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종우 신부
+찬미예수님
신학생 때 저에게는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들어가니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다른 직업에 눈길이 가기도 했습니다. 또래 친구들처럼 밤거리를 마음껏 다니고 싶기도 했고 연애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엄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면 하느님은 왜 이러한 분을 사제로 부르셨을까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신학교 저학년 때는 내적인 갈등이 많았습니다. ‘정말로 사제가 될 수 있을까?’, ‘사제가 아닌 다른 길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길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제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신학교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쓰러져 큰 수술을 받으시는 바람에 앞으로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하느님께 간곡한 약속을 드리기도 했고, 본보기가 되지 않는 신부님이 계시면 그분의 다른 좋은 모습을 보게 되거나 더 좋은 다른 신부님을 만나 위로받기도 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여러 분들은 사제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지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안에서 저는 차츰차츰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을 평소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깨달은 것은 바로 첫 미사 때였습니다. 첫 미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제대에 올라 성호를 긋는 순간 사제가 된 것이 결코 저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순간순간 벗어나려는 나를 하느님이 애써 어르고 달래서 여기까지 끌고 오셨구나’, ‘내가 감히 이렇게 미사를 손수 드릴 수 있도록 많은 신호를 보내오셨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자 감동이 밀려와 미사 내내 울고 그치고를 반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느님께서 여기까지 저를 끌고 오신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 음성을 듣고 삶의 방향을 매번 바꾼 저 자신도 퍽 대견합니다. 사실 하느님이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음을 종종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경우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신호를 보내십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긍정적인 의미의 ‘부르심’ 인데,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그 첫 번째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단순한 예언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그의 정체를 드러내 그가 삶의 방향을 전환하도록 경고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만약 이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차렸다면 유다를 제지했을 것이며 꼭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유다는 제자들이 이를 알아들을까 두려워 함부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두 번째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또한 단순한 유다에 대한 경고의 신호가 아닙니다. 빵을 나누어 주는 행위는 친절과 사랑의 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외면하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깊은 관심과 친절로써 그를 가까이 하십니다. 빵을 떼어 친히 건넨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풍속에서 매우 특별한 우정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유다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빵을 받음에도 마귀가 그의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신호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라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슬픔이 한층 묻어나옵니다. 이러한 마음은 당신의 죽음이 싫어서가 아닌 철부지 같은 제자들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죽음으로 인하여 당신과의 인연이 단절되는 것이 아님을, 지금까지처럼 당신의 죽음 이후에도 그 삶을 잘 따라 올 것을 가르치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이 말씀에 진정한 아쉬움과 애정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 당장 함께 하겠다며 급하게 나설 뿐입니다.
마지막 신호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을 통해 베드로는 나중에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이 후회와 자책은 오늘의 이 예언에서 시작됩니다. 이 역시 단순한 예언이 아닌, 정말로 네가 나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예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도 배반의 죄를 저지르는 베드로는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베드로야,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으로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공생활 중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그들은 언제나 환한 미래와 영광을 누렸습니다. 반면 누군가가 예수님을 등지고 자신의 길을 향하게 되면 거기에는 언제나 칠흑 같은 어둠이 있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기준에서 이루어집니다. 당신을 팔아 은전을 얼마나 받든, 부자들이 가난한 이웃을 돕지 않고 세상의 것을 얼마나 누리든, 예수님 앞에서 물질적인 것의 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인 양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불안감만 커질 것이며 물질적인 욕심으로 인해 삶이 평온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신호를 순간순간 알아듣고 방향을 전환해 사제가 된 제가 스스로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능력이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더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사제가 된 이후에도 지금껏 제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신호를 보내오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마찬가지 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신호를 보내셨고, 하느님께 마음을 두라고 요청하셨으며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미리 경고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악행을 저지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헛된 희망에 집중하느라 미처 하느님의 것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지나쳐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측은하고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십니다. 결국 그 뒤의 후회와 상처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죄를 해결하시고자 오늘도 홀로 십자가의 여정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복음 환호송의 기도문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이 오늘도 한 발짝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 친아드님마저 아낌없이 내어 주셨네”. 아멘.
[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청담성당 부주임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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