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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6일 주일예배 설교 * 종교개혁 508주년 기념 주일
고린도전서 14:26-33
“질서 있는 복음, 이웃과 함께 가는 진리”
오늘은 종교개혁 508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을 10월 마지막 주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로 1517년 10월 31일을 꼽기 때문입니다. 이날 루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논제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루터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급력으로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고, 많은 독일 사람들이 이 루터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개혁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중에는 1525년에 있었던 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500년 전이네요. 그 일은 “독일 농민전쟁(Deutscher Bauernkrieg)”입니다. 500년 전 독일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독일 농민들의 봉기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300년대와 1400년대에도 있었고, 불과 10여년 전까지 “농민화”(農民靴, Bundschuh, 1493-1517) 운동과 “가난한 콘라트”(Armer Konrad, 1514년) 운동이 독일 남서 지역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독일 농민전쟁은 앞선 다른 봉기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농민들이 성서와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요구하고 봉기를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 농민연합”(Christliche Vereinigung der Bauern)으로 지칭했다는 것과 그들이 1525년 3월에 채택하고 선언한 “농민들의 12개 조항”(Die 12 Artikel der Bauern)에 잘 드러나있습니다.
① 각 공동체는 스스로 목회자를 선출하고, 부적절할 경우 해임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인간의 교리가 아닌 순수하고 명확한 복음만을 설교해야 한다.
② 곡물의 십일조는 내되, 공동체가 선출한 교회 관리자가 징수하고, 선출된 목회자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잉여분은 마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국방세로 사용해야 한다. 가축에 대한 십일조는 인간이 만든 것(menschen erdicht)이므로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
③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귀한 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 이것은 통치자에게 불순종하거나 무질서한 삶을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영주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처럼 농노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거나, 성경을 통해 우리가 농노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④ 수렵과 어획을 금지한 것을 철회하라. 가난한 사람에게 야생 동물, 새, 흐르는 물에서의 물고기잡이를 막아선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동물에 대한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
⑤ 영주들이 독점한 공유지 삼림은 공동체에 환원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땔감과 건축 목재 등 생활에 필요한 만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⑥ 날마다 증가하고 있는 과도한 노역에 대해 공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조상들이 섬겼던 것처럼,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따라 노역을 줄여야 한다.
⑦ 영주가 농민의 토지를 빌려주는 방식에 공정한 규정이 있어야 하며, 영주는 더 이상의 추가적인 봉사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영주가 봉사를 필요로 할 경우, 농민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요청해야 한다.
⑧ 토지 지대가 너무 높아서 농민들이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재산이 손상되는 경우, 정직한 사람들의 심사를 거쳐 공정하게 지대를 다시 책정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그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⑨ 지속적으로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편애나 악의에 의해 불공정하게 처벌하는 것을 폐지해야 한다. 오래된 성문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⑩ 공동체에 속했던 목장이나 경작지를 일부 영주들이 부당하게 차지했는데, 이를 공동체의 소유로 환원해야 한다.(정당하게 구입한 경우는 제외)
⑪ 영주가 농민의 사망 시 유가족으로부터 재산을 가져가는 '사망 시 상속세(den todt fall)' 풍습을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 이 풍습은 하나님과 명예에 위배되며, 과부와 고아를 보호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그들을 강탈하는 것이다.
⑫ 이 조항들 중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성경의 근거로 명확히 설명해 줄 경우 기꺼이 철회할 것이며 그 조항은 그 즉시 무효가 되고 더 이상 효력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진실로 하나님께 반하고 이웃에게 짐이 되는 더 많은 조항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들 역시 유보하고 채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고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있기를.
