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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유년의 고향을 그리며 썼던 책을 출간했다. 첫 번째 수필집을 출간한 뒤로 5년간 모은 원고로 차일피일하다 완성된 것이다. 원고를 쓸 때 지켜보았던 문우들이 찬사를 아끼지 아니했다. 이 책이 나오면 고향에 크나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고향마을의 도서관이나 경로당에서 크게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심지어 어떤 이는 고향 사람들이 감사 폐라도 주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나 또한, 그 말에 고무되어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이 출판되면 먼저 가족, 문우들, 지인, 고향의 도서관과 경로당 순으로 선물할 순서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고향 동네에 볼일이 생겨 책을 챙겨 나섰다. 고향에 사는 사촌들의 몫과 여유분 몇 권을 더 챙겼다. 혹시 경로당에라도 들리게 된다면 선물해야 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촌의 집에는 아무도 없어 현관 앞에 책을 두고 나오다 돌아서는데 형 집 이웃에 사는 동네 형을 만났다. 사촌 형과 형수는 새로 생긴 경로당에 있을 것이라고 그곳에 가보라고 위치를 일러주었다.
경로당에는 형은 없고 형수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우선 책 한 권을 내밀고 그간의 안부를 묻다가 아무래도 한 권의 책으로는 돌려가면 보기에 모자랄 것 같아 한 권을 더 가져와 경로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심심하면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받고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영 아니었다.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경로당에는 예닐곱 명의 할머니가 있었는데 내 또래이거나 서너 살 아래위로 보였다. 그때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할머니는 나의 둘째 여동생 친구였다. 그녀는 외지에서 고향 경로당을 오면서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면서 오빠는 공부도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도 모르냐 하다못해 밀감 한 톨이라도 들고 와야 예의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경로당에 괜히 와서 자기의 책자랑만 한다면서 힐책했다.
내가 비록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부모님이 이제껏 고향을 지키고 계셨고 아버님도 경로당 출입을 해서 가끔 막걸리병을 들고 간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싶었다. 아버지 연배의 어르신을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나와 같은 연배에게 꼭 선물을 들고 가야 하는 법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 지어진 양옥집에 냉난방이 잘된 큼직한 거실에다 각종 운동기구가 즐비한 곳에서 멋진 옷을 입고 고급 소파에 앉아 쉬고 있다. 자신들이 지켰기에 이처럼 고향이 잘살게 되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고향에 남은 자신이 고향 파수꾼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외지에 나갔던 나 같은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올데갈데없어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딱한 사람이라고, 정부의 지원으로 지어준 집에서 호사를 누리는 것은 그들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국가의 복지혜택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던 고향의 경로당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고향을 방문하면 노동력이 없는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던 길가의 오두막 경로당이었다가 아버지가 일하시다 지치면 가끔은 쉬었던 작은 구멍가게 옆에 있는 경로당이었다. 경로당 옆을 지나다 아는 어르신이라도 만나면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막걸리 몇 통이라도 사드리고 안부를 묻던 곳이었다.
책 한 권이 밀감 한 알보다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다, 16세에 떠난 고향을 75세가 되어 둘러보았다.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향의 추억을 소재로 만든 책을 선물하고 싶어서다. 고향 사람들이 무척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경로당에 있는 노인이라고 해도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거나 또래가 많고 일부는 서너 살 많은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서적 거리가 많이 멀어졌다. 예전에 가까웠던 사람도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는데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고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들은 내 책 한 권보다는 밀감 한 알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책은 펼쳐보지도 아니하고 이것뿐이냐며 아쉬워한다.
강도를 맞은 심정으로 밀감 세 상자와 음료수 다섯 세트를 사다가 대령하고 나왔다. 고향에 대한 추억마저 깡그리 무너져버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