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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주유선회(榮州 儒宣會) 원문보기 글쓴이: 정태주
정운경, 그 시대와 역할에 대하여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들어가는 말
1. 정운경이 살았던 시대
2. 정운경은 누구인가?
3. 역사 기록에서 공인받은 행적
4. 삼판서 고택에 얽힌 사연
5. 정운경의 아들 정도전
- 글을 맺으면서
들어가는 말
고려후기를 살았던 정운경(鄭云敬: 1305~1366, 충렬왕 3~공민왕 15)은 영주 지역이 배출한 인물 중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정운경의 집안은 고려시대 향리 출신에서 출발하여 신흥 사대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서 최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원나라 간섭이 이루어지던 고려후기 격동의 시대에 출생하여, 새 왕조의 건국이라는 변화로 나아가는 시기를 살아간 정운경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
1. 정운경이 살았던 시대.
정운경이 살았던 고려후기의 사회는 정치, 사상적으로 변화의 조짐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 하에 들어가면서 원나라에 종속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왕의 시호가 ‘충’자 돌림으로 붙여진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 간섭이 기간이 지속되면서 원나라에 빌붙는 세력인 부원세력(附元勢力)도 점차 확산되었다. 부원세력은 일제시대의 친일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의 도입이라는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1259년 몽고와의 전쟁을 끝내고 1270년 무신정권이 타도되고 왕정이 회복됨으로써 고려사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고려왕[원종]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세자인 충렬왕의 비로 맞이하였는데, 그 후에도 역대 국왕은 이러한 관례를 따랐다. 그리하여 두 나라 왕실은 혈연적으로 굳게 맺어지고, 고려세자는 북경에 머물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원제국의 부마[사위]가 된 고려의 왕은 원에 대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반대로 원의 간섭을 받기도 쉬웠다. 원은 고려왕에 관련된 칭호를 격하시키고, 고려의 정치조직을 개편하였다. 또 다루가치의 파견, 정동행성의 설치 등을 통해 내정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여러 조치들은 고려국가의 권위에 적지 않은 상처를 준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원은 고려가 강하고 문화가 높은 나라임을 인정하여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하였다. 따라서 고려는 주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관료재도에 고려사람이 원나라에 가서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원과 강화를 맺은 원종(元宗, 1259~1274)과 그 다음 충렬왕(忠烈王, 1274~1308)시대는 원의 일본침략 시도 때문에 고려가 병선과 군대를 대느라 많은 고통을 받고 내정의 간섭도 많이 받았으나 그 다음 충선왕(忠宣王, 1308~1313) 때에는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온 정치, 사회, 경제의 폐단들을 시정하려는 개혁이 시도되었다. 충선왕대의 개혁정치는 홍자번(洪子蕃) 등의 지원과 왕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방향성이 제시되고 사림원(詞林院) 등의 기구를 통해 뒷받침되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충렬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여 유교이념에 따라 왕권을 강화하고 관료정치를 회복하려는 방향에서 관제를 바꾸었고, 권세가들의 농장 확대로 인한 토지제도의 문란을 시정하여 국가수입을 확대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고 하였으며, 각종 농민부담을 탕감하고 억지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권세가의 반발과 몽고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개혁정치를 강력하게 뒷받침할 만한 정치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것도 실패의 큰 원인이었다.
개혁에 실패한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忠肅王, 1313~1330) 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원나라 수도[북경]에 들어가서 그곳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연구소를 차리고 원의 거유(巨儒)인 조맹부 등과 고려의 이제현(李齊賢)등을 모아 유학을 연구 토론하였으며 원나라의 과거제도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은 뒷날 고려의 유학을 부흥시켜 개혁 지식인이 성장하는 첫 번째 길을 열어놓았다. 고려의 유학은 주희에 의해 완성된 신유학, 즉 주자학(또는 성리학)의 도입으로 큰 전기를 맞게 된다. 중국의 북송(北宋)에서 일어난 신유학은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에 이르러 집대성되어 성리학, 주자학 등으로 불려졌다. 고려는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진 이후로 양국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성리학은 빠른 속도로 도입되었다. 원과의 관계 이전에 고려에서도 12세기에 이미 사서(四書)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성명(性命)·의리(義理)의 학문 경향이 일어나고 있었고 또 남송을 통해서 주자학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주자학의 본격적인 수용은 13세기 말 안향(安珦), 백이정(白㺿正)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과 그 과정에 대하여 여러 기록이 남아있으나 대체로 주자학 도입의 계보로 안향과 백이정, 권부를 꼽는다. 안향(安珦, 1243~1306)은 충렬왕이 원에 설치한 만권당에 들어가 원의 학자와 교류하면서 주자서를 접하고 귀국길에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함께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안향에 의해 처음 소개되고 백이정, 우탁, 권부에게 전해진 후 그 뒤를 이어 백이정에 원에서 직접 성리학을 접하고 서적을 구해 돌아와 이를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박충좌(朴忠佐, 1287~1349), 이곡(李穀, 1298~1351)에게 가르침으로써 전파되었다. 정운경의 행적에서 이곡과 친분을 맺은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만큼 정운경 역시 성리학 이해의 바탕 위에서 성장하는 고려후기 사대부의 전형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원에서 관직에 오르고 이제현과 함께 공민왕의 추대에 참여한 이곡(李穀, 1298~1351)은 한산(韓山, 지금의 충남 서천)지방 향리 출신이나 복주현에서 외관을 역임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이곡의 아들로 원에서 벼슬하다 공민왕대 활약하는 인물이다.
