런 사문도의 눈을 바라본다.
“...!”
갑자기 공손호의 두 눈이 세차게 떨린다. 마치 무엇엔가 무척이나 놀랐다는 듯이.
“그럼 소생은 이만 가 봐도 괜찮겠소?”
사문도의 물음에, 공손호는 퍼뜩 정신을 챙기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사
문도는 얼굴을 펴고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사라진다.
사문도가 사라지고도, 공손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다.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기라
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단지 미남(美男)이라서 놀란 것만은 아니다.
눈빛... 사물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피곤에 찌들어 있긴 했지만, 공손호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문도의 그 눈빛은,
결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눈빛이란 것을.
“왜 그러시오, 련주?”
그런 공손호를 바라보던 백리승업이 물어온다. 그러자 공손호는 고개를 내젓다가 자리
에 다시 앉으며 말문을 연다.
“방금 전에 제가 앉았던 의자에 부딪혔던 청년...”
“풍기는 기도가 범상찮던 그 청년 말이오?”
공손호는 백리승업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예. 대단한 고수(高手)인 것 같습니다. 저라도 상대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말에 백리승업의 눈에서 한 가닥 의혹이 일어난다.
자신이 평가하기에, 공손호는 사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고수다.
부검악보다 적어도 반 배분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공손호의 입에서 그런 말
이 튀어나오다니, 백리승업이 황당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련주께서도 상대하기 힘들 거라 여기실 정도로 고수란 말이오?”
“... 예. 적어도 제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공손호는 순순히 털어놓고 있다. 그때 느꼈던 자신의 심정을.
‘대체 누구였을까. 나조차 굳어버릴 정도로 무거운 기운을 갖고 있던 그 청년의 정체
는... 대체 뭘까...?’
하지만 공손호는 고개를 두어 번 내저으며 이를 악문다.
‘그래, 난 백마련이란 거대 방파의 주인이다. 아직 상대해 보지도 못한 자를 그렇게
평가한다는 것은, 이 백마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있어서도
안 된다!!’
공손호는 이렇게 생각하며 전의를 불태운다. 부딪히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적어도
피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는 듯이...
정확히 열 두 시진이 흘러갔다.
하룻밤을 편안한 마음으로 푹 잔 듯, 사문도의 얼굴에는 어젯밤 느껴지던 피곤함이 깨
끗하게 지워진 상태다.
“후우... 벌써 1년이나 지났다니, 안 믿어집니다, 어머님.”
사문도... 그가 모친의 산소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채 허탈한 얼굴로 마주하고 있다.
10년 이상동안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던 무덤이기에, 사문도의 정성은 가히 하늘도 감
동할 지경이었다. 벌초 하랴, 성묘 하랴... 거의 한 시진 정도를 산소 정리에만 신경
을 썼던 것이다.
“후후... 벌써 제 나이가 열일곱입니다. 어머님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면서 혼자서 많이 울고 그랬는데... 벌써 12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사문도의 얼굴에서는 슬픔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도
리어 얼굴엔 밝은 미소까지 드리워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지켜봐 주십시오. 이젠... 제 인생에 있어 후진(後進)이란 없습니다. 귀혼당 궤멸,
사파 통일, 다음에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해한 자들에게 복수의 검을 들 것입니다.”
그 순간, 웃음꽃으로 가득하던 사문도의 얼굴에서 그 깨끗하던 미소가 모조리 지워진
다. 대신 남아있는 것은, 얼음보다도 차가우리라 생각될 정도의 미소다.
‘아버님께서 펼치려고 하셨던 그 이념... 끝내 이루지 못하셨던 그 이념을 이루기 위
한 발걸음을 내디딜 날이 왔습니다.’
사문도는 고개를 돌려 한없이 푸르른 대자연을 그 맑은 눈으로 한번 훑어본다.
‘지켜봐 주십시오. 12년이 지난 오늘, 제가 과연 부모님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성장했
는지를 말입니다!’
사문도는 마음속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산소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사문도는 마음 속 깊이 다짐한다. 장백경을 없애고, 천마궁을 재건하는 순간... 그간
감춰뒀던 깊은 웃음을, 이제는 꺼내고 살겠노라고.
[귀거래혜] 38.비상(飛上)하는 천마궁(天魔宮)
이제 9월 1일도 몇 시진 남지 않았다. 대략 두 시진도 안 남았으니, 거의 다 갔다고
할 수도 있겠다.
“으하함... 매형은 잠적을 한 거야, 오고 있는 거야, 이거...?”
한정욱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하품을 하곤 불만스런 얼굴로 투덜댄다. 그러자 보다 못
한 강천비가 한정욱을 툭 쏘아보며 핀잔을 던진다.
“여태까지 기다린 시간이 얼만데, 그깟 몇 시진을 못 기다려서 그렇게 칭얼대는 거냐
? 정말이지, 어떻게 이렇게 졸렬(拙劣)할 수가 있는 거냐?”
“웃기네. 야, 그러면 너만치 남의 일에 참견하는 놈이 과연 몇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
냐? 내 비록 16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봤지만, 너처럼 그렇게 촉새처럼 끼어
드는 놈은 난생 처음이다. 알겠냐, 이 촉새같은 놈아?”
한정욱의 항변(抗辯)에, 강천비는 불쾌하다는 듯 구겨진 종이조각처럼 얼굴을 찌푸린
다.
“이놈 보게? 감히 누구 앞에서 눈을 부라리는 거냐?”
“흐흥, 왜? 네놈이 내 상전이라도 된단 말이냐? 앙?”
아예 끝장을 내버릴 생각인지, 강천비는 돌연 양팔 소매를 휙휙 걷는다. 그러자 한정
욱 역시 될 대로 되라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둘은 어이없게도 갑자기 자리에 푹 고꾸라진다. 그리고 하나같이 정수리를 움
켜쥐고는 바닥을 빙글빙글 뒹군다.
“그만 좀 해라, 이놈들아. 정신 사납다!!”
강천비와 한정욱이 마주 서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금문택이 서 있다. 대사(大事)가 눈
앞에 있는데도 저렇게 깝죽대는 둘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일 것
이다.
비명도 못 지르고 굼벵이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둘의 모습에, 굳은 얼굴로 사
문도를 기다리던 가신(家臣)들의 얼굴에서 약간이긴 하지만 미소가 일어난다. 가신들
과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던 모용화운의 얼굴에서도 청초한 미소가 일어난다.
“경고하마.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너희 둘이 티격태격 다투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 그러면 너희들 둘은 최소한 내 손으로 묻어줄 테니까, 알아서 처신해라.”
“아, 아고... 형님, 그건 그래도 좀...”
강천비가 지금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금문택을 향해 한없이 애처로워 보이는(?) 눈
길을 뿌리지만, 금문택은 그런 강천비에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길로 노려본다.
“왜? 천비 너는 지금 당장 묻어 줄까?
아니, 아니지. 주공 모친의 산소가 여기니까... 저~기 있는 장강 푸른 물에 잠수나
시켜줄까?”
“... 아뇨, 됐어요. 앞으로는 정욱이랑 사이좋게 지낼게요.”
강천비가 자리에 푹 엎드리고 계속해서 정수리를 문질러댄다. 그러자 금문택은 한정욱
에게로 고개를 돌려 묻는다.
“정욱이 너는? 너는 걸리면 어떻게 해 줄까?”
한정욱은 이미 정수리에서 손을 뗀 상태다. 누가 전신에 철판을 깔아놓은 것과 맞먹은
맷집 소유자 아니랄까봐, 정말 대단한 회복력이다.
“... 금 대협한테 맞기는 싫으니까, 그냥 용광로(鎔鑛爐)에 뛰어들게요. 기억나지요?
우리 백부(伯父)님 대장간에 있는 그 용광로...”
“거기에 뛰어들겠다고?”
