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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학창시절 이 책을 구입한지 는 오래 니이체가 이 책을 날을 세워가며 읽었다는 말을 듣고 불후의 명저이자 이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 중의 하나라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자 했다.
내 생의 한 장을 이룬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사상관과 생활상에서 그는 한 존재의 의지와 표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의지의 세계인데 인간에게는 표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표상(Vorstellung)의 독일어 원어의 의미는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물님은 그리스도인의 생이란 바라봄이 아니라 되어감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표상이라는 말은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단지 봄에 국한한 것이아니다.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인식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말로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로 경험하는 바로 이 세계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표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세계를 지금과 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에게 표상으로 드러나는 이 세계가 그 본질로는 의지라는 것, 즉 세계의 본질은 의지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설명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모든 만물과 생명을 지금 실재하는 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 생명의 원리. 생명에너지 즉 자연 속의 모든 힘을 말한다. 의지는 항상 사물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의지는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가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현상한 것이 바로 세계이다. 세계에 있는 것 중 의지의 성질이 가장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중력이나 원심력, 자기력 같은 자연력이다. 무기물이나 식물에서 드러나는 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의욕과 욕망 등이 모두 의지에 의한 것이다. 돌 바람 등 생명력이 없는 사물은 의지가 낮은 단계에서 구현된 것이고 생명체는 의지가 높은 단계에서 구현된 것이다.
의지가 구현되는 것 즉 의지가 세계로 드러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주관화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화 된다'고 표현한다. 객관화된다는 것은 모두가 절감할 수 있도록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인식의 조건상 주관과 객관이 구분될 수 밖에 없기에 인간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을 인식하지만 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아닌 의지다. 의지는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인과율에 입각해 객관화되어 다양한 표상들의 형태로 나타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고 인과의 원리에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인과의 원리와 관계된 것이 충분근거율(충족이유율)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가 생성, 인식, 존재, 행위의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드러나는 세계이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결합을 찾게 되어 있고(생성의 충분근거율), 이성의 논리 규칙에 따라 인식하고(존재의 충분근거율), 동기가 있어서 행위하게 된다(행위의 충분근거율),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근거율을 통해 파악한다.
그런데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비애와 고통이 나타난다.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의지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과율에 따라 개체로 되면 개체와 개체의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의지의 이유 없는 움직임에 의해 개체들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의지의 힘으로 생명을 보존해 가는 동물을 통해 우리는 의지의 작용을 엿볼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은 그것이 동기없이 일어나고 표상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며 인식이 없어도 의지가 작용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신체로부터 자유로운 머리를 가진 덕에 가장 고등한 표상 능력을 가졌고 그래서 자신의 의지현상까지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함보다 이러한 고등의 표상능력이 오히려 인간에게서 고통과 고뇌의 원인이 된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의지현상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통이 생기기 때문이다.
눈이 빛을 받아서만 시력을 발휘하듯이 의지는 동기에 의해서만 가시적으로 되는데 인간에게 동기가 생기는 것은 바로 신체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신체를 표상으로 된 의지, 생명의 원리인 의지가 가시화되는 마당이라고 본다. 인간의 신체는 세계의 다른 측면인 의지가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해 주는 매개체이다. 치아, 목, 장은 식욕이 객관화된 장기이고 생식기는 성욕이 객관화된 장기이고 개인의 자태는 의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 성격이 드러난 것이다.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지는 않기 때문에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런데 개인의 성격은 의지가 그렇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는 아무리 결심하고 성찰해도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싫어하는 그 성격을 유지하면서 의지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은 이 의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의지의 지배로 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의지에 따르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충분근거율과 무관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예술을 통해서는 의지에 사로 잡히는 것으로부터 일시적으로만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지에서 자유로운 인식을 하는 것은 의지 자체를 부정할 때이다. 인간만이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는 순수한 인식주관이 될 수 있다. 인간만이 세계가 표상임을 알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의지의 마당인 신체를 가지고 있어 의지의 작용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새로운 긍정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을 견뎌 내야만 의지의 부정으로 인한 평정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의지 자체에 대한 부정과 의지를 부정하려는 의지작용은 구분을 해야 한다. 의지를 부정하려는 의지작용은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의지를 부정하는 의지작용, 즉 금연을 하려는 의지작용 같은 것을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살도 의지의 부정이 아니라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다' 즉 '다르게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작용이라고 본다. 이는 의지 자체에 대하 부정과는 다르다.
