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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유월절 어린 양 』
나균용목사님 설교(10-1)
예수님은 누구신가? 제 6과입니다. 제목은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시라(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려라.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또 친히 한 어린 양이 되셔서 이렇게 자기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내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 당시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모세 때 출애굽 당시의 일이다. 애굽 땅에 열 번이나 무서운 재앙을 내리게 되는데, 그 때 이 재앙은 어떤 재앙이냐! 집집마다 장자가 다 죽는 무서운 재앙이다.
왕의 장자로부터 저 아래에 제일 하충민의 장자들까지 애굽 사람은 다 이렇게 죽는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재앙이 내리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감히 막겠는가. 그래서 고집을 부리고 하나님 앞에 앙탈을 부리고 자기가 이길 수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려봐야 결국은 하나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얼른 나서서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나를 보내주세요.> 이렇게 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복을 받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면서 건방을 떨고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 말씀에 불복종을 하면 결국은 손해가 나는 건 자기밖에 없다. 맏아들이 다 죽는 이 불행한 자리에까지 떨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순종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백성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하셨다는 것이다.
애굽 땅에는 집집마다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찾아와 장자들을 다 쳤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 집에는 안 들어간다. 왜 안 들어가는가? 이스라엘 집에는 미리 어린 양을 잡아가지고 해지기 전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어린 양의 피는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발라놓았다. 이 비밀을 모르는 애굽 사람의 집에는 전부 재앙이 내렸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잘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이렇게 일반적인 원칙적인 것만 쭉 설명하고 지나가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에게 이런 일이 있었더라 이렇게까지는 설명을 안 한다.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한 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 이 말씀대로 행했던 애굽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는 안 나와요. 그렇지만 아무튼 이 큰 원칙은 이렇게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놓은 집에는 다 구원이 있었고 재앙이 내리지 않았고 이 피가 없는 집에는 재앙이 내렸더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 교회에서 제일 첫째로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의 피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늘 기억하고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이다.
옛날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잡아가지고 그 피를 문설주와 안방에 발라놓았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에 인방과 설주에 발라놓아야 하는 것이 이것이 원칙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원리를 가지고 우리도 그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지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어디에 인방이 있고 설주가 있는가? 이것이 우리 마음을 말하죠.
우리 마음에 인방과 설주에 발라놓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주신 이 거룩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께 감사하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십자가 위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 손에 받아가지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 발라야지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렇게 발라놓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이 생깁니까?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왔다가 우리는 껑충 뛰어넘어간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대환난이 일어나고 어마어마한 재앙이 전 지구를 덮어서 사람들마다 아우성 치고 야단을 친다. 지금도 보면 얼마나 큰 재앙이 쏟아지고 있는가? 우리나라만 봐도 바로 우리 오른쪽 일본, 그리고 중국 이 두 나라에 계속 재앙이 쏟아진다. 그런데 한국에는 쏟아지지 않고 껑충 뛰어넘어가지 않는가? 이런걸 보면 우리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되었다 하는 것을 다시금 새롭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 문에 이 보혈을 발라놓으면 재앙은 왔다가도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쫓겨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잘 받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한국 땅에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재앙을 내리시다가도 한국은 싹 피해가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가!