“저는 절대 한 입으로 두 말 안 해요.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벌써 증인이
돼버렸잖아요?”
한정욱의 말이 재밌게 생각됐는지, 금문택은 딱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둘이서 안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좀 싸우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에...!”
둘의 확답(確答) 비슷한 확답을 받은 금문택은, 만족한다는 듯 그들 둘이 널브러져 있
는 곳에서 발길을 옮겨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
곧이어 강천비와 한정욱의 눈이 허공에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다. 둘의 눈은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있는 건지, 화로에 달군 쇳조각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으휴... 천비 네놈만 아니었어도!!’
한정욱이 자기 멱살을 쥐어뜯으며 험상궂은 얼굴로 강천비를 노려보자, 강천비는 또
강천비대로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머리 위로 불끈 치켜든다.
그때다. 돌연 두 개의 손이 강천비의 머리와 한정욱의 목에 놓여진다. 그러자 그 손길
에 움찔 놀랐다는 듯, 한정욱이 고개를 휙 숙이고는 따뜻한 손을 잡고 처절하게 매달
린다.
“아이고, 금 대협! 이건 분명히 어디까지나 천비 저 녀석이 시비를 걸어서 정당하게
응수(應手)한 거라고요. 알잖아요, 나란 놈은 거짓말 절대 못한다는 거...”
하지만 이렇게 애걸복걸을 하고 있는 한정욱과는 달리, 강천비의 얼굴에서는 격동(激
動)과 기쁨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잃어버렸던 귀중한 물건을 찾았을 때처럼.
“주... 주... 주군...!!”
낮지만 묵직한 강천비의 음성이, 한정욱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진
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강천비에게로 집중되고... 곧이어 강천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으로 옮겨간다.
“... 오랜만이다, 천비. 처남 너도.”
맑으면서도 힘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 모두가 그토록 듣고파
하던 바로 그 목소리를, 이젠 마음껏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소궁주(小宮主)님!!!”
태무극, 오태청, 뇌명... 이들 셋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사문도에게로
달려가고 있다. 그 기세에, 강천비와 한정욱은 기겁을 하며 조급히 뒤로 몸을 던진다.
하지만 그 셋은, 강천비와 한정욱의 예상과는 달리 사문도에게 매달리지 않고 정중하
게 사문도 앞에 부복(俯伏)한다.
“그간 편안히 지내셨습니까?”
“다친 데는 좀 괜찮으십니까?”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동시에 세 사람이 질문을 퍼붓자, 나뒹굴고 있던 강천비와 한정욱이 입을 쩌억 벌린다
. 하지만 사문도는 그들의 마음 씀슴이가 고맙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연다.
“편안히 지냈고, 다친 손은 다 나았고, 불편하기는커녕 가뿐합니다.”
사문도가 혈랑황(血狼皇) 관막과의 결투로 인해 오른쪽 손목뼈에 금이 갔다는 얘기는
금문택이 이미 다 털어놨었기에,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덕택인지 ‘다 나았
다’는 사문도의 대답에,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기쁨으로 물든다.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소궁주님. 그래, 내공은 다 찾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예상보다 한 달 정도 빨리 돌아오는 바람에, 이렇게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겁니다.”
곽경환과 사문도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을 맺자, 이번에는 곽경환 곁에서 잠자
코 입을 다물고 있던 모용화운이 싱긋 웃으며 말문을 튼다.
“멋진 검이네요.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와서 받아 보시구려.”
사문도가 흔쾌히 승낙하자, 모용화운은 나비 같은 걸음걸이로 사문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사문도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검을 얌전히 받아든다.
“후우...? 검이 왜 이렇게 무겁죠?”
검을 받아든 모용화운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태무극이 반색을
하며 단혼흑룡검(斷魂黑龍劍)을 쏘아본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검이니, 무거운 건 당연하겠지만... 모용 소저, 잠깐 줘 보실
수 있겠소?”
모용화운은 대답 대신 사문도를 바라본다. 사문도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 모용화운은 곧장 태무극에게 단혼흑룡검을 넘겨준다.
단혼흑룡검을 받은 태무극이, 검의 무게에 얼굴을 찌푸린다. 모용화운의 말대로, 실전
에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절대 이 검은 반 시진 이상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럼, 날이나 한 번 훑어볼까...?’
오태청과 뇌명 역시 관심어린 눈길로 단혼흑룡검을 보고 있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태무극은 기세 좋게 검집을 움켜쥐고는 단혼흑룡검을 끌어당긴다.
‘우웃?!’
단혼흑룡검을 끌어당기자, 태무극은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정체 모를 기류에 입술을
꽉 깨문다. 그리고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올라오는 기세를 차단시키자, 단혼흑룡검
은 그제야 조금 잠잠해진다.
“왜 봅다가 마는 거요, 형님?”
뇌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태무극은 천천히 머리를 내저으며 단혼흑룡검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또 노려본다.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거요? 검의 매력(魅力)에 홀리기라도 한 거요? 그 정도로 그
검이 좋은 검이오?”
이번엔 오태청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질문을 던진다. 그제야 태무극은 머릿속에
할 말이 정리가 된 듯,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이 검은... 내가 갖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어수룩한 검이 아닌 것 같다.”
“... 무슨 소리요, 형님? 아니, 천하의 수라쌍성 중 맏이인 형님께서 못 다룰 정도의
검이라니...”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이 검은... 현재의 나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으니까.”
말을 끊어버린 태무극은, 사문도에게 정중하게 단혼흑룡검을 내민다. 사문도는 단혼흑
룡검을 받아들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무극을 바라본다.
“아저씨의 말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습니다.”
사문도의 발언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사문도에게로 집중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
같은 얼굴로, 사문도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먼저, 아저씨께서 느끼셨던 대로... 이 검은 분명 사람을 가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가린다는 것이지, 주인을 가리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별안간 사문도가 단혼흑룡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더니, 곧바로 검집에서 검신을 시원
스레 꺼낸다.
거무튀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혼흑룡검이 쏟아내는 칙칙한 기운과, 살아 꿈틀거리는 듯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한 마리의 흑룡(黑龍)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아름다움을 말이다.
“이 검의 이름은 단혼흑룡검입니다. 이 단혼흑룡검을 완벽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
한 건,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검에 대한 사용자의 신뢰입니다. 검과 정신을 완전하게 합
일(合一)시키지 않는 이상에는, 이 단혼흑룡검의 저항을 피해내기란 불가능합니다.”
사문도의 말에, 태무극은 ‘그렇구나’하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단혼흑룡검
을 뽑기도 전부터 의심을 하고 있었으니, 뽑아서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면 오히려 그게
신기한 일 아니겠는가?
“둘째는, 사용자의 검술 성취도입니다. 검기(劍氣)를 날릴 수 있게 될 정도의 실력자
라면, 분명 단혼흑룡검을 쓰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겁니다.”
말을 접은 사문도는, 다시 단혼흑룡검을 검집에 밀어 넣는다. 좌중(座中)의 사람 하나
하나가 사문도의 동공을 스치고 지나간다.
“자, 그럼 이제 잡담(雜談)은 여기서 접기로 하고, 실질적인 실행에 들어가겠습니다.
태 아저씨는 동문(東門)을, 오 아저씨와 천비는 서문(西門)을, 뇌 아저씨와 화운은 남
문(南門)을, 저와 문택은 북문(北門)을 칩니다. 곽 군사님과 정욱은, 밖에서 신호가
떨어지는 대로 천마궁 안으로 들어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사문도의 입에서 구체적인 공격 계획이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번쩍
하고 긴장의 물결이 일어난다.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승리합니다. 12년 동안 오늘을 위해 벼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 가면서 살아온 우리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문도는 왼손으로 천마궁이 있는 산 중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승리를 향한 갈망이 담
긴 눈으로 모두를 둘러보고는,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선포한다.
