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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리스도를 통한 참평안 원문보기 글쓴이: 이상남
한국고대사의 비밀
신시·조선(神市·朝鮮)은 교회·왕국(敎會·王國)
[단군이 신시(神市)의 교화로 형성된 사회에서 왕국을 건설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먼 후일인 근대에는 이씨조선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군이 세운 조선을 다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 혹은 단군조선이라 불렀다. 필자는 이를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 부른다. 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말이 그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1. 새로운 문명이 요청되는 이유
미국을 정점으로 하고, 자본주의를 핵심으로 한 현재의 세계체제는 그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가톨릭문명공동체라는 역사2기 고봉문명이 해체된 뒤 유럽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역사2기 골짜기문명인 세속문명은 미국 주도의 그 화려한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돌리고 무너지는 중이다. 국가 공동체에서 상층부는 정치와 금융신용이다. 이미 정치는 한국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바닥이다. 신뢰를 상실하였다. 이제는 그 실질인 금융이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다음에는 실물경제가 하락할 것이고, 그 결과로 공동체의 내부적인 가치와 통일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가까운 하나의 예로서 북한을 보면 정치가 이미 신뢰를 잃었고, 경제가 바닥났고, 주민들이 그 독재정권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민심이 송두리째 떠났다. 지금의 북한 정권은 대안이 없어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식물정권이다. 이것은 여러 국가가 무너지는 그림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대안을 창출하지 못하면 세상은 끔찍한 상태로 계속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북한은 무너졌다. 지금 미국금융이 무너지는 것은 현 세계체제가 무너지는 시발이다. 역사적으로 고대의 로마제국이 무너지는 그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지금은 세계가 거의 하나의 시장으로 형성되고 그 안에 모든 국가 사람 경제 등을 포함하고 있는 관계로 바깥에서 침입하여 무너뜨리는 외적은 없다. 이것이 그때와는 현저히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서서히 안에서 무너질 것이다.
이미 소련은 무너졌고, 북한도 무너졌다. 곧 중국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미국도 무너지고, 유럽도 무너지고, 일본도 무너지고, 대한민국도 무너질 것이다. 국제금융재벌도 여타의 것들도 무너질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더 빨리 무너질 것이다. 이미 IMF를 겪었지만 다시 더 어려운 경제현실이 되어 고환율과 주가하락이 일어나고 있고, 부동산 거품 붕괴가 코앞에 닥치고 있다. 근본적인 처방을 못하면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더 비참한 붕괴와 하락이 주기적으로 계속되다 망할 것이다. 가정, 은행, 기업, 정부 할 것 없이 빚투성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계속되는 소수의 기득권만 살찌우는 정치 경제 사회 법률의 편중으로 양극화의 골이 깊어져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 되고 있다. 서민 일반의 생각은 “대한민국은 우리 서민의 나라가 아니야, 잘살고 힘있는 그들의 나라야.”라는 인식이 깊어지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인 서민은 기본재산이 없고, 장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유한한 물질적 부는 어떤 계층이 독과점하면 나머지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애국심도 재산이 있어야 지속되는 법이다. 그 위에 한국의 재산을 독점한 기득권층은 애국심이 없다. 번번히 경험하는 지도층의 무능과 몰염치와 부정부패와 탐욕과 어리석음과 자주성 상실로 말미암아 나라의 뿌리인 서민의 실망이 너무 깊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고도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다.
근대 이래의 한국인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제의 식민지와 미국의 패권에 종속된 자랑스럽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나의 건물이 노후화되면 그 건물을 해체하고 새롭고 좋은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있고, 세월을 견디지 못하여 죽어가는 고목 옆에서 새싹이 나고 자라 우람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듯이 새로운 문명이 등장할 것이다. 역사3기가 시작될 것이다. 한국인은 잘하면 이 역사3기의 고봉문명의 창설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러한 미래를 그리면서 그 가능한 원인의 하나인 한국인의 잃어버린 역사 시원인 신시·조선(神市·朝鮮)을 조명하고자 한다.
2. 한민족의 시작을 알면 그 미래도 알 수 있다.
