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20 (1권 7. 김홍신. 펌글)
"기차가 이 따위로 생겼을 바에야 특급이란 표찰을 떼어 버리는 게 나을 텐데."
다혜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말만 특급이지 특급다운 데라곤 없었다.
있다면 기차 옆에 특급이라고 써 붙인 표찰과 차표값이 비싸다는 것과 서울역에서 출발한다는 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특급열차가 언제부터 이렇게 허름해졌는지 모르겠다.
우등열차와 새마을이란 것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고속버스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이 따위를 특급이라고 한다고 특급이란 낱말에 대한 모욕일 것 같았다.
배우는 어린애들이 특급열차를 보고 특급이란 낱말을 똥통열차의 대명사처럼 알면 어쩌나.
하긴 내가 알 바 아니다.
그것까지 내가 걱정하면 교통부는 핫바지밖에 더 될까.
기차가 움직였다.
나는 차창 밖으로 멀어져 가는 역사를 올려다 보았다.
거무튀튀한 건물이 마치 전쟁터에 쓸쓸히 남은 건물 같았다.
"기차는 역시 공짜로 타는 맛이 제맛이지."
나는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
"오늘도 그래 보시지."
다혜가 거들었다.
"나도 이제 늙었나봐. 모험을 하기보다는 편한 걸 좋아하는 걸 보니."
"늙은이 희롱죄에 걸려."
다혜가 귤 껍질을 내게 던졌다. 향내가 좋았다.
나는 그것이 다혜의 냄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기차는 공짜로 타는 맛이 꽤 짜릿한 것이었다.
목적지까지 들키지 않게 숨어서 가는 맛,
목적지에 내려서 울타리를 뛰어 넘어 도망가는 맛,
들켰을 때 사정하다가 통하지 않으면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그 짜릿함.
기차는 언제나 내 어릴 적의 기억을 깨워주곤 했다.
그 큰 기차 화통과 화물칸과 철교, 목쉰 기적 소리와 콧구멍까지 새까만 화부 아저씨.
달리는 기차에 뛰어올라섰을 때의 정복감과 뛰어내려서 나뒹굴 때의 통쾌함 따위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완행열차와 화물차를 훨씬 좋아했다.
급행이란 놈은 나보다 빨라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급행열차만 지나가면 돌멩이를 내던지곤 했었다.
"급행 타는 새끼들은 골통이 좀 부서져도 돈으로 꿰매면 돼."
나는 다른 꼬마들을 이런 식으로 충동질해서 돌팔매질에 가담하게 만들곤 했다.
기차가 우리 동네 앞을 지나갈 때는 유난히 기적 소리를 빼각거렸다.
우리 동네하고 원수진 사람이 그 안에 타고 있을 거라고생각하곤 했다.
내가 역전에 끌려가 역장 아저씨에게 알밤을 맞은 횟수가,
극장을 개구멍으로 들어가다가 들켜서 얼굴에 페인트로 '축 개구멍' 이라고 씌어져 나온 횟수보다 많았었다.
달리는 화물칸에 뛰어올라가 석탄덩어리를 훔쳐내던 일이며 침목을 뜯어다가 불쏘시개를 하던 일이며.....
"다혜. 난 그놈의 기차를 전엔 장난감으로 알고 놀았었는데 이제는 무서워하는 놈이 돼 버렸으니."
"과거는 늘 화려한 거야. 아름답고 멋지고 즐겁고 행복한 거야."
"그럼 현재와 미래는."
"그건 불안한 미지의 세계지!"
"난 과거보다 현재가 행복했으면 싶어."
정말 그랬다.
취재 같은 건 집어치우고 대전에서 내려 어디 가까운 여관에라도 들어가고만 싶었다.
그러나 내 희망사항 같은 건 무시되었다.
대전에서 서울행 특급열차로 바꿔 탄 우리는 얌전하게 눈을 감고만 있었다.
10분 늦게 서울역에 도착한 기차는 지친 듯 수증기를 뿜으며 멎었다.
우리는 인파를 헤치며 뛰었다.
광장에 먼저 도착해서 사람장사꾼들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광장은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둡다기에는 밝고, 밝다기에는 어두운 그런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우리 뒤를 따라 승객들이 꾸역꾸역 몰려 나왔다.
우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섰다가 흐트러지는 쪽으로 걸어갔다.
다혜와 나는 팔짱을 꼭 끼고 걸었다.
그들의 관심을 끌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관비가 없는 가난한 연인 취급을 받아 둘 필요가 있었다.
젊은이들 속에는 여자들도 섞여 있었다.
"쟤들이 틀림없어."
나는 다혜에게 한 패거리를 가리켰다.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가서 지켜보자."
다혜가 팔짱을 꼭 낀 채 잰걸음으로 따라왔다.
"저 여잘 유심히 봐 둬."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사내들과 귓속말로 얘기를 끝내고 천천히 광장 복판으로 걸어갔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굴어야 돼. 무관심한 척해야 돼. 재들은 눈치가 빨라."
"알았어, 걱정 마."
다혜가 긴장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련된 옷차림과 장신구로 치장한 삼십대의 여자였다.
얼핏 보면 잘생긴 것 같았지만 천박한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마 행동대원인 것 같았다.
하얀 블라우스 깃에는 분홍색 수실이 달려 있었고 웃도리 깃에는 하얀 털장식이 있어서 여유 있는 집 부인 같았다.