“투항하는 자는 절대로 죽이면 안 됩니다. 오로지 장백경이 도망칠 수 없도록만 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모두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예!!”
“그럼 갑시다. 우리의 꿈을 실현시킬 그 시작점, 천마궁으로 말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문도는 빛줄기처럼 천마궁이 있는 산 중턱을 향해 신형을 날
린다. 그러자 뒤이어 태무극, 오태청, 뇌명이 화살처럼 그 뒤를 따른다.
“군사님께서는 제게 업히십시오.”
“이거, 신세지게 돼서 미안하게 됐네.”
“상관치 마십시오. 같은 분을 섬기는 사이 아닙니까.”
금문택이 곽경환을 업고, 얼른 뇌명의 뒤를 쫓아 신형을 날린다. 그러자 모용화운도
빙긋 웃으며 얼른 금문택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린다.
“가자, 얼간아. 매형이 늦었다고 화내면 어쩌려고?”
“얼씨구, 네놈이나 늦지 마라! 아직 내가 전력으로 경공술을 쓰는 걸 못 봐서 그러는
모양인데...!!”
강천비는 약이 오르는 듯, 전력으로 경공술을 펼쳐 모용화운의 뒤를 따라 나선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라, 멍청아! 야후!!”
한정욱은 강천비가 한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씩 웃고 있다.
“다 갔구만... 그럼, 나도 움직여 볼까나...?”
한정욱 역시, 그동안 갈고 닦은 경공술을 아낌없이 펼쳐나간다.
“크하하핫! 기다려라, 강천비! 네놈 정도 따라잡는 거야 시간문제란 걸 내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니까!!!”
이제 전부 다 출격했다. 사문도부터 한정욱까지, 전부 다 말이다.
공통된 하나의 꿈... 천마궁이란 집합체의 재건을, 부활을 위하여!!
그믐이기에, 하늘엔 달도 없다. 그렇기에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마음은 더없이
불안하다.
“에휴... 원래 이런 날 밤이면, 술 한 잔씩 하면서 지내는 게 제일인데...”
“그러게 말일세. 백마련인가 뭔가 하는 놈들만 아니었어도... 지금 이렇게까지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데. 어이구, 내 팔자야!!”
한 병사가 푸념 섞인 말을 꺼내자, 연이어 곁에 있는 병사도 같이 맞장구를 친다.
벌써 한 달이 더 됐다. 파양호에서의 결전에서 귀혼당이 대패(大敗)를 당한 다음부터,
귀혼당은 더욱 기울어지고만 있었다.
“휴...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백마련에 투항하고도 싶지만... 역시, 뒤가 찜찜해.”
“그래. 이제 와서 백마련으로 돌아서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곳에 몸을
붙이고 있자니,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겠고...”
“... 그냥 옛날 사무종이 사파를 통일했더라면, 이런 날이 있었을 리도 없었을 텐데.
..”
짙은 청의를 입은 병사의 말에, 갈의를 입고 있는 병사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기
어 나온다.
“음... 글쎄. 그 전에 귀혼당에서 장렬하게 전사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뭐, 자네 말
대로 되기 위해서라면, 우리 당주가 사무종에게 먼저 순순히 항복을 했었어야지.”
두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잠시 방심하고 두런거리는 사이, 한 검은 인영(人
影)이 소리 없이 그 높은 궁벽(宮壁)을 넘어온 사실을 말이다.
“지금 우리 당주, 어째 너무 뻔뻔한 것 같지 않나? 이렇게까지 몰렸다면, 그냥 항복
해 버리면 되잖아? 이미 중원무성에서의 지원도 끊어진 상태고, 지원도 없는데 말야.
”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두 개의 손이 불쑥 나타난다. 튀어나온 두 손은, 억세게 두
병사의 목을 움켜쥔다.
“으읍!!”
숨이 탁 끊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둘의 신형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른다. 아직 죽지
는 않은 모양인지, 둘의 전신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나는 고독랑이란 사람이다. 내게 항복할 의향이 있다면, 갖고 있는 무기를 떨어트려
라.”
짙은 살기가 배어있는 목소리다. 게다가 목을 쥐고 있는 사문도로써는 이들을 죽인다
고 해도 그리 손해 볼 것도 없으리란 생각에, 그들은 죽음의 문턱을 밟고 있는 듯한
얼굴로 버둥거리며 얼른 무기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그러자 둘의 목을 억세게 짓누르고 있던 사문도의 두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러자 그
들은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으며 낮은 소리로 숨을 헐떡거린다.
“생각보다 쉽게 항복하는군. 반항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사문도가 기대 이하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자, 갈의를 입고 있는 병사가 숨을 헐떡이
며 대꾸한다.
“헉... 헉... 이미... 저희들은 장백경으로부터...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헉...”
그 대답에, 사문도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는 질문을 던진다.
“호오, 그래? 장백경한테서 마음을 돌린 사람들 숫자는... 얼마 정도나 되는지, 혹
알고 있는가?”
그러자 이번엔 청의를 입고 있는 병사가 목을 꾹꾹 누르며 대답한다.
“아... 적어도 여기 있는 병사들의 7할 이상은 돌아선 것 같습니다만...”
“7할...? 그거 괜찮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사문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물결을 일으킨다. 그러자 그 미소에 한동안 굳어 있던
갈의인이 황급히 정신을 챙기고 고개를 내흔들며 묻는다.
“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고독랑 사문도가 맞습니까?”
“... 그럼 고독랑 사문도가 하나지, 둘이겠는가?”
사문도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자, 이번엔 청의를 입은 병사가
입을 조아린다.
“그게 아니라, 수개월 전에 고독랑 사문도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도는 바람에...”
병사가 말을 얼버무리자, 사문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피식 웃다가 다시
둘을 보며 강한 어조로, 딱딱한 얼굴로 말문을 튼다.
“고독랑 사문도는 바로 나다. 그깟 어이없는 헛소문은 다 잊어버려.”
“... 예.”
둘은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듯, 자세까지 갖추고 사문도에게 대답하고 있다.
사문도는 생각보다 상황이 쉽게 풀리는 것이 마냥 기쁜 듯,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
개를 돌려 천마전(天魔典) 쪽을 바라본다.
“그것보다, 장백경의 숙소부터 찾아야 될 것 같군. 길안내를 좀 해줄 수 있겠는가?”
“... 예? 갑자기 장백경에게는 왜...”
갈의 병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사문도는 환희로 일렁이는 얼
굴에 하얀 미소를 지으며 그간 묻어뒀던 가슴 아픈 사연을 거리낌 없이 읊는다.
“장백경을 죽이고 아버님의 의지를 받들어 천마궁을 재건한 뒤, 무림을 통일하기 위
해서다. 정파고 사파고 뭐고 상관없이, 평등한 무림을 만드는 게 내 꿈이거든.”
“예엣?!”
“처, 처, 천마궁에다가... 아버님이라고 하신다면...?!”
돌연 둘이 사시나무 떨 듯이 전신을 바들바들 떤다. 그런 둘의 어깨를 짚으며, 사문도
는 또렷한 목소리로 당차게 대답한다.
“그렇다. 내 아버님의 천마궁의 초대궁주인 사무종이다. 나는 오늘부로 귀혼당 간판
을 내리고 천마궁을 재건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사문도란 사람이고!”
사문도의 폭탄선언이 떨어지자, 그들 뒤에 홀연 다른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
문택, 그는 사문도와는 달리 얼음장같은 얼굴로 둘을 노려보며 입을 연다.
“명심해라. 지금 이후로 저분께 역심을 콩알만큼이라도 품는다면, 나 철혈쌍검 금문
택이가 친히 목을 따 줄 테니까!”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금문택 덕택에, 병사 둘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얼굴이다.
사문도가 금문택에게 손짓을 하자, 금문택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고 두 자루 검을 천
천히 뽑아 든다.
