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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 코리아 원문보기 글쓴이: 죤.웨슬리
R.A. 토레이 성령론
1. 서론
1.1. 연구의 동기와 목적
21세기의 초반을 넘고 있는 현대의 교회들은 오랜 전통적인 교파들의 교세가 줄어드는 가운데,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이른바 완전주의(perfectionism)와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 이 두 가지 운동의 현저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지나간 몇 십년간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현대교회사가 배본철 교수가 지적한 대로 금세기 동안의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큰 관심거리 중의 하나는 전통적인 교파들 속에서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의 급속한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로만 캐톨릭을 포함하여 실제적으로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에서 오순절적 성령운동의 유산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렇다면 오순절적 성령운동의 교회사적 위치는 어디이며 또 그 역사적 가치는 어떤 점에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20세기 오순절운동이 19세기 성결운동에 직결된 운동이라면 과연 그 연장선상의 모티브가 되어 개신교 전체 성령운동사에 대한 분석적, 평가적인 시도는 성령운동 이론적인 근저를 제공한 R.A. Torrey에 대한 성령신학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성령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9세기 미국의 근대 복음주의 성령론이 끼친 영향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 없다.2) 이러한 의미에서 19세기 성령운동을 주도했던 토레이의 신학에 관한 배경을 살펴 보고자한다.
성령님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하며 우리는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요, 신앙 생활에서도 큰 유익을 줄 뿐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데 유익을 준다. 즉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령은 신자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고 지속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주나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므로 피상적인 지식 가운데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20세기에 밀어닥친 최대의 충격파인 오순절 운동으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기형적 이해와 논쟁과 혼란의 와중으로 들어 가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은 많은 혼란에 부딪히고 있다.
이런 성령에 대한 여러 해석은 무엇보다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적인 문제의 신학적인 근본을 제공한 토레이의 성령신학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고 그의 이론의 주장과 개선 및 계승애야 할 부분을 정리하며 본 논문을 마무리 하고자한다.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연구의 방법은 토레이의 성령신학에 대한 주장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가장 민감한 부분 성경에 대한 이해를 한 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것을 토대로 오순절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상반된 견해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유로 본 연구의 범위는 토레이의 사역의 중심이 된 중생과 성령세례의 관계를 중심으로 글을 살펴보고자 하며 이에 대한 성령신학의 근간의 바통을 이어받은 오순절 계통의 신학적인 현상과 이에 대한 개혁신학적인 입장에서 개선 및 계승 발전해야 할 성령신학의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2. R.A. 토레이의 성령론
우리나라의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개혁파 교회 내에는 신학적인 면과 목회적인 면에 있어서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분명한 이질감이 생기게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을 받아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목회적으로 볼 때는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가옥명의 성령론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중생과는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또한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서 있는 외국 목회자들의 저술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3)
개혁파 계통의 인물들, 특히 케직(Keswick) 계통의 지도자인 머레이(Andrew Murray), 그리고 무디(D. L. Moody)와 함께 동역했던 토레이(R. A. Torrey)의 성령론 관계 서적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 성령운동과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고, 또 뒤를 이어 로이드존즈(D. M. Lloyd-Jones)의 성령론이 또한 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모두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케직 운동4)의 지도자로서 19세기 말 영미의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머레이의 경건서적이 한국 교계에 여러 권 번역되었다. 그의 글은 성결교회 <활천>에도 창간호가 나온 1922년부터 “신유”를 비롯한 여러 편의 설교가 연재되어 실렸다. 그의 성령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강조점을 따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를 강하게 지녔으며, 특별히 그가 지닌 성령세례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통치로서의 성령세례’에 있다.
머레이는 성령세례가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고 영광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거듭난 신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신자의 믿음을 통하여 명확한 성령세례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을 계승한 로이드존즈가 한국교회에 끼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그는 누구든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데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한 성령세례의 체험은 오순절 날 그러했듯이 여러 은사들을 동반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있으며 매번 정확히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 동반하는 은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가변적인 요소들이라고 보았다.5)
이러한 역사적인 면을 볼때 19세기 케즈윅 사경회는 근대 교회의 성령사역에 있어서 매우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수 있다.
19세기 케즈윅 사경회를 주도한 무디, 토레이, A.B. Simpson는 성령의 능력과 사역에 대해서 근대 교회사에 분명한 이정표를 긋는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동일한 선상에서 사역을 했던 토레이 성령론의 가장 주요한논리가 중생 이후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에 대한 이정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의 여향을 받고 오순절 계통의 신학이 발전하고 있으면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교회 성장을 이루는 교단으로 세워지고 있다. 그래서 토레이의 성령론이 교회 성장면에서만 보더라도(비록 지금 우리한국교회의 성장이 퇴보되는 위기상황에서만 보더라도) 우리의 흥미 이상의 주요한 관심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토레이가 주장하는 성령론의 근저를 살펴보고 우리가 얻을 소득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2.1. 토레이의 성령의 인격성1)
2.1.1. 성령님은 인격이시다
2.1.1.1. 성령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은 사람의 지정의를 통해서 성령님의 존재를 알게 하신다
2.1.1.2. 성령님은(고전 2:10절을 인용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2.2. 토레이의 성령 세례에 대한 주장
2.2.1. 성령 세례의 본질
2.2.2. 성령세례는 사람이 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역력한 경험이다
토레이는 성령세례를 받은 개인 적인 근거에 대해서 “ 어떤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물어보고 그가 확신에 차있으며 겸손히 ‘ 받았다 ’라고 대답하는지 보라고 했다. 2)
그렇다면 아직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주의 일꾼으로 되기에는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는 주장이라면 그가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의 확신이 진실된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본인은 오랜 동안 교회 생활을 하던 주요 직분자가 다른 종교로 돌아서버리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교회를 떠나는 일을 종종 본적이 있다. 그들도 분명히 확신에 차서 성령 세례를 받은 자라고 했던 것이다.
