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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곡초등학교39회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쇠북 위종
태어나서 잔뼈가 굵은 곳
잠시라도 잊어버릴 수 없는 곳
마지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곳
그러나 다 아는 것 같지만 알지 못하는 곳
내 고향 백곡 !!
그래서 조금이나마 고향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노력을 했다.
여기저기를 뒤지고 어느 부분은 귀동냥으로 들은 것도 있고, 다른 지역을 조사 해보고
유추해서 적은 것도 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공유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써 본다.
진천군, 천안시, 안성시 홈페이지와 각종 블로그, 기타 사이트를 참고로 하였다.
사송리는 사정과 상송의 한 글자씩 떼어와 지었고, 명암리는 명심과 동암마을에서, 석현리는 돌고개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구수리는 초등학교 옆 동네이름 구수에서, 대문리는 대삼과 수문에서, 용덕리는 용진과 덕가동(덕개동)에서, 양백리는 상백과 하백에서, 성대리는 성대와 대명동에서, 갈월리는 갈대가 많은 곳이라는 ‘갈울’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며 백곡은 말 그대로 잣골이라는 뜻인데 유래를 가늠하기 어렵고 조선시대 지도에도 ‘백곡리’라고 나오는 것으로 봐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거의가 동네이름을 조합하여 <리>명칭을 정했다면 갈월리와 석현리, 구수리만이 다르다.
석현리는 돌고개 이름에서 음역한 것이고, 구수리는 김유신장군이 훈련할 때 말구유가 있었다하여 구유라고 하다가 구수로 변했다는 설과 골짜기가 구유를 닮아서 생겼다는 설이 있는 구수마을 이름에서 지었다.
갈월리는 갈대가 많은 골짜기라 갈대밭, 갈울, 갈월, 노동이라 불린다.-두산백과의 설명이다
갈월(葛月)리의 갈葛자는 칡갈자다. 서울 갈월동은 칡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이고 우리나라 여러곳에서 갈월동, 갈월중학교, 갈월로, 갈월이라는 이름이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갈월리는 갈대와 관련있다는 설이 유력하고 ‘갈울’이라는 말이 갈월의 발음과 유사하여 음차 즉 뜻하고 상관없이 소리에 맞춰 한자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갈월리의 자연부락은 강당, 노신, 중노, 상노, 서수 이렇게 5개 마을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노>자가 많이 보이는데 어느 기록물은 밥그릇 노(盧)자를 쓰고 다른곳은 갈대 노(蘆)자를 쓴다. 밥그릇하고 관계가 있으려면 그릇 만드는 가마관련 시설이나 터, 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백곡면에는 큰 고개가 여럿 있는데 산을 에워싸고 있는 계곡 형태로 왕래를 위해 자연적으로 생겼다. 갈월리, 대문리, 구수리, 사송리, 석현리, 용덕리, 양백리, 성대리, 명암리가 충남과 경기도, 진천읍과 경계를 이루고 그 경계가 산맥으로 되어 있어 양쪽 마을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현재는 도로로 확장하여 사용하는 엽둔고개와 배티고개를 제외하고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엽둔고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둔<屯>자는 군사가 진을 친다는 뜻이다. 김유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만뢰산, 장군봉이 근처이며 삼국시대부터 국경이었고 군사들이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더욱 그렇다.
도적들의 소굴이라 돈과 관련되어 엽돈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엽둔마을 뒤로 올라서서 현재의 청룡저수지를 내려서는 골짜기 가 곧 삼도경계이고 옛길이다. 고개를 넘는 가장 짧은 길이다. 지금도 엽둔재를 넘어 내리막길 도로는 충남이지만 바로 오른쪽편은 경기도이다. 즉 고개 넘어 골짜기와 청룡저수지, 개울을 경계로 오른쪽은 경기도 땅이다.
