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국의 유적지 고령 콫 축제장
경북 고령에서 콧축제가 열린다는 명 금자 시인의 권유를 받고 2018년 9월 29일 행랑을 챙겨 길을 떠났다.
금번 여행은 고령군 지자체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거라서 회비 1만원만 내면 가는 거라는 꼬드김에 승락은 했지만 출발지가 서울이고
이른 아침 7시 30분이라니 천안에선 5시 첫차를 타야만 하는 애로를 감수해야만 했다.
지하철 첫차를 타려고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서는 데 공교롭게도 두사람 다 탈이 붙었다.
명 시인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곤역을 치뤘는가 하면,필자는 어둠속에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 정강이를 심하게 다쳤기 때문....
다핼스러운 것은 상처나 피가 나지 않아 괜찮은 줄 알았지만,아픈 통증은 만만치가 않았다.
1호선 전철로 금정역까지 가서 4호선으로 사당역에 가니 예상보다 40분은 빠르게 도착하였다.
사당역에서 함께 가기로 한 일행 22명과 조우하여,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발 시간은 10분이 늦어져 7시 40분,중간에 두차례 휴게소에서 머물고 고령 대가야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11시 40분이었으니 만 4시간을 걸려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박물관 주차장에서 문화해설사를 태우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서 우선 점심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옛촌 갈치'라는 맛집을 추천받아 갈치탕을 먹기로 했다.
제주 은갈치는 1인당 2만원인데 갈치탕은 1만원이었고,갈치가 꽤 많이 들어있어 모두들 흡족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쳤다.
오찬을 마치고 고령 군청에 들려 보고용 사진을 찰칵하고,고령 전통시장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런후 곧 바로 대가야 유적지 박물관과 고분군이 있는 현장으로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현장 체험의 시간이 이어졌다.
휴게소에서 일단 기념 사진 한장을 찍어보았고....
일행이 전체는 수물 두명이었지만, 인연있는 일행은 8명이었다.
류 시호 선생 부부와 서 영창 선생,이 문희 선생등이 자리를 함께하여 쓸쓸하지 않은 여행이 되기도 했다.
오찬회의 시간에.....
고령 군청앞에서 보고용 사진을....
고령 대가야 전통시장에서.....
고령군의 군청 소재지는 대가야읍으로 불리우고 있다.
대가야 박물관 주변으론 수많은 고분군이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 관람은 시간이 없어 생략하였지만, 필자만 잠시 그 곳을 살펴보고 오기도 했다.
대가야 시대의 집과 창고
고령의 불교 문화재
백자탑과 분청자탑
대가야의 건국 신화부터 가야의 역사가 그림으로 전개되어 나온다.
가야국(加耶國)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세웠던 가락국을 비롯하여 6가야가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삼국지』동이전 한조에는 변한 12국이 나온다. 그러한 가야 또는 변한으로 나오는 나라들은 소국들로 대체로 기원전 2세기경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서라벌소국(사로국)이 형성 될 때 소국들을 형성했다고 여겨진다. 낙랑군이 설치된 후 기원전 1세기에는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을 위하여 가야의 소국들이 교역망을 형성하였다. 그 때 가락국이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다. 낙랑군이 소멸된 후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랑세기』와 관련시켜 보면 법흥왕이 가야를 남국과 북국으로 구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남국이라 하였던 가락국(금관가야, 본가야)의 왕들은 신라의 여자들과 혼인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532년 남국의 마지막 왕 구충(구해, 구형)이 신라에 항복할 때 구충의 조부를 제하고 고조부터 구충까지 신라의 여자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한 혼인관계는 구충과 그의 세 아들이 신라에 항복하여 진골신분을 갖는데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한편 북국(대갸야)도 신라와 관계를 가졌다. 561년 이전에 이미 신라에 신속하였으나 561년 경 반란을 일으켜 이사부가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 그 때 『화랑세기』에 나오는 5세 풍월주 사다함이 그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운 바 있다.
