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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 이사 56,1.6-7
제2독서 : 로마 11,13-15.29-32
복 음 : 마태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하는데,
자기 생각이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심리를 말합니다.
이런 심리를 유튜브 같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이용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시청했던 콘텐츠와 유사한 내용의 영상을 자동으로 추천 콘텐츠로 뜨게 합니다.
이렇게 보다 보면 다른 사람 모두 아니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생각과 신념에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면, 보기 싫은 것은 당연히 보기 싫어집니다.
이 역시 확증 편향 심리에 따라, 보기 싫은 것을 봐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이 계속해서 왜곡되고 조작되고 있는데 말이지요.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친한 초등학교 친구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놀았던 일을 이야기해줍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제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설명이 너무 자세합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있었겠지만, 제가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왜곡되고 조작될 수 있는 기억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겸손의 삶이고 지혜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하는 주님과도 일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여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가나안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된 청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모욕적인 말씀까지 하시지요.
이런 모욕에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겸손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상대방의 모욕으로 틀렸다면서 거부하고 포기하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인정과 지지를 통해 굳은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믿음에 주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고 싶은 것 이상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고 화내는 것이 아닌,
굳은 믿음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이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며 주님 안에서 커다란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글을 읽을 때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단어는 글의 기본입니다.
단어가 문장이 되면 글을 쓰는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면 글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를 주는 글, 용기를 주는 글, 비판과 비난의 글이 됩니다.
문단과 문단의 맥락을 이해하면 글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은 대부분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측하면서 어째서 시대의 징표는 모르느냐?”
단어와 문장에만 머물면 글의 목적과 가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글의 맥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주체적으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에 유익한 음식을 선택해서 먹지, 몸에 독이 되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받아들일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치유력을 새로 일깨우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절름발이 교회를
야전병원으로 만들고 민중의 빛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교회와 종교를 게토, 폐쇄되고 요새화된 벙커, 철 지난 과거 신조들로 장식된 무덤,
진정제나 수면제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신뢰를 잃고, 자유 좌파들에 의해 단호히 배격당하고 외면된
그리스도교가 다양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호 존중과 소통, 가치 공유의 도덕적 풍토로 바꿀 수 있는
정치 문화를 형성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어떤 유형의 신앙이 다가올 시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오후라고 지칭한 시대에
사람들을 위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신학, 영성이
어떤 형태의 변화를 겪어나가야 하는지 대답하고 싶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토마시 할리크가 진단한 시대의 징표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소의 감소로 성직자들의 고령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제가 없는 성당은 폐쇄되거나 이웃 본당과 통합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블랙홀이 되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저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쌓고 있는 탐욕과 욕망의 바벨탑은 아름다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 열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폭염, 가뭄, 화재는 삼종세트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내보내는 ‘온실가스’는 지구 열대화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를 훼손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땅, 물, 공기가 오염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땅, 물, 공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생명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달려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
구원이 하느님에 의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불순종한 유대인들을 통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려지고, 마침내는 모든 백성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1,30-32)
복음 또한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큰 소리로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다윗의 자손”, 곧 이방인이면서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러나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청하였습니다.
마귀 들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하고(15,23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마태 15,25)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하시는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겸손과 인내, 믿음과 확신을 밝힙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 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여인은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하느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13)라고
기도하는 세리처럼, 겸손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또한 “주님,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는 백인대장처럼, 믿음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했던 과부(루가 18,1-8)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창세 32,25-27)처럼,
끈질긴 믿음의 인내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단지 열매 없는 시련과 인내를 강요하시는 잔인한 시험자가 아닌,
완전한 구원과 은혜를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1고린 10,13).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은 이렇게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34-35)
이토록 모든 이에게 열리는 구원의 충만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드넓으심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거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으로 쓰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도와주소서.”를 간청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삶 안에서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은 삼킬 것 같은 풍랑 속에서 말없이 주무시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없이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하오니, 오늘 당신의 침묵 속에서 제 믿음과 겸손을 양육하소서.
더 깊이,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가나안 여인의 믿음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은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하여 강하게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 여인의 딸을 낳게 해주시겠다고 하면서(마태 15,28)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복음 선포가 모든 인류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에게 국가주의와 율법주의의 편협성을 버리고
보편적 구원론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기에 외국인들도 개종하여
그분의 계시와 율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성전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6-7).