60년대에는 안성장이 서는 전날 백곡에 소도둑이 많이 들어왔다,
훔친 소를 밤새 끌고 고개를 넘어 안성장에 팔기 좋았고 관할이 다르기에 추적을 따돌리고 수사공조가 어렵기 때문에 도둑질하기 좋은 곳이었다.
<배티고개> 양백리 배티에서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상촌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고개 밑에 마을이 배티 또는 이티라 하고, 배티성지로 유명하다. 梨峙(이치)라고 한자로 쓴 곳도 있으나 뜻은 배나무고개로 똑같은 말이다. 여기서 <티>는 고개를 말한다. 속리산 말티고개의 <티>와 같다.
<개천이고개> 서수 궝말앞의 실개천을 따라 골짜기로 오르면 고개가 나오고 곡간이 개천골에 이른다. 천안 북면사람들은 이 고개 마루턱에서 입장 장을 보려면 능선을 타고 엽둔고개쪽으로, 갈월리를 가려면 서수 궝말로 내려왔다.
북면 사람들은 이 고개를 갈월너미라고도 부른다.
<장고개> 성대리 두멍골에서 안성 상중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주민들이 안성장을 보러 넘던 고개라 장고개란 이름이 붙었다. 명암리 사람들도 안성장을 볼 때 이용했다고 한다.
<싸리재> 싸리나무가 많이 나는 고개라는 뜻으로 전국의 많은 지방에서 쓰이고 있다.
대문리 대삼 새텃말에서 북면 대평리 대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양쪽지방 사람들이 다 싸리재, 싸리고개라 불린다.
<돌목이고개> 돌메기라고도 하는데 대문리 칙목에서 병천면 봉향리 돌목이 마을로 연결되는 고개로 돌목이 마을은 돌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며 여기서 목은 길목이란 뜻이며, 참고로 들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들목이라는 이름도 있다.
<논실고개> 신작로가 생긴 이후 백곡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살구물로 내려가는 고개다.
거꾸로 진천에서 백곡쪽으로 올때는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길이라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걸어야 한다.
<목천너미> 갈월리 강당에서 천안 북면 곡간이로 넘어가는 고개다.
북면을 지나야 목천인데 그래서 생긴 이름인가?
<지새울고개> 명암과 지새울 사이의 고개로 명암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고, 명암사람들을 제외한 면의 모든 사람들은 멍심이 고개라 부른다.
<대삼고개> 대삼과 갈월을 연결하는 고개로 대삼사람들은 입장장이나 서울을 오갈 때 여기를 항상 지나다녔다. 버스를 타고 노신에서 내려서 걸어서 고개를 넘었다.
갈월사람들은 대상골고개로 부르며 대삼사람들은 갈월고개라고 불렸다.
백곡과 뗄 수 없는 지명이 있다. 천안 북면, 병천면, 입장면, 안성 서운면에 속한 백곡과 경계를 이루는 동네로 고개 넘어 왕래가 빈번하다 보니 인적교류도 활발하여 서로가 사돈 사이가 되는 마을로 귀에 익은 이름이 많다.
보련골 - 우리는 보령골로 알고 있지만 보련골이다.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마을로 연꽃과 관련되어 연곡리와 보련골 이름 이 만들어진 걸로 보인다.
비선골 - 비성골이라고 흔히 알고 있지만 진천읍 연곡리의 비선골이다.
비(비석)가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안각골 - 마을에 안씨들이 많이 살았고 강당이 있었다고 안강골이라고 했었는데 언제부터 인지 안각골이라 불린다.
곡간이 - 백제 온조왕이 군량을 저장했던 곳이라 곡간이라고 불린다.
곡간은 곡식을 저장하는 곳으로 농촌에서 근래까지 쓰던 말이다.
마당이 - 북면 매송리 자연부락으로 발음 습관으로 매댕이라고 한다.
군단이 - 백제시대에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으로 전해진다. 천안 북면에 있다.
독정이 - 독징이라고 불린다. 정자가 하나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행정구역을 정할 때 마을 이 둘로 나뉘어져 입장과 안성을 경계로 양쪽 다 독정이란 이름이 존재한다.