2.2.3. 성령세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서 하여 주시는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3)
토레이는 사도행전 1:5에 근거해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사도들이 아직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지만, 그 이전까지 사도들은 거듭났었기에 성령세례와 중생(거듭남)은 분명한 시간적인 차이와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토레이는 사도행전 8장에 있는 사마리아인들 중에서 거듭난 사람이 있었지만 빌립이 세례를 주고서야 세례를 받은 근거를 들며 성령세례와 중생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 거듭난 사람은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구원 받는 것만으로는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고 주장하고 있다.4)
토레이는 성령세례의 주요 목적이 하나님의 사업, 즉 전도와 봉사에 그 핵심적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성령관이 당대 무디와 같은 전도자들과 전도사역에 집중하게 하는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
성령 세례의 목적인 전도와 봉사에 있다면 꼭 전도하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전도와 봉사에 대한 열심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가능하지만 성령 세례의 결과가 교회내 전도와 봉사에 그 모든 역량이 집중된다면 대 사회적인 활동의 영역은 과연 어떻게 참여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지 2005년도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 시대에서 바라보는 시대적인 문제라고 판단해야 할까?
2.2.4. 성령의 세례는 주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토레이는 “ 성령 세례의 근본 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성령 세례의 목적이 이 곳에 있음을 기뻐한다 ” 고 했다.
토레이는 성령 세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의 사업에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업의 범위가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토레이가 주장하는 하나님 사업의 범위는 전도와 교회 안에서의 헌신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5)
2.3. 성령 세례의 결과
2.3.1. 성령 세례의 결과로 집약할 수 있는 말은 ‘ 권능 ’이다.
사도행전 1:8에 의해서 “ 누구든지 성령 세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다. ...... 그 사람은 반드시 그의 생활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레이는 권능에 있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고린도 전서 12장에 있는 은사의 모양처럼 다른 것이라고 한다. 6)
그는 권능을 해석하는 도중 방언에 관한 내용을 해석하면서 웨슬레, 피니, 무디의 간증을 듣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분들처럼 방언을 받는 다는 오해에 빠질 뻔 했으나 은사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 날 수 있음을 말하는 성경에 근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7)
2.4. 성령 세례의 필요성
토레이는 성령 세례란 받고 안 받은 것을 알 수 있는 분명한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거듭남과는 다른 그 윗 자리에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언제나 주님을 중시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주요한 목적이 증거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에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권능(=은사)을 부여 받음으로 그것을 반드시 활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2.4.1.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의 자격
토레이는 누가복음 24장 45~49절을 인용하여 “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 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 성령의 세례를 받고 확신 할때까지 결코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는 “ 여러분이나 나같이 평범한 사람으로 성령 세례를 받아 이를 체험하지 않고 복음 전도 사업을 착수 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고 주장한다.8) 그는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할 지라도 성령세례를 경험하지 않은 자는 결코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하고 있다.
2.4.2. 누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토레이는 성령 세례는 모든 믿는 자들의 유업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다 성령 세례의 자기 유업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유업을 구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성령 세례를 유업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2.4.3. 성령세례론 유형 분석9)
케직 사경회를 통해서 영향력을 끼쳤던 토레이와 당시 성령론자들의 유형이 어떠했고 한국교회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왔는지 배본철 교수의 글을 참고해 보자.
현재까지도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주장하는 이들의 신학적 계보도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 성령세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의 과정을 통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성령세례론의 여섯 가지 유형을 정리할 수 있었다.
2.4.3.1.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핵심을 둔 성령세례론은 주로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한 특색이라고 본다. 마한(Asa Mahan)은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봉사와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능력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피니(Charles G. Finney)도 역시 성령세례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인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초기 한국교회에 파송되었던 영미 선교사들에게 좀더 친숙했던 성령세례론의 영향은 무디(Dwight L. Moody)와 그의 동역자인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의 사역을 통해서도 많이 나타났다. 무디나 토레이는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0년대 이전 뿐 아니라 이후에도 한국 개혁파 신학계에서는 성령론에서 있어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하나의 큰 노선이 있었다. 여기에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를 강조하여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설교가로는 로이드존스(D. M. Lloyd-Jones)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이 신자들로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인한을 필두로 하고 차영배, 박영선, 안영복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의 학풍은 일반적으로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를 지지하고 있다.
2.4.3.2.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웨슬리(John Wesley)로부터 출발한 완전 성화의 교리는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정결하게 씻음을 받게 되고, 이 원동력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승리하는 삶을 가능케 해준다고 하였다. 이같은 전통적 입장에 새로운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선구자인 팔머(Phoebe Palmer)를 통해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가 많이 부가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결은 곧 능력”이라고 했으며, “정화와 능력은 동일한 것”이라고 했다.