이러한 일치된 모습은 하느님을 모두 아버지로 깨닫고 흠숭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아니면 인류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안에”(로마 11,32) 있는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고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종족을 따지지 않으시고 모두를 구원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배타주의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여인에게 붙여지는 가나안이라는 호칭은 종족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특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 여인이 이교도라는 것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그 이교도 여인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시며
처음에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절).
오히려 사도들이 그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도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고 하셨다.
그런데도 계속 간청하는 여인에게 더욱 가혹하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이 표현은 이방인을 가리키지만, 경멸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자세에 양보하신다.
이방인인 그 여인이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께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항변은 단호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게 하는
그녀의 믿음과 고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집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주인의 발밑에 웅크리고서라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믿음’에 탄복하시고(28절) 그녀가 원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갖게 해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여기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여인의 믿음이라면 어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겠는가!
즉 구원의 조건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예수님의 모순적인 태도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에 투신할 힘을 발견한 것이다.
사도들은 믿음의 가치에다 구원의 최고 능력을 부여한다.
이 믿음의 가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신 말씀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
바로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선포함으로써
새 이방인들, 세례를 받았더라도 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혹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굳게 믿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앙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포기되지 않는
항구한 신앙이어야 함을 우리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보았다.
우리도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끝까지 항구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우리 모든 교우가 그렇게 되어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영원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 엎드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고, 다시 여인이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하셨습니다.
또다시 여인이 도와달라고 청하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여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은총은 준비된 사람에게 우선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의미로
구원의 혜택이 이방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탄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확고하게 믿으면 그만큼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방인 여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자식을 위한 한없는 사랑,
그리고 세 번의 끈기 있는 간청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결국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느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4천여 전에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선민의식이 뿌리 깊게 박혔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을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강아지’‘돼지’라 부르면서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표현으로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말씀하시고,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며
간절한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니 ‘정신 차려라!’는 꾸중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요, 강아지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하느님이 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내칠 위험이 큽니다.
특별히 선택되었다면 그에 걸맞은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고 다른 모든 민족이 배척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우리 내덕동 주교좌성당의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올해 본당 설정 66주년을 지냈습니다.
청주교구의 중심 성당으로써 많은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왔습니다.
주교좌성당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고 사느냐?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풍요로움 속에 있으면 고마움을 잊게 됩니다.
따라서 더 큰 믿음과 사랑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겸손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더 많은 이가 미사참례와 기도로 성당을 지켜야 합니다.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보편적 구원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2).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딸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는 어머니를 봐야 합니다.
강아지 취급받는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매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5,11).
우리는 어떤 바람이 있을 때 반드시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죄를 짓고 잘못에 떨어졌다 해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한 지향으로 인내하면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입니다.
지혜의 저장소며 영혼의 힘이고 낙심의 치료제입니다.
슬픈 이들의 위안이며 의로운 이들의 승리고,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더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통 중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데 백인대장의 처신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이 믿음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미사 안에서 영성체 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무엇을 주시든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도 믿음으로 병이 나았고(마태9,20-22),
주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하시며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5). 하시며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더군다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큰 만큼 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설령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을지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이 마치 예수님께서 외면하는 듯 여겼을지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켰듯이
우리도 어두운 밤이 올수록 더 큰 신뢰를 지니고 믿음을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기대하는 바와 간절한 소망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리석은 끈기
크고 튼튼한 집게발을 가진 어리석은 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게는 늘 자기의 튼튼한 집게발을 내보이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였습니다.
“난 무엇이든 한번 물면 놓지 않아.”
친구들은 모두 겁을 먹었습니다. 게는 더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어느 날, 어리석은 그 게는 낚시꾼의 낚싯대를 물고 가며 친구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난 한번 물면 놓지 않아! 절대 놓지 않아!”(이규경).
엉뚱한 고집 부리지 않는 지혜의 끈기가 필요합니다.
큰 겸손과 강한 믿음의 소유자, 가나안 부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다릅니다.
본문을 읽는 동안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던지는 말씀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마귀의 횡포에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 때문에 잔뜩 기대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었습니다.
절박하고 딱한 처지에 놓인 여인에게 위로와 기쁨, 희망과 구원을 선사해야 마땅한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청을 강경하게 거부하시며
이방인인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표현까지 쓰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오해의 소지가 꽤 큽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후 맥락과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맥락을 잘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통에 뿌리를 둔 ‘성경의 구원사적 기본 원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에도 순서와 절차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에 도달해야 하며,
그래야 이방인들도 하느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구원에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 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구원이 최우선 관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사람 예수님의 머릿속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의 행동반경을 보면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경로 주변에는 수많은 이방인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도시들을 대체로 비켜 가십니다.
