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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란(契丹)=요(遼)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는? (1)
○ 기존(旣存)의 역사통설(歷史通說)【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역사(歷史)를 말하며, 이는 조선사(朝鮮史)뿐만 아니라, 세계사(世界史), 모두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에서 이해(理解)하기 어렵고, 난해(難解)한 두 왕조(王朝)가 있는데, 바로 『요(遼)나라와 금(金)나라』 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발해(渤海)’는, ‘요(遼)’나라에 의해 멸망(滅亡)당했으며, 또 ‘금(金)’나라는 ‘요(遼)’나라를 멸망(滅亡)시켰다고 하며, ‘금(金)’나라는 원(元)나라에 의해 멸망(滅亡)당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실제(實際)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대해서는, 「이들의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의 후손(後孫)이나 근거지(根據地)는 오늘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는 점이다.
그저 말로만 전해지고 있을 정도(程度)인데, 이것 역시(亦是) 사가(史家)들에 의해 기록(記錄)된 것일 뿐이다. 문제(問題)는 이러한 사가(史家)들의 기록(記錄)은, 20 세기(世紀) 초(初), 혼란스러운 시기(時期)에, 목적(目的)을 가진 자(者)들에 의해, 대부분(大部分) 재(再)편찬(編纂)되었다는 점이다. 이것과 조선사(朝鮮史)의 조작(造作)과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다는 점이다.
○ “요(遼)”는 ‘글란(契丹)’이며, ‘거란’이라고도 한다. 문제(問題)는 이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종족(種族) 또는 어떤 부족(部族)이며, 어떤 인종(人種)인가? 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하여 이들의 후손(後孫)들은 과연(果然) 누구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역시(亦是)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이런 해괴(駭怪)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주장(主張)하는 입장(立場)에서, 이들 정체(正體)에 대한 것들을 논의(論議)해 보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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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회요(唐會要) 글란(契丹) / 契丹契丹居潢水之南.黃龍之北.鮮卑之故地.君長姓大賀氏.勝兵四萬三千人.分為八部.餘風俗與突厥同. : 글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에서 산다. 선비(鮮卑)의 옛 땅이다. 군장(君長)의 성(姓)은 대하(大賀)씨이다. 뛰어난 병사가 4만 3천명이 있으며, 8부로 나누어져 있다. 많은 풍속(風俗)이 돌궐(突闕)과 같다.
➠ 위의 원전(原典)인 당회요(唐會要)에서는 : 돌궐(突闕)의 풍속(風俗)과 많은 부분(部分)이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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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전(通典) 글란(契丹) / 契丹之先與庫莫奚異種而同類,并為慕容氏所破,俱竄於松漠之閒.其俗頗與靺鞨同.中略.其後為突厥所逼,又以萬家寄於高麗.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고막해(庫莫奚)의 다른 종류이나 같은 무리인데, 함께 모용(慕容)씨에게 깨어진바, 함께 송막(松漠)의 사이로 숨었다. 그 풍속(風俗)은 약간 말갈(靺鞨)과 같다. (중략). 그 뒤, 돌궐(突厥)이 핍박(逼迫)하자, 그 중 『만(萬)여가(餘家)』 가 고려(高句驪)에 위탁(寄)하였다.
