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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의 막을 연 남조선 로동당의 선동가이자 반란수괴 중 한명이다.
본명은 이승진(李承晉), 본관은 고부(古阜)이다.
(가명은 김달삼, 金達三, 이상길),
남제주군 대정면 영락리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유격대 사령관으로서 4.3 사건을 주도하였다.
1923
1923년 8월 4일, 전라남도 제주도 대정면 영락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에서 아버지 이평근(李平根, 1900 ~ ?)과 어머니 풍기 진씨(豊基 秦氏, 1909 ~ ?, 진문표, 秦文杓의 딸이다.)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 이평근이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사하면서 대구에서 유소년-청소년기를 보냈고, 이평근은 대구에서
술도가를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 대구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였다가 아버지를
따라 도일, 오사카에 거주, 교토 성봉중학교를 거쳐 도쿄 주오대학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대구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인 명문자제의 출세코스인 교토 세이호중학교
(聖峰中学校,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구제중학교로, 1948년 학제개편으로 신제 세이호고등학교가 되었으나 1950년에 폐교했다.)를 거쳐 주오대학(中央大学)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주오대학 경제과 2학년 재학중에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에 지원하여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5년 1월에 대정면 안성리 출신인 남로당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하였다.
일본군 복무중인 1945년 1월 19일, 역시 제주도 대정읍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군수공장 납품업체를 운영하던
사장이자 '일본공산당 비밀 당원인 강문석(姜文錫)'을 만나고 그의 장녀로서 오사카 고등여학교에 재학중이던
진주 강씨 강영애(1929 ~ ?)와 혼인했다.
강문석 증조부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 왔을 때 두 번째로 머물던 집의 주인이었다.
추사에게 자식들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달삼이라는 가명도 원래 강문석이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혼자 귀국하였다.
해방후 이승진은 대구의 형 집에 임시 기거하면서 1946년 10월 1일의 대구폭동에 깊이 개입했다.
귀국후 대구에 체류하며 장인 '강문석'을 통해 알게된 조선공산당 경북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과 손을 잡고,
9월 총파업에 이은 10월 1일 대구 10.1 사건에 가담하였다.
다만 당시 조선공산당의 지령은 9월 총파업에만 국한되어 있어, 노동계급의 파업만 설정했을 뿐, 무력투쟁은
상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9월 총파업을 지휘했던 박헌영은 10.1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 관속에 들어가 비밀리에 월북을 해버리는 등, 공산당이 10.1 사건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는 건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여기서 천부적인 선동능력을 발휘하여, 남조선 로동당 지도부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스티코프의 1946년 9월 9일자 일기에 따르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련당국에 문의했다.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을 9월 11일, 9월 16일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
이때는 10월로 예정됐던 총파업을 1개월 당기도록 조선공산당이 전평 지도부에 지시한 무렵으로, 1947년 2월초
남로당 중앙당은 스티코프의 지령을 받아 전국에 “3.1절 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을 하달했고,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지령문을 2월 16일에 받았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이 남로당의 지령으로 벌어졌다는 주장은,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박갑동이 중앙일보에서 연재한 글을 1983년에 단행본으로 펴낸 책 『박헌영』에서 언급된 것인데,
(박갑동 저 『박헌영』 인간사, 1983, 198~199쪽),
정작 박갑동은 제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답변했으며, "4.3이 5.10선거 반대투쟁이라지만, 왜 유별나게 제주에서만 그랬겠는가?
4.3은 서청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출처: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편 2: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백선엽(白善燁)도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 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선엽,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157쪽)
백선엽(白善燁) 대장
폭동 초기의 소위 시체사건의 주모자로 개입했고,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서부지역 세포책임자로 활동하다가
경찰의 체포를 피해 연말경 귀향하여 대정면 하모리에 거주하였다.
1946년 12월 경북에서의 대대적인 좌익검거 선풍을 피해 고향 제주도로 몰래 잠입해,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교사, 귀환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쳤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소조를 이끌며 좌익세력 규합에 나섰다.