이 성령세례 유형은 성결교회 내에서 김상준, 이명직, 김응조 등의 저술들, 그리고 <활천>, <성결> 등의 정기간행물들을 통하여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현재 중생 이후의 ‘제 이차적 축복’(the Second Blessing)으로서의 성결 혹은 성령세례, ‘죄성제거설’로서의 성결론, 그리고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관념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구세군, 나사렛성결교회 등, 한국의 웨슬리안-성결 그룹들의 공식적인 교리로서 채택되어 있다.
2.4.3.3.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이 노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에 근거를 두었지만, 무디나 토레이와는 달리,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에 의한 전인적 통치에 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보드맨(William E. Boardman)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하고 난 후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의식적인 증거’를 얻게 되는데, 이를 그는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이 외에도 마이어(F. B. Meyer), 머레이(Andrew Murray)와 같은 케직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였다. C&MA의 창시자인 심프슨(Albert Benjamin Simpson)도 역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이루어주시는 성결은 성령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오시는 체험이며, 성결의 체험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크리스천의 생활에 능력과 승리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2.4.3.4.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박형룡의 성령론이 <신학지남>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인데, 그는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자 박형룡의 저술을 필두(筆頭)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저술들이 신성종, 김해연, 박형용 등을 통해 한국 신학계에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성령론 노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외국 신학자들로는 우선 핫지(Charles Hodge)나 워필드(B. B. Warfield)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성령 은사의 중단성(中斷性)과 중생과 연관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카이퍼(Abraham Kuiper), 개핀(Richard B. Gaffin), 스토트(John R. Stott) 등의 영향도 역시 이 노선에 힘을 주었다. 특히 대중적으로 국내에 큰 영향을 끼친 CCC의 브라이트(Bill Bright)나 부흥사 그래함(Billy Graham)도 역시 명확한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2.4.3.5.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
파함(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단 하나의 증거라고 최초로 강조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1901년 Topeka와 1906년 시무어(W. J. Seymour)가 이끈 Azusa 거리의 부흥에서는 물론, 현재까지 방언을 성령세례와 직결시키는 전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 신앙의 전 세계적 확산을 가져오게 하였다. 국내에는 하나님의성회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전통 오순절주의의 대표적 교단이다. 이 노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저자로서는 조용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일어난 은사갱신운동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권장하지만, 그 강도가 전통 오순절주의보다는 선택적이다.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세릴(John L. Sherill), 베네트(Dennis J. Bennett), 맥너트(Francis MacNutt) 등의 저서들이 번역되어 일반 독자들 사이에 친숙하게 소개되었는데, 이들의 저서에서는 방언을 거의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2.4.3.6. 중생=성령세례, 이후 은사적 성령충만
일반적으로 ‘제 3의 물결’에서는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 안에서의 세례받아지는 것’(being baptized in the Holy Spirit)이라는 용어 대신, ‘성령충만’(filled with Holy Spirit) 또는 ‘성령에 의한 능력의 덧입힘’(empowered by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 이유는 제 3의 물결 운동가들은 대부분 회심과 성령세례가 동시적 경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생하게 될 때 성령께서 내주하시지만, 저절로 그분의 능력과 은사들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노선은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개혁주의신학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크게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신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앞으로 ‘제 3의 물결’에 대한 개혁주의신학의 평가와 적용이 어떻게 진전될지 기대가 된다. ‘제 3의 물결’은 국내에 잘 알려진 윔버(John Wimber), 와그너(Peter Wagner), 크래프트(Charles H. Craft), 힌(Benny Hynn) 등의 사역과 저서의 영향으로 현재 많은 독자층과 지지자들을 얻고 있다.
3. 중생과 성령 세례 오순절과 성령 세례와의 관계
토레이와 오순절 신학은 어떤 상관이 있는가? 토레이의 성령론은 근대 오순절 신학의 토대가 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오순절 운동은 몬타누스주의, 중세 신비주의 운동, 재침례파,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으로는 17 -18세기에 일어난 독일, 영국, 및 미국 등지의 부흥운동 (Revival Movements)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웨슬리, 피니 (Charles Finney) 및 토레이 (R.A.Torrey) 등의 지도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즉 웨슬레에 의해 시작된 영국의 감리교 운동이 19세기에 미국의 피니와 무디에 의해 부흥운동 혹은 성결 운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20세기의 오순절 운동으로 번져갔다고 볼 수 있다.1)
오순절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강조점 중의 하나는 회심 이후의 경험 즉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인데, 이러한 견해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리의 신학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중생을 가져오는 성령의 역사에 이은 성령의 2차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령의 2 차적인 사역이야말로 인간의 죄된 욕망을 뿌리채 뽑고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갖게 하여 준다고 가르쳤다. 그 후에 챨스 피니 (Charles Finney), 토레이 (R.A.Torrey), 심슨 (A.B. Simpson), 고든 (A.J.Gorden)과 같은 부흥운동의 선구자들이 이와 유사한 견해를 주장하였다. 특별히 피니의 조직신학 강의서(13) 는 오늘날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신학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는 칭의 보다 성화를 중시하였고, 특별히 성령 세례의 필요성을 많이 강조하여 오순절 성령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2)
구체적인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순절 운동은 기존의 성도들 가운데 성령을 역사를 보다 더 많이 체험코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 시초는 1896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즉 미국 남동부에서 조용히 시작이 되어, 1901년에는 미국 중서부에 해당하는 캔사스 지역으로 번져갔고, 급기야는 미국 서부 로스엔젤레스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에 결정적인 불을 붙인 주요인물은 윌리암 세이무어 (William J. Seymour)였는데, 그가 1906년 4월 9일 어떤 침례교도들의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에서 방언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연상케 하는 모임이 되었다. 이 모임은 곧 미국 LA 근교의 아주사 거리 (Azusa Street) 312번지의 감리교회당에서 정기적으로 모이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인디아나폴리스 주로 건너가면서 전 미국으로 메아리쳤고, 마침내 시카고에서 브라질로 그 불길이 번져갔다. 그 후에 노르웨이의 감리교 목사인 바랏 (Barratt)이 이 운동에 큰 감동을 받고 노르웨이로 돌아가 오순절 운동을 일으켰고, 이것이 영국, 독일, 스웨덴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 세대 (약 30년) 안에 오순절 운동은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3)