➠ 위 원전(原典) 통전(通典)에서는, 글란(契丹)의 풍속(風俗)은 일부분(一部分)이 말갈(靺鞨)과 같다고 하였다. 「송막(松漠)사이로 숨어들어 종족(種族)을 보존(保存)했다」는 이야기는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이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스며들어 종족(種族)을 보존(保存)했다」는 이야기와 너무도 똑같다. 우연(偶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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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오대사(舊五代史) / 契丹者,古匈奴之種也.代居遼澤之中,潢水南岸,南距榆關一千一百里,榆關南距幽州七百里,本鮮卑之舊地也. : 글란(契丹), 옛 흉노(匈奴)의 핏줄이다. 대대로 요 택(遼澤)가운데에서 살았는데, 황수(潢水)의 남안(南岸)이다. 남쪽으로 유관(楡關)까지 일천(一千)일백(一百)리 떨어져 있으며, 유관(楡關)에서 남쪽으로 유주(幽州)는 칠백(七百)라 떨어져 있다. 본시 선비(鮮卑)의 옛 땅이다. 中略. 天祐末,阿保機乃自稱皇帝,署中國官號.其俗舊隨畜牧,素無 邑屋,得燕人所教,乃為城郭宮室之制于漠北,距幽州三千里,名其邑曰西樓邑,屋門皆東向,如車帳之法. : 천우(天祐) 말에, 아보기(阿保機)가 스스로 황제(皇帝)라 칭하고, 중국의 관호(官號)를 썼다. 그들의 풍속(風俗)은 오랫동안 가축을 들에서 기르며 따랐는데, 마을이나 주거(住居)도 없었는데, 연(燕)인들로부터 배워 득하여, 이에 막북(漠北)에 성곽(城郭) 궁실(宮室)의 제도를 행하였는데, 유주(幽州)는 3천리 떨어져 있었으며, 마을은 서루읍(西樓邑)이라 명하고, 집의 문은 모두 동향(東向)으로 하였는데, 거장(車帳)의 법을 따른 것이다.(같다).
➠ 위 원전(原典)인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는 : 글란(契丹)은 흉노(匈奴)의 한 부류(部類)라고 하였다.
㉮ 글란(契丹)이 대대(代代)로 살던 땅에서, 「남쪽으로 일천(一千)일백(一百)리에 유관(楡關)이 있고, 유관(楡關)의 남쪽 700 리에 유주(幽州)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유관(楡關)은 산해관(山海關)이라고 하는데,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에 있을 수 없으며, 유주(幽州) 또한 현(現) 하북성(河北省)에 없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하는 내용(內容)이다.
➠ 유관(楡關)이, 현(現)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이라고 한다면, 산해관(山海關)은 바다 가에 있으므로, 그 남쪽 700 리에 유주(幽州)라는 땅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산동성(山東省) 앞 바다 한 가운데(海中)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원전(原典)을 조그만 연구(硏究)해도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産物)이란 알 수 있음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학계(學界)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목말라, 더욱 발전(發展)시키지 못해 안달 하고 있다. 역사(歷史)는 ‘무리들’의 정신(혼)이라고 본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친일이 바탕이며, 위정자(爲政者)들은 친일(親日)의 혼(魂)으로 무장(武裝)된 자(者)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당시(當時)의 글란(契丹)은 “막북(漠北)”에 있었으며, 유주(幽州)까지 3천리(千里) 떨어져 있었다.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보면, 유주(幽州)는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에 있어야 하며, 이곳은 “최소한(最小限)” 항애산맥(杭愛山脈)과 알타이산맥(山脈) 서(西)쪽과 서북방(西北方)이다. 【‘환국고려’님께서는 신강성(新疆省) 서쪽 일부와 카자흐스탄 발하슈 호(湖) 인근(隣近)까지라고 하셨는데, 그곳에 유적(遺跡)들이 지금도 존재(存在)하고 있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곳에서 「북방(北方) 또는 서북방(西北方) 3천리」 라면, 「러시아의 ‘오브 강’과 ‘우랄산맥(山脈)’과 ‘모스크바’ 지방이 된다.」 역사통설(歷史通說)은 강대국(强大國) 위주(爲主)로, 그들의 입맛에 따라 재편(再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자각(自覺)하지 않으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곳으로부터 흉노(匈奴)의 핍박(逼迫)으로 남천(南遷)하여,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으로 들어왔으나, 그것도 잠시, 서(西)쪽에 있던 돌궐(突闕)로부터 격파(擊破)되어, 일부(一部)는 송막(松漠)사이로 산재(散在)하여 보존(保存)하고, 일부(一部) 만여(萬餘)가(家)는, 당시(當時)에, 현(現) 신강성(新疆省)지방의 서(西)쪽 일부(一部)까지 세력(勢力)을 뻗쳤던, 고구려(高句驪)영토(領土)로 들어와 의탁(依託)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의탁(依託)한 글란(契丹)족들은, 대부분(大部分) 고구려(高句驪)화 되었으나, 고구려(高句驪)가 당(唐)에 망(亡)하자, 일부는 대조영(大祚榮)과 함께 “발해(渤海)”를 건국(建國)하게 되며, 일부(一部)세력(勢力)은, 송막(松漠)사이로 숨어들었던, 글란(契丹)무리와 합세(合勢)하게 되는 것이 역사(歷史)의 줄거리이다.