시작과 끝은 서로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시작이 어떠하면 그 끝도 그러하다. 오늘 한민족이 갈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것은 그 역사의 시작을 잃어버린 탓이 크다. 그러므로 그 미래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으로 국민 일부는 사대주의자가 되어 중국과 일본을 섬기다가 이제는 미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있다. 이들이 일제시대 부역과 미군정의 협력자가 되고 건국을 담당하였다. 이리하여 이승만 시대부터 지금까지 국정을 담당한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다. 한국의 어려움은 이들로부터 기인한다. 일부는 편협한 국수주의가 되어 민족 정통 신앙의 타락한 흔적인 무속을 고유의 문화라 여기는 어리석음도 있다. 그 위에 많은 서민은 발 디딜 땅 한쪽도 없고 밥그릇은 비어 나머지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사람에게 기본재산이 없는 것은 죄악이다. 그 사회체제가 잘못된 증거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태생적으로 잘못되어 결단코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그 속에 마귀가 슬쩍 똬리를 튼다. 마귀는 그 본성이 공포, 불안, 시기, 질투, 살인, 사망, 가난, 음란, 저주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나라들은 반드시 그런 결과들이 일어난다. 과거 소련이 그러했고, 현재의 중공과 북한의 실상이 그렇다. 그 공산주의에서도 저질인 주체사상을 신봉하여 천인(天人)이 함께 분노하여 죽어 마땅한 북한의 망령된 독재자와 그 체제를 찬양하는 흑암의 무리도 있다. 이처럼 국론 분열이 극심하다. 그 위에 인류 역사이래의 여러 사상이 흘러들어 융합되지 못한 혼돈 속에 아직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스런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의 시원을 알 필요가 있다. 처음이 어떠하면 그 끝도 그러함 같이. 한국인에게 있어서 고대사는 풀리지 않는 하나의 비밀이다. 비밀 이전에 그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만, 그 흔적과 어렴풋한 기억이 단군신화라는 신화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특별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결과로 한국인은 자아가 어두워져 “곰의 후손이다. 무속이 고유한 문화다.” 하는 망발로 자신을 모독하고, 우상에게 절하고, 돼지머리에 절하는 어리석은 민족이 되어, 실패와 좌절과 축소와 패망과 능욕의 길로 흘러 왔다.
그러므로 그러한 중요한 하나의 원인이 된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인 신시·조선(神市·朝鮮))의 비밀을 밝혀 우리 당대부터 이루어야 할 위대한 비전에 투영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한다. 개인, 조직, 민족, 국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는 그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역사관으로 풀리는 한국고대사
사람의 인식에는 차원이 다른 두 종류의 인식체계가 있다. 이처럼 역사를 보는 역사관도 두 가지가 있다. 나아가 모든 행위도 두 종류가 있다. 그 근원과 실상을 성경 창세기 2~3장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이 아담을 위하여 창설한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알게하는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길로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자원으로 삼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결과 죽음과 심판에 이르는 길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 자아를 하나님으로 삼는 길이요. 그 선악과 이면에는 악한 마귀가 있다. 생명나무는 그러한 자아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생명으로 누리는 길이다. 이 두 그림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간결한 그림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격과 운명과 숙명이며 인간조건이다. 누구도 여기에 벗어나지 않는다.