의지의 부정은 개체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인들을 통해 나타나는 의지작용의 흐름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해서 얻게 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의지에 부합하지 않는 인식에 이르게 되는데 이 단계에 들어서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고통을 겪다 보면 정관(靜觀), 즉 관조를 하게 되고 관조를 하다 보면 의지에서 자유로운 인식이 가능해진다. 인식이 의지에 부합할 때 불안이 생겨나고 인식이 의지에서 자유로울 때 평안이 온다. 이유 없이 움직이는 의지의 작용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게 마련인 인간의 기본조건을 파악하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 의지의 맹목성에 따라 휘둘리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 의지의 작용에 지나치게 영향받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간수하게 된다. 맹목적인 의지의 움직임을 보면 의지 자체가 헛되다는 인식을 할 때 의지의 불꽃이 꺼지는 것이다. 고통에 대해 추가적인 표상을 가지지 않고 고통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태도로 고통을 단순하고 순수하게 인식하면, 모든 고통이 개체화의 원리에 묶여 있음으로 인해 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근거율에 따르는 인식 즉 의지에 사로 잡힌 인식은 개체화의 원리에 벗어나지 못하기에 이기심의 제약을 받는다. 개체화의 원리에 매여 있으면 타인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다. 이기심에 입각한 잘못된 인식을 하는 것을 두고 쇼펜하우어는 '마야의 베일'을 썼다고 표현한다. 근거율에 따르는 인식은 의지에 사로잡힌 인식은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힌 인식으로서 마야의 베일에 가려진 인식인 것이다. 개체화의 원리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는 의지를 그러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나는 의지를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할 뿐 너와 나는 의지를 실현하는 매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에 해당한다.
개체화의 원리에 매이지 않는 사람은 삶에의 의지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때문에 의지가 자신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에게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개체화의 원리를 미미한 정도로 간파하면 정의가 생기고, 보다 높은 정도로 간파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본래적인 착한 마음씨가 생긴다. 개체화의 원리에 매이지 않는 시선에서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구분되지 않기에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동고(同苦, Mitleid)를 말한다. 동고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심정이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지배를 받기에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식하면 동고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가장 내적이고 진실한 핵심적인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모든 생물의 무한한 고통도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하고 전 세계의 고통도 분명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계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의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영원한 정의를 볼 수 있고 이 영원한 정의에서 위로를 얻게된다.
의지가 부정되고 포기됨으로 인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無)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더불어 무(無)이다" 라는 서술어로 마무리된다. 쇼펜하우어는 이 무(無)가 허무, 공허의 무(無)로 오해될 것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우리에게 남는 무(無)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서술 흐름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남는 무(無)는 허무, 공허의 무(無)가 아니므로 '꽈찬 무(無)' 즉 공(空)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空)을 언어적으로 굳이 설명하자면, 세상에 대한 모든 규정이 들어 있어 그 자체로 꽉 차 있지만 그 모든 규정이 서로를 무화시켜(즉, 제 1의 규정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다 보면 제2의 규정이 제 1의 규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또 제2의 규정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다 보면 제3의 규정이 제2의 규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또 제3의 규정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다 보면 제4의 규정이 제3의 규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과정의 연속으로 인해) 그 어떤 규정도 규정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무(無)이지만 허무는 아닌 상태, 무(無)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모든 규정을 포괄하기에 더 이상의 규정이나 말이 필요 없게 되는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4권으로 나뉘어 있다. 1권과 2권은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고, 3권과 4권은 각각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술인 1권과 3권의 경우, 1권은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 경험과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고찰이고, 3권은 근거율과 무관한 표상으로서의 세계 즉 플라톤의 이데아라든가 예술의 대상에 대한 고찰이다.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술인 2권과 4권의 경우, 2권은 의지의 객관화 부분 즉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이고, 4권은 의지의 참된 본질과 관련하여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것과 의지를 부정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철학사적으로 반합리적 철학, 즉 생철학과 실존철학의 원류에 해당하는 철학이라는 의의가 있다. 이성 중심 철학과 대조적인 반합리주의 철학의 기수로서 상당히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해서 이후 니체, 키르케고르,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생철학의 원류가 되었으며 생철학을 통해 실존철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성 중심 철학의 흐름에서도 칸트의 철학에서는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계승했는데 헤겔의 철학에 대해서는 헤겔 자신도 모르는 절대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서 상당히 평가절하했다. 이성철학의 완성자라 칭해지는 헤겔 철학이 풍미하던 시대에 쇼펜하우어는 최초로 독창적인 반합리주의(비합리주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는 데 그 탁월함이 있다.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철학에 매료되었다. 키르케고르, 바그너, 도스트옙스키, 톨스토이, 베케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카프카, 헤르만 헤세 등은 쇼펜하우어를 숭배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쇼펜하우어를 천재라 칭한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는 영향으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구상을 했다고 전해진다.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릴케의 시(詩), 「그럼에도 불구하고」에는 "나의 쇼펜하우어를 꺼내 본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헤세도 쇼펜하우어를 통해 동양철학을 접하고 이러한 사상을 『데미안』과 『싯다르타』에 담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키르케고르의 일기에서, 칼 융과 앙드레 지드의 자서전에서, 그 외 수많은 지성인들의 증언에서 쇼페하우어 철학에서 받은 충격과 공감이 나타난다.