㉰ 글란(契丹)은 「옛 연(燕)나라와 인접(隣接)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위의 본문(本文)글에서, 「글란(契丹)은 집을 지을 지도 모르고, 그저 가축(家畜)을 따라 수초(水草)을 쫓아 이곳저곳으로 이동(移動)하며 살던 이목(移牧)민이었으나, 연(燕)나라 사람들로부터 집을 짓고, 성곽(城郭)과 궁실(宮室)의 제도(制度)를 배웠다」고 하였으니, 연(燕)나라와는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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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오대사(新五代史) 사이(四夷)부록(附錄) - 2 / 《雲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상시 회흘(回紇)의 부역을 하였다. 등 뒤의 ‘흑 거 자(黑車子)’로 도망을 쳐, 처음으로 거장(車帳)을 만드는 것을 배웠다. 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 또 북쪽의, 우제돌궐(牛蹄突闕)은,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더욱 추워, ➠호하(瓠河)의 물은,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얼어 두께가 2척(尺)이나 되는데,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얻어 마신다. 東北,至襪劫子,其人髦首,披布為衣,不鞍而騎,大弓長箭,尤善射,遇人輒殺而生食其肉,契丹等國皆畏之.契丹五騎遇一襪劫子,則皆散走. : 》
➠ 위의 글에 대단히 중요한 구절(句節)이 있다.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들이 살던 곳을 찾을 수 있는 중요(重要)한 단서(端緖)가 된다. 이곳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였으나, 당(唐)에 뺏기고, 부흥군【復興軍 : 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으로 구성(構成)되었다.】과 당군(唐軍)과 치열(熾烈)한 접전(接戰)을 벌인 곳이다. 이곳의 남쪽지방에 글란(契丹)이 대대(代代)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어딘가, 아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보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 外夷附考 / 瓠<盧瓜>河,在漠外.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有寒水,曰瓠<盧瓜>河,夏秋冰厚三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雲. : 호로(과)하(瓠蘆(瓜)河) : 막외(漠外 : 사막의 밖)에 있다.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매우 추운데 물이 있어, 호로(과)하(瓠蘆(瓜)河)라 하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두께가 3척(尺)이나 되고,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얻어 마신다. 》 ※ 산서(山西)란 말은, 산(山)의 서(西)쪽 지대를 말한다.
➀ 글란(契丹)들은, 상시(常時) “회흘(回紇)”족에게 “부역(役=負役)을 당했다.”는 말에 따르면, 회흘(回紇)을 중심(中心)으로, 근접(近接)한 “서(西)쪽 또는 북(北)쪽”에 있었을 것이며, 흑거 자(黑車子)와 우제돌궐(牛蹄突闕)의 추운 기후(氣候)로 보면, 『글란(契丹)』 은 회흘(回紇)로부터 『북쪽과 서북(西北)쪽』 방향(方向)의 근접(近接)한 지방에 있어야, 복속(服屬)되어, 부역(負役)을 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➁ 「호로하(瓠蘆河)」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산서(山西)편에 기술(記述)되어 있으며, 호로하(瓠蘆河)편에서는 『막외(漠外)지방』 에 있다고 하였다. 그 서쪽에 “해(奚)”가 있었다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이들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신강성(新疆省) 서북쪽 『러시아 땅의 오브강과 우랄산맥과 모스크바」사이의 땅이 된다.