이색은 처가가 안동 권씨일 뿐만 아니라 사돈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그와 사돈지간이자 좌주ㆍ문생관계인 권근은 학문적으로도 이색의 뒤를 이어 성리학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성리학 수용기의 사대부를 출신을 살펴보면 전체 16명 중 영남이 9명으로 영남출신 인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과거 급제율이 상승한 삼남지역 중에서 호남지역 출신이 매우 적다는 점에 비추어 이 경향은 후에 성리학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영남은 이른바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대변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충선왕 다음 고려의 왕위는 충목왕으로 이어졌다. 충목왕(忠穆王, 1344·1348)은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두고 부원세력을 척결하면서 권세가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기도에 권세가들이 가진 이른바 사급전(賜給田)을 혁파하여 일반 관리와 국역 부담자에게 녹과전(祿科田)으로 지급하는 조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녹과전제도는 이미 무신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1271년(원종12)부터 간헐적으로 시행되어 왔지만 권세가들의 반발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권세가들은 개간과 겸병 등의 방법으로 토지 집적을 계속하여 국가재정과 농민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심한 경우에는 한 사람이 가진 농장이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에 이르고, 한 토지에서 조세를 받아가는 주인이 6~7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왕실토지인 장(莊)이나 처 등이 전국에 360여 곳에 달하였다. 국왕의 사치와 낭비, 그리고 몽고의 공물수탈은 민생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는데, 특히 사냥에 필요한 해동청을 징수하기 위해 응방이라는 관청을 두고 갖가지 민폐를 일으켜 큰 원성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몽고간섭시기에 큰 농장을 가진 권세가들은 권문세족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귀족들도 포함되지만, 몽고어의 통역관이 되거니 응방의 관리가 되어 출세하기도 하고, 원나라 황실과 혼인을 맺거나 원나라로부터 만호(萬戶)의 직책을 얻는 등의 방법으로 출세한 신흥세력이 적지 않았다. 기철로 대표되는 기씨 일족의 세도는 원나라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출세한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의 문벌처럼 가문을 통한 족적인 세력 기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개인의 재능에 따라 출세하고,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상대적 진보성을 지니고 있었다.
권문세족들은 도평의사사에 참여하여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였다. 원래 고려 전기의 도병마사는 10여명 안팍의 재신과 추신으로 구성되는 임시적 합의기구였으나, 이것이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고 그 구성원이 점차 늘어나 70~80명까지 이르게 되고 그 기능도 상실적인 최고 행정 기관으로 격상되었다. 이러한 도평의사사의 기능 강화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무신집권시대에 비해서는 왕권이 강화되고 관료정치가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원 간섭하의 고려는 국왕의 개혁과 권문세족의 반발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1368년(공민왕 17)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 나가고, 명이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고려의 개혁정치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이 좀더 적극성을 띠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공민왕은 비록 원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가지고 있었지만 고려왕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밖으로는 반원친명정책을 분명히 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여 왕권강화와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정운경은 바로 이러한 원 간섭 시대인 고려 충렬왕 때 출생하여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 생활을 두루 거쳤다. 공민왕 때는 참신한 개혁 관리로서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실무를 만튼 역할도 했다. 그가 고려사 열전의 양리(良吏)에 수록된 것은 관리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운경은 넓게 보면 고려가 원 간섭 시기를 극복하고 공민왕 시대에 이르러 자주적인 개혁정치를 펴려는 시대적 조건 위에 있었으며, 좁게 보면 지방의 향리 집안에서 출발하여 성리학을 이념으로 중앙으로 진출하는 사대부 집안의 전형을 축소판처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정운경은 누구인가?
정운경의 행적을 정리한 자료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고려사> 열전의 기록을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등 조선시대 당대에 정리된 자료들이다. 그리고 아들 정도전이 찬한 행장을 비롯하여, 후손들이 전대의 기록을 토대로 정리한 묘표, 신도비명 등 각종 기록이 전한다. 정운경의 행적을 살펴보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행장이다. 대개 한 인물의 일생을 기록한 자료로는 아들과 같이 피전자와 가장 가까운 비속이 찬술하는 가장(家狀)과 이를 다시 정리한 행장이 있다. 행장은 비지(碑誌) 찬술의 가장 기본 자료가 된다. 이외에 시호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장(諡狀), 묘소의 바로 앞에 세우는 묘표(墓表), 광중에 넣는 묘지(墓誌), 신도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정도전이 찬한 행장을 중심으로 정운경의 삶을 개관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정운경은 1305년(충렬왕 31)에 강주(剛州:지금의 영주) 구성산성(龜城山城)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봉화. 증조부 공미(公美)는 봉화 고을의 호장을 지냈고 추밀원부사에 추증되었다. 조부 영찬(英粲)은 비서랑동정을 지냈고 밀직부사에 추증되었다. 부친 균(均)은 검교 군기시감정을 지냈고 밀직제학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순흥 안씨로 안상열의 따님이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이모님의 집에서 자랐다.
