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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자왈, “인이불인, 여례하? 인이불인, 여악하?”
사람이 仁하지 않으면 禮를 어찌하며 樂을 어찌할까요?
1) 仁은 ‘사람다움, 사람답다’입니다.
사회의 仁은 ‘사회다움, 사람 사는 것 같다’입니다.
仁의 내용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상황 속에서 구체화합니다. 때와 곳, 사람과 사안에 따라 달라지곤 합니다. (시중지인)
2) 爲仁을 뜻하기도 합니다. 爲仁은 ‘仁하게 되다, 仁하게 하다’입니다. 仁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仁을 실현하거나 추구하는 겁니다.
爲仁은 스스로 사람답게 하는 修己의 爲仁과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회를 사람 사는 사회 같게 하는 治人의 爲仁을 아우릅니다.
3) 仁心 곧 사람다운 마음, 사람답고자 하는 의지, 사람다워야 한다는 양심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孟子 “仁, 人心也.”
사랑 자비 긍휼 따위의 ‘타자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인자하다 어질다 함은 이런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을 잘 쓴다는 말입니다
4) 仁者 곧 ‘사람다운 사람, 爲仁하는 사람, 仁心을 지녔거나 仁心을
잘 쓰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仁者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爲仁하는 그때 그 일에서의 仁者, ‘상황적 인자’가 있을 뿐입니다
음악은 일련의 ‘가락이 있는 소리’
*가락: 소리의 높낮이가 길이나 리듬과 어울려 나타나는 음의 흐름
논어가 긍정하는 음악은 仁을 이루는 데 유익한 소리 ‘爲仁之樂’
음악은 마음을 담아내거나 마음을 빚어내는 소리입니다
즐거움이나 위안을 주기도 하고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애정 열정 사기를 고양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화합 단결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樂의 본질은 이런 정서적 기능에 있거니와 좋은 樂은 仁을 이루는 데도 유익합니다. 樂은 이렇게 기능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찌 소리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람 사는 사회 같게 하려는 誠意正心이 없다면, 그런 사회사업가는 어떤 예악을 쓸까요?
* 仁하지 않으면 예악을 할 수 없을까요? 예악을 해도 무익할까요?
걸언이라는 禮는 어떨까요? 실리 감사 평가회나 강점 비전 워크숍 같은 樂은 어떨까요? 仁하지 않아도 이런 예악은 할 수 있고 필요하고 유익하며 이런 예악을 하다 보면 爲仁하게 되기도 합니다.
당사자에게 좋지 않은 마음이 있을지라도 예를 갖추어 정성스럽게 인사하고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고 감사하다 보면, 귀하게 여기는 마음, 爲仁하려는 마음이 됩니다.
仁하지 않더라도 이런 樂은 할 수 있고 필요하고 유익하며 이런 樂을 누리다 보면 爲仁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 與其奢也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임방문례지본. 자왈, “대재문! 예, 여기사야영검, 상, 여기이야영척.”
임방이 禮의 본질을 물으니 “좋은 질문입니다. 禮는 사치함보다 검소함이 낫고 喪은 易함보다 슬퍼함이 낫습니다.” 하셨습니다.
禮는 마땅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형식
예의 본질, 예의 근본은 예의 형식이 그러한 이유, 그런 형식을 취하는 근거입니다.
① 仁을 이루려는 誠意正心
②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③ 자신의 처지 본분 권한 책임 역량 따위를 헤아리는 마음
④ 타인 사회 공동체 역사 따위에 미칠 영향을 헤아리는 마음
⑤ 타인의 고통이나 부담,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
⑥ 인간적 감정, 정서
형식이 하찮거나 무익한 건 아니지만, 본질에서 우러나지 않는다면 어찌 편안하겠으며 어찌 오래가겠습니까? 그런 형식이 어찌 즐기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 사회사업의 禮
1) 사회사업의 禮는 복지를 이루는 데 마땅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형식입니다. 그 본질은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람 사는 사회 같게 하려는 誠意正心입니다.
2) 소박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대개 소박해야 뜻이 맑아지고 소박한 데서 인정이 자랍니다.
사회사업 예의 본질은 사람다움 사회다움을 살리는 데 있는데 뜻은 사람다움의 알맹이이고 인정은 사회다움의 알맹이이니 이러므로 복지는 소박하게 이루는 편이 낫습니다.
