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해달별사랑
 
 
 
카페 게시글
한국문화유산자료 스크랩 문화재 한국 관음성지(觀音聖地)
으뜸빛 추천 0 조회 49 12.11.13 07: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 관음성지(觀音聖地)

 

남해 금산 보리암
우리 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683년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 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이라 한데서 착안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라고 하였다. 그 후 1660년 현종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하여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한 것이다.

 

서해 강화 보문사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 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동해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홍련암이 창건된 때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으로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이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 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금오산 향일암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오산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호젓이 자리하고있다. 절의 왼쪽으로는 보리암과 감응도가 보이고 앞으로는 세존도, 오른쪽으로는 미타도와 관음동굴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8년(65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했다.

 

월출산 무위사
전남 강진군 월출산 무위사는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였는데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더구나 617년은 원효대사가 출생한 해이므로 사적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성덕산 관음사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기슭에 관음사가 있다. 금랑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관음사는 백제 분서왕 때인 308년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樂安浦)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했다고 한다.

 

설악산 오세암
강원도 인제 설악산 만경대 아래에 있는 오세암은 백담사의 산내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10㎞ 지점,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 고갯길로 가노라면 오세암이 있다. 오세암이 창건된 것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두타산 관음암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관음암이 자리하고있다. 관음암의 원래 이름은 지조암이었다고 한다. 921년(고려 태조 4)에 창건되었으며,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남해 금산 보리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683년(신라 문무왕 3)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放光)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普光宮)이라 한데서 착안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고 하였다. 그 후 1660년(조선 현종 1) 현종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하여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한 것이다. 1901년에는 낙서(樂西), 신욱(信昱)스님이, 1954년에는 동파(東波)스님이 각각 중수하였고, 1969년에 양소황(梁素滉)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사찰 옆에는 이성계가 기도했던 자리인 ‘이씨기단(李氏祈壇)’이 있는데 매년 가을 전주이씨종친회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이름이 바뀐 금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창건하기 전, 이성계는 전국의 이름난 성지에서 기도를 올렸다. 계룡산과 지리산에서의 기도가 응답이 없자 보광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나의 기원을 들어준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산신령에게 약속했다. 기도의 영험이 있었던지 이성계는 훗날 개국해 왕이 되었다. 나라를 새로 열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기도했던 남쪽 끝의 작은 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약속도 생각났다.

그러나 비단으로 산을 덮는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으나 약속한 것을 어쩔 수는 없어 태조는 묘책을 짜내고자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신하들도 뽀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 후 어느 신하(정도전<鄭道傳>이라는 설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해도 그 산을 비단으로 직접 감싸지는 못합니다. 어명을 내리어 이제부터 산 이름을 비단 금(錦), 뫼 산(山)자로 해 금산이라 부르게 함이 옳을 줄 압니다. 뭇 사람들이 그 산을 금산이라 부르면 실제 비단을 두른 것이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묘책이었다. 이후 보광산이란 명칭과 함께 금산이 혼용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대부분 금산이라 쓰여지고 있다.

보리암에는 현재 보광전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의 당우가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관음상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모셔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상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보리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이다. ‘빛(光=깨달음)을 널리 펴겠다’는 의미를 가진 보광전은 바로 관음보살의 중생구제 원력을 현실화시킨 당우다. 칠난삼독(七難三毒)에서 미혹한 중생들을 인도하겠다는 서원이 담긴 건물이다. 보광전 뒤편에 있는 간성각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 옆에 있는 산신각도 간소하기는 마찬가지다.

보광전 맞은 편 바위 끝에 있는 해수관음상은 헬리콥터로 이곳에 이운될 때 찬란한 서광을 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 옆에 있는 3층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보주(寶珠)만이 놓여 있다. 높이는 2.3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며 원효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세울 때 건립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보리암의 기도는 하루 네 번, 한번 시작하면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된다. 오전 3시 30분과 9시, 오후 2시와 6시 30분에 시작되는 기도시간에 맞춰 사찰측은 수송차량을 남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운행한다. 장기(長期) 기도를 올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요사채를 기도객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

 

 