3.1.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다. 특히 날카롭게 신학적 대립을 하고 있는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성령세례에 관한 학설들은 먼저 중생시기를 기점으로 양분됨을 알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주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 오순절 전에 예수를 믿고 중생한 후 그 다음 단계로 성령세례를 받았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면에서 토레이는 가장 최초로 성령세례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정립한 학자이자 목회자라고 볼 수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보다 이 성령의 세례라는 한 개의 사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되는 사실은 이 성령으로 받는 세례는 그 받는 자 스스로가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잇는 뚜렷한 체험을 가진 것이다. 이른바 중생과는 명확히 구분되고 분리되는 성령의 역사중의 하나이다. 성령의 세례는 언제나 복음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과 항상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가 무엇을 위함인지 주목해 본다면 성령의 세례는 능력과 봉사의 능력을 부여해 준다"고 했다.
영국의 오순절주의자 바삼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결과 방언이 나타나 여러 세대에서 기독교 부흥을 일으켰다"고 강조하면서 "성령세례는 중생회심에 따라오는 두번째 은혜의 역사"라고 했다.
D.M.로이드 죤스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 하며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성령세례가 중생할 때에 모든 사람에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을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분명히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중생은 무의식적이며 비체험적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체험적이다. 사도행전 2장을 보라. 그것은 체험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 체험적이어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그들에게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 말했다.4)
한국의 대표적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도 "중생과 성령세례는 동일한 체험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체험이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일정한 기간을 두고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개별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 주장하였다.
성령세례에 대한 웨슬레안의 견해도 중생 후 2차적 체험을 말하는 점에서 오순절 주의의 주장과 동일하다. 웨슬레는 이차적인 성결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부르는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하였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과 웨슬레안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오순절 전에 이미 중생했다고 믿는 점과 사도행전 3장과 19장, 그리고 중생과 성령세례의 목적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세례를 중생 후 이차적으로 받는 어떤 특별한 체험으로 이해하고 성령세례의 영속성을 주장했다.
이들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장단점이 있다.
장점으로서 그들은 현재 실현된 실재로서의 성령의 임재를 강조한다. 성령의 실재가 성도들의 생활 가운데서 큰 역할을 감당하며, 성도들은 바로 성령 안에 있으며 항상 성령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이다.
단점으로는 첫째, 성령의 세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동일시 생각 한다. 이 성령의 능력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성령세례를 받은 체험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세례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성령의 세례는 두 번째 축복으로써 회개 이후에 경험한다는 것이다.
결국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의 문제점은 전체 성경보다 어떤 특별한 성구에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조건을 제시함으로 성령을 예수믿는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노력으로 받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3.2.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하게 보는 견해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스토트는 성령의 세례를 성도가 거듭남에 있어서 최초적 은사요 보편적 은혜라고 하면서 물세례는 [구원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그 [실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을 터인데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은 성령세례의 최초성에 맞지 않는 예외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5)
달라스 신학교 학장이며 조직신학 교수인 죤 월부어드 박사는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뚜렷한 특징이다.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순간적이고 동시적인 역사이며 세례는 가끔 성령의 충만과 동일시되고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박윤선 박사는 "사도행전 주석"에서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할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성령세례라고 정의하였다.6)
성경으로 돌아가서 요3:5의 말씀을 보면 중생시키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사역이다. 고전12:3을 보면 이 말씀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고백도 마찬가지이다.
이로 보건대 어떤 별스러운 은사가 없다 하더라도 '예수를 주시라' 믿는 믿음은 성령을 받은 가장 좋은 증거이다.
이러한 논증을 통해 볼 때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토레이(이를 바탕으로 하는 오순절의 성령체험의 신학)의 태도는 성격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먼저 구원받고 나중에 성령세례 받은 것은 오순절 전후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이지 신약시대에 계속되는 일반적인 규범이 되는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생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문제를 신약시대와 그 다음에 온 시대와를 구분해서 생각함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이 문제는 다음의 오순절 사건을 다룰 때 더 깊이 이야기하겠다. 결론적으로 오순절 이전에 이미 중생한 제자들에 있어서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단계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나 오순절 이후 오늘의 우리에게는 구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즉 오순절 이후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중생한 신자는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3.3. 오순절 사건과 성령세례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앞에서 이야기했던 중생과의 관계, 그리고 후에 이야기 할 성령충만과의 관계가 결정된다. 과연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가 첫번째 체험이냐, 아니면 중생 후의 두 번째 체험이냐를 논하게 될 텐데 앞의 내용과 반복을 피하는 방향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3.3.1. 오순절과 성령세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세례요한의 메세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례요한의 사역과 오순절이 연관되어지는 것은 예언과 성취로 나타난다. 세례요한에 의하면 메시야의 성령의 사역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세례요한의 예언는 오순절에 성취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성취하신 사역의 대표로서 주어진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행2장)에서 보면 성령세례는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세례 사건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부활,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세례 사건도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개인 성도의 경험의 한 모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해야 한다.