10세때 영주의 지방 학교인 향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복주(현。安東)의 향교로 올라갔는데 실력이 뛰어나서 복주의 목사에게 훌륭한 재주와 기국(器局)을 지닌 것으로 인정받았다. 10대에 외삼촌인 한림공 안분(安奮)을 따라서 서울인 송도로 들어가서 개경 관학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때 한림 유동미(劉東美)와 근재(謹齋) 안축의 칭찬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이곡과 함께 관동지방의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다가 영해부(영덕)에 이르러 수년간 글을 읽었다. 그 뒤 간의대부를 지낸 윤안지와 삼각산에서 공부 하였는데 한번 본 것은 다 기억하였으며 대의(大義)를 통했다고 한다.
병인년인 1326년(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330년에는 동진사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뒤로 36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외직으로 나아가서는 상주목 사록(司錄), 지밀성군사, 복주판관을 비롯하여. 양광도․교주도안찰사, 전주목사, 서해도 찰방, 강릉존무겸 삭방도 채방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도평의 녹사, 삼사도사, 통례문 지후, 전의 주부, 홍복도감 판관, 서운부정, 성균 사예, 전교 부령, 직보문각 지제교, 전의부령, 전법총랑, 판전교시사, 병부시랑, 비서감보문각직학사, 지형부사, 영록대부 형부상서,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상호군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사이에 하정사(夏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를 다녀온 일이 있다. 정운경은 충목왕 때에 서운 부정(書雲副正)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에 뽑혀서 새해 축하 사절로서 원나라에 갔다. 당시 기황후(奇皇后)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중귀(中貴)에 고려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와서 음식을 대접하는 품이 거만하였으므로 정운경이 정색하여 “오늘의 접대는 옛 주상(主上)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니 중귀들이 크게 놀라며 “이 선비가 우리를 깨우쳐 주었다”라고 말했다. 고려 관리로서 원의 지원을 받는 세력에 맞서서 꼿꼿한 풍모를 보인 정운경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을사년(1365년) 정운경은 병환 때문에 벼슬을 사퇴하고 영주로 돌아왔다가, 다음해(1366년) 정월 23일에 집에서 서거하였다. 향년은 62세였다. 문계서원(文溪書院)과 문천(文川)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되었다. 정운경의 시호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정운경이 서거하자 친구인 성산 사람 송밀직과 복주사람 권검교가 서로 의논하기를 ‘벼슬이 호를 받을 수 있는 품계가 못될 적에는 친우가 시호를 지어주는 법이다. 도연명의 정절이라는 시호와 서중거의 절효라는 시호가 이런 전례에 속한다.’하고 묘표에 염의(廉義) 선생이라고 썼다고 한다. 정운경의 시호가 염의인 까닭은 이에서 연유한다.
아내는 강주<剛州(영주)> 우씨인데 산원 우연(禹嚥)의 따님이었다. 정운경은 평소 가산에 힘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준비했는데 부인께서는 가계의 유무를 헤아리지 않고 편의에 따라 음식을 장만하여 접대함으로써 어진 이를 친하고 선한 이를 벗하는 뜻을 받들었다고 한다. 두 분의 분묘는 합장으로 되어 있다. 정운경은 우씨와의 사이에 삼남 일녀를 두었다. 장남 도전은 이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어 봉화백에 봉해졌으며 영상에 제수되었는데 시호는 문헌공이다. 저서에는 「경제문감」,「심기리 삼편」,「불씨잡변」등이 전해오고 있다. 차남 도존은 직제학으로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막내인 도복은 호가 일봉인데 한성판윤을 지내고 후에 성주 유학교수와 인녕부 사윤에 이르렀다. 따님은 평해 황유정에게 출가했는데 유정은 판서 벼슬을 지냈다. 도전의 아들 진은 양도 관찰사에 형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희절공이다. 영은 소윤을 지냈으며, 석은 통례문 지후를 지냈다. 도존의 아들 담은 중추원 부사를 지냈다. 도복의 아들 기(淇)는 생원을 지냈고 사위 손권(孫權)은 월성(月城) 사람으로 무참군을 지냈다. 사위 황유정의 아들 전은 지평을 지냈고, 현은 부윤을 지냈다..