강화 낙가산 보문사(普門寺)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 는 절 이름을 갖고있다. 고려 현종 1년(1095)에 중국 자은종(慈恩宗) 소속의 혜인(惠忍)스님이 31인의 성인과 함께 낙가산의 성굴(聖窟)을 친견하고자 고려 조정에 간청하였나 조정에서는 친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 조정에서 그만큼 신성시하고 보호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보문사는 1812년(순조 12)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으로 이뤄진 대대적인 불사로 중흥의 기틀을 다진다.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원(大圓)스님이 화주가 되어 관음전을 중건했다. 그 후 1928년 주지 선주(善周)스님의 원력으로 마애관음보살상 조성불사가 이루어져 보문사는 명실공히 전국적인 관음기도 도량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법당, 관음전, 종각, 석실 등이 있다. 석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한 어부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그물에 걸려 올라온 22위(位)의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석실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설치돼 있고, 동굴 안에는 21개소의 감실이 마련돼 있다. 석실 법당 좌측 위에 천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암반인 천인대가 있다. 길이 40m, 촉 5m의 위용을 자랑하는 천인대는 이 절 창건 당시 인도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마애관음보살상은 절에서 1km 가량 뒤쪽으로 올라간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높이 32척, 너비 11척인데, 각각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 낙조에 붉게 물드는 보살상의 모습은 관음진신 바로 그것이다. 고해(苦海)에 허덕이는 중생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는 대비보살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보살상을 덮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눈썹바위는 보살상을 외호하는 천혜의 지붕으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사의 볼거리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다. 수령(樹齡) 600년이 넘은 향나무는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 32m, 둘레는 굵은 곳이 2.8m이며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나무와 성보문화재들이 보문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낙산사 홍련암(紅蓮庵)이 창건된 때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으로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625~702)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이다. 창건연기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제3권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따르면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 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은 창건당시부터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여의주를 바친 용(龍)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뒷날 원효스님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를 찾았으나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낙산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소실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뜻있는 이들의 원력으로 관음성지의 맥을 이어왔다. 고려 초기에는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으나 관음상만은 약간의 화를 입었다. 1468년(조선 세조14) 세조가 학열(學悅)스님으로 하여금 중창하게 했다. 1631년(인조 9) 화재로 다시 불타자 종밀(宗密). 학조(學祖)스님이 중건했고, 1643년(인조 21) 다시 불타자 도원(道源), 대주(大珠)스님 등이 중건했다. 현대에 들어 오현(五鉉), 지홍(知洪)스님 등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보타전과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 ·마두(馬頭)관음 ·11면관음 ·준세(准提)관음 ·여의륜(如意輪)관음의 6관음과 관세음보살 32응신상(應身像) 등을 봉안했다.

낙산사와 관련된 영험담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梵日)스님의 정취보살 친견기와 춘원 이광수가 소설로 꾸몄던 조신(調信)의 설화다.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간 범일스님이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는 스님으로부터 명주 익령현(지금의 양양)의 덕기방에 집을 지어주라는 청을 받았다. 847년(문성왕 9)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범일스님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선(禪)을 전하기에 여염이 없었다. 그 뒤 10년이 지난 858년 2월 15일 밤, 중국에서 보았던 귀가 없는 스님의 꿈을 꾼 범일스님은 잠을 깬 즉시 익령현으로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물 속에 금빛 나는 돌부처가 있었는데, 왼쪽 귀가 없는 것이 중국에서 만난 스님의 모습과 똑같았다. 정취(正趣)보살이었던 것이다. 낙산 위에 3칸의 불전을 지어 모셨다. 정취보살과 관음성지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그 비밀이 있다. 선재동자가 도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 스물 여덟 번째로 만난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스물 아홉 번째로 만나는 분이 정취보살이다. 홍련암에는 신비로운 창건설화를 이어가기라도 하듯 이적들이 계속 나타났다. 1185년(고려 명종 5) 병마사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관음굴 앞에서 분향하고 배례했을 때 청조(靑鳥)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렸다. 관음굴 앞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예배하면 청조가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1683년(조선 숙종9)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는 공중에서 한 알의 명주(明珠)가 내려오는 이적이 있기도 했다. 이를 목격하고 환희에 찬 석겸(釋謙)스님은 곧 사리탑을 건립하고 탑의 이름을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라 했다. 1694년에는 사리탑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공중사리탑비를 세웠다. 현대에 들어서는 1930년 2월 25일, 현대 고승 경봉(鏡峯)스님이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시작했는데 13일째 되던 날 찬선 중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큰 정진력을 얻었다한다. 스님은 이러한 인연으로 낙산사 원통보전과 홍련암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낙산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이다. 돌과 기와 흙을 함께 이용한 낙산사의 담은 소박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그밖에도 세조 12년(1466)에 세운 홍예문, 최근에 다시 중수한 의상대, 1972년에 착수해 5년 만에 완공한 해수관음상 등도 관음도량 낙산사를 돋보이게 하는 문화재들이다. 낙산사와 홍련암은 하루도 빠짐없이 4분정근을 한다. 시간은 새벽 4시, 오전 9시 40분, 오후 2시, 저녁 7시다. 특별한 기도를 원할 때는 시간을 정해서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천 금오산 향일암