둘째로 이 어린양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양을 잡았으면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집에 식구가 몇 명이냐 그래서 양 한 마리를 잡았는데 식구가 다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너무 적으면 다른 집 식구들을 불러서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있도록 해야지 이 양의 고기를 먹지 못하고 남겨 놓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이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을 먹어라 말씀하시고 다음에는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마셔야 한다고 하셨다.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ㅣ 않는 자는 나와는 상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랬으니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만 받아먹을 것이 아니라 정말 이것이 나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살이요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받아먹을 때 그 보혈의 역사가 내 속에 참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함께 또 먹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두 가지를 더 먹어야 하는데,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한다. 무교병은 누룩없는 빵이다. 우리가 빵을 만들 때 누룩을 넣죠. 왜냐? 부풀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일종의 속임수로 비유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상징한다. 사실 누룩 없는 빵이 딱딱하고 무슨 맛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것을 먹어야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쓴 나물인데, 왜 달콤한 나물을 먹지 쓴 나물을 먹어야하는가? 우리 인생이 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너무 달콤한 것만 찾지 말고 쓴 것도 달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이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쓰라린 고난을 달게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이 죄악이 많고 험한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지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그리고 충성된 말은 귀에는 따갑지만 우리 행함에는 이롭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이 잘못 되어 있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나 나를 바르게 가르쳐 줄 선생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사모하면서 그런 교회를 찾아나가고 그래서 말씀을 받고 우리가 새롭게 변화하는 이 복된 역사가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정말로 이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유월절 양은 정월 10일에 택한다. 그래서 나흘 동안 관찰을 한다. 이 양에게 무슨 흠이 있지 않은가 만약 흠이 있다면 이 양은 불합격이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종류의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조사를 받으셨다. 종려주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그 다음부터 나흘 동안이죠. 첫째로 제일 높은 제사장들과 장로무리들이다.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했다. 성전에 장사치들을 엎으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니 말라버리고 이런 일들을 하니까. 그런데 이런 것을 보고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될 거고, 예수님이 가서 장사치들을 엎으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 과연 이 성전이 얼마나 부패 했나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하면 깨달아서 겸손하게 무릎 꿇고 ‘주님 우리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세요.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이래야 하는데, 악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대든다. 두 번째로 헤롯당이다. 이들이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가시아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왔다가 책 잡지 못하고 자기들이 책을 잡히고 돌아갔다. 세 번째로 나타난 무리가 사두개인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이 잘난척 해가면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떤 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한 여자를 취해 살았습니다. 다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이런 말로 예수님께 도전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를 했구나.’ 부활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마치 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물리치셨다.
아담이후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죽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겉보기에는 산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부활을 해야 한다.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지 영생을 가진 생명이 부활을 받은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야지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비밀을 몰랐다. 넷째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셨다. 첫째는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너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모든 율법 가운데 대강령이니라 예수님은 흠 잡힐데가 없는 분이시다. 마지막에 빌라도의 재판정에 섰을때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보고 나는 이 사람의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그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내신다. 그래서 그분이 내려주시는 그분의 삶, 이것이 곧 무엇인가? 오늘날에는 성경책이다.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새 은혜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소감문 :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를 다시 듣고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다만 유월절 어린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죽음이 문방을 넘어갔다는 것을 알지만 그 피를 우리의 마음가운데 바르고 감사와 기쁨으로 나간다는 부분에서 너무 큰 은혜가 되었다. 매번 자주 듣는 내용인데, 오늘은 더 크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38. 이삭대신 죽은 어린 양 나균용 목사님 설교 (10-2)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제7과 이삭대신 죽은 어린양입니다.
이삭대신 죽었다 하는 말은 창세기 22장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명령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산까지 사흘 길을 가서 산에 올라가 단을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해서 칼을 들어 막 죽이려고 할 때 그 찰나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네 독자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하시면서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알았다 하시면서 그때에 보게 하신 것이 수풀에 걸린 어린양 한 마리를 보게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이야기다. 이 아애기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 네 독자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마라 하는 말씀을 하실 때 한번 나타나고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다시 두 번째로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내려주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이 두 번이 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두 번째는 이 어린양이다. 예수님은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이삭이 죽을 것을 대신 제물이 되신다. 우리 모두가 다 이삭같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릴 때에 드디어 예수님이 내 대신 생명을 바쳐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언제 발견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백세에 주신 그 아들을 절대로 죽이시고 데려가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대요. 죽였다고 해도 반드시 살려내실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꼭대기에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하나님께서 예배해 놓으신 양 같은 제물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찾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때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삭을 정말로 칼을 빼어들고 죽이려고 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제지하시고 수풀에 걸려있는 양을 발견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가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배해 놓으신 모든 것이 우리 주변에 다 감춰져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것들이 하나씩 발견되어 우리를 돕고 우리를 대신하고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우리가 나 자신을 드릴 때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어린양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은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 성경에서 이 말씀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고린도 전서 2장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도 못했고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것들을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미처 보지 못하니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슬퍼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에 나의 일생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인생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걱정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믿음으로 전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9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첫째가 우리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둘째 우리 귀로 듣지도 못하고 셋째 우리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식을 위해서 예비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내 자식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이 훨씬 더 크고 엄청나게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저는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큰일 났다. 우리나라가 다 망했다. 다 적화됐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현상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맞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가운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일을 이루어주신다.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서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요 희망을 주려한다고 하셨다. 유대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울고울고 또 우는데 하나님은 슬퍼하지 마라 너희에게 희망을 준다, 장래를 준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받기까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되는 이 과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똑 같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이런 복이 저절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험한 과정이 있다.