➂ 이곳은 서기 668년 이전(以前)엔 고구려(高句驪)땅이었으나, 당(唐)에 의해 고구려(高句驪)가 망(亡)한고 난 뒤에는, “당(唐)”의 영토(領土)가 되었다가, 다시 “글란(契丹)”의 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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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2 / 자치통감(資治通鑑)唐紀18 / 高宗 咸亨四年 / 閏五月,燕山道總管,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 : 당(唐) 고종(高宗) 함형(鹹亨) 4년, 윤 5월에, 연산도(燕山道)총관(總管)이던, 우령군(右領軍) 대장군(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高句驪)의 반군(叛軍)【부흥군(復興軍)이다.】을 호로하(瓠蘆河) 서(西)쪽에서 크게 깨뜨리고, 사로잡은 포로가 수천(數千)인이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新羅)로 달아났다.【註釋 : 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 : 주석(註釋) :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더욱 추워, 호로하《瓠蘆河 : 호로하(瓠蘆河)또는 호하(瓠河)를 말하는 것으로, 고구려(高句驪) 망(亡) 후, 고구려(高句驪) 부흥군〔(復興軍 : 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이다)〕과 당(唐)군과의 치열(熾烈)한 전투(戰鬪)가 벌어졌던 곳이다.》란 물이 있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얼어 두께가 2척(尺)이나 되는데,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만들어 마신다. 당서(唐書)의 유인궤(劉仁軌)전을 상고해보면, 이 호로하(瓠蘆河)는 고구려(高句驪)의 남쪽지경, 신라(新羅)의 칠중성(七重城) 북쪽에 있다.】 時謹行妻劉氏留伐奴城,高麗引靺鞨攻之,劉氏擐甲帥衆守城,久之,虜退.上嘉其功,封燕國夫人.謹行,靺鞨人突地稽之子也,武力絕人,為衆夷所憚. : 이때, 이근행(李謹行)의 처(妻) 유(劉)씨는 벌노성(伐奴城)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고구려(高句驪)군이 말갈(靺鞨)병을 이끌고 공격하자, 유(劉)씨는 갑옷을 입고 무리들을 인솔하여 성을 지키자, 한참 후에, 오랑캐【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을 일컫는다.】가 퇴각하였다. 상(上 : 고종)이 기뻐하며 그 공으로, 이근행(李謹行)의 처(妻) 유(劉)씨에게 연국(燕國)부인(夫人)에 봉하였다. 이근행(李謹行)은 말갈(靺鞨)사람 돌지계(突地稽)의 아들로, 무력(武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오랑캐무리들이 그를 꺼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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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자치통감(資治通鑑) 기록을 보면, 당시(當時) 고구려(高句驪) 영토(領土)를 알 수 있는, 내용(內容)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상상(想像)을 벗어나는 지방(地方)이다.
㉯ 우제돌궐(牛蹄突闕)은 “현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타타르공화국의 북방지대에 있었다.”고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살고 있었던 이곳에, “호로하(瓠蘆河)”가 있었다는 이야기며, 이곳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이며, 따라서 고구려(高句驪)의 부흥군(復興軍)들이 말갈(靺鞨)을 앞세워 당군(唐軍)을 공격(攻擊)한 것이 아니겠는가!
㉰ 더하여 ‘호로하(瓠蘆河)’의 서(西)쪽 지방에서, 우령군(右領軍)대장군(大將軍)이자, 연산도(燕山道)총관(總管)이었던 이근행(李謹行)이 지휘(指揮)한 당군(唐軍)과 고구려(高句驪) 군(軍)과 말갈(靺鞨)이 함께 이근행(李謹行)을 공격(攻擊)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이근행(李謹行)에게 패전(敗戰)한 고구려(高句驪) 부흥군(復興軍)인 <고구려군(高句驪軍) + 말갈군(靺鞨軍)>의 병사(兵士)들 수천(數千)이, 포로(捕虜)로 사로잡히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신라(新羅)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의 두께가 2척이나 되는 동토(凍土)의 땅! 이곳의 남(南)쪽 땅은 “신라(新羅)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 그렇다면 이때 당(唐)나라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당연(當然)히 그 남(南)쪽 지방이다.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당(唐)”나라는 중원(中原)대륙(大陸) 땅에 없었다.」 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알기 위해서는 발상(發想)전환(轉換)이 필요(必要)하며, 이는 원전(原典)을 보면서 더욱 필요(必要)한 일이다.