좋은 뜻으로 돕는다지만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사자와 지역사회의 것으로써 소박하게 복지를 이루게’ 하면 부작용이 없거나 덜하겠다 싶습니다. 이러므로 복지는 소박하게 이루는 편이 낫습니다
나무를 잘 기르는 사람은 나무의 본성을 살피고 나무의 본성을 따라 나무가 그 본성을 이루게 할 뿐이라 합니다. 사회사업도 사람의 복지 본성, 사회의 복지 본연, 그 본성과 본연을 살리는 방법이 좋습니다. 기계를 덜 쓰고 인위를 덜 가하고, 되도록 자연스럽게 복지를 이루는 방법이 좋습니다.
3) 핵심에 집중하고 실리를 살리는 편이 낫습니다.
일정한 순서, 축사, 환영사, 내빈 인사 따위의 의전이나 현수막 방명록 명패 꽃 다과 음료 따위의 형식을 갖추어 행사를 번지레하게 치르기보다 핵심에 집중하고 실리를 살리는 편이 낫습니다.
다만 때와 곳, 사람 사안 상황을 헤아려 奢해야 하겠으면 奢하고 易해야 하겠으면 易하고 다만 時中之禮를 따를 일입니다
사회사업의 禮와 道, 그 핵심은 걸언입니다.
걸언은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람 사는 사회 같게 하려는 誠意正心의 외형 곧 爲仁의 禮입니다.
걸언은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람 사는 사회 같게 하는 길입니다. 사회사업 正道입니다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자왈, “기여자상야! 시가여언시이의.”
자하가 “‘빙그레한 미소 예쁘구나, 고운 눈매 예쁘구나, 素로써 絢했음이여!’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繪事後素”라 하셨습니다. “禮는 나중입니까?” 하니 “나를 일으키는군요! 이제 함께 詩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셨습니다.
※ 絢 : 무늬, 문채(아름다운 광채), 꾸미다, 밝게 비추다, 눈부시게 하다
1) 素 : 예의 바탕
① 마음
예는 무늬에 해당하는 형식이고 그 본질은 爲仁하려는 마음입니다.
仁을 이루려는 誠意正心,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헤아리는 마음, 타인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입니다.
예의 형식은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巧笑요 美目입니다. 예의 형식을 꾸미는 일은 이런 마음으로써 爲絢하는 繪事입니다.
마음이 不仁하면 그 웃음이 어찌 倩하겠으며 그 눈매가 어찌 盼하겠습니까? “誠於中 形於外.”라 했습니다. 마음이 不仁한데 어찌 倩한 巧笑를 지을 수 있겠으며 어찌 盼한 美目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繪事後素라 함은, 아름다운 미소와 눈매가 아름다운 마음에서 나오는 무늬이듯 이처럼 예는 爲仁하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형식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② 時
사람과 사회가 있고 예가 있는 것이지, 예가 있고 사람과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회가 먼저이고 예는 나중입니다. 예는 사람과 사회의 時 곧 시대와 지역, 사람 사안 상황 따위의 바탕 위에서 그리는 형식입니다.
예를 그린 후에 사람과 사회를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회, 그 時를 바탕으로 예를 그리되 예의 본질을 그 時에 어울리는 형식으로 그려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繪事後素입니다. 예의 用은 時를 바탕으로 하는 時中之禮의 繪事입니다
사회사업 예는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람 사는 사회 같게 하려는 성의정심에서 나오고, 이는 사람다움 사회다움에 관한 탐구에서 비롯합니다.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격물치지한 대로 도우려는 성의정심이 사회사업 예의 바탕이고 본질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 갖추는 예, 이런 본질을 살리는 예, 그 주된 예가 걸언입니다.
2) 素 : 예의 기능
繪事에서 素는 ‘흰 색칠’인데 그림을 끝손질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畫龍點睛이라고나 할까요? 대상을 잘 꾸며서 絢하게 하는 기능 곧 대상을 돋보이게 하고 문채 나게 하는 기능을 상징합니다. 仁을 이루는 일에서는 예가 그 素에 해당합니다.
