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연군지정, 왕방연
신 웅 순
세조는 1457년 6월에 단종을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시켰다. 10월에는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시켜 사약을 내렸다. 이 때 금부도사로 유배길도 호송하고 사약을 들고 간 이도 왕방연이었다.
청령포에 단종을 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곡탄 언덕에 앉아 여울물 소리를 들으며 이 시조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자시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사모하는 님을 두고 와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며 밤길을 가는구나. 단종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이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왕방연은 사약을 들고 차마 단종의 처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머뭇대자 나장이 재촉했다.
“ 어명이오.”
단종은 관복을 갖추고 금부도사에게 까닭을 물었다.
“ 금부도사가 또 어인 일인가? ”
왕방연은 말도 못하고 뜰에 엎드려 흐느낄 뿐이었다.
단종 곁을 시중들던 공생(貢生)이 공을 세워볼까 금부도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청했다. 공생은 활시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문틈 뒤로 올가미를 단종의 목에 걸어 힘껏 잡아 당겼다. 단종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천근의 몸을 부렸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단종은 무거웠던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그대로 강물에 던져졌고 그날 밤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검은 안개비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단종을 죽인 공생은 몇 발자국 걷다 피를 토해 죽었다. 단종을 모시고 있던 궁녀들도 강물에 몸을 던졌다. 단종과 궁녀의 시신이 강물에 떠 있었으나 수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멸문지화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호장 엄홍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죽음을 듣고 대성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에 무덤을 마련해주었다. 지금의 장릉이다.
이후 영월에 부임하는 부사들은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어느 누구도 영월 부사로 가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소문은 궁중은 물론 조선 팔도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나갔다.
영월 부사를 자청한 이가 있었다. 부임 첫날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관복을 차려 입고 밤늦게까지 관헌에 앉아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한바탕 바람이 불더니 순간 불이 꺼졌다. 대들보가 흔들리고 선반 위의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 후 소년 혼령이 수십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뚜벅 뚜벅 동헌 마루로 올라갔다. 단종의 영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부사는 동헌 마루로 내려가 예우를 올리고 하회를 기다렸다.
“ 나는 공생의 활시위에 묶여 목숨을 잃었다. 목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으니 이 줄을 풀 어 달라.”
“ 저는 임금님의 옥체가 어디인지 모르옵니다.”
“ 엄홍도라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라.”
한 바탕 바람이 불더니 혼령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침이 되었다. 사람들은 장례 준비에 바빴다. 죽은 줄만 알았던 부사가 관복을 차려입고 동헌에 고추앉아 있지않은가. 엄홍도를 불렀다. 매장한 곳을 파보니 용안은 변함이 없었고 목에는 가느다란 활시위가 감겨져 있었다. 부사는 단종을 모시고 정중히 제사를 지내주었다. 영월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영조조에 이르러 엄홍도에게 공조참판을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주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주었다.
세상에 어찌 충신․열사가 없으리요마는 정축년의 충렬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으리요. 슬프도 다. 그 당시에 어찌 도신과 수령이 없었으리요마는 또한 아랑곳이 없었거늘 일개 호장의 몸으로 서 능히 큰 절개를 이룩하였으니 어찌 장하다 아니 하리요. 아아, 사육신은 비록 임금을 받드는 성심에서 일을 계획하였다할지라도 영월호장이야 무슨 바람이 있어 여러 친척들의 만류에도 돌 보지 않고 이런 일을 감행했는가. 이러한 아름다운 일을 백세에 전하여 그 충의를 빛나게 할지어 다.(이가원,「이조명인열전」(을유문화사,1965),60쪽.)
왕방연은 생몰 연대 미상으로 조선 초기 문신이다. 사육신,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은 결국 단종의 유배와 사약으로 이어졌다. 심부름꾼, 금부도사가 무슨 힘이 있으랴만 그래서 나온 시조이기에 더더욱 애틋하다.
영월에는 청령포의 단종어소,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이라 새겨진 금표비, 단종의 비참한 생활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는 600년이나 되는 관음송, 사약을 받은 자리 관풍헌, 달 밝은 밤 단종이 자규시를 읊었다는 자규루 등이 있다. 그리고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여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 엄홍도의 충절을 새긴 정려각, 청령포에 새겨진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 그리고 장릉이 있다.
한 밤중 자규의 울음 소리는 듣는 이를 처연하게 만든다. 누각에서 듣는 자규 울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17세에 자규 울음을 들었을 단종을 생각해본다.
『장릉지』에 전하는 단종의 자규시 한 수를 싣는다.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 없어라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 눈물은 흐르고 골짜기에 지는 꽃은 붉구나
하늘도 저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 젖은 내 귀에는 잘 들리는가.
- 단종의 「자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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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소재.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하여 관음송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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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죽루.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984-3 및 984-1 소재.단종이 자규사,자규루시를 읊은 후로 자규루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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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이비각은 엄홍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출처 : 신웅순, 『시조는역사를 말한다』(푸른사상,2012),180-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