㉲ 또 중요한 것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다. 「흑거자(黑車子)니 우제돌궐(牛蹄突闕)」이라고 하는 옛 나라들은 잠깐 흥성(興盛)했다가 인접(隣接)나라들로부터 예속(隸屬)된 종족(種族)들로써, 지금(只今)의 지도(地圖)로 보면, “러시아”지방 “우랄산맥(山脈)과 모스크바사이”의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곳까지도 고구려(高句驪)의 세력(勢力)이 미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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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가 전개(展開)된 영역(領域)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솔직히 이게 솔깃하다. ‘동호(東胡)였다’는 “조선(朝鮮)”의 근거지(根據地)와 조선(朝鮮)에 예속(隸屬)된 많은 나라들의 정체(正體)가 무엇이며, 이들이 있었던 땅은 과연(果然) 어디까지일까?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연구(硏究)하다보면, 무엇인가 보일 게다. 그것은 조선(朝鮮)의 진실(眞實)의 역사(歷史) 이야기일 것이다. < 2 편으로 계속(繼續)됩니다 >
2014년 12월 0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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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제돌궐이 소발굽 돌궐이라는 뜻이었군요.
예전에 아시아의 소수민족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요.
대략 30년은 안 된 것 같습니다. 정규방송에서 했던 건데요.
사람이 다리가 마치 소의 발굽 처럼 생긴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을 다루는 내용이 방송에서 2번 봤었는데요.
처음 본 것은 30년 좀 못 되었고 2번째 본 것은 20년이 못 되었습니다.
그들을 소개하면서 근친으로 인하여 열성인자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라고
소개를 하더군요. 실지로 그런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라는 건데요.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것은 그들이 사는 땅이 어디라고 했는데 죽어도
생각이 안 나네요. 확실한 것은 황인종입니다.
그런 방송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호로하"에 대한 설명은 몇 해전에 처음 번역과 해설을 해드린 것인데, 원전에서 계속 등장하다보니 다른 것을 설명하면서 또 설명하게 됩니다. 문제는 호로하의 서쪽에서 당나라군대와 고구려 부흥군들이 격전을 치뤘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고구려의 영토였을때, 가능합니다. 이곳은 우선 동토의 땅이란 공통점이 있으니 러시아 땅 북쪽 끝 지방이 아니면 불가능한 환경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곳의 남쪽지방이 또 신라의 땅이었다는 것인데, 고구려가 망하고 난 뒤, 신라의 땅이 된 곳이죠. 반도사학은 칠중성이며 임진강변에 있다고 해설하죠. 그야말로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려합니다.
@문 무 아이고~!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했네요.
아프리카 타조족과 헤깔린 겁니다.
사십 중간을 조금 넘어가다 보니 이러네요....^^!
작년 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이제 슬슬 폐차 수준으로 가려나 봅니다.
한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이런 실수 않 하겠습니다.....^^!
@마포대사 웃음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관심과 성원, 감사드립니다.
어느덧 12월이 되었습니다. 눈도 제법 내리고 추위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 합니다. 그동안 문무 선생님 강건 하시고,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신지요. 말씀 하신대로 발해, 글란[요], 금, 원나라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와 더불어 그 흔적이 역사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 허구의 역사가 대부분입니다. 조선사의 진실된 역사를 빼고 세계사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세계사의 반은 거짓의 역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글에서 언급 하신대로 선비는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 되었으며, 글란은 선비의 옛 땅에서 종족을 보존 하였습니다.