생명나무의 생명과란 우리의 지혜와 음식과 비전과 생명이 되는 하나님을 말함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생명나무란 인격적으로는 예수님을 말한다. 그 말씀인 성경을 말한다. 선악과란 인간 육신 즉 자아를 말하는 것으로 창세기에는 먹음직 하고, 보암직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런 것으로 표현한다. 신약에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적 자랑을 추구하는 것으로 표현한 사람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문화로서 예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의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하고 자랑하고 그 반대되는 것은 비방한다. 모든 사물은 끼리끼리 만난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위대한 명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근원을 둔다. 기원전 500년대는 역사1기 고봉문명이 해체된 뒤 그것을 대체한 역사1기 골짜기문명인 인문 사상이 완성되는 시대다. 통칭 세계성인들이 출현한 시대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도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까 애태운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로 세계적인 학문과 종교가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불교도는 석가에게, 유학자는 공자에게,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에게, 이슬람인은 마호메트에게, 진화론자는 다윈에게, 허황한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메르 신화에 그 뿌리를 박고 자랑하고 성경을 대적한다. 성경 창세기를 모방하여 이리저리 널어놓고 도색하고 변형하고 거짓을 첨가한 수메르 신화와 바벨론 설화는 거짓 신화의 원류라 할 수 있다. 원죄 이후의 인간이란 심히 거짓스럽다. 오늘날의 인간의 말과 행위와 뉴스와 책들과 문화들이 얼마나 거짓으로 점철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인간 육신이 거짓과 짝퉁의 진정한 근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위시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였다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 창조설을 부인하고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우습고 인간을 모독하는 이론인가? 모든 인공물은 사람이 만들었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창조는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그 첫 부분의 창조로 창세기 1장에서 태초란 시간에서 6일째까지 빛으로부터 사람까지 창조하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였다. 7일째는 그날을 복 주어 안식하셨다. 이 창조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미 태초에 완성되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이미 완성된 세계다. 복음은 더 위대한 새로운 창조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완성되었다. 그 복음에 우리가 뭐하나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것과 동일하다. 다만 아멘으로 인정할 길만 있을 뿐이다. 이 창조는 우리 인간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경험 이전의 하늘에 속한 창조다. 이 시간을 성경에서는 태초라 말한다. 이 태초란 시간은 현실 이전의 시간이다. 현실에서 어떠한 시간 연장도 추측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다. 창조의 둘째 부분으로 창세기 2장에서 현실적인 창조를 말씀하신다. 이것은 땅에 속한 부분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이며 현실이다. 복음으로 풀이하면 예수 구속 이후 오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구속과 새로운 창조를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역사로 창세기 2장의 창조와 동일하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그 창조질서를 어긴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약 60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은 현실적인 인간 역사의 시작을 수백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지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하여 태초의 시간을 잃어버린 까닭으로 일어나는 잘못이다. 어떠한 무량지겁도 창세기 1장의 태초의 시간은 아니다. 현재 이 땅에 사는 사람은 길어도 백 년 전이요. 불과 수십 년 안에 태어났다. 그와 같이 인류의 현실적인 역사의 시작은 6000년을 넘지 않는다. 4500년 전경에 인류는 노아 가족 이외는 홍수로 멸망하였다. 그 이전의 모든 사람과 생물과 문화와 기록과 건물들이 홍수에 사라졌다. 그 까닭으로 3000년을 넘은 기록도 거의 없다. 어떠한 민족도 국가도 4500년을 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시작은 200만 년 전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또 한민족의 기원이 9000년이라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의 시간적 순서로도 신앙에 따른 역사가 우선한다. 그다음에 타락하여 인간 일반적인 즉 육신에 따른 역사가 나온다. 성경에 보면 창조가 먼저고 타락은 그 뒤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적 부분에서는 신앙심 보다 불신이, 창조질서에 속한 마음보다 타락된 마음이 먼저 나온다. 이를 성경 창세기 25장에서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어미 배속에서부터 싸우고, 출생할 때 에서가 먼저 나올 때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 나온 마음은 절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흔히 세계의 성인이라는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마호메트보다 모세가 훨씬 앞선다. 무려 약 900년이나 앞선다. 모세 인식의 깊이와 정확성과 범위와 도덕적 행위가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마호메트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 업적도 우수하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인간 일반적인 판단일지라도 인식과 도덕성과 업적을 정확히 항목을 정하여 판단해도 그렇다. 단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오만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작게 보인다. 그 작게 보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모세가 성인들보다 작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위대하다.
