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와
세 자매가 왔다.
나를 외삼촌이라 부르는 여인들.
똑같이 외삼촌이라 부르며 와락 달려드니
누구 손을 먼저 잡아야 한단 말이냐...
반가워하는 나의 잠시의 망설임이었다.
아침마다 나서는 산책길, 석촌 호반으로 안내했다.
“여긴 벚꽃이 피는 날이면 환상이야, 미리 한 번 걸어볼까?”
“그래야겠네요.”
그래, 너희들은 아직 피기 전의 꽃봉오리란다.
뽀동이처럼 살포시 물 오른 꽃봉오리.
한참 동안은 레드 카펫이 아닌 꽃길을 걸어가야겠지.
그래야 주저앉아도 꽃밭이려니.
호반의 작은 카페에 들었다.
“잘들 지냈지?”
“네, 네, 네.”
"여성임을 잊지 마라.
뭇 사내들이 여성의 육신에서 떨어져 나와 어머니를 찾으며
종당엔 외마디소리 어머니를 부르며 생을 마감한단다.
여성은 창조주 브라마요 삶을 주재하는 비쉬누요
생명을 꺼버리고야 마는 시바이니..."
이렇게 말해주려다 입을 닫고 말았다.
내가 여자의 일생을 짐으로 지워줄 것 같아서였다.
“여기 미성년자 있나?”
“아니요.."
"그럼 와인 한 잔씩 해도 되겠군. “
"아기 타다시의 <신의 물방울>을 읽어보라.
거기 와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단다.
와인 글라스를 들고 사내들은 붉은 여인의 입술을 그려보느니
레드(Red)를 연출하라.
그러면 사내들은 감동한단다.
밤도 화려하게 연출하라.
스란치마를 끌고 가다 갑자기 풀어내려 보라.
백열등을 끈 자리엔 빨간 미등의 스위치를 올려보라.
그게 한 사내를 내 안에 꼭 잡아두는 요술이요
사내를 한 눈 팔지 못하게 하는 비술이란다."
이렇게 말하려니, 마 모 교수처럼 매도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와인 맛이 어때?”
“달콤하네요, 달콤해요, 달콤한데요.”
"그래, 그렇게 상대방에겐 맞장구를 쳐야 좋아한단다.
허나 자신의 심지는 곧게 감추고 가야 한단다."
“외삼촌, 이거 홍삼인데 건강하시라고요”
"그래? 고맙다."
"하지만 선물이란 고운 추억을 품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
내용물만이 중요한 게 아니니, 포장이 더 좋을 수도 있단다.
손재주 부려 마음의 흔적을 이미지로 담아주면 더욱 좋단다."
이렇게 말하려다 말고 반갑게 받아 들고 말았지만
나의 선물에 관한 글이나 한 편 카톡으로 보내줘야겠다.
"외삼촌, 안녕히 계세요."
"사랑의 밧줄로 꼭꼭 묶어 사랑방에 가두라.
그러다가 들판에 사정없이 내던져보라.
그래야 야생마가 되느니.
사랑과 자유, 구속과 해방, 구심력과 원심력
그 팽팽한 긴장의 틈바구니에 삶의 묘미가 있느니
너희들은 그걸 경영하거라."
이렇게 말하려다 말고
"그래, 잘들 지내고 다음에 만나자"
이렇게 해서 세 자매와의 데이트를 접어 두었는데
다음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반갑다고?
그저 안녕이라고? / 지난날 시월의 단상 중에서
다시 세 자매와
지난번 찾아왔던 세 자매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그중 한 놈이 취직해 친족회식을 하자는 거였는데
그 외숙 이모 내외와 이종 외종 모두 합해 서른여가 모이게 됐다.
밥값을 해야 하니 무어라 덕담을 들려줘야 하겠는데
무슨 말을 해줄까...?
해서 생각해 낸 게 가훈이었다.
내 어릴 적 시골생활 하던 시절엔
방의 아랫목 벽에 걸려 있는 건 횃대뿐이었다.
그건 옷을 걸 수 있게 만든 제구인데
간짓대를 잘라 두 끝을 끈으로 매고
벽 쪽에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그 왼쪽으론 궤가 놓여있었는데
거기엔 쇳대가 잠겨 있어서 할아버지만 여닫는 것이었다.
횃대를 뒤쪽에, 궤를 왼쪽에 두고 정좌한 할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가족들에게 훈육을 하셨다.
