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왜 전쟁을 피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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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제 2년되었다. 이 전쟁을 지켜보면서 내내 드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왜 피할 수도 있었을 전쟁에 뛰어들었을까'이다. 그것도 러시아 같은 군사대국과 말이다. 이 질문 속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동기는 물론 현재 처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고민이 함께 담겨 있다.
물론 전쟁은 한두 가지 이유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확장이다.
2차대전 후 냉전 시대 내내 미국과 소련은 군사동맹체인 나토와 WTO, 즉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만들어 충돌해왔다. 소련이 서진하자 이를 막기 위해 미국과 서유럽이 나토를 만들었고, 이에 대항하고자 소련과 동유럽이
는 동쪽으로 확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나토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소련이 해체되는 혼란을 틈타 과거 소련의 동맹국이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 이어 급기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까지 나토에 편입시켰다.
이 사건은 러시아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발트 3국은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모스크바와 함께 러시아의 양대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턱밑까지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이보다 훨씬 심각한 건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오래전부터 '유럽의 빵 바구니'라고 불리던 나라였다. 미국 못지않게 비옥한 토지를 많이 가진 땅이다. 문제는 평지가 대부분이라 적의 침공을 견제할 자연장애물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몽골, 나폴레옹, 히틀러가 모두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을 통해 밀려들어 왔다. 러시아로선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다.
그런 우크라이나를 2008년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가 나토 가입을 추진하고 나서자 러시아는 발칵 뒤집혔다. 우크라이나가 나토가 된다는 건 러시아 남부의 주요 도시인 볼고그라드에 미국의 탱크가 반나절 만에 닿을 수 있다는뜻이다. 더 심각한 건 미국의 미사일이 단 5분 만에 모스크바에 떨어진다는 뜻이니 러시아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건 1960년대 러시아의 쿠바 미사일 배치 때 미국이 느꼈던 위기감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모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이 불러온 것이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러시아는 우선 흑해함대 기지가 있는 크림반도를 병합해 부동항부터 챙겼다. 소련 연방 시절에 행정 편의상 우크라이나 영토로 두었을 뿐 역사적으로 러시아 소유인 곳이다.
이에 자극받은 친러 성향의 돈바스 지역 주민이 분리독립에 나섰다. 이에 우크라이나 극우 민병대가 돈바스의 러시아인들을 학살했고,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지원에 나서면서 사실상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급기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나토와 합동 군사훈련을 벌이면서 결국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사실 이 사태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에 조지 케넌이라는 외교관이자 정치가가 있었다. 미·소냉전 시대를 이끈 주역으로 러시아를 봉쇄하되 나토를 확장해선 안 된다고 한 인물이다. 나토 확장은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국수주의를 가져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의 혜안은 들어맞았다. 조지 케넌이 걱정하던 사태를 지금 우크라이나가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국제적인 역학 관계만으로 이 전쟁을 진단한다면 우크라이나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전쟁을 시작한 사람이 우크라이나 국민이다. 정치인의 무능과 부패에 신물 난 우크라이나인들은 아예 정치와 무관한 코미디언인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정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코미디로 큰 인기를 얻은 젤렌스키는 프로그램명이었던 <국민의 종〉이라는 당을 결성해 엄청난 지지를 받고 졸지에 진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취임 초만 해도 젤렌스키는 러시아와 전쟁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돈바스 내전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겠다"라며 러시아와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인사 실패까지 겹치면서 70퍼센트였던 지지율이 30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국민은 "푸틴에 굴복하지 말라"라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렇게 되면서 젤렌스키도 국민의 요구에 따라 반러 강경주의자가 되었고, 곧 인기를 회복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반러 정서는 오래된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늘 독립을 원했지만, 러시아가 빵 바구니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는 공산혁명 후 옛 소련에도 편입되었다. 그러다 20세기 초 스탈린의 무리한 식량 징발로 3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참극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인들의 집단 이주로 많은 농민이 집과 농토를 잃기도 했다.