500년 전 독일 농민들의 요구가 어떻게 들리시나요? 저는 그 당시 농민들이 농노로 살아야 했던 현실과 설움, 애통과 절규가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영주들에게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역시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겨달라고, 형제자매로 대해달라고, 제발 같이 살자고 하는 절규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영주들 즉 어쨌든 기독교인인 통치자, 지도자들에게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 그리스도인, 사랑과 자비로 평화를 일구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절규가 5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여전히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루터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루터는 1525년 4월쯤 농민들로부터 이 조항이 포함된 서한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곤 『슈바벤 농민들의 12개 조항에 대한 평화를 위한 제언』(Ermahnung zum Frieden auf die zwölf Artikel der Bauernschaft in Schwaben)이라는 글로 응답하는데. 이 글에서 루터는 제후 및 영주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그 시점에 해야 할 일들을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이 파괴적인 반란을 자초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제후와 영주들이며, 특히 지금까지도 그 완악한 마음을 회개할 줄 모르는 눈먼 주교들과 미치광이 사제들 그리고 수도승들에게 무엇보다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의 통치자들인 당신들은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려고 백성들을 속이고 강탈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민중들은 그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칼이 이미 당신들의 목을 겨누고 있으나, 당신들은 아무도 당신들을 말 안장에서 떨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안위와 완고한 사악성이 당신들의 목을 꺾을 것이니 두고 보시오. 당신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의 원인이니, 당신들이 제때 당신들의 행위들을 바꾸지 않으면 그 진노가 당신들에게 임할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들이 뭔가를 잃어도 평화를 보존하는 것이 당신들에게 열 배나 되돌려 줄 것입니다. 그러나 공공연한 갈등이 있게 되면 당신들은 재산도 생명도 모두 잃을 것입니다. 좋은 길인 다른 택함으로써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왜 당신들은 위험을 무릅쓰려고 합니까?
농민들이 발표한 12개 항목 중 얼마는 매우 공정하고 정당해서 하나님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당신들의 명성을 탈취하고 ‘고관들에게 능욕을 퍼붓는다’는 시편 107:40이 말한 바가 성취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복음을 설교할 목사에 대한 선택권을 요구하는 그들의 요구를 어떤 권리를 내세워서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죽은 자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같은 경제적 불의에 대한 저들의 항거 역시 옳고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하들을 착취하라고 임명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도록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통치자들이 무거운 세율을 정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다면 오래 참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루터는 제후와 영주들을 나무라며 농민들을 착취하는 불의를 회개하고 시정할 것을 경고하며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눈길과 마음이 여기보다 더 이끌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가 농민들의 편만 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루터는 <평화를 위한 제언>의 다른 부분에서는 농민들에게 그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면서도 그들 역시 자신을 돌아보라고 타일렀습니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복음의 설교를 금하고 백성들을 견딜 수 없이 억압하는 제후들과 영주들을 하나님이 그들의 보좌에서 내려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은 나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다. 영주들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커다란 죄를 지었고, 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들도 당신들의 대의를 정당하게 선한 양심으로 제기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들이 잠시동안 승리하고 모든 제후들을 죽인다 해도 결국 당신들의 영과 육신을 영원히 상실하는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웃어버릴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진지하게 고려할 것은 당신들이 얼마나 강하고 영주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진정 정당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기독교인의 단체 또는 동맹’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법에 따라 행동하고 살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 말씀, 명칭들이 헛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십계명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신들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폭력을 통해 권위를 찬탈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친애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권리를 찾는 척하면서 그리고 그의 이름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권리와 반대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또한 통치자들이 사악하고 불의하다는 사실이 무질서와 반란을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자연법도 “누구든지 보복하기 위해서 사람을 치는 자는 불의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 역시 “복수는 나의 것이다. 내가 갚아주리라”(신 32:35)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루터는 농민들의 요구가 한편으론 정당하고 공정하다고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농민들이 정작 자신들이 근거로 하며 내세우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서, 칼과 창 등의 폭력이 아닌 고난과 시련에 대한 인내심 있는 신앙과 기도로 돌아갈 것을 경고하고 촉구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자 행동이라면서요.