이승진은 남로당 제주도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동시에 모슬포 대정중학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변증법, 유물론, 유물사관 등 이념교육을 시켰다.
경비대 9연대와 대정중학은 일본군이 사용했던 병영을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승진(김달삼)은 제9연대
문상길 중위와 자주 어울렸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 남로당, 민주주의 민족전선, 민주주의 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제주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지원경찰 100명 등, 430명의 경찰 병력이 주변 경비활동을 하고 있었고,
기념식을 마친 3만여 군중은 가두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차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애를 치어놓고
사과도 없이 어디 가는 거냐"며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바람에 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이를 경찰의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지어,
3.1절 기념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후로 제주도 관청과 경찰들이 파업에 들어가 66명의 경찰이 해임되었고, 그자리는 육지(한반도 본토)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책에 임명되었고, 본격적인 지휘부를 구성하여 군사부장까지 겸임하였다.
당시 미군정이나 경찰은 경찰의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3.1절 기념식 사상자에 대한 도립병원 검시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등뒤에서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더구나 1947년 3월 3일 경무부장 조병옥이 "2월 28일 집회만 허가하고 행렬은 허가치 않았던바, 행렬까지
허가하라고 함에 부득이 집회까지 허가취소 하였는데, 1일 시민이 남산국민학교(제주북국민학교)에 모였으므로
집회만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내 오후 2시 50분경 경찰서 감찰서 등을 습격하였으므로 발포하였다"고, 3.1절 발포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제주도민에게 돌려버리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제주도의 민심이 들끓었다.
그리고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그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조직적인 좌익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47년의 3.1 사건 이후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으로 진출하여 조직부 차장을 거쳐 조직부장이 되었다.
1948년 초 "남북한 동시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라는 유엔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선거가 결정되자, 남한에 우익정부가 수립되면 남로당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므로, 월북해 있던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은 2.7 폭동을 일으켜 단독선거를 저지하라는 지령을 내렸는데, 2.7 폭동은
경찰의 대처로 큰 성과없이 진압되었다.
1948년 1월 22일 경찰이 압수한 문건에 의하면, 제주도당에게도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켜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폭동지령이 내려왔다.
그런데 폭동준비를 위한 회의에 참석했던 남로당원 220여 명이 2회에 걸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경찰의 체포를 면한 남로당 제주도당과 면책 이상의 간부급 19명이 2월 22일 신촌회의에서 강온파간 격론 끝에
단선 단정을 저지하고, 남로당 조직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찰에 대한 반격전(폭동)을 결정하였는데, 폭동을 맨먼저 제의했던 사람이 강경파의 선봉인 조직부장 김달삼이었다.
1948년 2월 25일에는 폭동 결정 직후, 제주도당의 조직개편시 강경파가 전면에 등장하였는데, 김달삼은 신설된
군사부장이 되었다.
군사부장은 유격대 사령관을 겸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4.3 사건을 주도하게 된다.
제주도당은 4월 3일 새벽에 4.3 사건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는데, 계획의 주요내용은 경비대를 동원하여 제주읍의 경찰력을 분쇄하고, 자체 양성한 유격대는 각 면에 있는 경찰지서를 공격하며, 경찰가족, 우익인사, 선거관리
위원들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했다.
4월 3일 새벽 12개 지서가 남로당 유격대의 공격을 받았고 경찰, 경찰가족, 우익인사, 선관위원들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도 습격하였다.
그런데 경비대가 동원되지 않아 제주읍은 평온하였는데, 경비대가 동원되지 않은 것은 중앙당의 지시가 없었다라는 경비대 프락치(문상길)의 변명이 있었으나, 사실은 당일 경비대에 탄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가 예정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된 상황에서 남로당 중앙당과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김달삼 등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무장폭동이자,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탁양현 『이승만 김일성,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
북한에서 UN 한국 임시위원단의 방북을 거절하자, UN은 총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5.10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극심했고, 이 점을 남로당 무장대가 교묘하게 이용한 측면이 있었다.
