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광복 후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당시에는 남포동 시장이라고 불렸다. 자갈치 시장의 이름의 유래는 한국 전쟁 이후 자갈밭에 있었던 시장이기에 자갈밭과 곳, 장소를 나타내는 처(處)가 경상도 사투리로 발음하게 되어 치가 되어 자갈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영도다리는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이며,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 11월 23일 준공하였다. 중앙 동쪽의 31.3m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건설되었다. 도개 속도는 저속일 때 4분, 고속일 때 1분 30초, 도개 동력은 22마력이었다. 다리의 영도 쪽 부분은 한쪽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캔틸레버(cantilever)식 강판항교(鋼板桁橋)로 하였다.
다리 아래로는 만조 시에도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교량 밑을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총공사비는 당시 700만 8000엔이 투입되었다. 2013년 11월 27일 복원 개통한 영도대교는 길이 214.7m, 너비 25.3m의 왕복 6차선이며, 도개교의 길이 31.3m, 무게 590톤으로, 2분여 만에 75° 각도로 세워진다.
옛날 시청자리 남쪽에서(현재 롯대백화점) 영도의 북서단을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유일한 일엽식 도개교로서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 및 수송로 구축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하루 7차례씩 영도대교 아래를 지나는 선박을 위해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장관을 연출, 부산 최고의 명물로 손꼽혔다. 하지만 영도의 인구증가 및 교통난등으로 인하여 1966년 9월 1일 그 들림 기능이 중단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건축물로 평가되어 2006년 11월 25일 부산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11월 27일 기존 4차선 도로를 6차선으로 확장 및 도개기능 복원을 통해 다시금 부산의 명물로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1932년 4월 20일 착공, 1934년 11월 23일 준공되었다. 1935년 2월에는 전차가 개통되어 다리 위를 지나다녔다. 1966년 9월 1일에 다리의 도개가 중단되며 고정식으로 바뀌었고, 1967년 5월 2일 전차 운행이 폐지되었다. 1982년에는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나란히 준공되면서 영도대교로 개칭되었다.
2007년 7월 6일 확장 복원공사 및 임시교량 건설을 착공하였고, 2009년 7월 27일 임시교량이 준공, 8월 영도 다리 상판 철거공사를 시작, 2011년 2월 26일∼3월 13일(16일)까지 도개 구간 마지막 모습을 공개행사를 거쳐 4월 상판이 완전 철거되었다. 2013년 6월 2일 상판 첫 가설공사가 시작, 7월 26일 복원 도개교를 처음 시험 가동하여 11월 27일 왕복 6차로 확장 복원 준공 개통하였다.
1932년 4월 20일 착공, 1934년 11월 23일 준공되었다. 1935년 2월에는 전차가 개통되어 다리 위를 지나다녔다. 1966년 9월 1일에 다리의 도개가 중단되며 고정식으로 바뀌었고, 1967년 5월 2일 전차 운행이 폐지되었다. 1982년에는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나란히 준공되면서 영도대교로 개칭되었다.
2007년 7월 6일 확장 복원공사 및 임시교량 건설을 착공하였고, 2009년 7월 27일 임시교량이 준공, 8월 영도 다리 상판 철거공사를 시작, 2011년 2월 26일∼3월 13일(16일)까지 도개 구간 마지막 모습을 공개행사를 거쳐 4월 상판이 완전 철거되었다. 2013년 6월 2일 상판 첫 가설공사가 시작, 7월 26일 복원 도개교를 처음 시험 가동하여 11월 27일 왕복 6차로 확장 복원 준공 개통하였다.