가장 강력한 충격을 표현한 사람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니체는 쇼펜하우어 책을 고서점에서 만난 후 충격에 사로잡혀 2주일 동안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새벽 2시에 잠들 때 까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 붙잡고 있었는데 전부 다 읽은 후에는 철학자가 될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3권에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라는 장을 구성하기까지 했다. 니체 스스로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당시의 생물학 등등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등 자연과학 및 실증주의의 영향을 수용한 철학이다. 신체와 성에 대한 논의를 철학적으로 상당히 구체화했다는 면에서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구분하는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흐름에서 보면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철학이다. 이는 쇼펜하우어 스스로도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면서 쓴 편지에서 "나의 이 저서는 하나의 새로운 철학체계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이지요. 기존에 존재하는 옛날 철학을 재탕해 새롭게 서술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고도로 응축된 사고로 쌓아 올린 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유명하지만 염세주의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물론 삶은 곤궁함으로든 지루함으로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일갈등이 염세주의라는 칭호와 어울리기는 한다. 욕망이 있으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괴로워지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이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린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삶은 결핍이 있거나 권태롭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사람들이 주목한 것도 이해가 될 만하다. 이렇게 생의 고통에 대해 썼기에 '염세주의'라는 칭호를 얻었을 터이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타인의 고통을 대해 공고할 것을 주문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두고 염세주의라고만 치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쇼펜하우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사상적 원천은 플라톤, 우파니샤드, 칸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원형적인 세 가지 흐름의 사상을 잘 소화해서 자신만의 철학체계를 구축했다. 플라톤에서는 세계를 현상계(경험하는 세계)와 이데아계로 구분하는 아이디어를, 고대 인도 철학경전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현상계가 마야의 세계, 즉 가상에 불과하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칸트의 철학은 이 중 쇼펜하우어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이 칸트 철학을 수정해서 완성하는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칸트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를 '물자체'라 칭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세계를 '현상계'라고 불렀다. 칸트가 물자체라 칭한 것을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드러나는 방식의 현상계만 인식 할 수 있기에 물자체계의 내용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인데 쇼펜하우어는 물자체계를 의지의 세계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는 칸트가 모든 덕의 근원으로 여겨지며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이성 역시 의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의지가 두뇌를 통해 구현되는 두뇌현상에 불과하다. 이는 이성철학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다. 칸트의 이성은 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가능하게 하는 덕의 근원이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이성은 선의와 협력할 수도 있지만 악의와 협력할 수도 있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그 무엇일 뿐이다. 즉 칸트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덕이 있게 행동하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쇼펭하우어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덕이 있게 행동하는 것은 별개라는 입장이다.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태도에 대해 세상과 인생을 몰라서 취하게 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꽤 긴 기간 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인간 삶의 다양한 면모를 직접해 보고 인간 삶의 비참함을 목격한 쇼펜하우어로 서는 헤겔 등이 가지는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경험의 폭이 적은 일부 철학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면 쇼페하우어가 흄의 저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흄은 상당히 정밀한 회의주의의 시선으로 이성의 실체를 해부하려 노력한 철학자이다.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쇼펜하우어와 같은 계열의 입장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쇼펜하우어는 헤겔로 대표되는 목적론적이고 낙관적인 사변철학이 우주의 무근거성과 맹목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를 처음 접한 것은 1814년이다, 그는 자신의 기존 생각과 상당히 잘 통하는 『우파니샤드』에 놀랐다. 