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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향기 스크랩 043_충남 논산시 양촌면 쌍계사
無盡藏 추천 0 조회 34 12.03.02 18: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관촉사에 이어 오늘의 두 번째 여행지이다. 여행이라기 보다는 가는 길에 들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 여행이 늘 그렇듯 오늘도 즉흥적으로 지도를 보며 가장 가까우면서 기억에 남을 곳을 추리다 보니 일곱군데가 전부 사찰이 되고 말았다. 관촉사 삼거리에서 643번 도로를 이용 가야곡을 지나 양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쌍계사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전에는 쌍계교를 지나 들어갔는데 새로 길을 내어놓은 것 같다. 작은 개울을 따라 오르려면 먼저 비각이 손님을 맞는다.

절골이라는 동네이름답게 아기자기 하게 구부러진 산길을 오르다보면 작은 소류지를 만난다. 이곳이 절골저수지이다. 저수지 가에 아주 색이 예쁜 열매가 달려있다. 보석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색깔의 열매인데 좀작살나무 같은데 아닌 것 같다. 이 계곡을 오르며 감나무가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은 마을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많아 까치밥 이라고는 생각키 어려울 만큼의 많은 감들이 달려있어 보기 좋았다. 소류지를 끼고 오르면 길 게 늘어선 쌍계사 부도군을 만난다.

길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것이 일주문을 들어서며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거의 경내에 가까이 오면서 느끼는게 또한가지 더한다. 온통 사찰을 감싸고 있는 석담의 아름다움이다. 항상 돌아다니며 이야기하는데 함양지방의 돌 쌓아 논 솜씨가 제일이라 했는데 이곳의 솜씨도 못지 않음을 자랑한다. 그 위를 따라 작은 석탑들도 같이 자리한다.

[쌍계사 중수비문석(절의 역사가 적힌 비문)...]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길모퉁이 숲속에 철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는 부도밭이 있으며, 그 한쪽 편에 쌍계사중건비명이 있다. 지대석 위에 바로 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식의 옥개석을 세운 비석이다. 정면과 후면에 비문을 음각했는데, 정면에 전서(篆書)로 '雙溪寺重建碑銘'이라는 비의 이름을 새겼다. 1735년(영조 15)에 조성된 것으로 金樂曾이 비문(碑文)을 짓고, 李華重이 글을 썼으며, 金樂祖가 전자(篆字)한 것이다. 쌍계사의 역사와 함께 승려 性能과 古察에 의해 불타버린 쌍계사 중건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절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좀작살나무 열매같기도 한데?...]

[쌍계사 부도군...]

절 입구에 위치한 부도전에는 모두 9기의 부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부도의 형식은 크게 석종(石鐘)형과 소위 ‘알부도’라 부르는 구형(球形) 탑신을 지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석종형 부도는 모두 형식이 대동소이한데, 네모난 지대석 위에 상하로 복련과 앙련을 포개놓은 대좌부를 놓고, 그 위에 종형의 탑신을 올려놓은 형식이다. 탑신 상부에는 연화 띠를 돌린 것이 대부분이며 그 위에는 연봉형의 상륜을 돌기시켰다. 탑신을 구형(球形)으로 만든 부도 역시 형식이 대동소이하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상하로 복련과 앙련을 포개놓았으며, 그 위에 구형의 탑신을 올린 위에 옥개석을 올려놓은 형식이다. 세부적인 조각의 내용은 약간 씩 차이가 있는데, 특히 옥개석에 용을 조각해 놓은 것이 있어 주목된다. 이들 부도 중 일부는 탑신에 명문을 새긴 것이 있는데, 대부분 풍화가 심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석종형의 취봉당혜찬대사지도(翠峰堂慧粲大師之屠) 정도가 명문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조선시대에 조성된 부도로 생각된다.

[경내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새로 조성된 관음보살좌상...]