 

향일암은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오산(金鰲山)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호젓이 자리하고있다. 절의 왼쪽으로는 보리암과 감응도가 보이고 앞으로는 세존도, 오른쪽으로는 미타도와 관음동굴이있다. ‘해(日)를 바라본다’는 절 이름에 걸맞게 향일암의 아침 해돋이는 장관이다.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8년(65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圓通庵)이라 했으며, 고려 제4대 광종 9년(958) 윤필(允弼)스님이 산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金鰲庵)이라 개명했다. 그 뒤 조선 숙종 41년 인묵(仁默)대사가 주석하면서 금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49년 무렵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책육암(策육庵)이라 하였고, 근래에는 경봉(鏡峯, 1892~1982)이 영구암(靈龜庵)으로 이름을 고쳐 현판까지 써주었다. 향일암은 이렇게 여러 차례 사찰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먼저 원통암은 관음보살이 지닌 원통자재의 위신력을 의미하는 말로 사찰이 곧 관음도량임을 나타낸다. 금오암과 영구암은 모두 거북이와 관계 있는 이름이다. 현재 절이 위치한 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절경이며 바위들이 거북이 등 같이 금이 있고, 지형자체가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서 이런 이름들이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책육암이라는 이름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책육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의식)의 옳지 못한 행위를 경계한다는 수행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또 거북이의 목과 네 다리, 꼬리를 모두 합하면 여섯이 되므로 사람의 육근을 여기에 비교하여 거북이가 위급할 때 고개를 집어넣고 발을 감추고, 꼬리를 사리는 모습처럼 사람도 조심해서 수행하라는 의미도 있다. 향일암은 현재 대웅전, 관음전, 용궁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으로 사격(寺格)을 이루고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1987년에 조성한 청동석가모니불과 관음, 지장보살이 모셔져있다. 1988년에 조성한 영산회상도와 금니(金泥)로 채색한 신중탱화, 1983에 만든 소형 범종 등도 봉안되어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일명 흔들바위는 마치 경전을 펼쳐 놓은 듯한 형상인데, 이 바위를 한 번 흔들면 경전을 사경한 공덕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음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있다. 1991년에 조성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고, 관음전 옆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동자상이 있다. 향일암은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는 절이다.

 

 

강진 월출산 무위사

 

전남 강진 월출산(月出山) 무위사는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였는데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더구나 617년은 원효대사가 출생한 해이므로 사적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이름을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국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했다고 하지만 선각국사는 이미 917년에 입적했으므로 사실과 거리가 있다.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절 이름을 무위사로 정했다. 무위사는 10세기 이전에 창건되어 도선국사가 머물던 시기에 사세(寺勢)를 확장한 것으로 보고있다.

임진왜란 때에도 화를 입지 않아 웅장함과 화려함이 전라도 사찰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무위사는 그 후 점차 퇴락하여 영조 15년(1739)에 이르러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 천불전, 시왕전 만이 남게된다. 일제시대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셨으며, 1974년 벽화보존각과 해탈문, 분향각(焚香閣), 천불전, 미륵전 등을 중건했다. 무위사의 큰 자랑거리인 극락보전은 1430년(조선 세종 12)에 지어졌다.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래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는 당시 무위사가 수륙사(水陸寺)로 지정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한다.

