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휘영청~
추석이다. 모처럼 아주 긴 연휴여서 명절다운 분위기를 느낀다고들 한다. 연휴가 길수록 더 쓸쓸하다는 사람도 많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식당은 문을 닫는데, 집 안에서 긴 나날을 보내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으니 모처럼 가을나들이를 떠나는 것은 어떨까? 하긴 모두들 차를 끌고 나온다면, 여전한 불볕 무더위에 몸과 마음 꽉 막힌 연휴가 될 수도 있겠다.
긴 연휴에 그저 몸조심을 당부하는 정부 당국의 주의보가 그리 살갑게 들리지 않는다. 명절에 들뜬 시장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자조하면서 떠든다. “장사하는 사람은 전생에 죄를 지은 거야.” 연휴를 맞아 모처럼 합석한 그들의 헛헛한 웃음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요즘처럼 사람 쓰기가 어렵고, 식구들끼리 하기도 쉽잖으니 몸이 고생이고, 마음도 지친다고 했다.
명절이면 공중파 방송에서 분위기를 전하는 안양중앙시장은 역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다. 기름 냄새 풍기는 전 골목이 가장 바쁘게 돌아가고, 수북이 쌓인 동그랑땡은 보기에도 흐믓하다. 명절이나 돼야 맛보는 가게들은 누구나 들러가는 모양이다. 제철 과일은 추석이 조금 이른 탓에 아직 풋내가 나지만, 철을 모르는 과일들이 다양하게 구색을 갖추었다. 아내 뒤를 따라 나래비를 선 반찬가게에서 여러 날 먹을 것들을 챙겼다.
어려서 엄마를 따라 명절 장터로 나서면 아주 신이 났다. 5일마다 돌아가는 장날 중 큰 명절을 앞두면 대목이라고 불렀다. 어제는 봉평(3,8), 오늘은 대화(4,9), 내일은 평창(5,10)에서 장날이 열린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어김없이 돌아간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장날을 확인해 시장을 본다. 반드시 챙기는 것은 두부와 새치(임연수)이다. 여느 동네와 비교할 수 없는 그 동네 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으뜸은 메밀적과 막국수이다. 어려서 투정 부리던 음식인데 지금은 입맛에 딱 맞는다. 음식도 나이에 어울리고, 몸에 배는 모양이다. 게다가 감자로 만든 것은 무엇이든 소울푸드다. 세상 어딜 가든 먹을 수 있지만, 역시 감자 맛은 강원도다. 감자송편, 감자부침개, 감자옹심이, 알감자간장조림은 물론 서양식 감자샐러드와 감자튀김(프렌치 프라이)도 좋다. 독일 사람에게 튀김감자인 폼프리츠(Pommes) 처럼 지극히 대중적이다.
뭐니 뭐니해도 감자 요리 중 으뜸은 고추장으로 달게 졸여낸 감자조림이다. 감자를 가지런히 반달썰기 한 후 냄비에 넣고 감자가 아삭할 때까지 끓인다. 약간 덜 익은 상태에서 불을 줄이고 고추장, 간장, 다진 마늘과 설탕 등을 넣고 기름을 두르고 천천히 졸이면 얼큰한 감자조림이 완성된다. 약간의 파를 넣으면 더 맛을 낼 수 있다. 평창읍내 강변에 있는 남산옥은 감자조림을 반찬으로 내오는 고마운 식당이다.
사실 요즘처럼 고기며, 생선이며, 과일이며, 떡이며, 예전에 명절에나 귀하게 먹던 음식들을 날마다 먹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명절 음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저기에서 쉽게 주문을 하고, 현관에서 배달을 받고, 향토 음식 이름만 붙인 어슷비슷한 팔도음식을 먹으면서 과연 고향집과 어머니의 손맛을 기억해 낼른지 의문이다. 게다가 끼니마다 게 눈 감추듯 먹고 나서 껀껀이 다이어트니, 성인병이니 후회한다면 거참 의뭉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명절이란 부모님을 기억하고, 음식을 베풀며, 푸짐한 덕담과 인사를 나누면서 고맙고 즐거운 시절의 인정과 인심을 돌아보는 날일 것이다. 평소 먹지 못했던 뜨거운 감자밥에 진한 된장호박찌개를 썩썩 비벼 먹으며 정든 입맛을 살리는 기회가 된다면 말해 무엇하랴. 그리고 식구들과 함께 둥근 보름달 아래에서 선선한 가을을 느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드믄 추억만들기일 것이다. 오호! 복되고 감사한 마음이 스며들 듯하다.
내일 아침 두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귀성행렬이 뜸할 늦은 저녁나절에 시동을 걸 것이다. 부모님이 계시던 옛집을 향해 평생 웬만하면 거르지 않던 귀성 순례를 올해도 반복하는 것이다. 새말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호젓한 42번 국도로 들어서 산길을 달리면 덜 여믄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를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둥근달이지만, 역시 내 집 마당에서 보는 즐거움이 크다. 명절은 해마다 그대로인데, 부모님만 빼고 모두가 여전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