“자, 그럼 길을 안내하라. 장백경이란 얼간이가 먹고 자는 곳으로!!”
금문택의 낮은 목소리에야 두 병사는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발걸음을 천마전 쪽으로 움직인다. 그 뒤를 사문도가, 사문도의 뒤를 금문택이 조심스
레 움직여간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아직 천마궁 내에는 아군이 되어 줄지, 적군이 될지도 모
를 병사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문도기에,
어느새 얼굴에서는 짙은 긴장감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
같은 시각, 남문에서는 이미 뇌명과 모용화운이 깨끗하게 주변정리를 해 둔 상태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새카맣게 타 죽어있는 시체 한 구와, 석상(石像)이 아닌 빙상(氷
像)이 되어 죽어있는 시체 한 구가 그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아, 젠장!! 이거, 소궁주님 말씀대로 좀 순하게 나가 보려고 했더니...”
이미 모용화운과 뇌명의 곁으로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무장을 갖춘 채 재빨리
달려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형사고를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이 보인다.
“뇌 대협께서는 잠깐 물러나 계실래요? 저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우리 둘의 명성
으로 저들을 타이른다면, 저들이 투항해 오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요?”
그 제안에 막 혈뢰비격(血雷飛擊)을 전개시키려던 뇌명이 얼른 도(刀)를 거두고 고개
를 끄덕인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을 듯싶군. 그럼, 저들을 설득시키는 일은 모용 소저에게 한
번 맡겨 보겠소. 대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놈이 있거든, 즉시 맞받아 주는 거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제가 적당하게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모용화운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믿어보라는 듯 빙긋 웃어보이자, 뇌명은 도를 바닥에
늘어트리고는 모용화운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얼마 뒤, 달려온 병사들은 동서로 모용화운과 뇌명을 에워싼다. 궁벽로(宮壁路)의 보
폭이 기껏 해 봐야 2장도 안 되는 덕택에, 남북으로 포위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
다.
포위하자마자 공격해 올 던 그들이지만, 막상 상대를 보고 나니 선공(先攻)할 마음이
사라져 버린 듯, 그들은 하나같이 웅성거리고 있다.
“모용화운이다... 분명, 사망빙화 모용화운이다...!!”
“모용화운 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 서, 설마... 혈귀 뇌명...?!”
혈귀 뇌명과 사망빙화 모용화운. 이 둘을 포위하고 있는 인원은, 많아 봐야 200명 정
도다. 그런 그들이, 이 좁은 길에서 막강한 고수 둘을 상대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보세요. 저자들도 벌써 동요(動搖)하고 있지요? 그만큼 뇌 대협과 제 명성이 가져다
주는 위압감이 크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흐흐흐, 모용 소저 말대로구려. 그럼 이제 저들을 설득할 차례 아니오?”
모용화운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고 숨을 고르다가, 두 눈을 천천히 감는다.
(맞아요. 당신들이 쑥덕이는 것처럼, 나는 모용화운이고, 옆에 계신 분은 혈귀 뇌명
대협이세요.)
“저, 전음이다?!”
“역시, 사망빙화와 혈귀다!!”
병사들이 다시 술렁이자, 모용화운은 감았던 두 눈을 뜨고 동서(東西)를 번갈아 바라
보고는 엄숙한 얼굴로 전음을 이어나간다.
(오늘 이런 시간에 우리가 여기에 불쑥 나타난 게 이해가 잘 안 될 거라 생각되는데요
, 이상할 거 전혀 없다는 걸 알아주세요. 우리는, 바로 천마궁을 재건하기 위해 여기
로 돌아온 거니까요!!)
모용화운의 차디 찬 목소리가 병사들의 마음 한구석을 바늘이 되어 쿡쿡 찌른다. 비록
실제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음이란 것이 시전자의 감정과 억양 등을 평상시와
다름없이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혈귀 뇌명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벌써... 천마궁 시절의 혈채를 받으러
왔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 북해빙궁의 소궁주인 모용화운이 가담하다니...!”
그들의 얼굴에서 차츰 절망의 빛이 떠오른다. 이 정도 인원으로 저 둘을 처치할 수 있
을 정도의 실력자란, 귀혼당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용화운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건 좀 뜻밖인데? 아직 주군과 다른 분들 이름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저자들이 동요할 줄은...?!’
하지만 일이 이렇게 풀려서 나쁠 건 전혀 없다. 아니, 모용화운은 이 상황이 최대한
빨리 일어나도록 하려는 것이 애초의 목적이었으니, 도리어 잘 된 일이다.
(잘 들어 주세요! 참고로 말하자면, 이곳 남문 말고도 동, 서, 북문에 다른 분들이 더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에요. 수라쌍성과 질풍귀, 철혈쌍검, 고독랑... 이 정도라면 과
연 이곳에 있는 군대 전원과 장백경 부자가 달려든다고 하더라도 이길 확률은 3할이
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겠지요?!)
“수, 수라쌍성?! 다 살아있었단 말인가?”
“거기에, 고독랑 사문도 일행들까지 합류를...!!”
“자, 잠깐?! 고독랑은...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사문도가 죽은 것이 아니었나’하는 망언에, 모용화운은 코웃음을 치고는 전음으로
사실규명에 나선다.
(어디서 들은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고독랑은 버젓이 살아 있어요! 게다가 실질적인
그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마궁의 소궁주란 거고요!!)
모용화운의 말에, 결국은 병사들 전원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든다.
“그, 그렇다면... 사문도가, 저번 천마궁주 사무종의 아들...?”
“그러고 보니... 성씨가 같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사문도가 사무종의 아들이란 사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 사문도와 가신
들이 철저하게 은폐(隱蔽)해 왔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말을 듣게 된 병사들
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호오... 모용 소저, 생각 외로 말솜씨가 상당한 것 같소이다?”
“북해빙궁에 있을 적에, 아버님께 언변 능력을 조금 배웠거든요. 도움이 돼서 다행이
에요.”
뇌명이 감탄했다는 눈길로 모용화운을 주시하고 있다. 그때 모용화운은 잠깐 숨을 돌
리고, 거의 마비상태에 빠진 병사들에게 꿀과 같은 이야기를 던진다.
(내가 보기에, 귀혼당은 이제 끝났어요. 물자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해서 여기 여러분
들의 마음 한구석에 필승(必勝)의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백마련은 뒤에서 숨통을
죄고 있으니 말이죠.
차라리 그냥 우리에게 항복하세요. 일단 우리에게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될뿐
더러, 더 이상 지금 같은 대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모용화운의 전음이 끊기자, 병사들 사이에서 무언(無言)의 긴장감이 바람을 타고 날아
오른다.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귀혼당 편에 서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이들에게
서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것이냐에 대해서.
“설사 여기서 천마궁도로 귀화(歸化)한다 사더라도, 곧이어 백마련의 공습이 이어질
것이오! 해봐야 3000 남짓한 이곳 병사들로, 어떻게 1만이나 되는 백마련 군대를 상대
하겠다는 말씀이오?”
별안간 한 병사가 모용화운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다. 그러자 뇌명과 모용화운
을 비롯한 병사들 전부의 시선이 그 병사 하나에게로 집중된다.
뇌명조차도 흥미진진한 눈길로 모용화운과 그 병사를 번갈아 바라본다. 과연, 이렇게
몰린 모용화운이 어떤 말을 꺼낼지가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 내가 듣기로는, 백마련이란 조직은 과거 천마궁에 귀속됐었던 세력들이 하나로
뭉쳐져 만들어 낸 하나의 집합체(集合體)예요. 그런 그들이, 천마궁이 재건되고 과거
천마궁을 섬기던 가신들이 다시 활동하는데... 과연 섣불리 움직일 수 있을까요? 오
히려 군사를 물리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고 하고, 물러날 것 같지는 않은가요?”