무위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바로 극락보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이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강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淨甁)을 들고 노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주변에는 물결이 표현돼 바다 위에 떠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불이 8여래와 8보살을 이끌고 죽은 이들을 맞으러 나오는 광경을 그린 아미타래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해수관음상좌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비천신인도 등 30여 점이 보존돼 있다. 모두 고려 불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불화들로 극락보전에 있는 아미타삼존도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극락보전 오른편에 있는 선각대사 형미(泂微)의 부도비도 매우 아름답다. 946년에 건립된 부도비는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 비신머리가 모두 온존하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 작은 깃이 달려 있다. 코가 벌름하고 윗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으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이빨과 혀가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비의 주인공 선각대사 형미(864~917)는 광주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하여 보조체징(普照體澄)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무위사에서 머물던 형미는 이후 철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곡성 성덕산 관음사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기슭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금랑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관음사는 백제 분서왕 때인 308년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樂安浦)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장님 원랑(元良)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용모가 수려하고 효성이 지극한 홍장(洪莊)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밖으로 나갔다가 홍법사의 화주승 성공(性空)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보는 스님이 빈털터리인 원량에게 한사코 시주를 청했다. 불사의 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마지막 회향하는 어젯밤 꿈에 부처님께서 오늘 동네에서 장님을 만날텐데 그가 대화주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원량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설명하고 다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대작불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홍장은 아버지와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통하게 울었다. 홍장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약속한 것을. 홍장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스님을 따라 나섰다. 난생 처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소량포에 이르러 잠깐 쉬어 가기로 하고 언덕에 앉아 있는데, 바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붉은 배 두 척이 나타나 홍장에게 다가왔다. 중국의 배였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언덕에 앉아 있는 홍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예를 갖추고 말하길 “참으로 황후마마이십니다.”하는 것이었다. 홍장은 물론 성공스님도 깜짝 놀랐다.

“저희는 진(晋)나라 사람입니다. 최근 왕후께서 돌아가신 후 임금님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이미 동국 백제에 탄생하여 성장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하니 가신 이를 생각하고 과히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했답니다. 이에 저희들은 황명을 받자와 동국으로 오던 중 여기서 마마를 뵈옵게 된 것입니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한숨을 쉬며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다만 아버님을 위해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어 드리고자 스님과 가고 있는 중이니 배에 실은 폐백을 모두 스님께 바치면 기꺼이 가겠나이다.”고 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자신의 원불(願佛)로서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아침저녁으로 모시다가 고향 백제를 그리는 마음에서 석선에 실어 보내면서 “관음보살이여, 인연 따라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淨業)을 닦아 소원을 성취하게 하여주소서”라는 원력을 세웠다. 그 배는 바다에 표류하기를 한 달만에 홀연히 낙안(樂安)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이 때 옥과(현 곡성군 오성면)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배 안에 번쩍이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경스런 마음이 생긴 성덕은 보살상을 어디든 좋은 자리를 찾아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인 옥과로 향했다. 관음상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도중에 열 두개의 정자를 만나 쉬어 갔다.

막상 고향 가까이 왔으나 관음상을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았다. 9일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다시 관음상을 업고 성덕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태산처럼 관음상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덕은 관음상을 모실 곳이 가까워 옴을 알고 주위를 살피니 마침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져 있고, 가운데는 집짓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터를 잡고 관음상을 모셨다. 바로 현재의 전남 곡성군 오산면(梧山面) 선세리(善世里) 성덕산 관음사 자리다. 성덕은 나무 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관음사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조석으로 드렸다. 후세 사람들은 주산(主山)을 처녀 성덕의 이름을 따서 성덕산이라 하였으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는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80여 동의 건물을 자랑하던 거찰이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832년(순조 32)에 큰 홍수가 일어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1936년 청운스님의 발원으로 중건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에 창훈스님이 근처에 있는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와서 원통전을 중건하였다. 최근에는 1982년 중환스님이 천왕문을 복원하였다.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등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에는 원통전이 국보 제273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4호로 지정되었으나 전쟁으로 둘 다 없어졌다. 사찰 일대는 현재 전남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있다.