우리 신체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세계가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주관적인 표상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의 중심 생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고통에서 시작해 해탈로 끝난다는 평가는 적절하다. 그는 자신의 결론이 『우파니샤드』의 주장과 겹친다고 말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이 세계』초판에는 불교에 대한 언급이 별로 나타나지 않다가 136쪽이 증보된 1859년의 3판에서는 불교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나타난다. 불교를 접하기 전에 이미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가 구축되었고 불교가 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유사하기에 3판에 불교 내용이 많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초판에서 3판에 이르는 25년 동안 불교의 영향을 받아 그러한 사상체계를 구축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불교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이해가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쇼펜하우어는 경험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과학주의에 빠지는 것은 경계했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뉴턴주의나 독일 관념론은 인간의 사고 형식을 실재의 구조로 착각했다. 그에게 과학주의는 실재의 구조가 아니라 실재의 구조에 대한 인간의 설명방식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과학기술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점의 시대를 살았던 쇼펜하우어는 과학적 경험 성과는 수용하면서도 과학의 논리를 반성적으로 분석하여 그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학시대가 잃어버린 삶의 의미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의미를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실천적 신비주의'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노선은 그를 과학적 세계관의 흐름에 대비되는 생철학과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신체가 사물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생리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해 신체가 영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갖는다는 점을 인식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신체는 우리에게 의지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그 무엇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식기를 두고 의지의 본래적인 초점이라고 하면서 생식기는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훨씬 더 의지에만 종속되고, 인식에는 전혀 종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욕의 총족을 자발적으로 단념하는 것은 의지의 자발적인 자기지양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의지라고 주장하면서 전통철학과 다르게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설정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무의식 개념을 함축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을 철학적으로 선취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실제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환영, 정신착각, 광기, 우울증, 기억 상실에 따른 고통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프로이트 역시 정신분석학의 억압 개념을 쇼펜하우어가 먼저 설명했다고 하면서 쇼펜하우어를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로 인정했다. 칼 융도 자서전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거론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연구한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토마스 만은 쇼펜하우어가 비합리적인 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라고 평가하면서 쇼펜하우어를 두고 '의지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모든 현대 영혼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는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가 프로이트의 무의식(의식되지 않은 것)과 친연성이 있으며 쇼펜하우어 철학이 일종의 영혼학이고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성격에 해당한다고 서술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제자 하르트만을 통해 '무의식의 철학'으로 계승되기도 했는데 니체와 프로이트를 통해 정신분석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쇼펜하우어 스스로도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자신이 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함으로써 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평한다.
서양철학은 존재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철학자들은 존재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궁긍적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궁극적 원인은 없다는 주장을 매우 체계적으로 제기했다. 무(無)를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면서 동양철학과의 접점을 만들어 낸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 연구자인 이규성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동양철학과 연결해 장점을 밝히고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쇼펜하우어가 개인의 윤리적 지평에서의 자유의 길을 제시하였다고 하면서 이 길은 정관주의를 극복하고 맥락에서 보다 적극적인 사회윤리적 활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동고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것이 개인윤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고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톨스토이 같은 비평적 행동가들의 사회의식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1절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인간의 철학적 사려 깊음이 생긴다. 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2절
모든 것을 인식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은 것이 주관이다. 따라서 주관은 세계의 담당자이며 현상하는 모든 것과 모든 객관을 관통하며 항시 그 전제가 되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항상 현존하는 것은 오직 주관에 대해서만 존재하기 떄문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이 주관으로 발견한다. ……
우리는 결코 주관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식이 행해질 경우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 주관이다.
