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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2:1~7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24.10.20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관통해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체를 보는 것은 산을 볼 때 한 그루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약과 구약을 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만약 구약성경만 읽고 연구하다보면 여호와 증인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도 마치 시각장애인이 코끼리를 만지고 설명하듯 그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다리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큰 나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만 만지고 굵은 밧줄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코끼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도 한 두 구절에만 매이거나 한 부분에만 집착하면 얼마든지 곁길로 갈 수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꼭 이단은 아니더라도 성경의 특정한 부분에 집착하면 대단히 율법적인, 구약적인 교회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 아무런 죄의식도 없고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거룩을 잃어버린 무질서한 교회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도 알고 복음도 알아서 은혜를 깨달을수록 죄에 대한 두려움과 또한 용서의 기쁨도 갖게 되길 축복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더 읽을수록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700년 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란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고 붙드시는 아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곧 내가 택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오실 때는 하나님의 택한 종으로 오셔서 주인이 맡긴 일에 순종하듯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을 따라 일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싸우거나 큰 소리로 다투신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다’라는 원문의 의미는 ‘꺾인 갈대라도 밟아 부수지 아니하다’입니다. 여기서 갈대와 심지는 우리 인생을 가리킵니다. 즉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불태워야 할 갈대 같은 인생일지라도 꺾지 아니하시고 바람만 조금 불어도 불꽃이 꺼지는 심지와 같은 인생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 갈대와 심지 같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이미 꺾인 갈대와 같이 불 속에 던져진 죄인들입니다. 불꽃이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심지와 같은 죄인입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고인이 되신 이어령 선생이 사랑하는 딸 이민아교수를 먼저 보낸 뒤 어느 날 딸의 일기장을 보다가 통곡을 합니다. 일기장에는 딸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며 힘썼는지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빵점을 받아와도 너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딸이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를 쓴 독일을 대표하는 지성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자서전인 ‘시와 진실’이라는 책에 그의 어린 시절에 재미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마을에 도자기 시장이 열리는 날인데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시장에 나가고 아이들만 집에 있었습니다. 괴테는 혼자 집에서 놀다가 심심하니까 그릇을 던지면 깨질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갑자기 궁금했습니다. 낡은 그릇 하나를 집어 창문 밖으로 던져보았습니다. ‘쨍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옆 집 아이들이 소리를 듣고 나와서 재미있다면서 “하나 더 던져” 라고 합니다. 다시 던졌더니 또 “더 던져”라고 합니다. 또 던졌더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더 던져, 계속 던져.”라고 합니다. 그렇게 방에 있는 도자기와 부엌에 있는 접시를 손이 닿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던져버렸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읽다가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때 어른들이 있었다면 “그만 해”라고 하여 말렸을 텐데 철없는 아이들이니까 “더 던져”라고 했구나’ 사단의 역할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더 하라고, 아무도 없으니 더 하라고, 그래서 바닥이 날 때까지, 도무지 일어서지 못하도록 더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접시 한두 개 깨뜨렸을 때와 모든 접시를 다 깨어버렸을 때가 부모를 대하기가 같겠습니까. 큰 일군 큰 사발이 아니라 큰 죄는 주님께 더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호5:4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처럼 사단은 우리가 더 큰 죄를 범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미혹합니다. ‘더 싸워’, ‘더 미워해’, ‘더 짓밟아’, ‘더 분노해’라고 범죄를 응원합니다. 선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응원합니다. 불난 집에 도리어 부채질하는 자, 기름을 붓는 이가 마귀입니다.
또 하나는 그의 부모가 돌아와서 어떻게 했을까, 입니다. 놀랍게도 이 큰 잘못을 범한 아들에게 그의 부모가 어떻게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날 이 아들을 향해 바보, 멍청이, 병신, 머저리라고 했다면, 이 놈아, 접시 값이 얼마인데, 저 도자기를 어떻게 구입한 것인데, 라며 바보 취급했다면 이후에 괴테가 창의력을,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부모가 조금도 야단을 안 치지는 않았겠지만 아들의 허물도, 연약함도 덮어주고 사랑으로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 4대 문학 중 하나를 쓴 문학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성경은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 같은 죄인을 구원하고자 아들을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지만 그러나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시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또 달리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요3:17).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음을 알리고 우리가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구원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말합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건져내는 것이 구원이니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구조대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구조장비를 갖추고 달려오듯 소방관이 불을 지르기 위함이 아니라 불을 끄기 위해 달려오듯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 살리고 생명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감춰놓은 죄를 찾아내고 정죄하여 법정에 세우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어떤 죄라도 자백하고 회개하면 용서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요일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살 길을 열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왔노라고 했습니다. 자기 몸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병환자 와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소서”라고 할 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고 말고, 나도 원한다, 내가 더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하여 채찍에 맞아 피 흘리기까지 우리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맞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원하신 것입니다.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인생일지라도 주님은 치료하시고 회복하시고 구원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허락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다 챙겨 집을 나간 아들! 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여 꺾인 갈대가 되고 꺼져가는 심지가 되었음에도 그래도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 죽었던 내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맨발로 달려 나가 껴안으시는 아버지, 그게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구절이 몇 절 있습니다. 겔16:6에 보시면 타락하여 가증한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비유로 말씀합니다. 네 근본은 가나안이고 아버지는 아모리족이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인데 즉 유대인으로서 버림받은 이방인의 혈통입니다. 네가 날 때에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고 물로 씻어 정결케도 하지 않고 강보로 싸지도 않고 돌보거나 불쌍히 여기는 자가 없어 들에 버려졌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피투성이채로 버려진 아이가 지나가다 보니 막 살려고 발부둥칩니다. 그 발짓하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버림받은 아이라도 그래도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두어 키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생명도 살리길 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비록 육신은 이후에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영혼이 반드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이런 마음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향해서도 마음을 열어놓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즐거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24:17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 살다보면 아주 미워 죽겠다는 사람, 꼴도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다가도 안 마주쳤으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분명히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고 하셨지만 원수를 위해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분입니다. 롬5:10에 “곧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의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그와 같이 너에게도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겔18:23에 보면 하나님은 죽을 사람의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사람이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드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못 박는 군인들을 위해서도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 원수라도 용서하는 마음, 마땅히 죽어야 할 자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는 이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접붙인바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노력만으로 안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도 부은바 되어야 합니다(롬5:5). 고전 2:16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고 복을 빌어주는 마음, 원수라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도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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