따지려고 해도, 전혀 반박할 구석이 없을 정도로 논리정연한 말이다. 전 병사들이 ‘
과연 여걸(女傑)이다!’란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모용화운의 말에 탄복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항복하라! 천마궁이 재건되고 나면, 방금 전에 모용 소저가 했던 말처럼 너희들을
대할 것이다. 우리 모두 속까지 썩어버린 귀혼당을 뒤집어엎고, 천마궁도로 귀화해서
무림을 하나로 묶어버리잔 말이다!”
뇌명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병사들의 고막을 진동시킨다.
“탁!!”
별안간 무기 떨어지는 소리가 모두의 귀를 메운다. 한 병사가 전투의사가 없음을 전격
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탁탁’거리는 무기 떨어지는 소리가 궁벽로를 가득 메운다. 뇌명
과 모용화운은 그런 그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잠시 뒤. 그곳에서는 한없이 고요한 정적이 메아리처럼 퍼진다. 바람 스치는 소리도,
그 흔한 잡소리도 없는 가운데, 뇌명이 바닥에 질질 끌고 있던 도를 힘껏 들어올리고
는 외친다.
“가자, 천마궁도들아! 귀혼당을 궤멸시키고, 장백경의 목을 날려 버리러 말이다앗!!
”
“와아! 귀혼당을 궤멸시키자!! 장백경을 척살하자!!”
뇌명과 모용화운이 다급히 천마전이 있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리자, 그 뒤를 따라 천
마궁도로 귀화한 병사들이 무기를 주워들고 외치며 그 뒤를 따른다.
그렇게 9월 1일의 밤, 천마궁의 남문은 때 아닌 함성소리로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
함성소리는 천마궁 전체를 암흑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듯, 그렇게 천마궁 안쪽으로 서
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사문도와 나머지 가신들이 귀혼당의 병사들을 하나둘씩 포섭해 가고 있을 무렵이다.
자신의 병사들이 뿌리째로 흔들리고 있는 때인데도, 장백경은 두 발 뻗고 편안히 잠만
퍼 자고 있다.
“드르르렁... 드르렁...”
장벽경이 곤히 늘어져 있는 침실에서는, 코고는 소리마저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당직을 서고 있는 부하들을 두고, 그들의 주인이란 자는 이렇게 잠만 자고
있는데,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자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그때, 장백경의 코고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던 이곳에서, 점차
소동의 색이 짙어져간다. 벌ㅆ 사문도 일행들이 여기까지 도달했기 때문일까?
“으음...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이거?!”
장백경이 신경질적은 눈초리를 하고는 두 눈을 비비며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 장백경이 벽에 걸렸던 옷자락들을 전부 입고 머리맡에 있는 검을 막 잡았을 때다.
“당주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
호위무사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끊긴다 싶더니, 뒤이어 굳게 닫혀있던 장백경의 침실
문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다.
“무슨 일이냐?! 백마련의 공격이 시작됐단 말이냐?”
그러자 그 호위무사는 숨을 헉헉거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내흔든다. 그러자 장백경의
벼락같은 호통소리가 침실에 한가득 울려 퍼진다.
“백마련 놈들이 온 것도 아닌데,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이런 늦은 시간에 와서
난리 법석을 피운단 말이냐? 감히 본좌의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겠다는 것이냐?!”
장백경의 호통에, 그 호위무사는 기가 찬다는 듯 가슴을 두더리더니 갑자기 고함을 꼬
개 지른다.
“폭동(暴動)이 일어나 지금 여기로 폭도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인데, 그
래도 섬기고 있는 주인인지라 도망이라도 치라고 해 주려고 왔더니, 기껏 하는 소리가
그거요?!
다 치우시오!! 나도 이제 당신 수하노릇 따위는 그만두고, 귀혼당이니 뭐니 하는 3류
집단을 아예 아작 내버릴 테니까!!”
그 호위무사가 잽싸게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를 일이지
만, 어쨌든 정말로 장백경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 뭐야...? 폭동이... 폭동이 일어나...? 폭동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듯, 장백경은 돌연 미친 사람처럼 검을 빼들고 침실 바
깥을 향해 뛰쳐나간다. 그런 장백경의 귀와 눈을 한가득 메우는 것은, 절망감과 좌절
감 뿐.
“... 이럴 수가...”
능구렁이처럼 타오르고 있는 불길. 그리고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은 함성소리는, 과연
장백경의 눈과 귀를 멀어버리게 함에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귀혼당을 다 때려 부수자!!”
“천마궁을 재건하자!!”
“장백경 부자 놈들을 때려 죽여라!!”
함성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실로 다양한 소리가 넘실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
만 여기 섞여있는 말 중 하나가 장백경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버리도록 만들어 놓는다.
‘처, 천마궁... 천마궁 재건?!’
천마궁을 궤멸시키는 데는, 5대 세력뿐만 아니라 귀혼당도 한 몫을 했다. 거기다가,
천마궁 궤멸 후 이곳 천마궁 자리에 들어앉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아온 장백경
아닌가?
“당주님! 피하셔야 합니다!! 예전 천마궁도들이 사문도를 중심으로 이곳으로 몰려들
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1다경 내로 저자들이 이곳으로...”
“유승이는?! 유승이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부당주께서는 현재 폭도들을 저지하느라 중문(中門) 쪽으로...”
그 병사의 말에, 장백경은 귀신같은 눈동자로 그 병사의 멱살을 꽉 움켜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그 녀석더러 몸을 피하라고 일러라! 여기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고, 어서 도망가라고 말이닷!!”
귀곡성(鬼哭聲)같은 장백경의 목소리에, 장백경에게 상황을 보고하던 병사는 헐레벌떡
중문을 향해 뛴다.
장백경의 얼굴에는, 처절한 패배자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듯하다. 그에 걸맞게
, 검을 억세게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도, 지진이라도 만난 듯 가늘게 진동하고 있다.
언젠가는 폭동이 한 번 일어날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폭동을 일으킬
만한 건수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장백경은 그만 폭탄을 삼켜버린 가엾은 신세로 전
락하고 만 것이다.
‘일단은 살아야 뒷날을 도모할 수 있는 법! 유승이 너는, 일단 목숨부터 건지고 봐야
한다!!’
장백경이 입술을 짓이겨져라 깨문다. 그러자 입술에서는 검붉은 피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와 장백경의 푸른 옷깃을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자신이 어언 15년이란 기간동안 쌓아왔던 탑이 말이다
.
“귀혼당주 장백경은 어디로 도망쳤느냐!!”
“썩 나와 목을 내밀어랏!!”
“먼저 쓰러진 우리 동료들의 대가를 치러라!!”
피가 쏟아지고 있는 장백경의 입술 위에, 비릿한 피보다도 저 진한 것같이 느껴지는
미소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엔 검붉은 핏줄기가 아닌, 투명한 액체가 장백경의 얼굴
을 적시고 있다.
‘결국은...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나 인간 장백경이가...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단 말인가? 부하들에게 배반이나 당할 정도로... 어수룩하고 무능력한 놈
이었단 말인가...!!’
하늘은 철저히 장백경을 외면하고 있다. 여태 장백경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
자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무림이란 게 이런 곳임을, 장백경은 완전히 못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검으로 세상을
움직이려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림의 구동원리
를 말이다.
“부당주님, 이대로 가다가는 1다경도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에에이, 시끄럽다!! 그렇게 떠들 시간이 있다면, 배반자가 하나라도 더 생기는 걸
좀 막아 봐랏!!”
지금 장유승의 뒤에 있는 병사 숫자는 1000여 남짓이고, 중문으로 몰려오고 있는 폭도
들의 숫자는 2000명 정도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수치일 뿐이다. 그나마 현
재 중문에 남아있는 병사들이, 시시각각 폭도들에게 투항하고 있으니 말이다.