그러면 왜 이 말을 장황하게 설명을 하느냐! 바로 이삭대신에 죽은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이 되어서 우리를 위한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해 내시는 큰 역사를 이루어 주셨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지난시간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유월절 어린 양은 그의 피가 가장 중요하지 않는가?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삭 대신에 목숨까지 바쳐서 죽은 이 어린양 바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양의 피를 우리도 마음에 다시 바르고 장차 이 땅에 얼마나 무섭고 엄청난 재앙이 쏟아질 텐데 이 대환난속에서 구원받고 건짐을 받고 또 저들을 구원하는 큰 역사를 우리가 잘 감당해 나가야 한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18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네 씨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여기서 씨라고 하는 것은 복수 씨가 아니고 단수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다. 모리아에서 일어난 이 사건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사자로 이렇게 나타났고 또 하나는 이삭대신에 받쳐진 이 수풀에 걸려 있던 어린양으로 나타나셨는데, 그 다음에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약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너희 씨로 하늘의 별과 같게 하고 바닷가에 모래같이 많이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 씨는 육신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고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설명을 해나가고 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씨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육신의 몸으로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또 다른 씨가 되게 하세요.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역사를 이루게 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들 모두에게 넘치는 새 은혜를 베푸시고 복의 복을 더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소감문 : 모리아산 사건을 통해 만민을 향해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세의 지팡이 』
나균용목사님 설교 10-3
출애굽기 4:1-5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아멘!
오늘의 말씀은 모세의 지팡이다. 우리가 지팡이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노인들의 지팡이, 또 등산을 할 때 필요한 지팡이다. 오늘 말씀을 보니 야곱이 외갓집에 갔다가 거기서 결혼하고 20년 만에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그가 말을 한다. ‘내가 이 강을 건널 때에는 지팡이 하나밖에는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큰 떼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집을 떠나 외갓집에 찾아갈 때 나이가 40이 조금 넘었다. 한창 젊을 텐데, 지팡이 하나 가지고 갔다. 그리고 다음에 지팡이가 나오는 것이 유다 이야기다. 창세기 38장에 유다는 자기 친구 양털 깎는다. 그래서 거기를 갔다가 그만 며느리 다말과 변장을 하고 자기를 유혹하는데 들어가서 며느리를 범했고 증표로 지팡이, 도장, 끈 이런 것을 준다. 또 지팡이가 모세의 지팡이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지팡이도 나온다. 제일 유명한 말씀은 아론의 쌍난 지팡이 이야기가 나오죠. 그런가 하면 다윗이 시편 23편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이렇게 노래를 한다. 목자들에게 지팡이는 필수품인 것 같다. 이걸 가지고 양떼를 인도하기도 하고 악한 짐승이 나타나면 싸워서 물리치기도 해야하고 자기 신변을 보호하고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아주 필수적인 것이다.
모세의 지팡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모세의 지팡이는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다시 애굽땅으로 가라 그래서 내 백성들을 인도해 내라 할 때 모세가 못가겠다고 자꾸 핑계를 댄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내 손에 있을때에는 나를 안위하는 지팡이지만 그 지팡이를 버릴 때 뱀이되어 나를 두렵게하는 존재가 된다.그래서 나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 나에게 가장 허물이 없이 도와주는 나의 친구, 또 아내 남편 자녀들 이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팡이가 된단 말이다. 그래서 자녀가 많은 사람은 전통의 화살이 가득한 사람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모세의 지팡이 할 때 이 지팡이가 과연 모세에게 어떤 일을 했나? 본문에 나타나죠. 모세가 이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고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다. 왜 이런 표적을 행하는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서 보여줘라 그 말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의 앞에 가서 이것을 행한다. 그래서 애굽의 열가지 재앙을 내리는 가운데 모세가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재앙을 내리는게 네 번 나타난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것, 세 번재 재앙인 티끌을 쳐서 이가되는 것, 일곱 번째 우박이 쏟아지는 재앙이고 여덟 번째 바람이 불면서 메뚜기 재앙이 나온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론에게는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간다. 그래서 십계명을 쓴 돌판,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 이렇게 세가지 보물이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들어간다. 그래서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실은 우리에게 지팡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팡이가 있으면 사자 곰 같은 맹수가 오더라도 이길 수 있는 것이고 지팡이가 없는 사람은 견딜수가 없다.