농민들을 대하는 루터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을 대하는 루터의 태도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좋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독일 남서부 지역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파 또는 사회경제적 해석 학파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 평가엔 <평화를 위한 제언>이 무위로 돌아가고, 농민봉기가 더 확산되며 전쟁이 커지자 루터가 농민들을 진압해야 한다는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봉기가 진압된 이후 농민전쟁 지역이었던 남서부는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등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은 채 10년도 되지 않아 지지자 및 동력을 다소 잃으며, 독일 중북부 지역에 국한되는 모습으로 진행됐습니다. 또한, 밖으로는 로마 교황청 및 가톨릭 옹호파와 논쟁하고 안으로는 급진주의자들과 논쟁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독일 농민전쟁과 루터에 대해 묻는다면 참 난감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였기에 말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루터가 <평화를 위한 제언>에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루터와 그의 입장을 변호하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루터는 질서 특히 하나님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의 발자취에서 드러나는데, 심지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자 초기인 면죄부와 교황의 수위권을 비판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루터는 로마 교황이 온 주교의 머리이며 온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교황제도 자체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권한을 축소하고 조정해야 한다고도 말한 것은 당연하고요.(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 1519년) 또한,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면서 그를 “가장 거룩한 아버지” 그리고 “경건한 자”라고 부르면서 개인 레오에 대항하여 어떤 악한 것도 행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서를 근거로 교황제도를 비판하고자 했음을 조심스럽게 밝혔습니다. 그렇게 루터는 가톨릭에서 나와 다른 분파를 만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로마 가톨릭은 그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절충하지 않고 늘 해왔던 대로 교회의 이름으로 루터를 교회 밖으로 쫓고 생명을 앗아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루터가 교황청 및 제국으로부터 파문당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피신해있던 때나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종교개혁을 주도하던 때나 늘 한결같이 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피신해있던 시절 루터는 외르크(Jörg)라는 이름으로 종교개혁적인 글들을 계속 출간했으며 이 이름으로 잠시 비텐베르크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와 복음에 따른 개혁을 기치로 성물을 훼손하고 성상을 파괴하는 모습을 목도했고, 말없이 바르트부르크에 돌아와 『소요와 폭동을 피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실한 경고』(Eine treue Vermahnung zu allen Christen, sich zu hueten vor Aufruhr und Empörung)라는 글을 피신 중임에도 마르틴 루터라는 본명으로 출간할 정도였습니다. 이 글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폭력적이지만, 개혁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면서 따라서 엄청난 폭력으로 교회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고, 또 그런 주장을 ‘루터적’이라 하지 말라고, 그런 식으로 복음을 당파적으로 매도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첫 일주일 동안 매일 설교를 했는데, 그 이유는 급진개혁파가 주도한 성상 파괴, 미사 전면 폐지 등으로 일어난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함이었고, 그 내용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개혁은 폭력이다."라면서 개혁은 말씀을 통해서만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사랑을 바탕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배려하고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따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미사 폐지나 성상 철거와 같은 외적인 변화는 필요하지만, 이는 강압이 아닌 자발적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신앙이 약한 이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에 맞춰 개혁의 속도를 늦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해 부활절 성찬은 기존의 방식대로 교인들에게 잔을 나누지 않는 단종 성찬으로 진행하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상의 점들을 볼 때 루터는 아무리 좋은 뜻이더라도 그에 걸맞은 외형, 그릇, 질서에 적합한 형태로 담겨져야 하고, 또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복음”이자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좋은 것일수록 다른 이들의 왜곡과 오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곧 그 좋은 것의 목적대로 나타나기 위해- 좋은 것에 담아내려고 하는 노력과 수고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역시 하나님의 언어로 기록된 것이 아닌 약자인 인간들을 위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는” 번거로움과 수고 그리고 인내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굳이 “인간으로 오신 성자라는 방법을 통해” 그리고 “복음” 역시 굳이 “인간의 역사 곧 인간의 질서 속에 들어오심을 통해” 드러내 보이셨음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며 간과하지 않는 태도이자 자세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이것은 비단 루터만의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입장은 바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루터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갱신을 주창하면서 바울서신들도 많이 인용했는데, 이런 점을 미루어보아 루터가 바울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바울의 입장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지식과 믿음이 있을지라도 약자들을 배려하라는 루터의 입장과 설교는 고전 8-9장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관한 약자 배려 입장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맞고 옳다 하더라도 기존 질서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넓게 오늘 본문까지 확장됩니다.