고전15:45에서 바울사도가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말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살려주는 영은 곧 성령을 말함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구절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하며 오순절 사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첫째는 오순절 사건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후에"를 "말세에"로 고쳐 오순절 사건이 종말론적 사건임을 명백히 하였다(행2:14-21).둘째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강조하고 오순절 사건과의 관계를 설명한다(행2:22-36).
오순절 성령세례는 구약의 예언과 세례요한의 예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보내주심의 약속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인격으로 강림하여 모든 사람위에 임하여 오심으로 구속사의 전경륜이 이제 단번에 성취된 것이다.
3.3.2.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에서 그 신학적 중심을 찾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순절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첫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방언으로 말하게 한 것을 의미한다.
오순절주의에 있어서 오순절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반드시 사도행전2:4절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하면 오순절은 근본적으로 특별한 방법으로의 성령체험이다. 회개 이후에 성령충만하게 되고 그 증거로서 처음에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나타나며 절대 복종과 믿음이라는 충만 조건을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오순절주의자들은 체험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방언만이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라고 한다. 윌리암 콜드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때에 우리들의 혀를 지배하고 있다는 표시로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지체 가운데 가장 지배하기 어려운 혀를 지배하시게 된다면 우리들의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이 오순절 성령세례에 대해 말할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성령을 충만하게 영접하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자 스킵스텔은 성령세례는 "한 개인이 초자연적으로, 체험적으로, 그리고 완전한 의식 속에서 성령의 능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고 정의했다. 이 말에서 보듯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분명히 본인이 알 수 있는 체험으로써 초월적 존재인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고(고후1:21),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며(엡1:13), 성령세례의 목적은 영생을 위한 중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능력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성령세례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첫째, 일반적으로 오순절 사건은 중생과 분명히 다른 것이며 중생 이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 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징조가 우선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로, 성령세례를 열렬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후속적인 성령세례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7개의 성경본문들 (행2:1-4,2:38,8:4-25,9:1-19,10:-11:, 19:1-7;막1:9-11)은 중생에 뒤이어 일어나거나, 중생과는 다른 체험으로서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경의 바르지 못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가장 중요한 구절인 행19장의 에베소 사건과 행8장의 사마리아 사건을 보기로 하자.
먼저 행19장의 에베소 사건은 에베소 교인들이 세례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세례요한이 예언한 대로(눅3:16)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일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바울의 질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이해하듯이 믿고 난 뒤에 둘째번 축복이 있는데 그 축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은 완벽히 믿는데 실패해서 믿기만 하고 성령세례를 못받은 그런 사람이 아니냐 하는 그런 질문이 아닌 것이다.
행 8장의 사마리아 사건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자들에 의하면 사마리아 교인들이 믿은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나 이 사건은 중생한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은 유대기독교인과 사마리아 기독교인 사이의 무서운 분쟁을 막기 위하여 사도의 안수로써 그들의 회심이 순수함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의 물을 주는 것을 보류하셨다고 가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7)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일정한 전제조건이 충족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3.4.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는 달리 오순절 성령세례를 "첫번째 체험"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오순절 성령세례를 두번째 체험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인, 오순절 세례전에 중생한 제자들의 문제를 주로 다루기로 한다.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세례를 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구절은 고전12:13인데, 이 구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기에 넘어가기로 한다.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존 스토트는 중생후에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중생한 120명과, 비신자로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은 3000명의 두 집단이 있는데 오늘날의 기준은 3000명의 집단이고,120명의 체험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며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은 오래전에 끝났다고 말한다. 즉 오순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결과로서의 성령강림이며 예수의 구속을 위한 삶의 마지막 사건이라고 말한다.
엉거 교수는 제자들의 문제를 '시대전환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즉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과한 구약의 성도들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러한 시대전환적 현상은 오늘날에는 일어날 수 없으며 그 당시에만 일어났던 과도기적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성경과 두 견해를 통해 볼 때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이 보다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문제는 그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구약(욜2:28;겔36:26)의 성취인 것이다.
둘째,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단순한 충만의 사건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에 이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새롭게 열릴 성령시대, 교회시대의 출발점인 것이다.
4. 토레이 성령론의 계승과 개선
4.1. 토레이 성령론의 계승
4.1.1. 복음전도 사역과 교회 섬김에 대한 열심을 품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4.1.2. 성령 충만을 강조함으로써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요구함으로써 성결의 삶을 강조하게 되었다.
4.1.3. 현재 실재로서의 성령의 임재를 강조한다.
성령의 실재가 성도들의 생활 가운데서 큰 역할을 감당하며, 성도들은 바로 성령 안에 있으며 항상 성령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이다.
4.2. 토레이 성령론의 개선
4.2.1. 중생과 성령세례의 명확한 구분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구원받은 이후 다시 믿음보다 성령 세례를 의지적으로 간구하고 받아야 만하는 행위구원의 길을 열어 두게 했다.