“귀혼당은 끝났다! 투항하라!!”
“귀혼당은 이미 속까지 썩어 빠진 3류 조직이다!”
천지가 진동하고 있다. 2000의 성난 군대가 한 곳으로 몰려오고 있으니, 땅이 떨리고
건물들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 귀혼당에는 미래가 없다.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역시... 투항하자!!”
장유승의 곁에서 수군거리던 병사들이 한 무더기 또 폭도들을 향해 꽁지가 빠져라 달
려 나간다. 그 뒤를 다른 병사들이 뒤이어 따라가고, 따라가고 하는 악순환이 꼬리를
물고 진행되고 있다.
“항복, 항복!!”
“천마궁의 재건에 동참하러 왔습니다!!”
폭도들과 귀혼당 본래 병사들의 숫자는 점점 더 벌어져만 가고 있다. 이미 병사들의
마음이 귀혼당에서 멀리 떠나버린 데다가, 수적 열세(劣勢)로 인해 승리에 대한 신뢰
도(信賴度)가 그들 눈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숫자 비는 2600대 400 정도다. 2대 1 수준에서, 이젠 6대 1 수준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젠장!!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끝장나고 만다!!’
장유승은 그래도 아직 이성은 남아있는 듯,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성난 물결처
럼 밀려오고 있는 폭도들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당장에라도 다시 돌아오라! 그래도 너희들이 10년 이상 한
솥밥을 먹었던 곳인데, 오늘 이렇게 쉽게 배반을 하겠단 말이냐!!”
장유승의 진심어린 호소에도, 폭도들은 여전히 중문을 향해 살벌한 얼굴로 돌격해 오
고 있다.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그만큼 투항하는 병사들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
다.
“죽음으로 귀혼당을 지킨다! 죽음을 불사하고, 저들에게...”
바로 그때,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장유승 앞으로 홀연히 나타난 한 인물이 투박한 목
소리로 검을 휘어잡으며 묻는다.
“네놈이 귀혼당의 부당주, 장유승이냐?”
흡사 한겨울철의 눈보라를 대하는 듯한 한기가 그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
러자 그 눈빛에 질려버린 장유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떠듬떠듬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렇소만... 귀하는 대체 누구...”
그게 장유승이 이승에서 꺼낸 마지막 말이 될 거란 걸, 장유승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
이다. 그 괴한이 돌연 검을 휘둘러, 장백경의 허리를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서히... 천천히 바닥을 향해 장유승의 신형이 기울어진다. 그리고 장유승의 신형이
바닥으로 철퍼덕 내려앉는 순간, 장유승의 몸은 두 동강이 남과 동시에 선홍색 피를
울컥울컥 쏟아낸다.
“아... 무식한 놈이로군. 감히 흑사풍(黑邪風) 태무극 나으리를 몰라보다니.”
정체불명(正體不明)의 괴한, 그 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태무극이다. 태무극이 살기 어
린 눈빛으로 장유승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 장유승처럼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덤벼라! 안 그러면 당장 항복하고!!!”
태무극의 이 행동은, 100마디의 말보다 더한 결과를 가져온다. 창자를 쏟아낸 채 참혹
하게 두 동강이 나 있는 장유승의 시신 덕택에, 병사들의 사기는 아예 땅 속으로 꺼져
버린 듯하다.
“항복하겠습니다...”
“천마궁의 재건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장유승의 어이없는 죽음에 이젠 완전히 전투 의욕을 잃어버린 듯, 병사들 전원이 백기
를 꺼내든다. 태무극은 그 광경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돌격해오고 있는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고함을 지른다.
“전원, 중문도 뚫렸으니 곧장 천마전을 장악하러 간다! 이제 장백경만 제거하고 나면
, 귀혼당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거니까, 힘내라!!!”
“천마궁 만세!!”
“흑사풍 태무극 만세!!”
병사들의 환호성이 항주의 하늘을 뿌옇게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는, 이
미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다.
이제, 어느 누가 보더라도 천마궁의 재건은 그야말로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군대
장악에, 제 2인자인 장유승을 제거했으니... 이제 남은 적은 장백경 말고는 존재하지
않게 돼버렸으니 말이다.
태무극은 중문을 넘어서, 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이제 남은 장벽은 단 하나, 장
백경 척살만 남았기에, 꿈을 향해 쉼 없이 달리고 있는 태무극에게는 두려움이란 존재
할 수 없을 듯하다.
천마전. 예전에 사무종과 곽경환이 무림통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곳이다. 그
런 곳에서, 인생에 실패한 장백경은 대체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그래.. 모든 게 다 끝났다는 게... 내 눈에도 보인다...’
이미 귀혼당의 존망(存亡)에도, 목숨에도 관심을 끊어버린 듯하다. 그래선지, 홀로 외
롭게 천마전에 우뚝 서있는 장백경의 얼굴에서는 모든 것을 달관한 자의 미소가 피어
있다.
장백경의 웃음이 피어난 시점을 전후로, 일곱 개의 신형이 소리 없이 천마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정체는, 당연히 오늘의 대사건(大事件)을 만들어 낸 주역들이다.
“장백경,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네 목숨도... 그리고 귀혼당도.”
저벅... 사문도가 한 걸음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천마전 안
에 가볍게 반사된다.
장백경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자신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는다. 지금 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들을, 죽는 순간까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자네가... 고독랑 사문도인가?”
“... 그렇소.”
“... 그랬군. 역시, 사무종의 혈육(血肉)이었군...”
장백경의 낮은 독백에, 사문도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냉랭한 목소리로 묻는다.
“단순히 성(姓) 만으로 맞춘 거요?”
“아니, 모든 상황과 자네의 모습이... 자네가 사무종의 혈육이란 걸 증명해주고 있잖
은가.”
장백경은 사문도를 본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아니, 끔찍할 정도로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종과 흡사한 용모(容貌)에, 비슷한 기질을 지닌 사문도의 정체가
사무종의 혈육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것... 알고 있었소?”
스릉...! 사문도가 여태껏 꺼내들지 않았던 단혼흑룡검을 꺼내 쥔다. 하지만 장백경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 12년 전에, 천마궁의 가신(家臣)들과 소궁주의 시
신이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적부터...”
장백경의 대답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사문도의 얼굴은 무관심(無關心)하다는 감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 말인즉, 여기서 뼈를 묻게 되더라도 미련이 안 남는 거라 해석해도 되는 거요?”
방금 뱉은 사문도의 말에는, 냉랭함 뿐만 아니라 옅은 살기마저 묻어 나오고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장백경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하기만 하다.
“... 물론 이미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목숨에 대한 미련은 없네. 다만...”
“다만?”
사문도가 물음을 던지나, 장백경의 얼굴이... 처음으로 애처롭게 물든다.
“내 한 목숨은 오늘 거둬간다 하더라도, 내 아들놈만큼은 꼭 살려 주게나. 못난 놈이
란 사실, 그놈 아비인 내가 더 잘 알고 있네만... 그래도 아들놈마저 죽는다고 생각하
면, 괜히 저승에서도 울적해질 것 같아서 말일세.”
적 대 적으로써가 아닌, 결정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말이다. 그 말에 여태껏 무
표정한 얼굴로 사태를 대하고 있던 태무극의 얼굴이 가볍게 흔들린다. 하지만 장백경
의 바로 뒤쪽에 태무극이 위치해 있기에, 태무극의 얼굴색이 변했다는 사실을... 장백
경은 보지 못하고 있다.
사문도는 부정(父情)에 호소하고 있는 장백경과, 장유승을 제거한 태무극을 번갈아 바
라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장백경의 두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
로 말문을 연다.
“나 역시, 천마궁의 혈겁과 관계가 없는 자들을 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염려하지
마시오. 장유승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목숨은, 내 절대 거두지 않으리다.”
“... 흐흐흐... 고맙게 됐네.”