 

 

인제 설악산 오세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 아래에 있는 오세암(五歲庵)은 백담사의 산내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10㎞ 지점,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 고갯길로 가노라면 오세암이 있다. 뒤로는 관음봉이 병풍처럼 외호하고 오른쪽에는 만경대가 굽어보고 있다. 앞으로는 용아장성릉이 삿된 기운을 막는 듯 오세암을 안고있다. 오세암이 창건된 것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른 것이 오세암의 시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도 1445년(조선 세조 1) 여기서 출가했다. 이후 오세암은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스님에 의해 크게 중건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금강산에서 수도하다가 불교중흥의 큰 뜻을 품고 이곳에서 기도하던 보우스님이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고 난 직후 암자를 중건한 것이다. 그 뒤 1643년(조선 인조 21)에 설정(雪淨)스님이 중수한 다음부터 암자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뀌고, 5세 동자와 연관된 유명한 관음영험설화도 이 때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설정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데려다 암자에서 키우고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된 10월의 어느 날, 스님은 월동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 조카를 위하여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 스님은 아이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스님은 절을 떠나 장을 본 뒤 신흥사에 다다랐다. 다음날 돌아가려고 일찍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이 엄청나게 쌓여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눈 높이에 비례해 스님의 속도 점점 시커멓게 타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허나 길이 막혔으니 어찌하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만 드렸다. 억지로 가려고 하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말렸다. 무정한 시간은 그 사이에도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도 거의 녹았다. 서둘러 걸망을 챙긴 스님은 나는 듯이 달려 암자에 들어섰다. 달려가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스님은 정신없이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 후 까닭을 물었다.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 그 때 갑자기 환한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감격한 설정스님은 다섯 살의 동자가 관음보살의 가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 이렇게 하여 다시 태어난 오세암은 이후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865년(고종 2) 남호(南湖)스님은 해인사 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한 질은 오대산 상원사에, 한 질은 오세암에 봉안하였다.


1898년에는 인공(印空)스님의 주도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도량이 되어 무려 18년 동안이나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외에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사격을 일신했던 오세암은 한국전쟁 때 거의 모든 당우(堂宇)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 1992년 지우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백의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산신각, 요사채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있다. 오세암은 관음기도 도량이기도 하지만 김시습으로 널리 알려진 설잠(雪岑)과 만해 한용운 스님이 거(居)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험이 가득한 오세암은 영험이 가득한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해 두타산 관음암

 

두타(頭陀)라는 말은 원래 범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으로써 의 · 식 · 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듯 동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두타승(頭陀僧)처럼 엄격히 느껴지는 이 산에 있다.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관음암이 자리하고있다. 관음암의 원래 이름은 지조암(指祖庵)이었다고 한다. 921년(고려 태조 4)에 창건되었으며 항간에는 용비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나 용비(龍飛)는 임금이 등극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934년(태조 20) 태조 왕건은 통일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이름을 바꾸면서 삼화사에 노비와 사전(寺田)을 하사하였다. 삼화사는 이를 발판으로 산내에 8개의 암자를 창건하는 등 급격히 사세가 신장하였는데, 이 때 관음암도 중건된 것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 불탄 것을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이 주선해 중건했다. 현재 남아있는 삼화사의 유일한 산내암자이다. 관음암은 작은 관음상을 모시고 있는데 예로부터 그 영험함이 소문나 동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지금도 사시사철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이 암자를 중건하면서 아예 이름도 관음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관음암에 얽힌 영험설화를 살펴보면, 옛날 아랫마을에 심(沈)씨 성을 가진 총각이 늙고 병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심총각은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착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결혼을 못해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심총각은 삼화사 뒤 두타산과 청옥산에 약초를 캐서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약초를 캐로 갈 때면 늘 산중의 작은 암자 앞을 지나갔다. 이 암자에는 스님 한 분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심총각은 매일 같이 암자 앞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님의 염불소리를 조금씩 흉내내게 되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다가도 문득 목탁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어느 날 심총각은 약초를 캐고 내려오는 길에 기도하는 스님한테 불쑥 물었다. “스님, 관세음보살한테 기도를 하면 정말로 소원이 성취됩니까?” 스님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백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해도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내가 자네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겠네” “스님,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약속했습니다.” 총각은 그 날부터 산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법당에 들려 관세음보살 앞에 세 번 절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며 기도를 했다. 어느 날 점심을 싸 가지고 간 강냉이를 관세음보살 앞에 공양으로 올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산나물을 뜯어 관세음보살 앞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석 달 가까이 하다 보니 비록 말 없는 불상이지만 친숙함이 느껴졌다.