앞서 4.3 사건발발 이전에 3.1절 발포 사건에서의 과잉진압이나 사후수습에서 보듯, 제주도 내에서 미군정과
경찰들이 제주도민의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의 실책도 분명히 있었다.
(대구 10.1 사건만 하더라도 미군정의 당시 현지 주민들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식량정책이 한 원인이
되었다)
이미 북한에서도 5.10 총선거를 반대한다는 좌우익 일부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 등을 중심으로, 38선 이북지역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을 볼 때, 김달삼이나 남로당 무장대가 내세운 5.10 총선거 반대 역시, 단지 하나의 원인 내지 표면적인 명분일 뿐 그자체가
전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5.10 총선거를 반대했다는 표면상의 이유만으로, 제주 4.3 사건을 반란 또는 폭동으로 몰아가는 것도 지나치게 편향적인 결론이다.
미군정은 경찰이 남로당의 폭동을 진압하지 못하자, 경비대를 투입하기로 하고 4월 20일에 부산의 제5연대에서
1개 대대(대대장 오일균 소령)를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제주도 남로당 세력들은 외부와는 고립되어 있는 제주도의 지형과, 미군의 대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고, 제주도 경찰과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는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 공산
반란세력 진압에 나섰다.
이에 김달삼은 경비대 내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와 양자회담을 한바 있었고, 4월말까지 김익렬-김달삼-오일균 3자회담과 김익렬-김달삼 양자회담을 하였다.
국방경비대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은 4월 17일 제주주둔 미 육군 제59군 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진압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다음날 4월 18일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도 함께 맨스필드 중령에게
내려왔다.
맨스필드 중령으로부터 이 임무를 하달받은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고, 이에 김달삼이 호응하면서 4월 28일 구억리 국민학교 건물에서 두 사람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김익렬의 회고록에 따르면, 첫 대면 자리에서 김달삼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없었으며,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 악질 친일경찰, 서청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실시한다면 순종하겠다는 골자의 내용을 피력했다.
4월 28일의 김익렬-김달삼 양자 회담에서는 "단선단정 반대, 경찰 무장해제와 토벌대 철수, 반동테러단체 해산 및 철수, 피검자 석방 및 불법검거, 투옥 학살중지" 등을 요구하였다.
김익렬은 72시간내 양측의 전투행위 중지, 유격대 전원의 즉각적인 무장해제와 더불어,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 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김익렬 연대장 자신의 아내와
6개월된 아들, 그리고 늙으신 어머니 등) 무장대측에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
김달삼도 김익렬이 자신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혀 두겠다는데에는 놀랐는지 "노인을 산에 잡아둘 순 없다"며
자신이 지정하는 민가(전 면장 집)에 옮겨와 살도록 하고, 군인의 경비와 출입을 허용했다.
김익렬로부터 폭도들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에 의견일치를 보았으며,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회담은 5월 6일 김익렬이 연대장직에서 해임되면서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제9연대장이 5월 6일부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자, 5월 7일에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지도원(올구)이
제주도당에 당도하였고, 5월 10일에는 남로당 대표로 김달삼-김양근, 경비대 프락치 대표로 오일균 소령, 이윤락
중위 등 4명이 대책회의를 하였는데, 이 회담에서 신임 9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숙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해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새벽에 경비대 내의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중위 일당에게 암살된다.
사실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김달삼도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고, 양측은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28 협상이 있고, 바로 다음날인 1948년 4월 29일에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현지의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장 박두인과 부단장 고석종이라고 이름이 알려져 있다.)이 행방불명 되고, 4월 30일 제주읍 오라리 대동청년단원의 부인 강공부, 임갑생 두명이 납치되었다.
납치, 살해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위로 해서 이들에게 납치 되었는지는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
두 여인 중 강공부는 죽고 임갑생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5월 1일 연미 마을에서 강공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경찰트럭에 실려 고향마을에 온 강공부의 시신은 '제기물 동산'에 안장되었다.