18절
의지의 참되고 진정한 모든 직접적인 행위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도 현상하는 신체행위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다른 한편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신체에 미치는 모든 작용은 의지에 미치는 작용이기도 하다. 그 작용은 의지에 반할 때는 그 자체로 고통이라고 불리고, 의지에 따를 때는 유쾌감이나 쾌락이라 불린다. 양자의 단계적 차이는 무척 상이하다. 그러나 고통과 쾌감을 표상이라 부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고통과 쾌감은 결코 표상이 아니고, 의지의 현상인 신체 속에서 의지의 직접적인 촉발이다. …… 나는 내 의지를 전체로나 통일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완전히 그 의지의 본질에 따라 인식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그것을 의지의 개별적인 행위 속에서만 즉 모든 객관처럼 내 신체가 현상하는 형식인 시간 속에서만 인식한다. 그 떄문에 신체는 내 의지를 인식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에 따라 나는 내 신체가 없는 이 의지를 본래 표상할 수 없다.
28절
삶에 의지가 인간에게서보다 동물에게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본다. 인간에게는 삶에의 의지가 많은 인식으로 인해 감추어져 있고 게다가 왜곡능력으로 인해 은폐되어 있어서 인간의 참된 본질이 거의 어쩌다가 가끔씩만 나타날 뿐이다.
48절
영원히 칭찬받을 만한 예술의 거장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최고의 지혜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이것이 모든 예술의 정점이다. 즉 예술은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인 이념 속에서 모든 단계를 거쳐 의지를 추구해서 의지가 원인에 의해 움직이는 가장 낮은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동기에 의해 다양하게 움직여 그것의 본질이 펼쳐지는 단계에 이른 후에, 이제 의지가 자체의 본질을 가장 완전하게 인식함으로 써 생기는 하나의 커다란 진정제를 통해 의지가 꺼리낌 없이 자체를 포기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끝나게 된다.
53절
근거율에 맡겨진 인식으로는 사물의 내적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현상만을 무한히 추구하는 데 불과하며 쳇바퀴 안의 다람쥐처럼 끝도 목표도 없이 움직이다가 결국 피곤해져서 위든 아래든 아무 데나 제멋대로 멈추어 서고는, 그 장소를 다른 사람도 억지로 존중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55절
자연 속의 모든 사물은 특정한 영향에 일정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성격을 이루는 힘과 성질을 갖고 있듯이 인간에게도 성격이 있으며, 거기에서 동기가 필연적으로 행위를 일으킨다. 이 행동방식 자체에서 인간의 경험적 성격이 드러나고 이 경험적 성격에서 다시 인간의 예지적 성격인 의지 그 자체가 드러나며 인간은 의지 그 자체의 결정된 현상이다. …… 인간에게서는 의지가 완전한 자각에 이를 수 있고, 전체 세계에 반영되어 있는 그 자신의 본질을 분명하고도 남김 없는 인식에 이를 수 있다. …… 우리의 모든 고찰의 끝에 가면, 의지가 그 인식을 자신과 관련시킴으로써 같은 인식을 통해 의지의 가장 완전한 현상에서 의지의 폐기와 자기부정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밝혀질 것이다.
60절
눈이 빛을 받아서만 시력을 나타내듯이 의지는 동기에 의해서만 가시적으로 될 수 있다. …… 인간은 자신의 의식이 생기고부터는 자신을 의욕하는 존재로 여기는데 인간의 인식은 자신의 의지에 계속 관계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은 먼저 자신의 의욕의 대상을 그다음에는 이 대상을 얻기 위한 여러 수단을 완벽하게 알려고 한다.
63절
만일 세계의 모든 비애를 천칭의 한쪽 저울판에 놓고 세계의 모든 죄를 다른 쪽에 놓는다면 지침은 반드시 균형을 잡고 서게 될 것이다.