4.2.2. 성령 세례이후 그 결과로 복음전도와 교회 내 봉사에 반드시 참여케 해서 성도의 신앙을 인위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선을 그어 버렸다.
그렇다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성도가 전도나 봉사를 하지 않거나 게으를 경우 있을 수 있는 성도간의 정죄는 누가 책임 질 것인가?
4.2.3. 성령의 세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동일시 생각 한다.
이 성령의 능력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4.2.4. 성령의 역사에 관한 특별한 성구에 집착해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왜곡 시킬 오해를 야기 시킨 것이다.
5. 개혁주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의 성령 세례의 견해들
5.1.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
성령세례란 무엇일까?
성경 가운데 '성령세례'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한국어로 성령세례라는 말은 영어의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번역한 말이다.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는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 라는 의미이 다.
올바른 성령세례의 의미는 언약에 참가함을 말한다. 고전12:13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했는데, 이를 보면 성령의 세례는 불신자로서 회개하고 믿어 계약 백성의 단체, 즉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말한다.
5.2. 성령세례의 성경적 이해
성령세례는 신구약을 통 털어서 성령세례와 연관지을 수 있는 말이 7회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구는 모두 세례요한의 예언적 언급이고(마3:11;막1:8;눅3:16;요1:33),한번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행1:5),또 한 번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고(행11:16),마지막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고전12:13).
5.3. 복음서의 성령세례
성령세례에 관한 연구는 세례요한의 말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성령세례에 대하여 마3:11에 세례 요한이 최초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막1:8,눅3:16,요1:33에 나타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이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의 사역이 될 것을 증거하며 오순절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문제되는 것은 불과 성령의 세례가 한 세례인가 두 세례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할 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말씀은 두 세례를 가리키기 보다는 한 세례의 두 국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전치사가 성령과 불 둘 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세례를 받는 사람들인 '너희들'이 요한의 세례의 대상도 되고 예수님의 세례의 대상도 되는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두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세례의 두 국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 받은 자의 죄악이 그것은 불로써 무엇을 태워서 깨끗하게 함과 갔다.
5.4. 사도행전의 성령세례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성령 부어주심과 교회를 통하여 계속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지상 사역면을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천상에서 계속 일하심을 보이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머리와 인도자이신 예수님의 새로운 시작을 뜻하고 있다. 바로 성령세례의 사역인 것이다.
먼저 행1:5을 보면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4-8의 강조점은 개인의 믿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원역사에 있음이 분명하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신자의 개인적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교회가 새로운 한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행11:16에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했는데, 사도행전 11장은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일어났던 일을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이다. 그는 15절에서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임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처음 일어난 사건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다.
5.5.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
고전12:13은 연구해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오순절에 관한 언급일리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도 고린도 사람들도 그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사람들은 다같이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는 축복에는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고린도에 나타난 바울의 메세지의 의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되게 한는 것이다. 바울은 이 한 절에서 "하나"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사용함으로써 고린도인들이 하나되어야 함을 좀더 깊이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 한 성령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 성령은 둘이 아니며 그의 직임도 두 가지가 아니다.
둘째로, 모든 크리스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이 구절에 나오는 성령세례는 큰 결합요소이지 결코 분리요소가 아니다. 바울이 쓴 목적은 분리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성령의 세례는 몇몇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부차적이고 결과적인 체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최초적인 체험이라는 결론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근거들을 통해서 성경의 세례는 선물이며 또한 최초적인 축복이며 주를 믿는 자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6. 결과
6.1. 토레이가 미친 신학적인 영향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다. 심지어 그의 아들 토리에 2세와 토레이 3세는 중국과 한국에서 선교사로 여전히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토레이는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세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집중하였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 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세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다. 그는 성령세례가 반드시 이적을 행하게끔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증인되게끔 하는 권능을 주시는 일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가장 주목할만한 결과는 사람을 뉘우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는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의 성령 세례론은 또한 성결 중심도 아니다. 그는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 성령세례 자체의 목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은 현저하게 성결과는 직결되지 않는 ‘봉사 중심의 능력’에 치중하고 있음을 본다. 은사의 나타남도 아니요 성결의 체험도 아니라, 오직 복음전도의 능력을 부여 받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세례론은 ‘받았으니 이제 전하라’는 복음전도의 역동성을 뚜렷이 지닌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령의 인침(sealing)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데 있는데, 그의 성령세례론에는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와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특이함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레이의 신학적 배경은 한국 오순절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용기 목사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조용기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구별하여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보고 있으며, 방언을 성령세례의 표적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간된 “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의하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의 역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중생의 수단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중생의 결과로 보고 있다.2)
하나님의 성회 신학대학원의 윌리암 멘지즈(William W. Men- zies) 교수는 오순절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성령세례라 불리는 능력부여의 체험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표적을 동반함으로서 증거 되어야 함을 믿는다. 이 체험은 전통적인 성결교회의 '제 2의 축복'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3)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토레이의 신학은 오순절 신학의 기초가 되어 분명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즉 토레이(R. A. Torrey)는 성령세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세 가지로 대답하였다.
첫째, 성령세례는 그것을 받았다는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구분되며,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 주시는 역사이다.