영도대교는 시대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하게 불리었다. 건설 당시 영도쪽 접속도로와 호안 매립공사 때 주위의 산이 무너져 많은 노무자의 사망으로 유령이 나타난다고 「유령 다리」로 불렸고, 다리가 개통된 뒤 도개하는 광경이 신기하다고 하여 「마법의 다리」라고 불렸다. 6·25 전쟁 때에는 피난민들이 만남의 장소인 「만남의 다리」로 불렸고 생활고를 비관하여 운명을 달리한 곳이기도 하다. 새롭게 단장하여 도개 기능이 복원 개통되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추억 속의 다리」, 「희망의 다리」로 부산의 새로운 문화콘텐츠의 아이콘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영도대교 보수·복원공사 개요
■규 모 : L=214.8m, B=25.3~27.86m(왕복 6차로)
■사 업 비 : 1,100억원(당초 360억원) ▷ 롯데쇼핑(주) 전액부담
■공사기간 : 2009. 11. ~ 2013. 12.(준공일 : 2013. 12. 24.)
■재개통일 : 2013. 11. 27.
도개 운영 안내
■재개일자 : 2022. 6. 11(토) ~
■시행방식 : 주1회 시행(토요일 14:00~14:15)
■도개길이 : 31.3m(트러스교)
■도개각도 : 55°
■도개교 중량 : 590톤
■도개방식 : 전동기+기어방식
유라리 광장
영도대교 아래 건어물시장 쪽에는 예전에 점집들이 많아서 점바치골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그 아래 터를 마련하여 유라리 광장을 조성했다. 유라리란 유라시아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국도 7호선 시점과 종점이다. 유럽의 '유'와 아시아의 '라' 그리고 사람과 마을이 모여 즐겨 노는 소리를 뜻하는 '리'의 조합으로 유럽과 아시아인이 함께 어울려 찾고 즐기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조형물 아래 새겨두었다. 그러나 부산시에서 요즘 명칭 짓는데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게 왠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시시아관광단지도 그렇고 영도의 공원이름들도 그렇다.
부평깡통시장
부산 중구의 부평동이 발전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부평동에는 과거부터 열리던 장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곳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이 개설되었다. 일제가 정한 시장규칙에 따라 1915년 일한시장은 부산부에서 운영하는 공설시장으로 바뀌었고, 장옥도 새롭게 정비해서 부평정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부평정시장은 국내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0년대 시장의 규모를 넓혀가며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부평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장세를 키웠다. 부평시장은 베트남전쟁 특수로 크게 성장했는데, 당시 미군의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군수품을 팔았다. 부평시장은 미군 물자인 통조림 등을 많이 팔았기 때문에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1970년대 이후에는 일본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물자를 들여와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2013년에는 국내 최초로 야시장을 개설해 세계의 전통음식들과 먹을거리를 팔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부평깡통야시장 입구깡통시장은 저녁마다 야시장이 열린다.
부평동은 개항하기 전까지 강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 갈대밭과 풀밭이 많았다. 부평이라는 말은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富山)과 하구의 갈대밭과 풀밭을 의미하는 평(平)이 합쳐진 말이다. 부평시장은 시장이 있는 지역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편 부평시장은 부평깡통시장이라고도 불렸는데,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같은 깡통 제품을 많이 거래하고 판매했기 때문이다.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하기 전까지 부산의 중심은 동래와 구포였다. 동래는 행정의 중심지였고, 구포는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로서 낙동강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부산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부산의 중심은 조선시대에 초량왜관이 있던 오늘날의 부산 중구로 옮겨갔다. 용두산공원 주변의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신창동 등 오늘날의 부산 중구에 해당되는 지역은 개항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갈대밭과 풀밭이 많은 지역으로 ‘샛디’라고 불렸다. 부산이 개항을 하자 일본인들이 몰려왔고, 이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 부산 중구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이 도입한 서양 문화가 활발하게 유입된 지역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극장이다. 극장은 서양에서 발달한 문화로, 한국은 극장보다 마당극이 발달해 있었다. 부산 지역에 개관한 극장은 1904년 행좌와 송정좌, 1907년 7월 부평동에 부산좌가 있다. 부산좌는 2층짜리 목조건물로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주요 고객은 일본인들로, 활동사진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러나 부산좌는 1923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부산의 중구가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가 된 것도 부산좌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부평동에는 원래 사거리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으로 늘어난 일본인 거주자들이 이 시장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 또한 늘어났다. 그래서 근처의 밭을 구입해서 장옥과 점포를 설치하고, 경찰의 허가를 얻어 1909년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을 개설했다. ‘일한’이란 일본과 한국을 의미한다. 일한시장은 1914년 일제의 시장규칙에 따라 시장의 부지와 건물을 부산부 당국이 임차해서 1915년 9월부터 장옥을 개축해 공설시장으로 바꾸었다. 이때 이름도 지역 이름에서 유래한 부평정시장으로 바꾸었다.