3. 역사 기록에서 공인받은 행적
위에서 행장을 중심으로 정운경의 행적을 살펴보았는데, 이어서 국가의 공식 기록인 <고려사>열전의 '양리(良吏)' 편을 통해 정운경의 구체적인 삶의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고려사>에 기록된 정운경의 행적은 공인된 기록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운경은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다. 충숙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 사록(司祿)에 제수되었는데 “용궁(龍宮) 감무가 재물을 탐한다.”고 무고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안렴사가 정운경을 보내 국문하게 하였다. 정운경이 용궁에 이르러 감무를 보고 문초하지 않고 돌아왔다. “관리의 탐오함은 비록 악덕이라 하겠으나 재주가 법을 농락하고 위엄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감무는 늙고 또 소임을 이기 못하니 누가 뇌물을 바치려고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안렴사가 과연 그 무고임을 알고 탄식하여 “근자에 관리들은 엄하고 혹독하기를 숭상하나, 사록은 진실로 장자다.” 라고 하였다.
주에 환관이 있어서 원 천자의 사랑을 얻었다. 사명을 받들고 와서 예가 아닌 일을 행하고자 하니, 정운경은 곧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환관이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밤에 용궁까지 좇아가서 사과하므로 이에 돌아갔다. 조정으로 들어와 전교시 교감이 되고, 여러 번 옮겨 홍복도감(弘福都監) 판관이 되었다.
충혜왕 때에 나가 지밀성현사(知密城縣事)가 되었다. 이때에 밀성 사람 가운데에 재상 조영휘(趙永暉)의 배를 빌린 자가 있다. 조영휘가 어향사(御香使)안우(安祐)에게 부탁하여 공문을 보내어 이를 징수하려고 하였지만 정운경이 덮어두고 행하지 않았다. 안우가 김해부에 달려 들어와서 교외에 출영하지 않았다 하여 부사를 매치니, 이를 지켜보던 밀성의 아전이 달려와 이를 고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안우가 이르러 “전에 보낸 공문을 어떻게 하였느냐”고 묻자, 정운경이 “밀성인에게 배를 빌려준 조영휘가 스스로 징수할 것이지 공이 마땅히 물을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안우가 노하여 좌우로 하여금 욕하게 하자 정운경이 정색하면서“이제 천자의 명을 교외에서 맞이하였는데, 무엇으로써 나를 죄할 수 있겠습니까? 공은 덕음(德音)을 펴서 먼 곳에 있는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지는 않고 감히 이런 짓을 하십니까?”라고 하니, 안우가 꺾여 그쳤다.
복주(福州, 안동) 판관으로 옮겼다. 주의 아전 권원(權援)이 일찍이 정운경과 더불어 함께 향학에서 공부했는데, 이에 이르러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뵙기를 청하였다. 정운경이 불러 같이 마시면서, “이제 그대와 같이 마시는 것은 옛날을 잊지 않는 것이다. 내일이라도 법을 범하면 아마 판관이 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주의 어떤 중이 옹천(瓮川) 역의 길에서 도적에게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 역리가 그 까닭을 물으니 “내가 베 약간 필을 가지고 가다가 밭에 거름하는 자가 밥 먹는 것을 보았고, 또 밭에서 김매는 자를 보았다. 잠깐 있다가 사람이 뒤로부터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밭 매는 사람이다. 그대를 불러 같이 말하려는데 너는 왜 응하지 않느냐?” 하기에 미쳐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곧 치고 베를 빼앗아 갔다.” 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중이 죽었다.
아전이 밭 매는 자를 잡아 주에 고하므로 그를 국문하면서 재판이 열렸다. 정운경이 밖으로부터 돌아와서 “중을 죽인 자는 아마 이 사람이 아닌 듯하다.”라고 하였다. 목사가 “이미 자백하였다.”고 하니, “어리석은 백성이 국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데다가 놀란 김에 말을 잘못하였을 따름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목사가 정운경에게 다시 심문케 하였다. 정운경은 즉시로 거름을 내던 밭주인을 불러들여
“네가 전날 밭에 거름 줄 때 누군가 중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던 사람이 있었지! 숨기지 말라!”라고 하니 밭주인이
“어떤 사람이 중이 가진 포목은 술잔 값이나 될 것이라고 합디다”라고 말하였다. 그 자를 잡아다가 바깥에 두고 그의 처에게 먼저
“내가 들으니 모월 모일에 너의 남편이 너에게 포목 열 마를 주었다는데 그것은 어데서 얻은 것이냐?”라고 문초하니 그 처는
“남편이 포목을 나에게 맡기면서 하는 말이 베를 빌려 갔던 자가 반환한 것이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곧
“너의 포목을 빌렸던 자가 누구인가?”라고 그의 남편을 추궁하니 말이 막히어 자백하였다. 목사가 놀라며 물으니 정운경은
“도적은 그 자취를 감추고 누가 알까봐 겁을 내지요. 그런데 ‘나는 밭갈이하는 사람…’이라고 한 말은 속임수입니다”라고 말하였으므로 고을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감복되었다.