이때 경찰트럭을 타고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원 30여 명도 함께 왔다.
장례가 끝난 후 경찰관은 트럭을 몰고 돌아갔지만, 현지에 남은 대동청년단 단원들에 의해 5월 1일 12시경 연미
마을에서 당시 좌익활동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허두경, 강병일, 박태형, 강윤희, 박전형 등 5세대 12채의 민가에 대한 방화가 벌어졌고, 이에 민오름 주변에 있던 남로당 무장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들을 추적, 이 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1명(김규찬 순경의 어머니)이 피살됐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두 대의 트럭을 타고 오후 2시경 출동 하였지만, 이미 마을 안의 유격대는 도주하고 사라진
뒤였다.
때문에 쌍방간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경찰이 마을입구에서 난사한 총에 맞아 주민 1명(고무생 여인)이 피살되었다.
이 사건이 오라리 방화사건(1948.5.1.)이다.
오라리 방화사건의 경우, 주한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1948년 5월 3일자)는 「제주도 폭동, 오라리 방화」란 제목 아래 “오라리가 5월 1일 낮 12시 30분부터 3시간 동안 폭도 5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경찰이 도착하여 폭도들을 마을에서 축출하였다.”고 기록하고, 그 출처는 ‘경찰보고’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동아일보] 특파원이 쓴 '제주도 폭동 현지답사'(1948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5월 1일
메이데이에도 농민참살의 비극’ ‘불바다로 화한 오라리 부락’이란 소제목 아래 오라리에서 3시간의 교전이 있었고, 방화나 학살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묘사되고 있었으며, 1982년 발간된 『제주도지』에도 ‘오라리 전투’란 표제 아래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경찰 토벌대와 폭도 주력부대가 싸움이 붙어, 사건후 처음으로 경찰이 이들의 주력부대를 격퇴했다…
마을은 순식간에 격전장으로 변해서 3시간의 격전이 계속되었다.
이날의 격전에서 마을민가 상당채가 불타고 1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실제로 교전은 없었으며, 국방경비대 초대 9연대장을 지낸 장창국의 『육사졸업생』에는 “5월 1일, 소위
메이데이(노동절) 날 상오 11시 귀순자들이 많이 살고있는 제주읍 외곽 오라리 마을에 날벼락이 났다.
정체불명의 청년일당이 부락을 기습, 방화한 것이다.
다수의 사망자도 났다.
경찰은 하산, 귀순한 자를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폭도들의 보복행위라 했고, 반도들은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고 주장했다.”라고 썼다.
즉 이들 기록들은 오라리 방화사건, 그러니까 1948년 5월 1일 벌어진 오라리에서의 민가방화 자체를 '폭도' 즉
남로당 무장대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익인사인 김영중은 김달삼이 쓴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도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제주읍 2개소,
대정면 5개소, 조천면 2개소를 습격했다고 나온다는 것.
4.3 발발 이후 5월 1일까지 오라리에서는 토벌대에 의한 사상자가 사망 3명에 부상 1명이고, 좌익에 의한 사상자가 사망 4명에 탈출 1명으로, 좌익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정부 보고서는 그걸 휴전기간 중에, 경찰에 의해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 평화협상이 깨진 것처럼 몰아간다고 비난하였다.
학살에 숫자를 따지는 것부터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김달삼이 쓴 투쟁보고서라는 것도 북한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선전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니 만큼, 과장이나 왜곡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
당장 김익렬 연대장만 하더라도 "허풍이 심하다"는 우익인사들의 비난을 듣고 있다.
다만 이 방화 자체는 우익단체에 의한 대동청년단의 소행으로 확인되었다.
1988년부터 제주 4.3 사건을 취재했던 제주신문 양조훈 기자가 마을주민들을 취재할 당시까지 당시 방화에
가담했던 대동청년단원이 살아 있었다.