그러면 과연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바로 성령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고 행복을 주시는 분이신데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가 이 지팡이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려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정말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마음의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거룩한 일을 이루시려고 예수님이 이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참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떠나시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지팡이가 되고 참 위로를 주실것이고 세상을 이겨나가게 하실 것이고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지팡이를 꼭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지팡이를 받으면 나중에 깨달아지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나에게 믿음의 식구들을 이렇게 보내주셨구나 그래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좋은 친구들 좋은 가정, 좋은 자녀들을 주신다. 이 땅에서 지팡이가 많은 사람은 참 든든한 사람이고 힘 있는 사람이고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이 지팡이를 달라고 해야 겠다. 이 지팡이가 어떤 말씀과 연결되어있는가?
바로 창세기 맨 마지막 49장10절에 보면 유다에 축복을 하는데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런 말씀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지팡이를 주셨다.
이것은 사실 하나의 통치봉이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딱 들고 있어도 사나운 짐승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고 아랫 사람이 함부로 기어오르지 못하는 놀라운 권위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팡이라는 것이 이런 뜻을 가지고 있구나 깨닫고 또한 우리도 이 지팡이를 하나님앞에 받아서 아름답게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감문: 지팡이가 이렇게 큰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오늘 설교말씀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이런 지팡이를 하나님께 구하고 또 받고 세우신 자리에서 주신 사명 잘 감당가길 소망하는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나균용 목사님설교 10-4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제8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과 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해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아멘!
세례 요한이 증언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잠깐 비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리의 본체이신 말씀으로, 말씀이 육십이 되셔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소리는 환경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질 수가 이렇게 있지만은 말씀은 변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형태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도 이렇게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와서 소리로써 이렇게 외치다가 사라졌습니다.
이 소리는 한번 외치고 나면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지만 말씀은 영원히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더 깊이 공부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니까.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요. 옛날에는 책 읽는 걸 많이 이렇게 권장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인터넷이 발달을 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책을 안 읽고 그러죠 성경책도 옛날에는 다 이렇게 가지고 다니고 성경을 교회를 가지고 다니고 부피가 크다고 무겁다고, 어 복원하기 힘들다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면서 가지고 다니는 봤는데.. 가지고 다닐 때에도 성경을 잘 안 읽었는데 스마트폰 속에 들어있는 성경을 누가 그거를 펴가지고 읽어보고 공부를 하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점점 이 세상은 성경을 멀리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러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외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찾아 모여들게 되었고요. 더구나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까? 병자들을 고치고 오비영이 열을 통해서 5천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말씀 한마디에 바다가 잔잔해지고, 귀신이 쫓겨나고 그리고 소경이 눈 뜨고 앉은뱅인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고... 이런 엄청난 기적이 막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와와 이렇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설교를 하실 때에, 예수님의 설교 말씀은 양심을 팍팍 찔러주는 그런 설교를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들을 때에는 시원하고 그게 좋았는데, 이 종교 지도자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자기들을 꽉꽉 찔러주긴 하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심히 분노하게 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이를 갈게 되고 이런 짓들을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나와요.
두 증인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전하는데, 전하는 메시지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더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기적도 막 행하고 이렇게 하는데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일으켜 역사를 일으키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들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두 증인들은 다 순교를 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순교를 당함으로 어 그 한때의 역사가 반짝하고 일어났다가 다시 시들어지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하간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하나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능력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말씀하셨고요. 권능을 받으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땅 끝이 어딥니까 땅의 시작했던 곳이 바로 땅 끝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시작해 가지고 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온 유다로 사마리아로 그 다음에는 이제 바다를 건너서 로마로 가고 물론 남쪽으로는 애급으로 저 동쪽으로는 중동 지방으로 이렇게 다 퍼져갔지만 그래서 구라파 대륙으로 올라가고 독일 영국을 거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오고 미국에서는 태평양 건너 다시금 아시아로 와서 일본 중국 한국에 이렇게 오게 되고 그래서 이제 한국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아직 건너가야 될 험한 산이 가로막 가로놓여 있는데, 하나가 중국 이 공산주의라고 하는 산이고요. 또 하나는 중동에 이슬람권이라고 하는 큰 장벽이 막혀 있습니다.