63절
인간은 자신의 본질이자 근원인 격렬한 의지의 충돌에 사로잡혀 삶의 쾌락과 향유를 붙잡아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 의지의 행위에 의해 자신이 보고 몸서리 칠 삶의 온갖 고통과 고민을 붙잡고 그것이 그 자신을
강하게 누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세계의 악과 화를 보지만 이것들이 삶에 대한 하나의 의지 현상의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아주 상이한 것, 아니 전적으로 상반된 것으로 보고, 종종 악을 통해 즉 남의 고뇌를 초래함으로써 화, 즉 그 자신의 고뇌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이는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혀 마야의 베일에 의해 속고 있는 것이다. …… 보잘것없는 그의 일신, 연장(延長)이 없는 그의 현재, 그의 순간적인 안락, 이것만이 그에게는 현실성이 있다. 그리고 더 나은 인식에 의해 눈이 뜨이지 않는 한 이것을 유지하지 위해 그는 온갖 수단을 다 한다.
63절
근거율에 따르는 인식, 즉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힌 시선에는 영원한 정의가 보이지 않는다. …… 그러한 시선은 악이 온갖 종류의 악행과 잔인한 행동을 저지르고도 즐겁게 살아가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러한 시선은 억압받는 자가 고뇌에 가득 찬 삶을 끝까지 이어가도 복수자, 보복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런데 사물 자체에는 현상의 형식들이 맞이 않는다는 것을 깨닫은 사람만이 근거율을 실마리로 앞으로 나아가 개별적 사물에 구속된 인식을 넘어서고 이념을 인식하며 개체화의 원리를 통찰하여 영원한 정의를 이해하고 파악할 뿐이다. …… 이런 사람만이 동일한 인식에 의해 덕의 참된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 이런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전혀 다른 개체로 존재하고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의해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덮치거나 자신이 경험한 고통, 악, 화는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관련될 뿐임이 분명해진다. 그는 고통을 가하는 사람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차이가 현상에 불과하고 양자 속에 살아 있는 의지인 사물 자체와는 관계가 없음을 통찰한다. ……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하나다. 괴롭히는 자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둘 다 눈을 뜨게 되면 고통을 가하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모든 것 속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이성을 갖춘 자라면 어떤 잘못으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큰 고통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헛되이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또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악이 그의 본질도 이루는 하나의 의지에서 흘러나와 그의 속에도 그것이 나타나고, 그는 이 현상과 그 긍정에 의해 그러한 의지에서 생기는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며 그가 이 의지인 한 그 고통을 당연히 감내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66절
모든 사랑은 동고( 同苦, Mitleid)이다.
68절
어떤 사람의 눈앞에 마야의 베일, 즉 개체화의 원리가 확연히 드러나서 그가 자신과 남을 더 이상 이기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다른 개체의 고뇌에 자신의 고뇌처럼 커다란 관심을 가지며 그럼으로써 언제라도 남을 도울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할 수 있을 때 기꺼이 그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있다면 그 결과 자연히 모든 존재 중 자신을, 자신의 가장 내적이고 참된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은 모든 생물의 무한한 고뇌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전 세계의 고통도 분명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68절
완전한 내맡김(Resignation, 체념/방기)이나 성스러움으로 불리는 삶에의 의지이 부정은 언제나 의지의 진정제가 생긴다. 그 의지의 진정제는 모든 생물의 고뇌 속에 나타나는 의지의 내적 충돌에 대한 인식이자 의지가 본질적으로 헛되다는 인식이다. 우리가 두 가지 길로서 서술한 그 차이는 단순하고 순수하게 인식된 고뇌가 그것을 자유로이 제 것으로 하여 개체화의 원리를 간파함으로써 그러한 인식이 생기게 하든지 또는 직접 스스로 감각된 고통이 그러한 인식이 생기게 하든지 하는 것이다. 참된 행복, 즉 삶과 고뇌로부터의 구원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68절
악인은 의지의 부정을 초래하는 인식에는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삶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현상하는 모든 고민을 있는 그대로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그의 현재 상태가 행복하다고 해도 그것은 개체화의 원리에 의해 매개된 현상이자 마야의 환영, 즉 거지의 달콤한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의지 충동의 격렬함과 분노로 남에게 가하는 고뇌는 그 자신이 경험해도 의자가 꺾이거나 궁극적인 부정까지는 초래할 수 없는 정도의 고뇌다. 반면 참되고 순수한 모든 사랑, 그러니까 모든 자유로운 정의조차도 이미 개체화의 원인을 간파하는 데서 생기는데 이 일이 아주 명백하게 행해지면 그 원리의 간파는 완전한 신성화와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 간파의 현상체는 앞에서 묘사한 완전한 내맡김(체념/방기)의 상태이고, 그 상태는 이에 따르는 흔들림 없는 평화와 죽음 속의 최고의 기쁨이다.