셋째, 성령세례는 권능을 수반하며, 이 권능은 복음의 증거와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4)
토레이는 성령의 씻음과 중생의 새롭게 하심을 성령세례라 하지 않고 성령의 외적 증거인 능력과 은사들을 성령세례라 하였다. 토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거듭난 자들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 임마누엘의 종말론적인 성령의 역사를 차별하여 "성령이 내재하심을 의식치 못할 만큼 계신 것과 충만한 것, 즉 성령세례를 받은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구별하였다. 그는 또 모든 신자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만, 모든 신자가 다 성령세례를 소유한 것은 아니다(8 라고 말함으로서 성령께서 주시는 외적이고 증거적인 또는 일시적인 은사를 내적이고 영구적이며 구원을 성취하시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함께 하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성령세례를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은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성령시대의 독특한 특징이 될 수 없으며, 구약시대와 비교해서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겠다.
오순절 신학에서는 방언 말함을 하나님과 두 번째 만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만남은 회개의 때에, 두 번째 만남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를 성령세례라 부른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체험의 유무는 방언이 증거가 된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두 번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두 번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구원과 중생의 역사보다는 방언 말함을 더 중요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방언을 해야 만이 성령을 받은 것이라 하여 성령의 역사와 내재하심이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6.2. 토레이가 미친 교회 사적인 (특히 개혁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의 진보적인 학자인 김경재 교수는 토레이의 영향에 대해서 오순절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역사 속에서 19세기 말에 구미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된 개신교 교파신학은 그 주류가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되었는데, 19세기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했던 선교신학의 원천은 18-19세기 미국개신교의 대각성 운동이후 줄기차게 지속되어온 영적 부흥운동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웨슬레신학 영향을 받은 감리교 선교사들은 물론이요, 장로교목사들 마져도 머리는 청교도적이고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적 신학으로 훈련되었을지라도 그들의 가슴은 무디( Dwight L.Moody), 토레이(R.A.Torrey), 채프만(J.W. Chapman)등 19세기 부흥운동가들의 성서실재주의, 성령세례, 신유경험, 성결운동, 전도운동등에 의해 강렬하게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5)
한국의 대표적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도 지적하기를 한국에서 개신교가 성공한 이유 중 하나가 19세기 후반 한국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대체로 경건주의자들(Pietists), 심령부흥주의자들(Revivalists), 그리고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의 신앙과 신학이었으며, 그러한 복음주의적, 부흥회적 기질이 한민족의 심성에 맞았다고 서술하고 있다.6) 1907년 한국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성격이나 그 발단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 초기선교사 신학과 신앙의 성격을 잘 반증하는 것이며, 1907년 한국교회 평양 '대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1980년 서울 여의도광장에 초교파연합 부흥집회로 모인 '세계복음화대성회'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대형집회는 '대규모 전도부흥운동'(Mass Evangelistic Reval! Movement)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교회사적 사실들은 한국 개신교가 오순절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또 성공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여러 가지 요인을 고루 갖춘 신앙적 옥토라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6.3. 개혁주의 성령론과 토레이 성령론의 비교 비평
지금까지 토레이의 성령론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나는 토레이의 성령신학적 토대가 케직 사경회를 통해서 당대 복음전도에 열중해야 할 시대적인 상황에서 기인한 요인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토레이의 성령론을 비교 근거하여 현재 개혁주의의 노선을 지지하는 교회들의 견해를 비평해 보면,
첫째로, 체험을 너무 무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고, 오순절로부터도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 신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도외시한다. 오순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원한 대답으로 영적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셋째로, 교회의 영적인 침체이다. 영적고통이 개인의 문제라면 영적침체는 현대교회, 특히 개혁주의의 고민거리이다.
넷째로, 성령세례의 유사개념이다. 오순절주의자의 성령세례의 의미와 유사한 개념, 즉 전통개념의 성령충만보다 더 깊고 뜨거운 영적 체험의 상태를 전통 견해자들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이것을 Stott와 홍정길 목사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설명한다.7) 물론 완전하게 인정은 안하지만 은근히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토레이의 성령론은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을 깨트렸고, 타락되는 교회를 갱생시켰으며 기존 정통 교단의 침체와 무감각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성령론이 끼친 유익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 중생과 성령세례의 명확한 구분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구원받은 이후 다시 믿음보다 성령 세례를 의지적으로 간구하고 받아야 만하는 행위구원의 길을 열어 두게 했다.
둘째, 성령 세례이후 그 결과로 복음전도와 교회 내 봉사에 반드시 참여케 해서 성도의 신앙을 인위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선을 그어 버렸다.
셋째, 성령의 세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동일시 생각 한다. 이 성령의 능력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넷째, 성령의 역사에 관한 특별한 성구에 집착해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왜곡 시킬 오해를 야기 시킨 것이다.
다섯째, 삼위일체 중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다.
여섯째, 체험을 너무 강조하므로 감정에 치우친 신앙생활을 강요할 수 있다.
글을 나오며...
루벤 아처 토레이 3세는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성직자와 사회개혁가로서 험난한 길을 개척해온 대천덕 신부(81)의 본명이다.그의 선조들 역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개척을 했다. 토레이 3세(대천덕 신부)는 1918년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출생해 북경의 미국인 학교에 다니다 15세가 되던 해 아버지 토레이 2세 목사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2년간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공부했다. 이어 미국의 데이비슨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다시 북경에 있는 연경대학에서 교양과목들을 이수한 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영국의 성어거스틴 대학원,하버드대학,연세대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조부는 무디성경학교의 설립자이며 저명한 성령운동가인 토레이 목사.부친은 중국선교사로 한국전쟁 이후 재활사업에 매진한 토레이 목사(3대의 이름이 모두 루벤 아처 토레이로 대천덕 신부는 토레이 3세)다.