머리를 땋아 묶은 소녀와 회색바지를 입은 소녀가 광장을 느릿느릿 걸어갔다.
누가 봐도시골뜨기라는 걸 짐작하게 하는 차림새였다.
소녀는 방향감각을 회복하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서울이란 도시의 을씨년스러움과 악마의 주둥이처럼 버티고 서 있는 도시의 음울한 새벽녘을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하얀 봉투를 펼쳐들고 무언가를 확인했다.
아마 친척집의 주소일 것 같았다.
흰 블라우스가 소녀 곁으로 갔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걸었다.
흰 블라우스는 핸드백에서 조그만 증명서를 꺼내 보여 주고 윗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두 소녀에게 내밀었다.
"우린 아무 잘못도 없단 말예요."
머리 땋은 소녀의 목소리가 겁먹은 소리였다.
흰 블라우스가 웃었다.
그리고 바짝 다가서서 뭐라고 소근거렸다.
우리는 눈치 채지 않게 다가섰다.
"여기서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누가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채가요.
우린 무작정 상경한 아가씨들을 선도해서 직장을 알선하기 위해 새벽마다 이 고생을 한답니다."
흰 블라우스는 증명서를 불빛에 비춰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두 소녀가 잠시 멈칫했다.
"창녀촌에 잡혀 가고 술집으로 팔려 가서 돈 벌면 뭐해요. 좋은 직장 잡아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우리 선도회에서 끝까지 보호하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 선도회는 우수한 기업체하고 자매결연을 맺어서 유능한 인력을 확보하게 하고,
직장없는 아가씨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정부의 보조를 받는 단체예요."
"우린 첨인데 얼마나 줘요?"
바지 차림의 소녀가 물었다.
"처음에는 8만 원밖에 안 돼요. 한두 달 숙련되면 보통 12만 원은 받아요."
흰 블라우스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무슨 회산데요?"
머리 땋은 소녀가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H전자라고 들어봤어요?"
"그럼요. 텔레비에 매일 나오는 덴데."
"바로 거기예요. 이쪽으로 와요. 저기 아까 말한 나쁜 깡패들이 있으니까."
흰 블라우스가 서성거리는 패거리를 가리켰다.
겉보기에도 썩 불량기가 있어 보이는 패거리들이었다.
두 소녀가 흰 블라우스를 바짝 쫓아갔다.
"사람이 남네남네 해도 큰 회사는 항상 모자라요. 그거야 회사가 알아서 하겠지만....
멀쩡하고 순박한 아가씨들이 나쁜 깡패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망치는 걸 나라에서도 그냥 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나서서 아가씨들을 보호하려고 이러는데....
힘드는 거야 힘드는 것이지만 아가씨들이 우리 말을 못 믿고 그냥 속아 가지고....
나중에 후회해 봤자,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나쁜 깡패들이 쫓아와요."
바지 차림의 소녀가 뒤쪽을 가리키며 흰 블라우스에게 매달렸다.
흰 블라우스가 소녀의 가방을 받아들고 말했다.
"걱정 말아요. 우리는 쟤들이 못 건드려요. 순경이 보호해 주기도 하고 남자 직원이 곳곳에 서서 우릴 지켜 주니까요."
점퍼 차림의 청년이 멀찍이서 뛰어왔다.
"과장님, 여기 계셨군요. 저쪽에서 깡패놈들이 아가씨를 끌고 가는 걸 못 델구 가게 싸우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놈들 너무해요. 막 칼 빼 가지고 아가씨들을 찌르려고 그래요. 저놈들을 빨리 없애야지."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흰 블라우스가 들고있던 가방을 받았다.
"아가씨들 조심해요. 우리 선도회에 안 가도 좋으니 제발 새벽에 이 근처에서 얼씬거리지도 말아요. 그 나쁜 놈들이 글쎄....."
"우린 괜찮을까요?"
겁에 질린 소녀가 청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하고 있으면 걱정 없어요. 우린 가자마자 이력서를 넣어 하루 뒤면 취직을 시키니까요.
기숙사도 있고 칼라텔레비도 있고..... 얼마나 좋다구요."
청년이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혜가 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저치들 정말 선도회에서 나온 거야? 정말일까?"
"이런...... 저렇게 그럴 듯하게 하지않고 사람장사를 어떻게 해."
"가짜가 확실해?"
"언제나 가짜가 더 진짜 같은 거야. 가짜 애국자, 가짜 상품, 가짜 선생, 가짜 의사, 가짜 학생, 가짜, 가짜, 가짜......
모든 가짜는 들키지만 않으면 진짜보다 훨씬 우월한 거야."
"그래도 저런 것들은 칵!"
다혜가 입을 앙다물었다.
"쉿! 가만 보기나 해. 이건 취재야."
"찬인 분하지도 않아?"
"이 땅에서 분노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어. 방관자, 무관심한 자, 비겁한 자만이 득시글거리는 판에."
"찬이도 그러겠다는 거야?"
"보구만 있으라니까. 여기서 잘못 하다간 저 악마구리 같은 패거리들한테 걸리면 성하기 어려우니까."
"패거리들이 무서워?"
"대충 무서운 거야."
"대충? 차암 그 솜씨 좋다는 주먹도 별 거 아니구만..... 시시하다 시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