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코스트코 가는 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성경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구절이 있었습니다. ‘For if anyone thinks he is something when he is nothing, he deceives himself’(갈6:3). 이 말씀을 언뜻 이해한 바로는, ‘(누가) 사실은 별것도 아닌 존재이면서 혼자 생각에 무엇이나 된 줄로 안다면 착각이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울은 왜 이런 당연한 말을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when he is nothing”(아무것도 아니면서)이라는 대목이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참으로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다 속고 있다는 말인가? 저녁에 어떤 집회에 가서 이 말씀을 내어놓자, 다양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 자신도 그때까지는 이 말씀이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산책하면서, ‘오 주님 이 말씀을 제게 열어 주소서! 당신의 긍휼을 구합니다. 제가 스스로를 속이는 상태에 있다면 구원하소서! 오 주님, 빛 비춰주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바로 앞 절의 “여러분은 서로의 짐들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이룰 것입니다.”(2절)라는 말씀과 함께 묵상해야 하는 문맥입니다. 영어 성경은 3절 처음이 ‘for’(가르, 1063, 원인, 설명, 추정 혹은 계속을 표현하는 접속사)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이 부분은 갈라디아5장 1절부터 6장 17절까지에서 다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생활’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이룸’(6:2-6)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이루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길은 서로의 짐들을 져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이나 된 줄로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은 남의 짐을 지는 일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조금 더 추구하고 묵상함으로 얻게 된 도움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여기의 ‘그리스도의 법’은 쉽게 말해 ‘사랑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 영의 열매’(갈5:22) 중 하나이므로, 결국 이 말씀은 ‘생명의 영의 법’(롬8:2)을 따라 사는지 여부의 문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당 각주는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으로 운행하는 더 높고 더 나은 생명의 법이다(롬8:2, 요13:34). 사랑은 신성한 생명의 결과요 표현이며(비교 고전 13장), 그 영의 열매 중 한 항목이다(갈5:22).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우리가 서로 짐들을 질 수 있도록 생명의 영의 법으로 말미암아 구체화되어야 한다(갈6:2, 각주1).
또한 여기서 말하는 ‘짐들’(burdens)은 빈센트의 <말씀 연구>에 의하면, 어떤 실패한 지체가 느끼는, “도덕적인 결점, 잘못, 슬픔, 부끄러움, 후회(양심의 가책)”이고, 그것을 함께 짊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혹은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어떤 지체가 겪는, “고생, 고난, 책임감, 염려가 몸 혹은 생각을 짓누르는 그 무게감”(It denotes any weight which presses heavily on the body or the mind, as toil, suffering, responsibility, anxiety)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주변의 어느 지체가 도덕적인 실수, 사업실패, 혹은 사고 등으로 온 환경 때문에 괴로워할 때, 주변의 지체들이 그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 이런 위기상황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지체가 주변에 있게 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반응이 있습니다. 1) 먼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지를 모르거나 그런 상황에 연루되는 것이 번거로워 사실상 방치하는 것입니다. 2) 때로는 어떤 도움을 주지만, 의무감에 마지못해 그리합니다. 3)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에게 닥칠 손해나 불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안의 영의 인도를 따라 다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자(nothing)이고,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살 권리만 있음에도, 옛 자아가 자기 입지를 고려함으로 결과적으로 그 영의 인도를 거부하는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위 해당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참고로 갈라디아서 라이프 스타디는 해당 부분(갈6:2-3)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3절과 2절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사실은 대단히 실제적이고도 의미 깊은 관계가 있다.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짐을 질 것이다. … 바울은 자신의 체험에 따라 이 구절들을 썼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부담을 진다는 것을 바울은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영 안에서 그 영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그것을 할 뿐이다.
주님 앞에서 이 말씀들을 좀 더 묵상할 때, 다음 몇 가지 사례들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계모를 데리고 사는 어떤 사람”(고전5:1)을 다룬 바울의 태도입니다. 보통은 공동체에서 격리하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을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책망과 격리만 아니라,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여, 그러한 사람이 너무 심한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라”고 권면했습니다(고후2:6-8).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바울의 인격을 통해 균형 있게 나타남을 봅니다.
둘째는 죄지은 한 형제를 교회가 치리한 사례입니다(마18:15-17). 즉 교회가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겼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맥에 의하면, 교회의 말도 듣기를 거부하는 형제(마18:17)를 회복하려는 “두 사람이 땅에서 구하는 기도”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짐을 지는 한 방법입니다.
셋째는. 여행 중에 꼭 필요한 자신의 차비를 남에게 준 후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기 필요가 채워진 워치만 니 형제님 이야기. 빵밖에 없는 사람, 버터밖에 없는 사람이 기도와 영의 인도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킨 사례 등등. 오 ! ‘주라 그리하면 주신다’(눅6:38)는 위대한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 때 우리의 믿음 없음과 자기 과신 때문에 막히고, 지체 사이에 ‘평균케 함’(고후8:14-15)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지!
오 주님, 많은 때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따라 살고,
곤경에 처한 지체들의 필요를 채우시려는 그 영의 인도를 거절했습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 앞에 자신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님을 더 보게 하소서!
몸의 지체들을 목양하고 때를 따라 도우시려는 당신의 통로로 쓰임 받게 하소서.
기꺼이 서로의 짐을 짊어지게 하사 당신의 교회 안에 형제사랑의 실재가 더 풍성히 나타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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