사문도의 대답에, 장백경은 이제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고는 당당
하게 목을 쭉 내민다. 사문도는 이런 장백경에게 성큼 다가가더니, 단혼흑룡검을 높이
들어올린다.
“당신 한 사람 덕택에, 내 아버님께서 쌓으셨던 사파의 지위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것이, 당신이 죽어야 할 첫 번째 이유요.”
사문도의 두 눈에서는, 희한하게도 찹찹한 빛이 역력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제 곧 죽
게 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그래도 마음에 걸려선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천마궁의 혈겁에 직접적으로 개입(介入)을 했기 때문일 테지.
”
장백경의 평온한 음성에, 사문도는 한결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중 한 사람이 당신이란 것이... 바로 당신이 내게 죽어
야 할 마지막 이유요.”
사문도의 말이 조용히 끊긴다. 그리고 사문도는 단혼흑룡검을 꽉 움켜쥐고 있는 오른
손을 휘두르면서, 단혼흑룡검으로 팔랑개비를 만든다.
장백경은 가부좌를 튼 채로 여전히 무반응이다. 어서 빨리 죽여나 달라는 듯, 자기는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아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달라는 듯이...
중원무성에게도 버림받고, 사파들에게도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된 장백경이
다. 그래서 그는 오늘 같은 날을 도리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다. 더는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이, 사문도의 두 눈에서 짙은 살기(殺氣)가 일어난
다. 사문도의 변화를 모든 사람이 느낀 순간, 돌연 사문도의 우수(右手)에서 묵섬(墨
閃)이 빛살처럼 퍼져나간다.
점점... 천천히 장백경의 미간(眉間)에서부터 혈선이 드러난다. 그 혈선에서 핏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려 장백경의 턱을 타고 바닥에 똑 떨어지는 순간, 장백경의 정수리에서
갑작스럽게 피분수가 솟아오른다.
정수리에서 쏟아져 나온 뜨거운 피분수는, 단혼흑룡검을 일부분 적신다. 하지만 사문
도는 신경을 쓰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무너져 가는 장백경의 시신을 보며 쓴웃음
을 짓고 있다.
‘저승에서 아들을 만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당신 아들은... 이미 죗값을 치르러 저승으로 떠났으니 말이오...’
부인(否認)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문도의 두 눈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공...”
정적에 휩싸여 있던 천마전에서, 갑자기 금문택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모두의 귓전
을 때린다.
“... 무슨 일이오...?”
“밖에 계신 곽 군사님을... 모셔 와도 괜찮겠습니까?”
금문택에게 고개를 끄덕인 사문도는, 피로 젖은 단혼흑룡검을 탁탁 털어내고 검집으로
쑥 밀어 넣는다.
금문택의 신형이 어느덧 자취를 감춘 상태다. 바로 그때, 태무극이 가슴에 묻어 두고
있던 이야기를 사문도의 앞에 전개시킨다.
“소궁주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 장백경에게 거짓말을 한 것 말입니까?”
사문도의 쓸쓸한 눈은, 천마전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천마궁의 혈겁의 주연 중 하
나인, 귀혼당주 귀객(鬼客) 장백경을 자기 손으로 없앴지만, 도리어 허탈감만 더해져
버린 듯한 기색이 사문도에게서 심심찮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
“예, 그렇습니다. 왜 굳이 죽을 사람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장유승을 직접 죽인 태무극이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태청과 뇌명이나 비슷한 눈초
리로 사문도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사문도에게서 어떤 대답이 떨어질지, 궁금해 견
딜 수가 없다는 듯이.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 겁니다, 아마...
”
사문도가 꺼낸 말의 의미를 이 셋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듯, 두 눈을 치켜뜨며 다시금
사문도를 바라본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사문도는 천장에서 고개를 돌려 장
백경의 처참한 주검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아버님께서도... 임종(臨終)하시기 직전에, 지금 죽은 이 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
셨을 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저와 어머님
걱정을 하셨을 아버님을 모독하는 것 같아서, 장유승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훤히 알
고 있으면서도...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로움이 짙게 배어 버린 사문도의 목소리에, 다섯 사람의 시선이 모두 사문도에게로
고정된다. 그러자 사문도는 얼떨떨해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보겠다는 듯, 부스스한
얼굴에 애써 웃음꽃을 심으면서 다시 입을 연다.
“... 이제 우리 1차 목표는 달성된 겁니다. 천마궁을 장악하고... 귀혼당을 완벽하게
역사 속으로 날려 보냈으니 말입니다!”
약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궁무진한 희망을 가져다주는 말이었기에, 다섯 사람에게서
도 이제야 희망의 기색이 드러난다.
“예, 소궁주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사파를 하나로 묶는 일도 급한 일이고,
언젠가는 이 조각난 무림을 하나로 엮어 맞추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뇌 형! 그것보다는 일단, 천마궁의 부활을 소궁주님께서 선언하시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아직 기보 체제도 정비되지 못한 상황인데, 이런 꼴로 사파 통일이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곽경환, 그의 목소리 뒤로 한정욱과 금문택이 여유로운 미소를 날리며 모습을 드러낸
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이제 귀혼당 세력을 이곳에서 완벽하게 축출한
거라면, 우리 천마궁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가장 먼저 아니겠습니까?”
곽경환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맞장구를 치며, 흥분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하나같이 곽경환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진다.
“곽 군사 말이 옳습니다, 소궁주님! 대내외적(對內外的)으로 천마궁의 재건을 널리
알리는 것이, 아무래도 첫째인 듯싶습니다!!”
오태청이 맞장구를 치자, 뒤이어 태무극과 뇌명이, 그 뒤를 강천비와 모용화운이, 마
지막으로 금문택과 한정욱이 지지의사를 밝힌다.
“일단, 궁주좌(宮主座)가 있는 곳으로 가 보십시오, 소궁주님. 그 다음에, 거기서 선
포하시면 됩니다. 천마궁의... 우리 천마궁의 재건을 말입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곽경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12
년간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오늘을 위해 자신의 청춘(靑春)과 능
력을 바치지 않았던가!!
사문도 역시 12년 만에 되찾은, 자신의 기억 중에서 그나마 가장 즐거운 기억들이 가
득한 이곳, 천마궁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 대해 감격한 듯이 두 눈이 한없이 떨리고 있
다.
저벅... 저벅... 사문도가 궁주좌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는다. 곽경환이
궁주좌의 정면을 향해 몸을 옮기자, 태무극, 오태청, 뇌명 이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곽경환의 뒤쪽에 나란히 선다.
열 걸음 정도를 옮긴 사문도는, 궁주좌 앞에서 발걸음을 뚝 멈추고 왼손으로 궁주좌를
쓰다듬는다. 과거 부친이 앉았던 자리를 대하게 되자 감회가 새로운 듯, 사문도의 두
눈이 처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고 있다.
‘아버님의 의지를... 내가 이어받게 된다...!’
사문도가 궁주좌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가신들은 가신들 낄 또 쑥덕이고 있다
.
“하아... 이젠 소궁주님이라 부르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겠군.”
태무극이 섭섭하다는 어투로 푸념 섞인 말을 떠보이자, 오태청이 그런 태무극의 어깨
를 쿡 찌르고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럼, 평생 소궁주님이라고 부르며 살려고 했던 거요, 태 형님?”
“갑자기 궁주님이라 불러야 되니까, 왠지 좀 어색한 것 같아서 하는 소리 아니냐!”
오태청과 태무극이 서로 핀잔을 주며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다. 갑작스레
사문도의 창창한 목소리가 천마전을 한가득 메운다.
“모두, 귀를 기울여 제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엣!!”
여덟 사람의 오감(五感)이 사문도에게로 집중된다. 사문도는 전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로 완전히 고정됐다는 것을 느낀 듯, 느릿느릿하게 입을 연다.