대신 갈릴래야 호숫가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
특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머릿속에 이방인들의 구원은 전혀 없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청을 거절하신 것을 통해
이방인들이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방인들 때문에 그분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 집중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새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새 세상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우선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결론은 ‘해피 엔딩’이요 초긍정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겸손과 강한 믿음
그리고 절실함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게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와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딸의 치유는 사실 가나안 부인이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그 대화를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기 딸을 고쳐 달라며, 자비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엎드려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자 그 여인은 또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의 딸은 나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 전혀 자비롭지 않습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비를 거절할 뿐 아니라,
다가와 엎드려 간청하자, 강아지라는 모욕적인 단어까지 사용하여 거절하십니다.
그래도 그 여인은 간청합니다. 자존심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고 복음서가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앙은 강아지라 불리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비굴하게 엎드려 간청하는 데에 있다는 말인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것입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교도 여인의 딸을 고친 이야기를
마르코복음서(7,24-30)에서 옮겨 적으면서, 유대인적 해석을 가미하였습니다.
유대인이 가진 자폐적 選民意識,
곧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우월감을 가미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오신 분이고,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자비의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모는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유대인 특유의 해석을 가미하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티나로 옮겨와 정착하기 전, 그 땅의 원주민입니다.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력으로 그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최근 몇 년 전에도 팔레스티나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서 시대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티나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을
멸시하며, 그들을 강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그 표현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고,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예수님이 그 단어를 사용하신 것처럼 기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마르코복음서에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강아지라는 표현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감한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청을 들어, 딸을 고쳐주고, 그 여인을 칭찬하지 않으셨다면,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에 오늘 이야기를 굳이 싣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론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데에 당신의 사명이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타민족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에는 동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이방인들도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고,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境界를 넘어 타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한 것은
타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개방적 자세를 그들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기억을 되살려 유대인과 이교도를 차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며 신앙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구실만 있으면 사람을 차별합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 앞에 우월감을 가집니다. 유대인이 비유대인을 외면합니다.
종교인들도 宗派나 敎派가 다르면, 거기에는 갈등과 敵意가 있습니다.
한 정당에 몸담은 정치인들이 다른 정당 사람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사건건 상대방의 발목을 잡으려는 우리의 정치 현실입니다.
인류는 무슨 이유에서든, 자기와 類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배려하기보다 배타성과 적의를 더 쉽게 배설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종교가 만든 울타리 안에만 계시지 않고,
한 교파의 담장 안에 갇혀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닌 배타성으로 하느님을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하느님은 모두에게 자비로우십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이 칭찬하셨다고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이 여인의 이스라엘의 배타성과 그들이 가지는 적의에, 적의로 맞서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자비를 읽고, 그 자비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선입견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어떤 구원인지를 알리는 문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집단을 이루면 다른 집단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산산이 찢어진 우리의 사회이고 역사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믿은 것은 그런 찢어짐에서 구원되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차별의 울타리를 걷어내어야 하고, 배타성과 적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녹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惡貨가 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진실을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배타성과 적의를 거부하는 것은, 나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 없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간절한 원의가 하늘에 가 닿았다.
이 릴리안 수녀
여러분은 복음속 여인과 같이 예수님께 절실하고 간절했던 적이 있나요?
또는 누군가에게 엎드려 절할 만큼 나를 온전히 낮추었던 적은 있나요?
수련 시절 피정을 하며,
'엎드리다.'라는 구절이 마음을 둘러쌌던 기억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주님께 실제로 내 몸을 낮추어 엎드렸던 적이 없었기에
홀로 방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를 낮추었을 때
알 수 없는 눈물과 묘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겸손과 낮춤의 길로 다가감에 있어서
나는 어떠했는지, 내 믿음을 잠깐이나마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복음 속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분이
오직 주님이시라고 굳게 믿으며 자신을 온전히 낮추었습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여인을 낮추게 했지만
그로 인해 그 여인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에 매일 간절하게 주님을 찾지는 못하겠지만,
그분께 늘 매달리고 나를 낮추어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노력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넘치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출처] 마태 15,21-28 연중 제20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