부평정시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공설시장이었다. 부평정시장이 있던 곳은 오늘날의 부평아파트 인근이었다. 부산부에서 부평정시장을 공설시장으로 개설한 것은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식재료나 잡화 등을 일본인들에게 10~25% 정도 할인해서 판매했다.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서 부평정시장은 1922년과 1924년에 주위의 도로를 수용해서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시장의 규모는 이후에도 계속 커져서 1927년에 4,233.9m2가 되었다. 1층 목조건물이었던 부평정시장은 건물 안팎에 점포들이 있었다. 1923년에는 건물 내에 125개, 바깥에 137개의 점포가 있었고, 1935년에는 건물 내에 92개, 바깥에 570개가 있었다.
부평정시장은 매월 초하루를 빼고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이었다. 1923년 초반 주요 거래 품목은 백미, 대두, 소금, 야채와 과일, 잡곡, 조수, 어류 및 해조, 직물 등으로 가장 많이 거래된 것은 백미(56만 9,000원)와 어류 및 해조(47만 2,600원)였고, 하루 거래액은 4,346원, 연 거래액은 180만 3,000원에 이르렀다. 1935년에는 수백 명의 상인들이 곡물과 식료품, 해산물, 직물 등을 거래하며 하루 거래액이 6,500원, 연 거래액이 300만 원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도시가 커지면서 부평정시장 외에도 서구 대신동에 대신정시장이 1933년 1월 문을 열었다. 대신정시장의 부지 면적은 2,692m2였다. 이 외에도 1930년대 중구 영주동, 동구 수정동에도 영주정시장, 수정정시장이 개설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부평정시장은 동제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평동시장, 부평시장이 되었다. 해방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부평시장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강제든 자발적이든 해외로 나갔던 동포들이 귀환하기 시작했고, 부산은 인천 등과 함께 귀환의 주요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방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또한 한국 사회에 준 충격과 영향은 엄청났다. 전쟁 초반에 한국은 ‘낙동강전투’가 상징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났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함락되지 않는 부산을 향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은 시장과도 관련이 깊은 인구의 변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시장과도 관련이 깊은 인구의 변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방 당시 40만을 헤아리던 부산의 인구는 한국전쟁 당시 2배 가까이 늘어나 88만까지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피란민들은 곳곳에 임시가옥인 판잣집을 지어 거주했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의 활성화였다.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을 때 또는 위기에 빠졌을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암시장이다. 필요한 재화와 생필품을 얻기 위해 물물교환 형태로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산의 시장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시장이 확대되고 성장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중구가 그 중심지였다.