“천마궁의 혈겁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 벌써 12년 전의 일입니
다. 그 동안, 우리는 오로지 천마궁의 재건을 위해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그러나 바로 오늘!! 오늘 현재, 우리는 대업(大業)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말입니다, 아저씨들과 군사님이 안 계셨다면... 결코 이룩해낼 수 없었으리라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천마궁이 재건됐으니... 지금이라도 아저씨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
다!!”
사문도가 태무극, 오태청, 뇌명에게 순서대로 정중히 포권을 올린다. 그러자 그들 셋
은 황송하다는 듯 얼른 자리에 부복(俯伏)하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인다.
이제 곽경환 하나가 남았다. 사문도는 얼굴에 훈훈한 미소를 짓더니, 앞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권을 하면서 감사의 말을 늘어놓는다.
“마지막으로, 여기 세 아저씨들도 제게 무한한 정과 지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제 모든 면을 다듬어 주시고, 오늘날의 제가 있게 해 주신 곽 군사님께..
. 개인적으로 제일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사문도가 고맙다는 얼굴로 허리까지 숙여 가면서 포권을 하자, 곽경환은 다른 세 사람
처럼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고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리에 부복한다.
“이 외에도 오늘의 영광이 있을 수 있도록 미흡은 소생에게 충성을 바쳐준 강천비,
모용화운, 금문택, 한정욱... 그대들에게도 노고를 치하하는 바요!”
사문도가 이들 넷을 한꺼번에 호명(呼名)하며 감사의 뜻을 비치자, 이들 넷은 황송하
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공손하게 사문도에게 허리를 숙여 답례한다.
“이제 1차 목표를 달성하게 된 이상,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苦難)
들이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백마련과의 충돌뿐만 아니라, 언제 정파(正派)에서 또 연
합 세력을 구축해서 내려올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소궁주님!!”
가신들 넷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다.
떨리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전신이 ㅁ라이다. 사문도 역시 더 이상은 떨리
는 기분을 제어하기 힘든 듯, 떨리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가신들 모두가 그렇게도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쏟아 놓는다.
“천마궁의 재건(再建)을... 천마궁의 부활을, 지금 여기서 선언하는 바입니다! 더불
어, 전대 천마궁주 사무종의 아들 사문도가... 제 2대 천마궁주로 취임한다는 것을 무
림 전역에 선포(宣布)합니다!!”
비록 떨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엄숙하기만 한 사문도의 얼굴을 뒤로 한 가신들 넷의 얼
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구보다도 이 순간을 고대했던 그들이다. 12년 동안, 이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숨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오히려 부족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꿈대로 오늘 그 꿈이 실현되었다. 장장 12년 만에, 그들이 그토록 열망
하던 1차 꿈, 목표... 천마궁을 재건해내고 만 것이다.
[귀거래혜] 39.거짓 고백(告白)
“련주님, 귀혼당 쪽에서 무슨 변이 일어난 듯합니다!”
“?!”
난데없이 나타난 정찰병의 모습에, 홀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공손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정찰병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귀혼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예.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 영 꺼림칙해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장찰병이 말을 끝내고는 엉거주춤하게 뒤로 물러선다. 잠깐 심각한 얼굴로 무슨 생각
엔가 골몰해 있던 공손호는, 탁자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태상장로님과 부련주에게 가서 전하라. 귀호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하니까, 함
께 정찰이라도 가 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예, 련주님!!”
정찰병은 서늘한 밤바람과 함께, 공손호 앞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그러자 공손호
는 여태껏 숨겨뒀던 불길한 눈으로, 심히 염려된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귀혼당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귀혼당으로 진공할 시간이 이제 열두 시진도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일어난 일이
자칫 꼬인다면, 행여나 군대에 사기가 떨어질까 봐 공손호는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다. 귀혼당에서 천마궁 재건으로 한창 달아올라 있을
이 시간에도 점점 더. 그리고 애태우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공손호에게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은 공손호가 있는 이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리승업은 그래도 좀 덤덤한 얼굴이지만, 부검악은 자다가 온 모양인지, 두 눈에 졸
음이 가득하다. 꼭 두꺼비처럼, 그의 눈은 현재 퉁퉁 불어있는 상태다.
“찾으셨다고 들었소. 대체 귀혼당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 시간에 경황없이 찾으신
거요?”
백리승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공손호에게 묻는다.
“늦은 시간에 갑작스레 불러야 했던 것, 이해해 주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내
일 즈음해서 공격하려고 하고 있는 귀혼당에,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합니다.”
뜻밖에도 그 말에 부검악은 이맛살을 확 찌푸리더니, 공손호에게 더럭 화를 낸다.
“겨우 그런 일로 이런 늦은 밤중에 우릴 불렀다는 말씀이오, 련주? 하하, 나 참!!”
부검악의 노성(怒聲)을 토해내자, 공손호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버린다.
“정찰병을 더 보내서 조사해 오라고 해도 되는 거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련주께서
홀로 간단히 갔다 오셔도 되는 일 아니오? 왜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을 하는 거요?”
부검악이 큰소리를 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모양인지, 백리승업은 됐다는 듯 고
개를 가로 내저으면서 부검악을 흘낏 노려보다가 공손호에게 시선을 맞춘다.
“부련주가 쉬고 싶으시다면 쉬시오. 노부는 련주와 함께 귀혼당 정찰이나 다녀 오리
다.”
백리승업이 공손호의 쪽에 서겠다는 말ㅇ르 내던지자, 부검악은 쉬기는 글렀다는 듯,
마치 똥이라도 밟은 듯한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아니, 태상장로님! 태상장로님께서는 이런 달도 없는 야밤에, 그것도 정찰병을 보내
도 될 만한 상황에 불려 나오신 게 억울하지도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질문에, 백리승업은 도리어 야릇한 미소를 날리며 공손호를 바라보다가 부검악에게
로 시선을 돌리고는 반문한다.
“부련주께서 피곤하신 모양이구려. 아까부터 자꾸 말이 헛 나오는 것 같으니 말이오.
현재 련주는 귀혼당을 궤멸시켜 잃어버린 사파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 서 있
는 거요. 자신의 눈으로 보고, 또 듣는 것은 훨씬 신뢰가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
이라고 믿고 있소. 련주는 조금이라도 더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고 하려는 듯
한데, 부련주처럼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는 건 좀, 어불성설(語不成
說)같지 않소?”
백리승업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빙글 돌아서더니, 공손호를 바라보며 짧은 말을 휙
내던진다.
“가십시다, 련주. 정찰인가 뭔가 하러 말이오.”
“아... 예, 태상장로님!”
백리승업과 공손호가 함께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자, 부검악은 피로로 부은 두 눈을 쓱
쓱 문지르고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욕을 해대더니 얼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나선다.
“에이, 그냥 같이 갑시다 태상장로님! 혼자 뒤숭숭하게 무슨 잠을 잔단 말씀입니까?!
”
결국, 부검악도 공손호와 백리승업의 뒤를 따른다. 오로지 자의(自意)라고는 조금도
반영되지 못한,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귀혼당이 있을 옛 천마궁 자리로 가면서, 부검악은 혼자서 계속 툴툴거리고 있다. 먼
저 나서자고 이야기를 꺼낸 공손호가 밉다는 듯, 또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백리승업
이 야속하다는 듯이 말이다.
머무르고 있던 숙소를 떠나, 그들은 한 웅장한 궁성(宮城) 앞에 도착했다.
예전 사파의 최강자가 군림했던 곳, 천마궁. 하지만 이 셋이 현재 알고 있는 천마궁이
라면, 타락할 수 있는 데까지는 타락한 자, 장백경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다.
기세 좋게 달려온 이들은, 궁성의 남문 앞에서 숨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어
느 정도 숨을 돌린 셋은,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얼굴로 궁성벽 위쪽을 노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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