일송정이 - 소나무 한그루가 있어서 마을이름이 일송정이고 명암입구 마을로 진천읍 건송리다. 고향사람들은 일송징이라고 한다.
두건이 - 백곡저수지가 생기기전에 있던 동네이름으로 수장되어 없어졌다.
살구물 - 행정명칭으로 행정리(杏井里)다. 살구우물이 살구물로 변한 이름이다.
살구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목을 축이고 갔다한다.
다음은 마을별로 정리하여 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에서 가차우면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자세히 기술한 반면
나머지는 좀 소홀히 취급된 면도 있음을 양해 바란다.
<서수> 옛지명 서술원, 서수원에서 서수라고 지어졌고 군사가 주둔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엽둔, 궝말, 양달말, 새마을을 합해서 한 마을을 형성한다.
궝말 : 꿩이 많아서 꿩마을이 시간이 흐르며 궝말로 부르기도 하고 구석에 있다하여 구석마을 - 구석말 - 구억말 - 궉말 - 궝말로 변천했다는 설도 있는데 후자가 가장 설득력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궝말은 지역에 따라 구억말, 궝말, 궉말, 구석말, 국말로 전해진다.
양달말 : 서수의 자연부락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 마을로 양지 바른 동네이며 옛날에 교통기관으로 협탄원이 있던 자리이다.
엽둔 : 엽둔고개 바로 밑에 있던 마을인데 새마을로 전부 이전하여 살고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 현재 외지인들이 드문드문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다.
<상노> 소토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안으로 샘골이 있으며 현재 그곳에 골프장이 생겼다. 당시 논밭이 평당5-6만원에 매매됐고 이로인해 주민간에 갈등도 많았다.
현재 골프장의 배려?로 갈월리 노인들은 잔디에 풀을 뽑는 일을 하며 일당을 받는다.
<중노> 사람들은 안말이란 지명을 더 많이 쓴다. 안방마냥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큰길에서 논밭을 지나 안쪽에 있으며 검은들과 함께 중노에 속한다.
검은들 : 마을 뒷산에 검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니까 검은돌이 검은들로 바뀌었고 옛기록에는 흑석리다. 갈월리 중노에 속한 자연마을이다.
<강당> 학교에 강당이 있듯이 옛날 규모가 큰 서당에는 강당이 있었다.
이 마을에 강당이 있어서 마을이름으로 되었다고 전해진다. 병자호란때 의병으로 싸운 조감선생을 모신 사당 만뢰사가 있고, 강당과 새텃말, 풀무골로 구성되었다.
<노신> 대운말, 아랫말, 장승고지로 이루어진 동네로 갈대밭에 새로 생긴 동네란 뜻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갈월리는 갈대가 많아서 생긴 이름으로 노신을 중심으로 가운데는 중노, 그 위에는 상노 이렇게 이름을 지은 느낌이 들고 강당과 서수는 예부터 내려오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 같다.
집성촌으로 강당, 개죽, 중노, 상노의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자손들의 중심지다.
대운말은 언덕위의 동네로 예부터 도깨비 터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대운이 깃든 동네란 뜻 같기도 하고 아랫말이 있으므로 대웃말이 맞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다.
한때는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일족의 종손이 면내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았다.
아랫말은 말 그대로 언덕아래 마을로 옛길이나 신작로에 맞 닿아있는 동네다.
장승고지는 구수리 개죽에서 갈월쪽으로 가다 보면 갑자기 지대가 확 높아진다.
마을입구이며 갈월리로 들어서는 자리다. 장승이 서 있는 곳으로 추측되며 그래서 생긴 지명 같고 일부 장성구지라고 표기된 기록도 있는데 구전된 말을 그대로 쓴 것 같다.
먹뱅이는 먹방이에서 변형된 이름이다. 먹은 한자로 묵이다. 서울 동대문구 묵동도 먹을 만드는 곳이었다.