당시 부평정시장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의 점포는 한국인들이 차지했다. 서로 닮은 점이 많은 부평시장과 국제시장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부평시장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이었다. 따라서 부평시장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물품보다는 그들의 상권을 헐값에 물려받았다. 하나의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부산을 상징하는 먹을거리인 ‘부산어묵’이다. 어묵은 말 그대로 생선[魚]을 묵처럼 만든 것이다. 일본어로 어묵은 오뎅이다. 부평시장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어묵을 많이 팔았던 곳이었다. 오늘날 부평시장에는 3대째 어묵을 팔고 있는 전문점이 있는데 그 어묵가게의 시작이 1945년이었다는 것이 이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부평시장이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떠난 일본인보다는 새로 들어온 미군에 의해서였다. 오늘날 부평시장의 이름인 부평깡통시장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깡통이라는 말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과 과자를 비롯해 다양한 물품들을 팔면서 붙은 이름이었다. 미군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0년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미군의 전투식량인 시레이션(C-ration)을 비롯한 다양한 외국 물품들을 부평시장을 중심으로 판매하면서 깡통시장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부평깡통시장은 그 이후 수많은 외국의 물품을 다루는 대표 시장으로 성장했다. 그 시장을 지탱한 것 중 하나가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이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건너올 때, 그리고 해방으로 부산을 떠나야 할 때 탔던 배도 이 관부연락선이다. 관부연락선은 1945년 미군의 공습과 어뢰 공격으로 통행이 중단되었다가 1970년 6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베트남전쟁 특수로 급성장을 한 부평깡통시장의 상인들이 그 이후 새로운 수입처로 삼은 것이 때마침 통행이 재개된 관부연락선을 통해 연결된 일본이었다. 이때 과거 미군과 베트남 참전 용사를 대신한 것이 일명 보따리장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물건을 실어 날랐다. 시모노세키에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교포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싸게 물건을 떼서 부평깡통시장에 얼마간의 이익을 남기고 넘기면 깡통시장 상인들이 다시 이윤을 붙여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구조였다. 이 판매 구조는 공식적으로 세관을 통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때때로 밀수품 단속을 통해 부평깡통시장은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보따리장수와 깡통시장 상인들은 법망 위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물건을 들여오고 팔았다. 한편,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던 시대에 부평깡통시장은 소비자들에게 신세계와 다름없었다. 최첨단 전자제품부터 양주, 담배 등의 기호식품까지 흔히 말하는 ‘외제’ 가운데 구하지 못할 제품이 없었다. 그러나 수입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과거와 달리 소비자들이 외국 제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부평깡통시장은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이 쇠퇴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평깡통시장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즐비하고, 향수가 담긴 이야깃거리도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평깡통시장이 다시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2013년 10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야시장 때문이었다. 흔히 깡통시장야시장으로 불리는데, 연중무휴로 저녁 7시 30분부터 자정까지 불야성을 밝힌다. 깡통시장야시장은 깡통시장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과거 깡통시장에서 세계의 물품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면 이제 깡통시장야시장에서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액세서리, 건강식품 등 다양한 물품들이 함께 팔린다. 또한 민속놀이와 거리공연 등이 선보이며 부산의 밤 문화를 선도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2016년 현재 부평깡통야시장은 평균적으로 평일 3,000여 명, 주말에는 7,000여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야시장이 열린 골목 풍경천장 아케이드에도 색색의 조명이 들어와 분위기를 돋워준다. 터키인이 만드는 케밥 가게깡통시장야시장에는 세계의 요리를 파는 부스가 여럿 있다.
부평깡통시장은 유난히 부산 특유의 먹을거리가 많은 시장이다. 부평깡통시장하면 떠오르는 음식으로 비빔당면과 유부주머니전골 등이 있다. 또한 인근에 죽집골목도 자리하고 있어서 먹을 것이 풍성하다. ‘비빔당면을 먹지 않으면 부산을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 특유의 음식이 비빔당면이다. 비빔당면은 처음에 부평깡통시장의 상인들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비빔당면은 애초에 허기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기에 만드는 것도 간단하다. 당면을 불려서 삶고, 사각어묵 역시 끓는 물에 데쳐 썬 다음 그릇에 담아 양념장을 넣어 비비면 완성된다.
여기에 시금치 등의 채소를 넣기도 한다. 골목 한쪽에 비빔당면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 있다 유부주머니전골 또한 부평깡통시장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버섯과 대파를 잘게 썰고, 무는 납작하게 썬다. 그리고 멸치의 내장을 뺀 다음에 냄비에 끓여 육수를 만든다. 데친 유부에 잡채를 넣고 미나리로 묶은 다음 냄비에 육수를 넣고 끓이면 유부주머니전골이 만들어진다.