가야국의 위치도
가야국은 가야(伽倻:加耶, 伽耶)·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이라고도 한다.
기원 전후 시기에 경상도 해안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소국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3세기경 상호연맹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변한소국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구야국을 중심으로 김해·낙동강 하구·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분포했다. 친신라와 친백제 세력이 공존했는데, 5세기 초 고구려가 백제계를 정벌함으로써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예속되었다.
후기 가야연맹은 구심점이 경상도 내륙지역이었으며 고령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보다 진전된 통합력과 정치력을 발휘했다.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6세기 초 백제에게 패배한 후 급격히 쇠퇴했다.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복속되었고 562년 신라에 의한 대가야국 정벌로 멸망했다.
한때 가야사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이를 식민지배했다고 하는 임나 본부설이 있기도 하고,전기는 김해지역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이, 후기는 고령지역의 대가야가 중심이 되었다고 전한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경상도 해안지역의 여러 집단들도 일정한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어 소국(小國)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들 소국들은 동일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3세기경에 이르면 상호연맹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연맹관계는 백제국(佰濟國)을 중심으로 통합된 백제나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간 신라에 비하면 지극히 느슨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부분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경제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다.
전기 가야연맹의 분포 범위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소국들에 국한되며, 내륙지역에는 아직 가야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풍부한 철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랑과 왜를 잇는 해상교역의 중개지로 발달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교역거점들은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이 밀려들어와서 소국 단위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고, 각기 독자적인 교역권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대외적으로 신라·백제·왜 등의 이웃 집권국가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가야 소국들이 각기 강력한 독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 우세세력에 의한 일원적인 통합이 어려웠고 다원적이고도 완만한 연맹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성·사천·마산·동래 등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서 김해에 못지않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면모를 반영한다.
이와 같은 정치적·문화적 특징으로 전기 가야연맹은 집권적 통합력을 진전시켜간 이웃 신라·백제 등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빨리 대처하는 민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4세기에 이르러 교역상대국이자 후원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면서 주변의 세력판도가 일변하자, 이러한 가야의 취약성은 현실적인 문제로 나타났다.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야 중심지역이 친신라를 표방하였고, 탁순국(卓淳國:지금의 창원)을 중심으로 한 가야 서부의 여러 세력은 친백제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5세기초 고구려 광개토왕의 가야지역 백제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征討)가 진행되면서 가야의 여러 세력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가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5세기 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서서히 낙동강 서안의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던 내륙지역은 전화(戰禍)를 거의 입지 않았고, 해안지역의 선진세력들이 이주해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고령지역의 반파국(伴跛國)은 집권적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가야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했다. 흔히 이를 후기 가야연맹 혹은 대가야연맹이라 부른다.
후기 가야연맹은 반파국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진전된 통합력을 발휘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을 파견하고 삼국관계에 강력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백제·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고, 백제·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6세기초에는 백제와의 국경지역인 기문(己汶:지금의 임실)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일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기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왜와의 교역중심지인 대사(帶沙:지금의 하동)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겨 대왜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기 가야연맹을 구성한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완전 복속되어 562년(진흥왕 23)에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 의한 대가야 정벌로 소멸하였다.
지산동 30호분 이란 큰 고분이 눈에 들어온다.
대가야 통문
퉁문위로 고분군을 답사하도록 길이 열려있다.
문화 해설사가 매우 열정적으로 해설을 해주고 있었다.
새로 발굴 조성중인 고분군 지역으로....
고분군 지역에는 수많은 표식들이 보였는데,모두가 앞으로 개발 조성될 고분군이라 일러준다.
팬션이 있는 지역에 텐트를 칠곳이 있기도 했다.
왕이 죽으면 산사람을 함께 매장했던 순장문화 체험장이다.
쉬어갈수 있는 아담한 정자가 있기도 했고.....
팬션마을이다.
싼값에 빌려쓸수 있다고 한다.
요걸 타고 한바퀴 둘러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