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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물을 단물처럼(출15:22-27)-2017.2.5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쓴물을 단물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단물을 쓴물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쓴물 인생을 단물처럼, 단물 인생을 쓴물처럼 사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도 주어진 삶을 살면서 항상 쓴물만 있는 것이 아니요, 항상 단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쓴물을 마셔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장애물경기를 하듯이 우리 인생의 경주도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은데, 또 다른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인생은 쓴물과 단물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너무 오랫동안 쓴물만 마시는 인생이라든지, 마시기가 힘들 정도로 쓴물도 있습니다. 적당한 쓴물이라면 마실만 할 터이나 너무나 고통스러운 쓴물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울고불고 난리를 겪습니다. 때로는 진짜 쓴물을 마시고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쓴물이 있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인생의 쓴물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쓴물을 경험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쓴물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쓴물만 먹고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온갖 설움과 천대를 다 받으며 고통스러운 쓴 물을 무려 430년 동안이나 마셔왔던 것입니다. 마치 쓴물의 구덩이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그들은 단물을 구경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쓴물을 단물로 단번에 바꾸어 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나 민족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430년 동안 쓴물만 마셔오던 이스라엘이 단물을 마셔본 것은 불과 3일전이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 수르광야에 들어왔습니다. 불과 3일전에 그들은 최고의 단맛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해 해방의 꿀맛을 맛본 것이지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사흘을 걸어 수르광야에 도착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모든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된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단물만 마실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마실 물이 없습니다. 간신히 마라에 도착해서 물을 만납니다.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쓴 물이었던 것입니다. 보통 쓴물이 아니라 도저히 써서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향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여 원망을 토해냅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모세를 원망한 것이지만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었던 셈입니다.
과연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관문에서부터 실패한 것입니다. 인간의 간사함을 단번에 드러낸 것입니다. 불과 3일전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던 그 백성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기쁨으로 찬송하던 입술이 원망의 입술로 돌아서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영하던 그 입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죽이라고 저주하던 입술로 바뀐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심리학자 맨슬로우가 말하는 인간의 욕구5단계 법칙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 욕구 이른바 식욕과 성욕에 의해 인간의 의지가 꺾어진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보다 간사한 동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라의 쓴물 앞에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분명하게 나누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체하지 않고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모세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쓴물 앞에 선 인간의 두 얼굴입니다. 쓴물 앞에서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쓴물 앞에서 본심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쓴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라가 없는 인생도 없고, 지역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경제적인 마라, 건강의 마라, 인간관계의 마라가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마라가 있고, 목회자에게도 마라가 있으며,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마라는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마라가 없는 지역을 찾아다니거나, 마라가 없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마라가 누구에게나 있고, 어디에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라가 아니라, 마라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마라의 쓴물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라의 쓴물을 통과해야만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엘림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27절). 엘림으로 들어가야 목마름과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물 샘 열둘이 있고, 종려나무 칠십 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의 쓴물을 통과해야 엘림의 샘물을 마실 수가 있는 법입니다.
마라의 쓴물이 엘림의 단물이 되는 것을 26절에서 ‘치료’라고 말합니다. 쓴물이 단물이 되는 것이 치료입니다. 치료는 고장이 나고, 병이 든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죄와 질병으로 마라의 쓴물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쓴물이 단물 되는 것은 병든 영혼과 육체를 치유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육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과 만물의 치유자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못 고칠 질병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쓴물을 단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26절).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단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방법은 25절에 있습니다. 25절에 세 가지 치유법이 나옵니다. ‘부르짖었더니’ ‘지시하시니’ ‘던지매’입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말이요, ‘지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다는 말이며, ‘던졌다’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반응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속에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비결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즉, 구하고 듣고 따르면 됩니다. 이것이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비결입니다.
(1) 부르짖어야 합니다(25절상‘부르짖었더니’)
모든 백성들은 쓴물 앞에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모세를 원망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불평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는 모세였다면 백성들을 향하여 똑같이 공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모세는 분명히 어리석은 백성들과는 달랐습니다.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똑같이 반응합니다. 똑같이 덤벼들고 따지고 대들면 똑같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개도 수준이 있더라구요. 하다못해 종자가 좋은 개는 다릅니다. 볼독은 동네 있는 모든 잡견들이 컹컹 짖어대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동네 잡견들은 한 마리가 짖으면 다들 합창하고 짖어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인과 소인은 수준이 다릅니다. 대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대인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소인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거침없는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소인배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25절).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세가 진짜 대인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기도 속에는 마라의 쓴 물을 바꾸어 달라는 간구도 있었겠지만, 어리석은 자기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는 탄원이 더욱 강했을 것입니다. 역시 모세는 모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답답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너무나 억울하고 따지고 덤벼들고 싶은 일은 없으신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들과 똑같이 상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똑같은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상대하십시오. 하나님께 그 문제를 위탁하십시오.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그 사람이 대인입니다. 사실 사람들과의 논쟁은 이긴 자도 이긴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이긴 자입니다(렘33:3).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 외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었더니 곧 바로 응답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세에게 반응할 수 있는 조건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방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서 아픈 곳을 말해야 의사는 진찰을 해보고 처방을 내립니다.