자 이런 곳에 이제 이 복음을 가지고 저것을 깨뜨리고 나가야 되게 생겼는데
과연 어떻게 누가 할 수가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 마지막 때 사명자들이 마땅이 깨닫고 감당해 나가야 될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때에 더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받아 가지고 더 힘 있게 전파하고 외쳐서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지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례라고 하는 게 뭔가를 잠깐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에 첫째, 의미는 죄를 씻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6절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와서 그 소경된 것을 고쳐주고 할 때에 일어나서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세례! 씻을 세 자의 세례라고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침자는 잠길 침자를 쓰기 때문에, 물속에다가 잠근다는 거죠. 좀 물속에다 집어넣어서 다시 이제 끌어올리는 거를 말하고 예수님 때에는 그렇게 침례를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보통 세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침례하기가 어려운 게 첫째는 어린아이들 둘째는 병약한 노인들 그다음에 또 이렇게 불구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물속에다 집어넣어서 가라앉혔다가 다시 올린다고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세례 예식도 정말 진정으로 회개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더 중요하지 의식이 무엇이가 더 중요하겠느냐 이런 의미에서 그냥 세례로 이렇게 약식으로 했고, 또 옛날 초대 교회 우리 성경에 보면 하루에도 믿은 사람이 3천 명이 된다. 어떤 때는 5천 명이 됐다. 막 이렇게 나오는데 3천명 5천명을 무슨 수로 다 아 물속에 잠겨놓고 그래 가지고 침례를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결국 세례 물을 뿌려서 하는 이런 세례로 단순화하는 그런 작업을 했는데 이게 단순화한 것이 사실 우리의 의미를 약화 시키면은 안 됩니다. 보다 더 의미를 심화시켜 줘야지 그리고 우리가 마음에 깊이 깨닫고 철저한 회계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줘야 되는데 이것이 안되면 사실은 침례도 헛것이고. 세례도 헛것이고. 잘못되기 쉽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세례를 베푸시지도 않았고 제자 자들이 세례를 베풀었고요.
사도 바울도 보면은 세례를 많이 베풀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해서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대에 세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다. 종교 의식인데 이 의식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이것이 오히려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의식에 대해서는 자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첫째는 죄를 씻는다는 말이고요.
둘째는 우리 베드로전서 3장 21절 보니까 물은 곧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편이 세례 그러니까 그러면서 이 세례가 뭐냐 너희 육체에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이다. 개혁성경에 그랬구요. 우리 개정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양심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야 돼요.