문화예술정보씨스템에 의하면 "쌍계사는 백암(白庵)이라는 이름으로도 전한다. 중건 비문에 의하면 고려 때 행촌(杏村) 이임선생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절입구에 세워진 비문에 의하면 이 절에는 극락전을 비롯 관음전, 선원, 동당, 서당,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향로전, 해회(海會), 삼보, 요사 등 500~600여 칸이 있어 한 때 호서지방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절 남쪽의 작봉산과 남당산마루는 동서로 이어져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는데,

작봉산 자락의 북쪽에 전망이 트인 넓은 대지가 형성되고 그 곳에 쌍계사가 위치한다. 따라서 쌍계사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큰 중정을 두고 전면에 중층 누각 봉황루를 두었다. 중정 안쪽에는 대웅전, 서쪽에 명부전, 동쪽에 요사채를 배치해 두었다. 대웅전 서편에 나한전을 두고, 그 남쪽에 산신각을 배치해 두었다. 대웅전은 쌍계사의 중심법전으로 언젠가 화재로 소실된 후 1716년(숙종 42) 중층 대웅전을 중창하였으나 1736년(영조 12)11월 또다시 화재로 전소되어 1739년 다시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얼마나 커다란 절인지는 상상이 안가지만 5~600여칸이라면 어마어마한 크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경내는 좁아 보였지만 앞뒤로 터는 굉장히 넓고 층층히 잘 정돈되어 있는 그런 사찰임을 느꼈다. 백암쌍계사의 대웅전 문살도 유명하다는데 정말 오래되고 아름다워 찍기는 했는데 마크로를 풀지 않아 흐리게 나와 올리질 못했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雙溪寺 大雄殿)의 자태...]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쌍계사의 중심 불전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불전으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공포와 창호, 내부의 닫집 등 장엄은 화려한 성향을 지닌 조선시대 후기의 불전 중에서도 가장 화려함을 자랑한다. 조선 영조15년(1739년)에 세워진 ‘쌍계사중건비명’에 성능과 고찰 등의 승려에 의해 쌍계사가 중건되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대웅전도 이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쌍계사재중수기’로 미루어 볼 때 1932년에 한 차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1963년에 보물 제408호로 지정되었으며, 1972년에 해체보수공사가 실시된 바 있고, 이듬해인 1973년에 단청을 새로 했다. 현재의 대웅전에 앞서 원래 쌍계사에는 지금의 대웅전 이전에 숙종 42년(1716년)에 승려 자영이 중건한 중층의 대웅전이 있었다고 하나 영조 12년(1736)에 불타버렸다고 한다.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이 온통 공사 중이다...]


[쌍계사 대웅전 옆의 미각...]

대웅전은 쌍계사의 중심 마당 뒤편 불명산에 의지해 만든 대지 위에 북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도리통 5간, 양통 3간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불전 중에서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도리통 5간은 모두 약 12척의 동일한 주간으로 설정하였다. 양통은 어간을 약 12척으로 도리통의 주간과 동일하게 한 반면 전후퇴는 약 8척 정도로 하여 좁게 설정했다. 도리통과 양통의 비가 약 2.15:1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룬다. 조선시대의 불전에서는 보기 힘든 비례로 열악한 경제 조건에서 그 전에 있었던 큰 규모의 불전을 만들고자 했던 고려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면에는 5간 모두에 각 두 짝의 여닫이문을 두었다. 양 측면에는 전퇴에 외여닫이문을 두어 출입문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후면에는 어간에만 외여닫이문 하나를 두었다. 이를 제외한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을 들여 전체적으로 감실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하였다.

[쌍계사 대웅전 기둥과 귀공포의 자연미...]

기둥은 굵고 높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도리통이 5간이므로 정면은 수평적인 구성이 되기 쉬운데, 주간에 비해 기둥의 높이를 높임으로서 각 주간의 입면을 수직적인 비례로 구성함으로서 전체적인 비례의 조화를 꾀한 것이다. 한편 기둥은 건물의 규모에 따라 굵은 것을 사용한 것이지만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나치게 굵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건물의 시각적 안정감을 중시하는 조선 후기 건축의 조형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귓기둥, 특히 정면의 귓기둥은 다른 기둥에 비해 더욱 굵은 것을 사용함으로서 건물의 윤곽을 강조함은 물론 시각적 안정감

을 증대시키고 있다. 또한 자연목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기둥은 자연스럽게 상부에 비해 하부가 굵게 되었고, 그만큼 시각적 안정감이 강조되었다. 기둥은 각 면의 가운데에 비해 양측으로 가면서 높게 만드는 귀솟음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둥 상부를 연결하는 창방이 만드는 수평선은 양쪽으로 가면서 위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눈높이보다 높은 수평선은 양쪽 끝이 아래로 쳐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조형적 처리이다. 반면 현재 상태로는 안쏠림 기법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른쪽에서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넝쿨로 만든 것으로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한다고 한다.