충목왕 때에 서운 부정(書雲 副正)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에 뽑혀서 새해 축하 사절로서 원나라에 갔다. 당시 기황후(奇皇后)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중귀(中貴)에 고려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와서 음식을 대접하는 품이 거만하였으므로 정운경이 정색하여
“오늘의 접대는 옛 주상(主上)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니 중귀들이 크게 놀라며 “이 선비가 우리를 깨우쳐 주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양광도(楊廣道)와 교주도(交州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고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 전임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정운경과 좌랑(左郞) 서호(徐浩)가 법을 고수하여 어떤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자에 의하여도 그것이 굽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술을 주었다. 상서(尙書) 현경언(玄慶言)이 왕에게 간하기를
“왕궁과 왕비궁의 침전(寢殿)은 잡인(雜人) 금지를 지극히 엄하게 하는 법인데 요즘에 외인의 출입에 통제가 없습니다. 궁전의 문을 맡는 것은 환자의 직책인데 지금은 홀적(忽赤)이 문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사(政事) 볼 때 궁정(宮庭) 내 경비를 세심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전하의 좌우가 저자 마당 같아서 전하께 다 말씀드리기도 전에 이미 외부에 누설되고 있습니다. 형벌을 장악한 관원을 가까이할 것이 아닌데 정운경과 서호에게 침전에서 술을 주시니 모두 옛 제도와는 상반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오래지 않아 다시 전주(全州) 목사(牧使)로 갔다. 그때 그곳 중으로서 장가를 들고 가정을 꾸려 살던 자가 하루는 외출 도중에 누구한테 살해당하였다. 그의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서 오랫동안 미결로 남아 있었다. 정운경이 정사를 시작하자 그 처가 또 와서 고소하였으므로 그 자리에서
“남몰래 친한 자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그 처가 “없습니다. 단지 이웃 남자 하나가 ‘늙은 중이 죽으면 일이 될 터인데’하면서 늘 희롱하던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 남자를 잡아다가 바깥에 두고 먼저 그의 어머니에게
“어느 달 어느 날 네 아들이 집에 있었느냐? 외출하였느냐?”라고 심문한즉 그 어머니가
“그날 아들놈이 외출하였다가 돌아와서 친구와 술을 마셨다고 하면서 취하여 괴로워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 아들에게 그날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물으니 곧 자백하였다.
그때 원나라 사신 노모(盧某)가 횡포하여 도처에서 수령(守令)들을 능욕하였는데 갑자기 말을 달려 이 고을에 들어와서 교영(郊迎)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처벌하려 하였다. 정운경은 예(禮)를 따지면서 굴치 않고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떠나니 고을 부로(父老)들이 울며 떠들었다. 노가도 부끄럽게 여기면서 굴복하고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 후 소환되어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임명되고 강릉, 삭방도(江陵朔方道)를 순무(巡撫)하다가 다시 내직으로 올라 형부(刑部)를 주관하였다. 어떤 송사(訟事)가 도당(都堂)으로부터 내려왔으므로 정운경이 재상에게
“백관을 그 공로에 따라서 등용하면서 유능한 자는 등용하고 무능한 자는 물리치는 것이 재상의 일입니다. 법의 집행으로 말하면 각각 담당 관원들이 있는데 일일이 모두 묘당(廟堂)이 주관하면 이것은 직권 침범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임명되고 그 후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으로 있으면서 병으로 사직하고 영주(榮州)로 돌아가서 죽었다.
아들은 도전(道傳), 도존(道尊), 도복(道復)인데 도전의 전기가 따로 있다.」
위의 <고려사> 열전 기록을 통해 정운경이 관리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상황이 많았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정운경은 「양리」로 그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정운경은 조선전기 지리지 편찬 사업의 완결편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 이름을 올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봉화 인물편」에는 정운경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운경(鄭云敬): 충숙왕(忠肅王)때 과거에 급제. 상주사록(尙州司錄)에 보임(補任)되고,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옮기어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를 존무(存撫)하였으며, 들어가서는 지형부사(知形部事)가 되고 얼마 안 있어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뒤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으로써 병(病)을 이유로 영천(榮川)에 귀향했다가 돌아갔다. 운경(云敬)은 충목왕(忠穆王)때, 서운부정(書雲副正)으로써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하정(賀正)하러 원(元)나라에 갔을때, 기황후(奇皇后)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으므로 중귀(中貴)에는 우리 나라 사람(동인:東人)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음식을 베풀면서 몹시 거만하게 굴었다. 운경(云敬)은 정색하고 말하기를, “오늘 음식을 베푸는 것은 옛 주인을 위한 것이요.”하니 중귀(中貴)들은 놀라서 말하기를, “수재(秀才)가 우리를 가르쳐 주었다.”하였다. 공민(恭愍)이 즉위한 뒤, 운경(云敬)이 법을 지키면서 권세가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해서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술을 내렸다. 아들은 도전(道傳), 도존(道存), 도복(道復)이 있다.」