어느덧 백일이 다되어가던 어느 날 심총각은 산으로 들어가다가 암자에서 큰 비를 만났다. 법당 추녀 밑에 앉아 비 그치기만을 기다리다 무료해져서 맨땅에 줄을 그어 놓고 혼자서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두는 꼬니라 재미가 없었다. 총각은 문득 법당의 관세음보살을 바라보면서 “관세음보살님, 저하고 꼬니 한판 두시렵니까?” 관세음보살이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총각은 혼자말로 다시 말했다. “우리 내기를 합시다. 내가 이기면 보살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시고, 보살님이 이기면 내가 보살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지요. 제 소원은 예쁜 색시를 얻어 장가를 드는 것이니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보살님은 무엇이 소원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말씀해주세요. 꼬니는 세 판을 두어서 두 판을 먼저 이기면 승부가 나는 것으로 합시다.”

총각은 혼자말로 약속을 하고는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첫 판은 총각이 이겼다. 둘째 판은 관세음보살이 이겼다. 셋째 판은 막상막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선수는 관세음보살이 잡고 있었다. 장고를 하던 관세음보살이 드디어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승부가 나는 수였다. 심총각은 한 수 물리자고 억지를 부렸다. 관세음보살은 묵묵부답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총각은 벌떡 일어나 법당의 관세음보살한테 절을 세 번 하고 절값으로 한 수를 물리겠다고 했다. 심총각은 얼른 한 수를 물리고 다시 두자 이번엔 보살이 지고 총각이 이겼다. 총각은 찬을 쓸어버리며 관세음보살에게 말했다.

“보살님,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죠. 예쁜 색시한테 장가보내 주시는 겁니다.” 총각은 관세음보살님한테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비가 그치고 저녁노을이 들기 시작했다. 총각은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그날 밤 심총각은 꿈에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 “나는 지조암에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오늘 너하고 꼬니를 두어서 졌으니 약속대로 예쁜 색시를 얻어 주겠다. 내일 약초를 가지고 장에 나가면 어떤 처녀가 약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 처녀에게 약을 팔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꿈을 깨니 벌써 아침이었다. 총각은 약초를 들고 장에 나가 전을 펴고 앉았다. 조금 있으려니 처녀가 약을 사러 왔다.

“이 약이 두타산에서 캐온 것인가요? 지금 저희 아버지께서 몹시 위중하신데 이 약을 달여 먹으면 나을 수 있답니다. 저에게 이 약을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처녀는 약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돈을 가지고 오지 못했으나 반드시 갚겠다며 막무가내로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심총각은 할 수 없이 얼굴도 모르는 처녀에게 약을 외상으로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왠지 기분이 좋았다. 며칠 뒤, 날이 어둑어둑 지는데 문밖에서 사람 찾는 소리가 났다. 총각이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며칠 전 장에서 만난 처녀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서있었다. 노인은 죽을 사람에게 약을 공짜로 준 총각을 치하하며 약값을 갚으러 왔다며 약값을 물었다.

“약 값이 좀 비쌉니다. 노인장의 딸을 저에게 주시면 약값으로 받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노인은 약간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심총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몸도 건강하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이리하여 심총각은 드디어 장가를 들게 됐다. 드디어 꿈같은 첫날밤, 심총각은 아내의 옷고름을 풀며 지나간 세월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지조암 관세음보살하고 꼬니를 둔 얘기며, 그날 밤에 꾼 꿈 얘기를 털어놓았다. 남편의 얘기를 들은 아내도 비슷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저도 지조암 관세음보살님한테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했지요. 기도가 끝나던 말 꿈을 꾸었는데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장에 가보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날이 밝자 손을 잡고 절을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서 세 번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살펴보니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난 귀부인의 얼굴과 똑 같았다. 그제서야 지조암 관세음보살 앞에 무수히 절을 하며 소원을 이루게 해준 것에 감사했다. 그 후부터 이 암자에는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여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http://www.pokyo.net/sachal_html/han.files/han5-5.htm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