[쌍계사 명부전...]

명부전은 대웅전 앞마당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와 형식 및 1932년의 쌍계싸재중수기(雙溪寺再重修記)에 명부전의 중수(重修)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통 3간, 양통 1간의 장방형 평면으로 정면에만 3간에 걸쳐 각 두 짝의 여닫이문을 두었고, 양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으로 만든 감실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측면과 후면의 벽은 중방 하부에 화방벽을 설치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기단은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으로 막돌을 이용한 외벌대이다.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원형으로 후면의 일부 기둥은 휜 부재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기둥 위에는 도리방향으로만 창방을 돌렸으며, 공포는 이익공식으로 초익공은 앙서, 이익공은 수서형으로 초각하였다. 행공(行工)은 교두형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고미반자 형식의 평천장이다. 정면 어간에는 ‘冥府殿’이라 쓴 현판을 달았는데, 현판은 건물 규모에 비해 큰 편에 속한다.

[쌍계사 감로수...]

[쌍계사 산신각(칠성각)...]

칠성탱과 산신탱 및 독성탱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어간 상부에 횡으로 길게 '七星閣兼山神閣'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전 서쪽 마당의 남쪽 끝에 북향해 위치하고 있다. 1932년의 쌍계사재중수기에 산신각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통 3간, 양통 1간으로 도리통은 어간을 협간에 비해 2배 정도로 넓게 설정했다. 양통은 1간인데, 뒤로 벽장 형식으로 덧달아내고, 이것을 감실로 삼아 벽장 형식의 불단을 만들고 탱화를 걸었다.

정면 어간에는 두 짝의 띠살 창호를 달았고, 협간에는 중방 위에 띠살의 두짝 창을 달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벽이다. 벽장을 달아낸 모습과 정면 창호의 구성으로 보아 이 건물은 언젠가 잠시 주거용으로 사용하다가 벽장의 문짝을 떼어내고 탱화를 봉안함으로서 현재의 모습이 된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막돌을 이용한 두벌대이며, 거칠게 가공한 방형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후면의 덧달아낸 부분에는 막돌초석 위에 방주를 세웠다. 보아지를 사용한 납도리집으로 가구는 5량가이다. 바닥에는 장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쌍계사 나한전...]

대웅전 서쪽 마당에 동향해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없으나 그 용도로 보아 나한전이라 부를 수 있다. 또한 1932년에 작성된 쌍계사재중수기에 '신건나한전'이라 한 건물이 이것으로 그 조영연대를 알 수 있다.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질 뿐 아니라 옹색한 외관을 지니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도리통 3간, 양통 1간으로 도리통은 어간을 일반적인 주간(柱間)으로 설정한 반면 양 협간을 그 절반 정도로 좁게 설정함으로서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옹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면 어간에만 두 짝의 창호를 들였을 뿐 나머지 간은 모두 벽을 두어 폐쇄적으로 구성했다.

[쌍계사 약수터의 신비...]

[공들여 세운 돌담 위에 공든 탑들이?...]

[쌍계사중건비 (雙溪寺重建碑銘) 자연석 단위에 장방형의 비산이 올려져 있고 상단에는 가첨석이 올라있다...]

[쌍계사 부도군 9기가 모셔져 있다...]

다시 내려오며 부도군을 만나게 된다. 다른 사찰은 부도군을 찾아 다녀야 하는데 몇몇의 사찰들은 입구나 일주문 훨씬 전에 배치된 곳도 있다. 사찰의 어른들의 사리를 모신 곳인데 먼저 인사를 드리고 오르고 작별을 고하며 내려가는 그런 사찰이 된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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