성이 박씨라고만 알려진 그는 제주신문 4.3 취재반과의 첫만남에서, 1948년 5월 1일 강공부 여인의 시신을
경찰트럭에 싣고 오라리 인근 장지에 갔던 일과 그 트럭에는 경찰관과 서청, 대청 단원 등 30여 명이 동승한 사실, 장례가 끝난 후 경찰트럭에 경찰관만 타고 철수하고 서청, 대청 단원들이 현지에 남게된 일 등은 시인하면서도
방화사실만은 부인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취재반이 반증자료를 제시하고, 해당사건을 목격했던 당시 생존자들이 "대질 증언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전하자, 그때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는 표현으로 사실상 방화사실을 시인했다.
또한 그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있은 후 다음날인 5월 2일 김익렬 연대장의 특별지시로 '방화' 혐의로 검거되었으나, 딘 장군에 의해 김익렬 연대장이 6일에 전격해임 된 뒤 후임으로온 박진경 중령에 의해 풀려났고, 4개월 뒤인
1948년 9월 15일 제주 경찰학교 9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들이 오라리에서 자행한 1948년 5월 1일 12시의 민가 5세대 12채에 대한 방화를, 앞서 4월 29일과 30일에
대동청년단 단원 2명의 실종과 그 가족 2명의 납치 및 1명의 피살을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해서 당시 우익 및 군경은 1948년 5월 1일 12시에 민가 5세대 12채에 불을 지른 주체 자체가 '폭도' 즉 남로당 무장대라고 주장하다가, 이후에 관련자 증언이 나오게 되면서 방화를 저지른 주체 자체는
대동청년단이라는 우익집단이 맞지만, 그것은 좌익세력으로 보이는 모종의 집단에 의해 대동청년단원이 납치되어 한명이 피살된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의 뉘앙스를 바꾸고 있다.
여기서 1948년 5월 1일의 오라리에서의 5세대 12채에 대한 대동청년단원의 방화 자체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아니면(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되는) 그 이전 4월 29일과 30일에 있었던 대동청년단 단원 및 관련자의 납치 및 피살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에서 논점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협상이 깨지면서 김익렬은 1948년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 여수시 주둔 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김익렬은 오라리를 습격한 것이 경찰들의 소행임을 언급하며, (방화 자체는 우익이나 경찰의 주장과는 달리
대동청년단 단원의 소행이 맞았다.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를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온건 화평전술을 주장했지만,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에게 좌익이라고 매도당했다.
하필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김익렬과 김달삼이 일본 육군예비 사관학교 동기라는 것까지 조병옥에게 트집이 잡혀, 이 때문에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다.
1948년 초 북한은 사실상 정부수립 상태였으나, 남한이 정부수립을 위하여 5월 10일에 제헌의원을 선출하자,
북한도 정부수립 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남한의 국회의원 격인 인민회의 대의원 선출을 위하여 북한은 1948년 8월 21일~25일에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 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김달삼은 이 회의 참석을 위하여 1948년 8월 2일 배로 제주도를 출발하였다.
결국 김달삼은 1948년 8월, 사태수습이 안 되고 자아비판을 요구받자, 이덕구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월북하였다.
김달삼은 월북해서 주석단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에 월북하여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되어 북한의 인민공화국 창건에 참여하였고,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김달삼은 8월 21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로당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했고, 여기서 그는 제주 4.3 사건에 있어 자신이 세운 공적을 선전하여,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국기훈장 2급 수여에 북한 헌법위원회 위원으로까지 활동하는 등 출세한다.
그리고 김달삼은 연설도 하였는데, 4.3 사건에 관해서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서 벌어진 자연 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하고는 "통일정부를 거론한 후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쳤다.
김달삼은 월북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손수 작성하여 가지고 월북했는데,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에게 보고용) 4.3의 목적에 대해서
⓵ 조직수호
⓶단선 단정 반대라고 기록하고는, 해주 연설에서는 경찰의 탄압과 단선에 대한 민중항항론을 주장한 것이다.
해주 대회를 마친 김달삼은 제주도로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머물면서 북한의 인민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
1949년 1월 8일에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직접 수여받았고, 대남 무장간첩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했다.