이 일을 겪은 후 우크라이나에는 민족주의가 본격화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도 상당수가 독립을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의 러시아인들은 물론,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되었다. 근래에도 오렌지혁명, 마이단 혁명 등 정권이 친러 성향을 띨 때마다 국민이 나서서 퇴진시키곤 했다. 얼마 전의 여론조사에서도 우크라이나인들은 6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와의 협상을 반대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에 싸우지 않으면 또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라는 게 이 전쟁을 지지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국민적인 결기와 달리 우크라이나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다. 우선 2024년 1월 우크라이나 당국이 발표한 군 사망자만 해도 4만2,000명이다. 여기에 민간 희생자가 1만여 명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추산은 좀 다르다. 2023년 8월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군의 사망자가 7만여명, 부상자가 10만 명이 넘는다. 여기에 국내외 난민이 무려 1,000만 명이다.
경제적인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전쟁 후 우크라이나의 GDP는 30퍼센트 이상 줄었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지금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의 향후 재건 비용만 5,000억 달러다. 가난한 이 나라에서 마련하기 쉽지 않은 돈이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로 인구가 줄고 있는데 대량 난민으로 인구마저 급감하게 되었으니 성장 잠재력마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전쟁 장기화에 피로를 느낀 서방의 지원도 시들해지고 있다. 초조해진 젤렌스키의 잇단 말실수로 폴란드같은 열성 후원국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군사 지원에 반대하는 트럼프가 다음 대선에서 재집권하는 것이다. 서방의 지원 없이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을 계속하는 건 불가능하다.
러시아의 침략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전쟁 직전 우크라이나 정부의 행동과 결정에도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정말 많다. 서방 세계는 일찌감치 러시아의 침공을 우크라이나에 경고해왔다. 그럼에도 젤렌스키는 이를 무시하고 러시아를 계속 도발했다.
러시아의 흑해함대 앞에서 나토와 합동 군사훈련을 했고, 외교 관례를 무시한 채 푸틴을 적이라고 수차례 직격하는가 하면, 러시아가 극도로 우려하는 문제임을 뻔히 알면서도 2024년까지 나토 가입을 마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미국과 나토가 파병은 없다고 누차 확언했음에도 이렇게 도발한 것은 마치 자살과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토 중심국들은 이미 이런 점을 우려해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꺼려왔다. 나토 규정상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모두 참전해야 하는데 상대가 러시아라면 그건 3차대전까지도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나토 회원국들은 대부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완충지대로 남아 있길 원했다. 그건 누구보다 러시아가 원하는 것이었다.
많은 국제 전문가는 이미 우크라이나 정부에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균형 외교를 권해왔다. 어느 한쪽에만 붙는건 파멸을 초래한다는 경고였다. 프랑스는 아예 핀란드 모델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2차대전 후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중립을 지키고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핀란드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러시아가 하루 만에 우크라이나 수도를 포위할 정도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를 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쟁의 방아쇠는 한 번 당겨지면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전쟁에는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전쟁터가 자국이라면 모든 게 폐허가 되니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국민의 분노를 푸는 것 외에 이 전쟁으로 우크라이나가 얻을 실익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인명피해와 경제 손실 외에 안보도 마찬가지다. 이기면 보복이 두렵고, 지면 영토한쪽을 떼줘야 한다. 공짜 점심이 없는 것처럼 공짜 전쟁도 없다. 전쟁을 대부분 외세에 의존해 치르고 있으니 머지않아 외세의 청구서가 날아들 것이다. 앞으로의 안보와 재건도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테니 누군가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허술한 전쟁 준비와 애초부터 존재하던 양국 간의 국력차를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누가 봐도 선전 중이다. 그만큼 러시아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경험 없는 대통령치곤 젤렌스키도 기대 이상으로 전쟁을 잘 이끌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우크라이나의 한계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제 문제 전문가, 중립을 권했던 서방의 조언 그룹, 우크라이나의 야당, 해외를 떠도는 난민, 전쟁터인 동부지역주민, 징집 대상인 젊은 층 등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왜 피할 수도 있는 전쟁에 뛰어들었는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