글란들은 모두 문을 동향으로 하였으며, 이는 거장[車帳]의 법을 따른 것이다. 의 이러한 기록들을 증명하는 유적과 유물들은, 지금도 곳곳의 광활한 지역에서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부만을 말씀 드린다면, 카자흐탄을 거쳐 러시아 대륙의 중앙을 가로질러 우크라이나, 흑해의 일대인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어키에 이르는 지역에 역사의 기록들을 고증 할수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이러한 광범위한 지역에 걸처서 이어지고 있는 석상들은, 모두 동쪽을 향하여 합장 배례하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유적과 유물들은, 역사서의 기록과 그 시대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현재 널리 알려진 고 비석의 형태을 보더라도, 반도 한국의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라고 하는 것과 집안의 광개토왕비의 형태와, 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가면서, 알타이산맥을 거처 흑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 비석들의 형태가, 같은 형식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 비록 이러한 고 비석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없으나, 역사의 기록에서 말하는 여러 내용과 큰 틀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언급했던 내용이나, 이에 대한 역사의 자료가 미진하여 망설여지긴 하지만, 다시 한번 말슴을 드린다면, 불가리아의 중부에 있는 고대 왕릉의 석실과, 경주의 석굴암이 그 천정의 돔에 있어서 아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또한 신라의 황금보검이라고 하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데, 이를 흉노와 연결 시키는 설로부터, 별의 별 소설을 스는 설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인 조선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황당하고 안타까운 현실 입니다.
반도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만을 보더라도, 지금의 반도는, 대륙의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고토이지 초기의 신라와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 입니다. 이는 사서로서도 증명할 수 있으며, 이를 고대의 유적과 유물로 증명 할 수 있는 것이며, 물론 후대에 대륙의 삼한 지역에서 일어난 백제와 신라의 교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는, 역사의 기록들을 따라서 하나하나 역사의 진위를 밝혀 나가다 보면, 조선사 역사의 본 모습은, 거짓과 오욕의 비루함을 털어 버리고, 반드시 광명의 빛으로 스스로 우리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마포대사님!
환국고려님!
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오늘 새벽 출근 길, 가장 추운 날씨처럼 느켜졌습니다. 조선사에 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한데, 이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또 다른 사료로써 고증하려니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퇴근 후에 한, 두시간.......최소한 5시간 정도로 이틀 정도면 한 편의 게재글이 완성될 수 있는데.......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조선사에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는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추운날씨에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당의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도로를 개통하기 위하여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즈음에 심(深)이 와서 성을 치지 말고 빨리 평양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므로, 왕은 이 말을 좇아 장새에 이르렀다가 적(勣)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동사강목(東史綱目) 제4상 정묘년 ~~~>
위의 동사강목의 내용이 왜곡이 아니라면 칠중성과 평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칠중성은 반도 임진강변에 있다고 합니다. 호로하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봅니다. 다만 반도사학에서 칠중성이 있는 임진강이 호로하라고 할 뿐이죠. 호로하의 서쪽으로 고구려 부흥군이 진격, 당의 이근행은 당시 연산도총관이었는데, 연산도가 반도 땅에 있었을까요? 또 이근행의 처 유씨는 벌노성에 머무르고 있는데, 역시 말갈병을 앞세운 고구려부흥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고구려군이 공격하다가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때 당 고종이 이근행의 처에게 내린 것이 "연국부인"입니다. 연산이 어디에 있으며, 연국과 연산도는 연산주위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칠중성이나 호로하는 반도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곳의 남쪽지방에 "글란"들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글란"이 현 하북성이나 그 북방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라고 봅니다.
@문 무 그렇습니다. 반도와는 아무관계가 없죠.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것은 아님니다. 대륙의 어느곳이든 평양과 호로하가 비교적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사강목의 내용이 왜곡이 아니라면 말이죠....
@맑은영혼 그리고 우제돌궐이 우랄산맥 서쪽에 있고 그 땅에 고구려 부흥군과 당과의 전투지인 호로하가 있으며 그 호로하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라면 고구려, 당, 신라, 우제돌궐의 국경(?)은 어떻게 그릴수 있는지요... 또 이근행(燕山道 總管)처 유씨에게 연국 부인(燕國夫人)에 봉하였다 함은 연나라 땅과도 관계있다는 것인데, 연나라땅은 조선의 연행사들이 갔던 곳입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천산 서쪽일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림을 그릴래도 참 어렵습니다.