위의 기록은 대체로 <고려사>열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정운경이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 사록(司錄)에 임명되고 이후에 병부시랑, 지형부사. 형부상서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공민왕이 즉위한 후 법을 지키면서 권세가들에게 굽히지 않은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정운경은 전법 총랑으로 있을 때 억울하거나 지체되는 옥사가 없었고 법을 집행함에 권세가들에게 동요 당하지 않았으므로 공민왕이 침전(임금의 침실이 있는 궁전)으로 불러 들여 술을 하사할 만큼 깊은 신임을 보였다. 형부를 맡고 있을 적에는 도당(의정부)에서 내려온 송사가 있자 선생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백관들의 등급을 정하여 능한 사람은 승진시키고 능치 못한 사람은 물리치는 것은 재상의 일입니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각기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사건건 모두 동당을 경유하게 되면 이는 직책을 무시하는 월권행위인 것입니다.’고 할 만큼 당당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송사 사건이 폭주해도 분석을 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정밀하고도 정당하였으므로 승자나 패자나 모두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는 정운경이 법 집행에 있어서 특히나 단호한 면모를 보인 것으로, 훗날 아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등의 법전 편찬을 통해 강력한 법의 실천을 강조한 것과도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정운경과 공민왕의 인연은 위기의 순간에도 이어졌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리가 있을 때 남쪽지방으로 피난 갔었는데 선생이 뒤따라 충주에 이르러 배알하니, 공민왕이 크게 기뻐하여 위로 면려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운경이 공민왕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음을 알 수가 있다. 정운경은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추진하던 시절 신진 사대부의 일원이 되어 이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정운경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는 「신도비명」이 있다. 1990년 변시연이 찬한 「신도비명」중 명(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소백산 동남쪽에 위치한 큰 고을에 맑은 정기가 뭉쳐 우리 선생을 탄생시켰네. 일찍이 향교와 송경(개성)에서 공부하여 학문의 조예가 뛰어나니 명성이 저절로 웅대하여졌네. 한번 응시하여 과거에 급제했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는 충실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했으며 선처한 일 또한 많았네. 용궁 고을의 감무가 무고에서 벗어났고 환자(내시)가 피가 나도록 이마를 조아렸으니 그 지혜와 그 용기에 온 경내의 사람들이 찬탄하였네. 서해도에서 군량을 운반할 적에는 제일 높은 공을 세웠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니, 삭방도의 걱정이 없어 졌네. 기생을 꾸짖어 예법을 확립시키니 원나라 사신이 위축되었고 정색하고 과감히 말하니 중귀(내시)가 깜짝 놀랐네. 법의 집행에 동요됨이 없어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의논과 생각이 정직하니 도당(의정부)에서 더욱 중히 여겼네. 일이 의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신을 신고 돌아선 것이 몇 번이었던가. 병환으로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훌륭한 이가 거처하는 곳이네. 부엌에는 훌륭한 아내가 있어 내조가 적지 않았고 이름난 아들을 두어 국가의 창업을 도왔네。 시호를 염의라고 일컬으니 도연명이나 서중거와 대등한 인품이네. 훌륭한 덕망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우뚝 솟은 소백산 같네.
「小白靈嶽 雄鎭南東 淑氣鍾毓 篤生我公 早年就學 于鄕于京 所造優越 名聲自宏 一擧捷科 歷職內外 忠勤讜直 施措亦大 龍宮脫誣 宦者血顙 其智其勇 一境嘆賞 輪給西餉 功居最上 辨彊安民 朔方無恙 叱妓立禮 元使縮焉 正色敢言 中貴愕然 執法不撓 爲上所寵 論思切直 都堂加重 事不合義 納履幾何 謝病卷歸 碩人在阿 國有賢婦 內助不些 又有名子 佐國興家 諡稱廉義 陶徐其倫 考德何處 白山嶙峋」
4. 영주 삼판서 고택에 얽힌 사연
정운경에 관한 자료 중에서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가 삼판서 고택이다. 삼판서가 연이어 나와서 붙여진 ‘삼판서 고택’은 고려말 조선전기 재산 상속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먼저 자료에 전하는 「영천삼판서고택(榮川三判書古宅」의 기록을 보자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은 군서(郡西) 귀성산성(龜成山城) 남쪽 기슭에 있었다. 고려말(高麗末)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이 살던 집으로 그 사위 공조전서(工曹典書)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黃有定)이 살다가 그 외손자 이조판서(吏曹判書) 김담문절공(金淡文節公)에게 물려 주었다하며 삼공(三公)이 다 판서(判書)에 올랐으니 세인(世人)은 이 고택(古宅)을 삼판서(三判書) 고택(古宅)이라 부르게 되었다.