자고 일어나 옷을 입으려면 그 앞에서 몸가짐을 추슬러야 했고
밥상도 그 앞에 놓이니
밥을 먹으려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앉아야 했으며
나들이 갔다 돌아와 옷을 벗어 걸려 해도
어디 갔다 왔다고 먼저 말씀드려야 했던 것이다.
결국 횃대 아래는 왕좌에 버금가는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주택개량에 의해 횃대도 물러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방안으로 훤한 벽면이 생기게 되었고
그곳엔 무언가를 장식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상징을 조작해 잃어버린 권위를 찾는 것이었다.
"자안시중(慈眼視衆)"
내가 제일 먼저 벽에 걸었던 건 이것이었다.
어느 스님으로부터 받은 글씨인데
부처님이 자애롭게 내려다본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경외(敬畏), 외경(畏敬) 이란 말을 섬기게 되었고
아이들이 우리 집 가훈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엉겁결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 전차로 나는 늘 외경하는 마음은 품고 있지만
애인(愛人)은 흉내도 내지 못하고
기족이나 챙겨 왔을 뿐이다.
어느 해 호남의 장전 하남호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래서 받은 글씨가 부식강상(扶植綱常)인데
그 뜻은 삼강오륜(삼강오상)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두 딸만 낳아 출가시키고 나니 아내와 나, 둘만 들어앉아 있는데
나에게 가훈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그걸 지키지 못하는 나는 다만 부끄러울 뿐이요
응접실 벽에 걸린 글씨도 아무런 울림이 없다.
바야흐로 시대는 가부장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
부부 중심의 핵가족으로 분화되는가 하면
때로는 출가한 자식과 함께 살기도 해야 하고
사위나 사돈댁과도 같이 지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삼강오륜에 부자유친은 있지만 부서유친은 없다.
그보다도 고부(姑婦) 유친이 없으니
유친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세 자매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고 헤어졌지만
삶은 각자의 몫이니 너스레였을 뿐이리라.
첫댓글 아름다운 세자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네요
네에 고마워요.
와~~세상이~~부럽습니다.
그런가요?
ㅎㅎ
자식에 연연하고 애면글면 하던 세월이 지나고 나니
자식 두기전 온전히 여자로서 살아온 삶은
별 의미가 없는 삶이었고 어미로서 살아온 삶만이
내 앞에 놓여서 숱한 사연을 만들어 내고 있네요
사람이 혼자 만들어 가는 생이란 특별한 모험에
의해서가 아니면 전혀 무의미한 흔적만 남기나요?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고 양쪽 집안과 얼키고 설키고
갈등과 기쁨의 세월 속에 인간의 역사도 쓰여지고
자신의 생애를 점수 매기는 건지 그래서 자식을 낳고
키우고 지지고 볶고 하나 봅니다
나의 생애는 여기까지 입니다 더 무엇을
못난글에 긴글로 화답하셨네요.
고맙습니다.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에서 로잔느의 입을 통해 이렇게 술회하지요.
삶이 그렇게 행복한것도 불행한것도 아니라고요.
저의 과거도 미래도, 그렇게 기대할것도 실망할것도 없이 알아듣는 이들과 이렇게 너스레나 떨며 지내는것도 뭐 어떨까 한다네요.
옛날 시골집 사랑방, 건넌방엔 횃대(옷걸이로 주로 사용)가
꼭 있었지요.
요즘 아이들한테 너무 장황한 연설은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기네들 주관이 뚜렷하여 잘 들 알아서 하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실려다 참길 잘 하셨어요.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인 시대가 바로 요즘입니다.
박시인이 횃대를 아시남?
주워들은 이야기일 껄요~~~ㅎ
@석촌 충청도 산골의 우리집에도(저가 국민핵교 시절)
건넌방, 사랑방에 횃대가 있었거들랑요.
@박민순 ㅎㅎ
세 자매와 만나 여성 삶에 관해 수많은 얘기를 해주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절제에 절제를 거듭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글 곳곳에 書香이 배어있어 품격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구우 부끄럽습니다.
오늘 글에서도 몇 가지 읽어볼게 생겼네요.
도깨비도 뭐 모르는게 있나요?
석촌님은 멋진 외삼촌이십니다.
귀여운 조카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시는 크나 큰 이유로는 분명 석촌님의 넉넉한 큰 사랑 베품이 우선 했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전 나름 짐작 해 보게 됩니다. ^^~
네에, 그 어미를 제가 많이 봐줬죠.
세자매가 참 이뿌네요!!!
석촌님도 젊어 보이시구요...
석촌호수 정말
멋진데 사시네요....
옛날에...
예술의 전당,
88 올림픽 도로로
고속도로
많이 다녔지요...
이젠 젊음이 이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