고구려의 전신이 북부여 북부여의 전신은 부여 부여의 전신은 환인 이고 환인은 외계인 입니다 환인들은 지구로 와서 소 말 개 양 도야지로 새로운 인종개발을 하였지요 이른바 오가제도 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온 디엔에이와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우제돌궐은 소인데 농업을 목적으로 창조 되었다고 생각 됩니다
우제돌궐인들의 다리가 소와 같았다는 내용은 믿기 어렵읍니다. 더구나 새로운 인종개발을 하는데 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지 사람도 짐승도 아닌 반인 반수로 만들겠읍니까...
다만 추측하건데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고 변변한 신발도 없었을 것이니 그들이 키우던 소를 잡아 그 다리를 잘라 속을 파 내고 신발(장화같은)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예! 정답일 것입니다. 워낙 추운지방이니 소가죽등으로 다리를 두번 세번 싸매고 다니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소다리처럼 여길 수도 있겠지요. 아마도 그래서 우제돌궐이란 이름이 나라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가죽과 가죽사이에 보온재를 넣고 두번 세번 싸매면 추위를 막을 수 있는 훌륭한 겨울내기 준비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 회원님들의 괸심과 성원에 감사드리며, 추운 계절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소 중에서 제일 큰 소가 있는데 셀라당(가우어), 반탕 등등이 있는데 일반 물소들 보다 한배 이상 큽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벽창우 같은 존재인데요. 우제 돌궐이 사는 곳에는 이 소들보다 큰 놈들이 없습니다.
이 소들을 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으로 해도 사람이 신발로 쓰지는 못 합니다. 발굽과 가죽이 분리가
되겠지만 그 전에 발굽이 사람의 발 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마포대사 제 이야기는 소가죽을 잇대어 다리를 감싸는데, 다리와 가죽사이에 털이나 옷감등을 넣으면 보온재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추위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죽신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소가죽은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잖습니까.
@문 무 선생님에게 안 물어봤는데요....ㅋㅋㅋ
농담입니다. 문제는 이 우제돌궐이 소발굽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흔히 소발굽과 같은 놈들을 우제목 유제류로 분류를 합니다.
우제 돌궐고 추측을 했는데 본문을 보니 정확하게 발굽제자를 썼더군요.
단순하게 소가죽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요. 발굽이 소처럼 생겼다라는 것이
포인트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 추운 곳에는 소가 없습니다. 소는 남방계 동물이고요.
버팔로 같은 놈들은 좀 다른 종이고요. 가만 보면 우리 벽창우가 소중에서 제일 큰
놈일 것 같네요...^^! 우각돌궐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우제돌궐이기 때문에 맑은영혼님도
다리를 파내고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추측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마포대사 만약에 엘크(마록, 누렁이)보다 더 큰놈이 살기는 삽니다.
말코손바닥사슴(와피티)라고 하는 놈인데 그놈이라면 어쩌면
가능도 하겠습니다. 어깨 높이가 2m넘는 놈들이니 발굽이 사람 발 정도는
될 듯 합니다. 발굽도 소발굽 처럼 생겼으니 색만 다르지 영락 없는 소발굽이죠.
조금 더 찾아봐야 할 듯 합니다. 이놈들은 전형적인 북방종이라 남쪽에는 없는 놈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우제돌궐인들의 다리가 소와 같아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이 생태학적으로 진짜 소의 다리와 같이 털도 많이 나고 발도 소의 발굽처럼 생겼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제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추정하건데 그들도 맨발로 다닐수 없으니 신발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들이 키우던 가축(소, 순록...)의 일부를 잘라 적절한 가공을 거처 장화와 같이 길게 만들어 신고 다녔을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위에 소의 다리속을 파내어 신었을 것이란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