거금(距今) 사백여년전(四百餘年前)에 김학사 응조 선생(金鶴沙 應祖 先生)이 영천군지(榮川郡誌)를 편찬할 당시(當時)에 이미 본군(本郡)에서 유일(唯一)한 고적(古蹟)이라고 군지(郡誌)에 기록하였으나 이 건물(建物)의 창건 년대(年代)는 상고할 길이 없다.」
위의 자료는 조선전기까지는 자녀에 대한 균분상속이 이루어져서, 딸도 재산 분배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도전 집안의 경우 정운경이 살 던 집이 그 사위 황유정에게 이어지고, 다시 황유정의 외손자 김담에게 이어진 것 역시 딸이 재산을 상속하던 시대 분위기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조선중기까지 외가의 비중이 컸던 것에는 경제적인 요인이 큰 몫을 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장자상속은 조선후기에 정착된 관행이었을 뿐 조선중기까지도 자녀들에게는 균분상속이 지켜졌다. 즉 딸이라고 해서 재산상으로 크게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딸은 경제적으로는 엄연히 아들과 같은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외가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도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조선전기에 작성된 족보인 성화보를 통해서 딸이 차별을 받지 않았던 분위기를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성화보는 안동 권씨 족보로, 현재 전하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중국의 성화 연간인 1476년(성종 7)에 편찬되었다. 성화보는 조선후기의 족보와는 달리 딸 아들 구별 없이 출생순으로 기재하고, 외손도 본손과 같이 편찬 당시까지 대를 이어서 전부 기재하고 있다. 딸이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음이 나타나는 조선후기의 족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딸이 족보에서 사라지는 것은 조선후기에 국한된 일로써 남성 중심의 주자성리학 이념이 점차 사회적으로 정착되는 것과 궤도를 같이한다.
전통 시대 혼례 풍속 역시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결혼을 해도 남자가 여자집에서 일정 기간을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누구누구 장가간다’라고 할 때 ‘장가간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중기이후 주자가례의 보급과 함께 혼례에도 친영의 의식을 적용하려는 의지가 점차 정착되었다. 친영은 주자가례에 규정되어 있는 의식으로, 전통적으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장성할 까지 머무르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류부가혼이 혼인 후에도 남자가 여자집에서 일정동안 거주하는데 반하여, 친영은 혼인 의식을 치룬 뒤에 바로 신부를 신랑집에 데려옴으로써 친정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바로 시댁의 습속에 맞추도록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친영은 남성 중심의 주자성리학 사상이 혼례도 깊이 침투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즉 기존의 ‘장가간다’는 개념이 ‘시집온다’라는 개념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사건이 바로 친영제의 정착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친영의 제도가 정착되어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혼인풍속인 서류부가혼의 틀을 깨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왕실에서는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캠페인 차원에서도 친영제도를 일찍부터 시작했지만 양반가나 일반 평민들의 풍습까지 전파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 서류부가혼은 신랑이 신부집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장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배경이 있는 장인의 든든한 지원까지 기대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전기까지 처가나 외가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혼례에서의 친영 의식의 도입은 단순한 풍속의 변화만이 아니라 기존까지 유지되던 생활방식의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한 어머니의 자손들이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니 서로 화목한 바 그 풍습이 대단히 후하다’고 한 것이나(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윤4월), ‘우리나라의 풍속은 처가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면 아내의 부모 보기를 자기의 부모처럼 하고 아내의 부모도 역시 그 사위를 자기의 자식과 같이 봅니다’라고 한 것(성종실록 성종 18년 8월 6일), ‘우리나라의 풍속은 여자에게로 장가들고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이 있어서 異姓간의 친분과 의리가 동성과 차별이 없다 ... 어려서부터 같이 크면서 서로 형제, 숙질, 조손으로 부르고 있으니 그 은혜와 정이 어찌 동성의 친분과 차이가 있으랴?’라는 기록(성종실록 성종 2년 5월) 등은 처가살이가 조선전기에 상당히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처가쪽 친족과 긴밀한 교분을 유지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연산군대의 관료인 이극돈에 관한 기록에서 ‘이극돈이 벼슬하여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처가살이를 했다는 기록’(<연산군일기> 11년 6월 28일)은 당시 고위관료에 이르기까지 처가살이가 관행적으로 행해져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중기까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서류부가혼의 풍속은 외가와의 친밀성을 깊게 하였다. 실제 조선후기까지도 대부분의 관리들은 외가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이러한 사례는 흔하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율곡 이이가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임신을 하면 친정에 가서 애기를 낳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지만 조선시대처럼 장성할 때까지 외가에 머무르는 것은 보편적이지가 않다. 서류부가혼의 풍습으로 말미암아 조선전기까지는 자연히 어머니와 외가를 중시하게 되고 외가쪽 친척들 간의 친분이 두터웠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의 「동국미속(東國美俗)」 항목에서 ‘우리나라의 풍속은 백여년전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자가 많았음으로 외가의 족속을 친속과 다름없이 여기게 되어 5세 후에까지도 혼인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드디어 풍속이 되어 온 세상이 아무런 폐단이 없이 행해지고 있다’라 하여 외속과 친속의 구분이 거의 없었던 시대분위기를 언급하였다.
5. 정운경의 아들 정도전
1384년(우왕 9)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농민 생활의 참담한 실상을 목격한 정도전은 함주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장군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고려말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 홍건족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신흥 무인세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1380년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한 황산대첩은 이성계의 명성을 보다 높이게 했다.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에 가장 적극적인 비판을 하면서 혁명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정도전의 정치적 야심과 이성계의 군사력이 결합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고려말의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차지하고 있던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세력의 득세로 말미암아 지방의 중소지주와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여기에 더하여 남방의 왜구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국가의 위기도 한층 커졌다. 이러한 시기 권문세족의 특권의식과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고려후기 새로운 사상으로 수용된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기득권층의 특권을 견제하고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 왕도정치의 회복을 추구하고 나선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신분적으로는 지방의 향리 출신,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신흥사대부의 주류를 이루었다. 정도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열혈남아였다.