먹방은 먹을 만드는 곳이란 뜻으로 전국 곳곳에서 그 지명이 발견되고 있다.
갈월리 노신과 중노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바닥이 넓어 밭이 많고 앞에는 절벽밑으로 개울이 흐르고 들과 강당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말구리는 말이 구르거나 뒹굴어서 생긴말이라고도 하고 큰골짜기란말도 있다. 이런 지명이 전국적으로 발견된다. 대삼으로 가는 대삼고개 입구를 말한다.
주걱산은 노신 남쪽 앞산인데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능선을 따라 가면 대삼고개다.
산이 주걱같이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6.25때 남쪽으로 가야 산다고 해서 동네사람들이 이 산으로 피난을 갔다는 웃지 못 할 일이 전해져온다.
장구산은 강당초입에 얕은 동산이다. 가운데 허리가 잘록하니 장구를 닮았다.
<개죽> 옛지명이 개죽리다. 마을 북쪽 뒷산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개죽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가죽과 관련됐다는 설이 있는데 개죽, 대죽과 같이 대나무와 연관된 이름이 많은 것으로 보아 가죽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뒷산 대나무는 키가 작고쓸모가 없는 대나무다. 그러므로 개옻나무, 개복숭아와 같은 말로 유추 해 볼 수 있다.
‘개’자가 별로여서인지 지금 마을사람들은 대죽마을로 불리기를 원한다.
구메바위는 신작로가 있기전에 바위밑에 구멍으로 지나 엽둔재로 갔는데 구멍바위가 구메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개죽마을 소속이며 음덕진, 음태진이 출신 동네다.
<구수> 김유신 장군과 관련하여 말구유에서 유래 되어 구유가 구수로 되었다는 지명이다.
또한 군사훈련을 할 때 말죽그릇을 아홉 군데 설치하여 구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뒷산자락이 장군봉이고 보면 김유신과 관련 되어 생긴 것 같다.
<내구수> 구수마을 안쪽에 있는 골짜기에 있는 동네며 안구실이라고도 한다.
<과수원> 백곡에서 제일 큰 과수원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과수원이 지금은 없어졌다.
백곡에서 유일하게 약방이 있었고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대삼>대삼, 칡목, 새텃말로 이루어진 동네로 지명유래를 찾을 수 없다.
위 세 동네로 이루어진 곳이라 하여 大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돌목이고개, 싸리재, 갈월고개가 있고 계곡 상류지역이다.
<수문> 상수문, 중수문, 하수문이 있고, 옛날 군사시설로 수문이 있었고 여기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만뢰산에 국경을 지키는 성이 있고 보면 설득력 있는 말이다.
<장대> 원래이름은 장터로 5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장터가 있어서 마을이름이 되었고, 한자로 장대(場垈)이다. 옛날에는 꽤 큰 규모의 돌고개장이 섰다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소금소 : 돌고개장은 서해 아산만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들어와 내륙지방인 괴산, 음성, 증평 각지로 팔려나가는 역할을 하는 소금장터였다. 장터 앞 개울에 매우 큰 물웅덩이가 소금소인데 소금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용암> 마을에 용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이름이 유래 되었다.
모시골 : 마을사람들은 모세골이라고 하는데 모시골이 맞다. 옷감의 모시를 말한다.
옛날에 모시가 많이 생산 된 곳이라고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苧洞)이라고 했다.
안골 : 용암마을의 안쪽 골짜기를 말하며 잣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곡> 지새울의 음역이다. 지사울이 오랜 세월이 지나며 지새울로 변했다.
고려말 강릉김씨 김사혁공이 이 동네로 이주하여 터전을 잡고 살았으며 김공이 앞일을 잘 맞추어 사람들이 지사라 일컬었으며 이 마을을 지사울로 불리었다.
옛이름은 와조동이며, 강릉김씨가 대대로 주류를 이루며 현재까지 많이 살고 있다.
<사정> 사징이라고 하는데 사정이가 변형된 말이다.