죽집골목 역시 부평깡통시장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온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을 하나로 모아 죽을 끓여 파는 집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죽집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돼지 먹이를 의미하는 꿀꿀이죽 또는 유엔탕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이 죽은 값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피란민을 비롯해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훌륭한 한 끼였다. 오늘날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식이나 이유식, 건강 죽을 파는 죽집으로 변화하고 있다. 길에서 노점을 펼치고 죽을 파는 상인도 있고 점포를, 가진 죽집들도 있다. 죽 외에도 국수, 국밥, 만둣국 등도 팔고 있고, 야채와 잡곡을 이용해 미숫가루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다대포해수욕장(多大浦海水浴場)
해안 백사장은 낙동강 상류에서 밀려 내린 양질의 토사가 퇴적돼 생겨 모래가 부드럽고 반월형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휘어져 있다. 낙동강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 부근에 위치해 수심이 300m 거리의 바다까지도 1.5m 정도로 얕고 평균수온이 21℃로 따뜻하다. 백사장의 면적은 53,000㎡, 길이 900m, 폭 100m이다.
1987년에 축조된 낙동강 하구 둑이 강물의 흐름을 막아 백사장의 경질화와 수질오염 및 갯벌화가 진행되고 있어 해수욕장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으나, 현재 진행 중인 연안 정비사업으로 개선될 전망이다. 다대포해수욕장 일원에는 2014년 완공을 목표로 연안정비사업이 진행 중으로 진입광장·방사림·산책로·생태탐방로·해수천 등 생태 친화적 해변공원을 조성하여 세계적인 해안관광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6월 준공된 세계 최대 규모의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는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매년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국제록페스티벌과 다대포해넘이축제 등의 문화·축제행사에 많은 방문객이 다녀가고 있다.
주변에는 해안 절경지인 몰운대(沒雲臺)가 있고, 다대포패총·다대진 동헌·낙동강하류 철새도래지·정운공순의비·윤공단 등의 문화유적지와 관광명소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낙동강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가 퇴적되어 생긴 해수욕장으로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해안선은 초승달 모양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휘어져 있고, 길이 900m, 폭 100m의 백사장은 부드러운 모래로 되어 있다. 낙동강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 부근에 위치해 300m 거리의 바다까지도 수심이 1.5m 정도로 얕고, 평균 수온이 21℃로 따뜻해 해수욕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주변에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몰운대와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낙조 분수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낙동강과 남해안이 만나 양질의 모래밭을 만든 곳, 일출과 일몰 조망지이다. 대포해수욕장은 자연이 주는 황홀경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기분 좋은 장소이다.다대포 해수욕장의 희고 고운 모래는 오랜 풍화작용 덕에 매우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또한 다대포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수온이 차지 않아 아이들이 놀기에 적격이다. 최근에는 패들보드나 카이트보딩 등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사시사철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다대포해수욕장에 해변공원과 생태탐방로가 생기고 난 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해수욕장 입구에 드넓은 광장이 펼쳐지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꿈의 낙조 분수와 함께 해변공원이 시작된다. 꿈의 낙조분수는 화려한 조명과 음악이 춤을 추는 분수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4월 말부터 10월까지 정기적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분수쇼가 밤의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취옹정님이 사는 '성원상떼빌' 아파트
취옹정님 아파트에서 바라본 야경 모습이 그저 황홀경에 취하기 딱 좋다
보름달은 아니지만 달도 휘영청 밝게비추고..
다음날은 장림포구/감천문화마을/흰여울마을/송도(거북섬)/택사스거리를 다녀봅니다
첫댓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자갈치 시장,영도다리,깡통시장은 중학교떄 내 나오바리인데 아쉽게도 용두산 공원이 빠졌네요. 용두산 공원의 대마도를 향한 대공포는 어릴때 호기심의 대상이였죠.지금은 다 사라졌지만요. 한편의 영사기를 돌리듯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현대판 사진 잘보았습니다. 즐여하셔요.
멋쪄 부러용,~~
즐거운 시간 보내셨군요
추억의 부산 가보구싶네요
멋진사진 잘보구갑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셨네요♡
내고향 부산, 청마님 덕분에 오랜만에 취옹정님 얼굴도 보고….….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