신흥사대부내에서도 고려말기의 대내외적 위기를 맞아 시국관에 따라 온건파와 혁명파로 분기되었다. 온건파 사대부는 고려왕조의 테두리 내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반면, 혁명파 사대부는 왕조의 교체만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정몽주, 이색, 길재, 이숭인 등이 온건파였다면,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은 혁명파의 대열에 섰다. 1392년 4월 온건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의 지휘로 개성의 선죽교 근처에서 피습됨으로써 권력은 완전히 이성계 일파와 혁명파 사대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때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 받았던 시조인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되면서 정몽주를 고려 충신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게 하였다.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길재의 사상이 조선시대 사림파의 뿌리가 된 것도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학자들이 재야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혁명파 사대부의 중심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이 급진적 성향을 띤 이면에는 이러한 신분적 성향도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고려말 관리를 지내면서 법 집행에 엄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부친 정운경의 강직한 면모 또한 정도전의 인생 행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도전은 1362년 문과에 합격한 후 공민왕대에 관직에 진출하였다. 개혁정치를 계획했던 공민왕은 기존의 권문세족에 맞설 수 있는 ‘젊은 피’ 신흥사대부를 중용하였고 이 때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구상해 나갔다. 부친 정운경에 이어 부자가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입은 셈이다. 옹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한 후 권문세족 이인임 일파를 비판하다가 1375년 나주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보다 더 혁명 의지를 불태웠다. 유배에서 풀린 후 본가인 영주, 외가인 단양, 서울 등지를 왕래하던 정도전은 1384년 마침내 혁명을 위한 파트너 이성계를 함주막사로 찾아갔다. 이성계의 명망과 그의 휘하에 있는 군사력이라면 혁명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의 ‘문(文)’과 이성계의 ‘무(武)’가 조화되면서 역사는 새로운 혁명의 길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세력들에게는 무엇보다 새 나라의 국호를 정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였다. 왕조의 설계자로서 큰 역할을 했던 정도전은 옛 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단군조선에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천손(天孫)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함께, 중국의 선진 문화를 우리나라에 전래한 기자조선에서 도덕문화의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국호였다.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은 고려후기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의 책에도 나타나는 것으로서 전대의 역사의식이 국호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라는 국호에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포함되어 신라와 백제 지역의 유민을 모두 포괄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으나, 조선이라는 국호에서는 모두가 다 같은 고조선의 후예라는 민족통일의식이 담겨져 있었다. 이처럼 조선이라는 국호에는 지역성을 극복하고 삼국의 유민들을 모두 포용하려는 민족통합의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건국의 설계자 였으며 한양 천도에서도 일등공신이었다. 1395년 북악 남쪽의 평평하고 넓은 터에 390여 칸 규모의 새 궁궐이 처음 세워졌다. 태조는 같은 날 낙성된 종묘에 4조(祖)의 신위를 개성으로부터 옮겨 모시고 친히 새 궁궐을 살핀 다음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술이 거나해진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고, 정도전은 <시경> 「주아(周雅)」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술을 마셔서 취하고 큰 은덕으로 배가 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의미로 정궁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정했음을 아뢰었다. 정전(正殿)인 근정전을 비롯하여, 정무를 보는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康寧殿) 등의 이름도 이 때에 지어졌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신도시의 건설을 주도하고 완성한 정도전. 그는 1398년 4월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자신의 손으로 완성된 한양의 모습을 찬양하고 대대로 복을 누릴 것을 기원했다. 하지만 이해 8월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그가 제거되면서 정도전이 새 왕조를 창건하고 새 도읍지를 정하면서 그 스스로 영원히 복을 누리겠다는 기원은 꿈으로만 그친 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영주 출신의 사대부 학자 정도전이 완성한 신도시 한 한양은 오늘날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 발전하고 있다.
글을 맺으면서
정운경은 고려후기에 태어나서, 원 간섭 시기라는 암울한 시기를 겪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영주에서 향리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고, 관리로 있을 때에는 원칙과 신념에 입각한 모범적인 관리상을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그가 몇 명 안되는 고려사 열전의 양리 편에 들어간 이유가 되었다. 정운경은 특히 공민왕의 개혁정치 시기 일선에서 법집행을 확실하게 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점은 훗날 정도전이 <조선경국전>과 같은 법전을 편찬하는데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공무에 철저했던 그의 모습은 아들 정도전에게 이어졌다. 기대하는 바대로 정도전은 승승장구하였고, 새 왕조의 건설이라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정도전의 성장에 정운경이 있었고, 이들의 연고지 영주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왕조의 교체 시기 영주라는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이 작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경상도의 한 작은 고을에서 출생하여 마침내 한 왕조의 교체를 달성한 주역이 된 인물 정도전과 그의 아버지 정운경. 이들의 행적에서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갔던 옛 선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