나는 신학을 시작했던 1993년 이후로 매년 정기적으로 강원도 하사미리에 있는 예수원을 기도와 안식의 목적으로 다녀 오곤했다. “ 기도가 노동이요 노동이 기도다 ”라는 거대 문구가 대 예배당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토레이 3세의 사역이 절대적인 기도 사역이었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하루 시간의 십일조를 기도로 드리는 조도, 대도, 만도, 그리고 노동을 삶의 모습을 인정하고 손님들에게 당당히 노동 할 것을 요청(^^)하던 그 삶속에서 성령님께서 깊은 산골짝에서 너무도 크고 깊이 임재하신 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끼며 올 때가 많았다.
이러한 예수원 사역이 토레이 3세의 성령론에 의해서 토대로 세워졌음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토레이 3세는 토레이 1세의 영향을 받았음도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토레이 1세는 당대 무디와 함께 복음전도 사역에 충실했던 대 전도자요, 토레이 2세는 중국에서 의족사업을 활발히 벌였던 선교사요, 토레이 3세는 대한민국에서 예수원을 창설하여 신학적인 논쟁을 뒤로 하고서라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산골에서 육신의 깊은 안식과 영적인 채움, 그리고 중보기도를 통한 치열한 영적 전쟁과 삶속에서의 끊임없는 신앙적인 투쟁을 격려하셨던 토레이 가문(家門)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기독 일간지의 이태형 이라는 기자가 토레이 3세를 취재하며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대신부의 이력서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무디성경학교의 설립자이자 저명한 성령운동가인 토레이 목사며 아버지가 중국선교사로 한국전쟁이후 재활사업에 매진한 토레이 목사라는 사실이다. 이같은 신앙적인 분위기속에서 대신부는 자연스레 할아버지로부터 성령운동을 배웠고 아버지로부터는 동양 특히 한국을 느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대신부는 성령운동가라고 볼 수 있다.그는 성령의 외적역사와 내적역사를 동시에 중시한다.동양사상에서 음과 양이 모두 중요하듯 기적으로 표시되는 성령의 외적역사와 열매로 나오는 내적역사가 함께 중요하다는 것이다.성령과 함께 그는 코이노니아를 중시한다.「교제」「사귐」「교통」으로 번역될 수 있는 코이노니아를 통해 나와 하나님,나와 우리와의 관계가 올바로 이뤄 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신부를 성령운동가로만 분류하기는 다소 부족하다.어떤 측면에서 이상주의적 기독교운동가라는 표현이 걸맞기도 하다.그는 행동하는 목회자다.복음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한다.실제로 토지문제에서 대신부는 급진적 이상주의자의 주장을 한다. 그는 토지가 없는 자는 토지를 가진자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면서 토지문제해결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기본이라고 주장한다. 토지세는 올리고 노동세는 받지 말라는 것이 지론이다. 다소 현실과 거리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만과 싱가포르 등 실제로 지키고 있는 나라들이 꽤 있다고 설명한다. 성경이 지주들과 권력자들의 돈으로 번역됐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많이 들어가 있다며 성경재해석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는 『신학은 과학의 여왕』이라고 정의하면서 과학이 실험실에서 치열한 연구 속에 발전하는 것처럼 신학역시 거친 삶의 현장에서 구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원공동체는 다름 아닌 「신학의 실험실」로 젊었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대신부는 한국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에게는 기쁨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것 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요즘 한국크리스천들이 종교는 천국가기위해 존재 하는것 만으로 생각하고 사회문제에 신앙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면서 성경은 천국보다는 생활과 사회문제를 더 많이 거론했다고 설명했다. 십계명도 많은 부분에서 사회문제를 다뤘으며 결코 신앙과 생활은 나눠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론의 대가였던 토레이 3세의 평생의 주요한 사역이 성령과 코이노니아, 토지문제이다. 그가 인생을 걸고 씨름해 온 3대 주제이다. 특히 그의 일생에서 첫번째로 두드러지는 것은 성령에 대한 태도이다. 대천덕 신부는 조부 토레이 목사와 같이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심을 믿고 있다.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선조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일생 동안 성령과 어떤 교제를 했었는지에 관해 자서전을 통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전기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다. 대신부는 성경의 원리와 헨리 조지의 경제이론에 토대를 둔 토지개혁과 세제개혁을 주창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사회개혁가의 면모를 드러내 왔다.`성령파 선교사 가정'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그가 사회개혁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보이지만 이 자서전은 어떻게 이 요소들이 대립되지 않고 통합될 수 있었는 지를 보여 준다.
교회 안에서 신학적인 문제의 논쟁도 주요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켜 대 사회 문제를 근원부터 고쳐보자고 외치면서 토지문제를 적극적인 그 대안으로 소리 높이는 토레이의 삶의 신학은 부동산 문제로 자유로울 수 없어 스스로를 투기의 당사자로 내어 둔 한국 교회 앞에서 크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기도가 노동이요 노동이 기도다 ”
박정우 목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