물론 의사를 찾아간 환자는 아픈 곳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환부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고 숨기면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이라도 아픈 곳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치료가 시작됩니다. 환자의 고백은 치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2) 처방을 잘 들어야 합니다(25절상‘지시하시니’)
환자가 병원을 찾아간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처방을 내립니다. 그러면 환자는 의사의 처방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만물과 인간을 치유하시는 전인적인 치유자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는 못 고칠 질병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치유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육간의 병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도 병들어서 치유를 받아야 하고, 자연계도 병들어서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만물도 하나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쓴 물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내리십니다.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25절). 하나님은 가타부타 말씀하여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실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처방을 내리신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엉뚱한 처방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참으로 희한한 처방을 통해 치유 받는 사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서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민21:9). 얼마나 황당한 치유법입니까? 그런데 그 말씀대로 쳐다본 사람은 전부 다 살았습니다. 아람나라에 군대장관 나아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가 아픈 당처에 손을 얹고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왕하5:11).
하지만 엘리사는 영접하기는커녕 사자를 보내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주문만 합니다. 얼마나 황당한 처방입니까?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진 나아만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했지만 종들의 만류로 인하여 자존심을 굽히고 순종했더니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방법으로 이해가 안 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를 받습니다.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어 갈 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큰 낭패입니다. 그때 잔치 집에 참석했던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리고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황당한 처방입니다. 그런데 물이 변하여 지금까지 한번도 맛본 적이 없는 극상품 포도주가 되었던 것입니다(요2:10). 이것이 소설처럼 들리십니까? 솔직히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주안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고침받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치시는 장면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안수기도를 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약간은 주술적으로 보이는 의아한 행동을 하십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요9:7). 참으로 희한한 처방전입니다. 하지만 순종한 그가 완전히 씻음 받고 고침 받았음을 믿으십니까?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번의 실수도 아니 하셨고, 한 번의 실패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치유법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신 ‘한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구르쿠드’라는 나무열매가 쓴물을 달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런 억지해석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정화시켜주는 성분이 있을지라도 그 많은 백성들이 마실 수 있는 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을 인간의 공력으로 희석시키지 마십시오. 마귀들의 장난입니다. 제발 성경을 보면서 쓸데없는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나무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많은 도구 중에 왜 나무를 사용하셨는지는 어떤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후 생명나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나무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우편으로 승천하사 완전속죄를 이루시고 성령 안에 다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나를 성전 삼고 계십니다.
지금 내안에 주님이 나와 함께 사십니다. 나를 성전 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본문에 나타난 ‘한 나무’가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시 말해 ‘한 나무’는 나무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구원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진주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황금 길을 갈 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히고,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케 하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신 ‘한 나무’가 생명나무의 상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대로 지체하지 않고 ‘한 나무’를 물에 던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무슨 효험이 있겠냐고 의아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렸고 순종한 것입니다.
(3)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25절중‘던지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전인격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전인적인 순종이 없으면 절대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목을 놓아 부르짖어도, 아무리 그분의 지시하심을 똑똑하게 들었을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한 나무’를 지체하지 않고 물속으로 던졌습니다. 거짓말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쓴물이 달아졌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능력입니다.
결국 아무리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내 자신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순종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때문에 마라의 쓴물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유도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믿게 하려는 것이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출애굽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세상 군대에서 제대한 젊은이들도 상당기간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모세의 앞날이 암담해 보입니다. 하지만 출애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일뿐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께 집중하여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 앞에 주어진 어떤 쓴물이라도 원망이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단물처럼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이 마라의 쓴물 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라의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도자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모세처럼 하나님을 상대하여 승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이 결정하십시오. 하지만 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치유하시기 원하십니다. 내 인생의 마라를 엘림으로 바꾸어주시기 원하십니다.
모든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지시하심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듣는 것으로 흘려버리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이런 모든 과정들이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내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계시는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오직 주님의 마음만 구하고 찾아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되어짐을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내 인생의 어떤 쓴물이라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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