오늘 본문 역시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입장처럼 논란이자 피하고 싶은 부분임은 틀림없습니다. 논란이 되는 34절 이하는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듣기 거북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 부분을 놓고 바울이 여성의 권리를 무시했다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세간에서만이 아니라 교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물론 일견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빌립보서나 로마서 등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에 대한 태도, 특히 여성 신도들에 대한 태도를 종합해보면 이런 평가는 부당하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에 나오는 여성들인 유오디아나 순두게가 교회 내에서 차지하는 영향력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 내에서 여성인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과 지도력 자체는 인정하면서 그러니 서로를 품으며 관용을 베풀라고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린도전서에서와 같이 어디 여자들이 나서서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냐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글레멘드를 포함한 여성 모두를 동역자로, 빌립보 교회의 중요 지도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장에서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언급되는 뵈뵈 역시 여성입니다. 그리고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로 봉사자, 사역자, 집사 등으로 해석됩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바울서신 중 빌 1:1에서는 보통 수신자들에 포함된 집사들로 번역하고,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자신과 그 사역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즐겨 쓰는데 보통 일꾼, 사역자로 번역합니다. 즉 겐그레아 교회의 여성 뵈뵈를 교회의 일꾼, 봉사자, 집사, 지도자로 인정하고 로마에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입장이 바울의 일반적인 태도였다고 보기보다는 고린도 교회와 그 지역 상황에 맞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듯합니다. 더욱이 본문 직전인 22-24절에서 바울이 불신자들과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을 언급하는 것을 미루어보아, 당시 사회상 특히 고린도 지역의 특색에 비추어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나서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그들을 배려하여 조금은 자제하고 질서정연하게 말해달라는 권면이라고 이해하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뒤집어 생각해보면, 애초에 여성들이 공개적인 기도와 예언 및 예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 적어도 여성들의 그런 활동을 금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머물며 사역한 기간은 사도행전을 따르더라도 최소 1년 6개월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다음가는 기간으로 이렇게 장기간 지속적으로 체류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어쨌든, 잘 아시다시피 갈 3:26-28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바울이지만, 루터가 이해한 것처럼 바울 역시 이 “복음”을 “혁명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리스도 예수라는 옷을 입은” 복음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기존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그 지위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했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인간의 질서를 하나님의 방법 곧 그의 말씀으로 대응했다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방법으로 무리하게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그 과정 역시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예수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리고 쉽게 예수께선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제사장과 성전 중심의 유대교의 종말을 고하려 오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분명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고착되어 낳는 병폐를 경고하고 갱신을 요구하셨던 것이지 결코 그 질서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앞서 루터를 대한 로마처럼 예루살렘 역시 그 개혁과 갱신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묵살하고 처단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이자 핵심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그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보완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 바로 오늘 예배의 말씀으로 낭독한 마 8:1-4입니다.
나병은 율법에 의하면 마을을 떠나 문밖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병이었습니다. 죄와 오염을 상징하는 종교적인 부정 상태로 간주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불과 1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취급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인 이 지역, 봉선동이 광주 개화기 당시에는 나병촌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을 예수께선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곤 레위기 14:1 이하 즉 율법이 말하는 것처럼 제사장에게 확인받고 정한 새 두 마리 등의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마을과 공동체의 일원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게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차는 율법에서 제시된 것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기존 규정인 율법을 존중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정결례를 거행하는 제사장과 예루살렘 성전 및 그 제도를 존중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절차나 질서를 너무나 쉽고 가볍게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근거가 예수님에게서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율법과 성전, 그리고 바리새파와 제사장을 비롯한 제도와 구조를 예수께선 완전히 무시하시고 뒤엎으러 오셨다고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해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폐와 잘못된 것은 지적하고 시정과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권위와 질서는 존중하고 또 존중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따르는 통치자들과 그 추종자들에겐 반동분자로 취급당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언급한 세 사람,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루터나 예외 없이 모두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복음의 진리가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이들 모두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과 섬김 그리고 평화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인내의 기도로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요. 그리고 하나님께선 이들 모두를 당신의 아들, 당신의 종, 당신의 사람, 당신의 사역자로 인정하고 세우셨다는 것을요.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는 게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습니다. 자칫 불의와 부조리를 용인하라는 말로,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말로 들리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혹시 그저 고난을 참고 견뎌내라는 종용이진 않을까 두렵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천상의 소리, 이상적인 말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진정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떨리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그저 저의 기우이길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오늘 설교는 저의 입장이자 해석이기에, 이 외에 다른 견해는 덮어놓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저의 설교는 단순히 제 견해라기보다는, -종교개혁의 후예인-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입장이자 전통입니다. 즉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해 우리가 물려받은 종교개혁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종교개혁의 상속자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인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평화목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종교개혁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인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과 갱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 평화와 관용> 두 마리 토끼 모두를 놓치지 않는 우리 평화목교회 공동체와 교우가 되길 기원합니다. 비록 질서와 함께 가는 개혁, 이웃 및 공동체를 존중하는 개혁의 과정은 지난하고 힘들겠지만, 그 여정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과 우리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선 위로하시며 함께하실 것입니다. 부디 우리들의 공동체와 삶에 주님의 진리와 사랑, 평화와 친교가 끊이질 않길 기원합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진리는 사랑과 함께 기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