71절
의지를 자유롭게 부정하고 포기함으로써 이제 이런 모든 현상들도 없어지고 객관성의 모든 단계에서 세계가 그것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존립하는, 목표도 휴식도 없는 끊임없는 소동과 야단법석이 없어지고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형식들의 다양성도 없어지고 의지와 더불어 그것의 전체 현상이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이러한 현상의 일반적인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또한 그 현상의 궁극적인 기본형식인 주관도 객관도 없어지는 것이다. 즉,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 앞에 남는 것은 무(無)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무(無)로 융해되는 것에 저항하는 우리의 본성이야말로 우리 자신이자 우리의 세계인, 바로 삶에의 의지일 뿐이다. 우리가 너무나 무(無)를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너무나 의욕하고 우리는 이러한 의지에 불과하며 바로 그 의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궁핍과 속박으로부터 눈을 돌려 의지가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하고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한 다음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부정하여, 그런 다음 의지의 마지막 흔적이 그들의 신체와 더불어 소멸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세계를 극복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쉼 없는 소동과 야단법석 대신에 소망에 두려움으로, 기쁨에서 고통으로의 끊임없는 이행 대신에, 의욕하는 사람의 삶의 꿈을 이루는 결코 충독되지 않고 결코 소멸하지 않는 희망 대신에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처럼 완전히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흔들림 없는 확신과 명랑함이다.
71절
우리는 오히려 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는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의지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그토록 실재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이나 은하수와 더불어 무(無)인 것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류문화사, 2019.
첫댓글 붓다는 '일체(一體) 즉 세계는 12입처(十二入處)'라고 했다. 십이입처는 대상인 외육입처와 인식주체인 내육입처를 말한다. 내육입처는 안이비설신의 입처이며 외육입처는 색성향미촉법 입처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육입처나 내입처 모두 머리 속에 이미지로 자리 잡은 표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의입처는 외부의 대상이 아닌 내적 표상이다. 이것이 표상인데 표상의 대상과 인식주체를 연결하는 것이 의지이다. 이 의지는 대상과 주체에 같이 작용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쇼펜하우어가 불교에 심취했던 이유로 유식무경의 유식사상을 바탕으로 입처의 이미지를 표상으로 대상을 향한 갈애와 탐착을 의지로 설명한 것이다.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이 의지와 표상에 다 담겼고 이는 이천오백년 전의 불교 교학에서 충분히 다뤄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읽고 그의 고독과 고통을 들여다 보았는데 장로님이 말씀하시는 내육 외육 입처가 표상의 실재임을 알게 되며 그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가 불교의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됩니다.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평안하소서.
장로님 말씀대로 쇼펜하우어는 유럽의 불교 수용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서양 최초의 불교사상가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서양인들이 불교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가 놀라울 정도로 불교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불교철학의 해설자’ 혹은 ‘불교적 염세주의자’로 불렀다. 특히 르네 게농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그의 제자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이나 다른 유럽 학자들에 의하여 불교와 동일시됨으로써 ‘불교적 염세주의’라는 개념이 정착되었으며, 이로써 불교의 무아사상을 쇼펜하우어의 극단적 비관주의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와 세계가 표상이고, 그 배후에 의지가 도사리고 있으며, 삶의 의지의 긍정은 고통을 유발하므로, 고통을 벗어나려면 의지의 완전한 부정을 통하여 동고(同苦)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분명 불교의 중심사상과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