繪事에서 素가 주제를 돋보이게 하고 문채 나게 하는 것처럼 爲仁에서는 예가 인을 돋보이게 하고 문채 나게 합니다. 巧笑에 하얀 이를 칠하고 美目에 흰자를 칠하듯 仁에 예를 입히는 겁니다.
하얀 이가 巧笑를 예뻐 보이게 하고 흰자가 美目을 예뻐 보이게 하듯, 예가 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합니다. 예가 인을 살리는 겁니다
※ 사회사업의 素가 되는 禮
① 걸언
당사자와 지역사회의 복지 본성과 역량이 있습니다. 그로써 복지를 이루고 더불어 사는 당사자의 삶, 지역사회 사람살이가 있습니다. 사회사업은 이것을 살리는 繪事이고 그 素는 걸언입니다. 걸언의 예가 당사자와 지역사회의 복지 강점을 살리는 素이고 당사자의 삶, 지역사회 사람살이를 살리는 素입니다.
② 감사
사회사업은 걸언으로써 爲仁하는 繪事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素는 감사입니다. 당사자와 지역사회에 걸언하여 당사자와 지역사회가 복지를 이루게 하고 당사자와 지역사회에 감사하는 겁니다. 감사의 예가 당사자와 지역사회를 빛나게 하는 素이고 당사자와 지역사회의 자존심 체면 품위를 살리는 素입니다.
3) 素 : 예의 극치
지극한 경지의 예는 素로써 絢하는 예입니다. 예를 꾸미는 일은 繪事와 같습니다. 예의 그림을 다듬고 또 다듬다 보면, 예의 형식을 절차탁마하다 보면, 결국 素에 이르게 됩니다.
※ 사회사업 예의 지극한 경지 - 素
① 꾸밈이 없는 경지
사회사업 하수는 복지사업으로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전문적이라는 형식으로, 새롭거나 특별한 형식으로, 화려하게 꾸미려 합니다. 사회사업 고수는 ‘당사자의 삶, 지역사회 사람살이’ 그 평범한 일상으로 소박하게 복지를 이루게 합니다. 사회사업의 예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대개 평범하고 소박할 겁니다
② 얽매임이 없는 경지
중심에 원칙으로 삼는 예의 형식이 있으나 그에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예의 본질을 살려 행할 뿐입니다. 사회사업의 時 곧 때와 곳, 사람 사안 상황에 따라 변통합니다. 자신의 時 곧 자리와 나이, 처지와 역량, 책임과 권한에 따라 변통합니다. 변통할 뿐 아니라 또한 여지를 둡니다. 달라질 수 있다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며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③ 자연의 경지
예를 체화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時에 따라 응할 따름이나 본질에 들어맞고 본질을 운용할 따름이나 時에 和하게 됩니다. 의식과 의지의 채색을 넘어 자연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의 극치, 예의 素입니다.
或問禘之說. 子曰,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혹문체지설. 자왈, “부지야, 지기설자지어천하야, 기여시저사호!” 지기장.
禘의 본질은 자기 존재의 근원인 천제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요 천제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爲仁의 제사 곧 爲仁하는 삶, 爲仁하는 德治야말로 참으로 그런 제사입니다.
仁하게 하고, 仁하게 되는 德治
만인이 천제로 말미암았고 그 은혜로 살아가니 만인이 저마다 자기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서 仁을 이루려는 삶의 제사, 仁을 이루려는 敬事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만인이 禘의 주체, 禘의 제사장입니다.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
제여재, 제신여신재. 자왈, “오불예제, 여부제.”
계신 것처럼 제사하셨습니다. 신이 계신 것처럼 신을 제사하셨습니다. “나는 不祭 같은 祭는 與하지 않습니다.” 하셨습니다.
不祭 같은 祭를 드린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 상황, 사안, 이유가 있었겠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지만, 不祭 같은 祭를 다른 것이라고,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내가 만약 不祭 같은 祭를 드린다면,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내 것 중에 최고를 드린 것이라고, 틀린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하며 자기 합리화하기보다는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싶다.
위인지예가 무엇인지 헤아려보아야 한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자왈, “주감어이대, 욱욱호문재! 오종주.”