옛 선비들이 산수가 수려한 이 곳 모래 백사장에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사정(沙亭)이라 하였고 이것이 마을이름이 되었다.
<지구> 池九. 주민들은 지구머리라 한다. 아홉 개의 골짜기에 못이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뒷산이 만뢰산자락인 갈미봉이 있고, 근래에는 진천읍 연곡리와 도로로 연결되었다.
<상송> 소나무 숲속에 마을이 있어서 마을이름을 상송(上松)이라 했다.
<두주> 斗酒 글자그대로 말술이다. 술을 잘 먹는 사람이 있어서 마을이름이 그렇다는데 특이한 지명이다.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어서 즘이라고 했는데 점이다.
옹기를 구워 파는 점말, 밤나무가 많은 밤나무골, 새로 생긴 새텃말이 마을을 형성하며 40년만에 폐교가 된 백곡중학교가 있었다.
<명심> 물이 맑고 산세가 수려하여 명심(明心)이라 하는데 와전되어 멍심이라고 한다.
명암마을 중 맨 윗마을을 말하고 가운데를 양달말이라 한다.
백곡초등학교 명암분교가 있었으나 현재 폐교되고 매각되어 사유지가 되었다.
<동암> 아래 하류쪽 마을을 동암이라고 하며 명심마을의 명(明)자와 동암의 암(岩)자를
따서 명암리의 명칭을 지었다.
<발래기>무제봉 골짜기에 있는 명암리 중 제일 꼭대기 마을로 천주교와 관련하여 마을이름이 알려져 있고, 시설로 한국순교복자수녀원이 있다.
<용진> 대명동에서 떠내려 온 구렁이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연유로 용진이란 이름이 생겼다. 용덕리 중에서 가장 큰 동네이고 앞 개울에 가마소가 있다.
<유곡> 주민들은 느릅실이라 부르는데 느릅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느릅나무 유(楡)자 를 써야 되는데 웬일인지 선비유(儒)자를 따서 유곡(儒谷)이라고 관청에서 마을이름을 사용하니 공무원들의 실수가 아닌가 한다.
느릅실에서 왼쪽길은 양백리, 오른쪽길은 성대리로 가는 방향이다.
<덕가동> 느릅실에서 배티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여러 가구가 있는 동네다.
백곡면 사람들은 덕개동이라고 부르고 한자로 덕가동(德加洞)이라 쓴다.
<성대>성터가 있던 자리이며 성터를 한자어로 바꾸어 성대(城垈)다. 성대국민학교가 있었는데 백곡초등학교 성대분교로 되었다가 폐교되었다.
<모니> 옛지명이 모리(毛里)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대명동>전설에 의하면, 대명동(大明洞) 계곡에는 청학과 백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천년이나 묵은 대명이란 구렁이가 용이 되고자 깊은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가려고 해도 옆골짜기 학동에 살고 있는 학이 항상 방해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니 깊은 물을 사모(思慕) 하였다고 하며 이곳을 모리(慕里) 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리(毛里) 로 변하고 모니라 한다.
<상봉>산의 형세가 코끼리 모양을 하여 象峰(상봉)이라 하였으나 나중에 상봉(上峯) 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상백>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 청학(靑鶴) 과 백학(白鶴) 이 살았다 하여 양백(兩白)이라 하였고, 청학이 살던 곳이라 하여 지금도 청학동이라 한다. 상백과 청학동으로 이루어졌다.
<하백>중백, 하백, 은골, 새터 자연마을로 은거하려는 선비들이나 정감록 (鄭鑑錄)에 매혹되어 피란지를 찾던 인사들이 이 고장을 찾아서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배티>반역모의를 하던 무리들이 이 곳 고개에서 패하여 패티(敗峙)라고 하였다가 후에 배티로 변했다는 설과 배나무가 있어서 배티(이티)라는 설이 있다.
조선때 천주교도들이 관군에 붙잡혀 30여명이 순교한 곳이라 지금은 천주교 성지로 되었다.
백곡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