선한 양심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 한국말로 양심은 어 선량한 마음을 양심이라고 이 선할 양자하고 마음 심 자 하고 이렇게 써 가지고 양심이라고 해서 선한 마음을 말하는 건데
사실 양심이라는 말에 그 헬라어 원어나 물론 영어로도 마찬가지지만 그 뜻은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영적인 겁니다.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의 죽었던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 살아나 가지고 하나님을 찾게 돼요. 그래서 세례를 받음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줄을 몰라요. 입술로는 찾는다고 할지 몰라도 그의 영이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찾을 수는 있어요. 그러긴 하지만 영이 하나님을 찾아야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이 살아나야 된다. 세례란 둘째로, 선한 양심을 살려내는 방법이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셋째로는 어떤 뜻을 가지느냐 로마서 6장 4절 말씀 보면 세례라고 하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물속에 이렇게 잠기는 것은 육체가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물속에 장사 지내는 것을 상징하고, 물에서 이렇게 올라오는 것은 내가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세 사람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새롭게 탄생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으므로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세례를 많이 봤지만 어떤 어느 세례 장소에 가도 이런 것을 찾아보기는 거의 힘듭니다. 정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느냐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뒤집어지는 새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은혜를 상호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이거를 우리가 다시 결론적으로 말해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 이것이 세례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세례를 다 받아야 됩니다. 마지막 때 이런 세례 운동을 새롭게 일으켜야 되구요.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놓고 뭐가 다 된 줄로 착각을 하고 그렇게 사니까 오히려 오늘날 교회가 더 이렇게 타락하고 어두워지고 곤비해지고, 그리고 거짓 신자들이 가득하게 되고 이런 일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우리가 이 마지막 대회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성령 세례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이 성령세례라는 게 뭐냐하는 거를 교단별로도 보면은 설명하는 게 다 달라요. 그래서 성령의 세례는 성령 받아가지고, 방언하는 걸 보면 성령세례 받은 거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 있고요. 어떤 사람은 성령 세례라는 거는 성령 충만함을 받는 거다 그래서 우리 몸이 물속에 이렇게 잠기는 것처럼 성령의 이 바다속에 성령의 불 속에 우리가 이게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자 이렇게도 설명을 합니다. 과연 어떤 것이 성경적인 설명인가 우리는 그거를 정확하게 집어내기는 분별하고 집어내기는 쉽지는 않지만 여하간 교회 이 성경에서 특별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몇 가지 말씀들을 찾아보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6절이죠.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라고 말씀을 하셨죠. 그리고 바울도 에베소에서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하고 그들이 대답하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했더니, 요한의 세례니라 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였더니,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이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은사가 필수적으로 나타나야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가 우리 사도행전 12장 8절 이하에 말씀하는 것처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리듬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다음에 이제 병 고치는 은사 능력을 행하는 거 예언하는 것 방언하는 것 영분별 하는 거 이런 은사들이 줄줄이 그 다음으로도 이어지지만, 여하간 성령을 받아야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긴 받았는데 가짜 세례를 받은 거죠. 진짜 세례가 아니고 성령을 못 받았으니까 근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자기는 성령을 바둔 줄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폐역한 시대에 산 우리가 정말 정신 바짝 차려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도 넘게 따라다녔어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못 받았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닐 때 예수님이 전도하러 내보내셔서 저들이 돌아다니면서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이렇게 능력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아직 저들에게 성경이 임하시지 않았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이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이 열흘 동안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 열흘 동안 날마다 모여서 열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도 한 1주일만 하고 다가 만 것도 아니구요.
열흘을 꽉 채웠어요. 이렇게 하게 되니까. 드디어 오순절 날이 되어서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불이 임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 예언도 하게 됐습니다.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능력이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즉흥 설교를 했는데 베드로가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아가지고, 그 말씀을 이 본문으로 설명하면서 그때야 성경책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처럼 이렇게 있어서 자 이제부터 유엔스가 2장 18절을 봉했습니다. 뭐 다 같이 읽읍시다 뭐 이렇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에도 성령께서 친히 역사시니까 요엘서만이 아니라 시편에서 예수님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 이런 것도 막 자유자재로 성경부야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해 가면서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너희가 죽인 그 예수 그분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제 하늘에 올라가셔서 우리에게 성령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이렇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오늘 우리가 다 이렇게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하는 거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다 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의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다고 힘 있게 전파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그 자리에 있던 유태인들이 다 회개하고 뒤집어지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서 그들이 다 성명 세례를 받고 구원받는 자리에 나아가게 됐습니다. 이렇게 그날의 3천 명이 주께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에는 5천명이 또 주께로 돌아왔다. 이런 말씀들이 계속 나오고요. 엄청난 박해를 받았지만 박해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전해서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 오늘날 교회들 같이 형식적으로 믿는 척만 하고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니고 정말로 성령 충만한 교회 모이면은 성령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교회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술로만 성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이렇게 알고 또는 고백하고 그럴 게 아니라 정말 성령의 충분함을 받아 가지고 성령의 사람이 이어서 아름다운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놀라운 역사가 다 크게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소감문 : 10월 과제를 하면서 그동안 흘려 지나갔던 말씀속 의미들을 되새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몰랐던 부분도 많이 알게되는 보물을 캐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세우신 자리에서 무엇을 간구하고 받아야하는지, 받았을 때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다시 묵상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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