주는 하와 은 두 왕조를 거울삼아 그 文이 찬란합니다.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1) 주의 文
거울삼았다 하니 그저 계승한 것은 아닐 겁니다.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했을 겁니다. 더러는 수정 보완 혁신했을 겁니다. 이는 溫故而知新하는 주체적 행위입니다. 옛것을 살피는 비판적 행위이고 새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文을 이루는 道 곧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法古創新의 도, 나아가 文을 用하는 도 곧 개방적이고 가변적인 時中의 도, 이것이 따를 바 ‘周’의 본질이고 그 文의 근본입니다. 따르겠다고 하신 것이 주의 文 그 자체일까요? 적어도 말단 곧 文의 내용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2) 나의 文
溫故하되 그에 매이거나 그저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하며 知新 하는 도, 이 도를 따라 저의 文을 이룹니다. 주의 文처럼 빛나는 文이라도 時에 맞으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거나 수정 보완 혁신하는 도, 이 도를 따라 저의 文을 이룹니다. 남을 그저 따르지 않거니와 굳이 남과 다르게 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남과 다르든 같든 저는 저의 文을 이룰 뿐입니다. 옛것을 고집하지 않거니와 굳이 옛것과 다르게 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옛것이든 새 것이든 지금 여기에 마땅한 文을 취할 뿐입니다
子入太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太廟, 每事
問.” 子聞之曰, “是禮也.”
자입태묘, 매사문. 혹왈, “숙위추인지자지례호? 입태묘, 매사문.” 자문지왈, “시례야.”
태묘에 들어가 매사에 물으시니 어떤 사람이 “누가 이 사람이 예를 안다 했는가? 태묘에 들어와 매사에 묻는데…”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이것이 예입니다.” 하셨습니다.
제사와 관련된 문헌도 있을 것이고, 조사하지 않고 묻기만 하는 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다만, 문헌이 있어도 時에 따라 변화했을 수 있다. 그러니 주재하는 제관에게 물어야 한다.
공자가 예의 전문가라지만 모든 경우에 다 그렇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집마다 다른 가례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그 시대 그 지역의 예도 그러합니다. 어찌 외인이 잘 안다 할 수 있겠으며 어찌 그 祭主에게 묻지 않고 제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물어야 할 때 묻고 알아서 해야 할 때 알아서 함이 예입니다.
당사자의 일은 당사자에게 묻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다만 자기 일이라도 처음에는 전임자나 관계자에게 물음이 좋습니다.
공자께서도 태묘 제사는 태묘 제관에게 물어서 도우셨으나 그밖에는
이같이 하신 일이 없습니다. 태묘 제사도 처음 한두 번 그러셨을 겁니다. 그 후에도 같은 것을 물어서 도왔다면 어찌 예라 할 수 있겠으며 주재하는 제관이 되어서도 그랬다면 어찌 예라 할 수 있겠습니까?
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욕거곡삭지희양. 자왈, “사야! 이애기양, 아애기례.”
자공이 告朔 예의 餼羊을 없애고자 하니 “자공은 양을 생각합니까?
나는 禮를 생각합니다.” 하셨습니다.
告 : 아뢰다, 알리다 / 朔(삭) : 초하루
告朔(곡삭, 고삭) : 朔을 고하는 일, 朔에 고하는 일
餼羊(희양) : 사람에게 대접하는 양, 또는 제물로 바치는 犧牲양
고삭은 제대로 행하지 않아서 유명무실하거나 본디 목적에 맞지 않
거나 이름과 실제가 다른 예, 또는 時에 맞지 않는 예를 상징합니다. 희양은 고삭이 그러하여 별 소용이 없어 보이는 것, 인력 예산 시간 따
위를 허비하는 것 같은 일, 헛수고로 느껴지는 일을 상징합니다. 고삭이 그러하다면, 희양을 없애야 할까요? 고삭을 바로잡거나 폐지해
야 할까요?
고삭을 바로잡을 수 없고 폐지할 수도 없다면, 사직해야 할까요? 희양
이라도 지켜서 명맥을 유지하며 후일을 도모해야 할까요?
독서와 도서관의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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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수록 내가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속이 복잡합니다.
이 개념과 저 개념이 뒤엉켜있는 것 같습니다.
관념적으로만 그려보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삶과 사회사업에 적용해서 그 실상을 그려보아야겠습니다.
머리속은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기쁩니다.
함께 하는 선생님들이 있어, 군산에서 공부하는 동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마땅함을 향해 가는 길을 기쁘고 즐겁게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