1949년 8월 4일에는 유격대원 게릴라 300여 명을 이끌고 38선을 침투하여, 경북 보현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전복활동을 했다.
김달삼은 이후 태백산을 거쳐 일월산까지 침투하여 지방 좌익과 빨치산들을 규합하는 등, 남로당의 1949년 9월
공세를 지원했으며, 경북 일대에서 지서습격, 교량파괴, 식량약탈, 민간인 학살과 납치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1950년 2월에 김달삼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가 청송면 월외리에 출몰했다.
당시 은거중이던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양식과 약품을 구하는 것을 목격한 한 청년단원이 경찰과 군부대에
이를 신고하여 체포되었는데, 주민들의 신고로 체포된 사실을 알게된 70여 명의 김달삼 등 빨치산 부대는 2월 6일 밤 11시경 마을을 습격하였고, 마을 주민 12명이 희생되었다.
3월 20일, 다시 강원도로 침투하려다가 반론산에서 매복에 걸려 총살되었다.
당시 신문보도는 3월 20일 15시경부터 20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김달삼의 부대를 섬멸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신은 인상착의와 소지품을 통해 김달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안면의 안경 자국, 골상, 지문 등.
당시 한국인 중에서는 안경을 쓰는 인구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마우저 권총, 부대 지휘관 깃발, 러시아어로 쓴 일기 등이 김달삼을 말해준다.
시신은 토벌대에 의해 참수-효수되었다.
김달삼은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20일에 국군에게 사살되었다.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 있는 "김달삼 모가지 잘린골"이라는 곳이 김달삼이 총살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지명은 현재 한국에서 두 번째로 긴 지명으로 꼽힌다.
가장 긴 지명은 같은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의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현재는 지명이 승지골로 바뀌었으며, 여량면에서 발간한 여량면 지명유래에서 지역 어르신들이 김달삼 모가지
잘린골이라 한다는 것으로 확인사살 했다.
김달삼을 사살한 부대는 제8보병사단 21연대이며, 당시 김달삼을 사살하는데 공을 세운 연대장은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관오이다.
김달삼은 제3병단 제1부관을 겸하다가 사령관 이호재가 전사하자 제3병단 사령관이 되었고, 6.25 전쟁중인 1950년 9월 30일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의 죽음에 관해서는 몇차례 신문보도가 있었는데, 그중 1950년 3월 22일 강원도 정선의 반론산 사살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던 소련 대사관 근무자는 김달삼이 3월 22일 반론산에서 사살되었다고 대한민국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나, 실은 김달삼이 3월말에 평양에 들어왔고, 4월 3일에 북한 남로당 중앙위원회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함으로써 반론산 사살설을 부인하였다.
북한은 평양 근교 신미리의 애국열사 능에 김달삼의 가묘를 만들었는데, 묘비에는 "남조선 혁명가, 1926년 5월 10일 생, 1950년 9월 30일 전사"로 쓰여있다.
옆에는 성시백의 묘도 있다.
북한에서는 김달삼이 매국노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인민봉기의 공로자로 추켜세우지만, 말이 좋아 인민봉기지,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된 군경, 우익인사나 그 관련자 및 민간인의 수도 상당히 많았으며, 그에
대한 보복이랍시고 군경이나 서청이 양민을 상대로 저지른 어마무시한 학살을 진영논리로 묻어버렸을 뿐이다.
무엇보다 매국행위도 모자라 사태가 불리해지자, 제주도민을 내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버린 시점에서 김달삼은 6.25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박헌영과 같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제주도에서는 김달삼의 후임을 맡은 이덕구가 머물렀던 산전이나 그의 가족묘에는 동정심으로나마 찾아가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있었을지언정, 김달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냉담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덕구는 반란의 수괴였다는 점 때문에 가족이 몰살당했다.
제주도민들의 인심을 잃어버린 탓도 있지만, 북한과의 혐의점이 너무 분명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