문명과 국가와 지도자를 측정해도 하나님이 주신 신앙에 따른 편의 역사가 훨씬 앞선다. 서벙에선 그 고봉문명이 이스라엘문명이다. 이는 그리스·로마문명보다 약 500년 이상 앞선다. 동방에서는 하나님을 모신 신시·조선(神市·朝鮮)시대의 문명이 유일한 고봉문명이다. 이 고봉문명은 주나라로 시작되어 춘추전국시대 인문사상의 완성과 정치적으로는 진을 거치고 한나라에서 완성된 골짜기문명인 중국의 인본적인 문명보다 약 1000년 앞선다. 고대 서방에서의 지도권을 잡은 다윗왕이나 솔로몬은 그리스·로마의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보다 훨씬 앞선다. 성경에 보면 고대 세계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을 찾아가서 존경하고 진리를 묻고 감탄했더라 한다. 중국 고대의 주목왕이 서쪽의 서왕모(西王母)를 찾아 즐거이 놀면서 자신의 왕국인 주나라로의 귀국을 잊었다는 전설도 그러한 사실의 중국적 반영일 것이다. 자신은 과장하고 남은 낮추고 사실을 은근슬쩍 변개하는 상습성 같은 것이 중국적 기록의 특징이다. 서왕모를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솔로몬이다.
그 당시 솔로몬은 유일한 고봉문명권의 지도자로서 그 영향력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을 증거하는 하나의 사례다. 이를 성경 열왕기상 10장에서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쓴 역사에는 이것을 감추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동방에선 신시·조선이 유일한 고봉문명인데 동방의 모든 사서에서는 그 기록이 없다. 동일한 원리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든 감추고 왜곡하고 헐뜯는 것이 거의 본성에 속한다. 이것이 고봉문명인 옛 조선과 이스라엘왕국과 중세시대의 가톨릭문명공동체가 작게 보이고 더럽게 보이고 가려져 있는 원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기록한 하나님의 책이다. 즉 인간 이성을 통하되 그것을 넘어선 신앙으로 주어진 책이다. 오직 하나인 신인(神人) 합일의 책이다. 시작과 끝이 되는 책이다. 수많은 책 중에서 단 하나의 표준이 되는 책이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시금석으로 인격적으로는 예수님을 주셨고, 책으로는 성경을 주셨다. 모든 민족과 개인은 창세기에 기록한 그 역사에 근원 한다. 어떤 사람이든 족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창세기에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 거짓이다.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다. 그 많은 후손이 죄를 지어 홍수 심판을 받았다. 오직 노아 가족만이 살아남아 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현재의 모든 사람과 국가와 문화가 노아에 연원한다. 그 범위를 벗어나는 족보와 이론과 기록들은 다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어떤 경험한 사실을 빙자하여 그 사실을 넘어 인간 육신으로 자의적으로 기록한 거짓이다. 그러므로 그 이론과 족보와 전설과 역사서와 민족의 기원들은 서로 모순되고 천차만별이다. 원래 거짓은 절제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이 원숭이같이 막 달려간다. 그러므로 그 이론과 억측이 가지각색이다.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 자손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지혜와 겸손한 인간능력을 활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산출되는 문명체계를 이루었다. 고봉문명의 근원이 된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를 따르는 노선이다. 그 후 많은 자손이 태어나고 지식과 지혜가 모여지자 인류는 교만해졌다. 그리하여 인류사의 처음 보는 영걸인 함의 손자 니므롯의 지도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벽돌로 하늘로 치솟는 바벨탑을 건설하였다. 즉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적 문명을 건설하였다. 그 결과 율법을 대신하여 가나안의 배도에 따른 간교한 상인문화와 니므롯의 폭력이 대세가 되었다. 따라서 사회질서와 심성이 점점 야만으로 변하여갔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언어가 혼잡해졌다. 단일한 인류가족이 수많은 언어로 갈라져 서로 소통을 못하여 남남이 되었다. 언어 따라 공동체가 분열되어 수많은 나라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 노선이다. 즉 골짜기문명인 세속문명의 원형이다. 오늘 미국주도의 세속문명도 간교한 상인문화와 폭력으로 구성되었다. 간교한 가나안의 자리엔 국제금융세력이, 니므롯의 폭력에는 미국의 군사력이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의 구성도 이와 유사하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은 동방의 첫 문명으로서 하나님을 따른 고봉문명이다. 그 신화적 표현과 남은 유적과 언어와 민족 풍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고대사는 신앙으로 풀어야만 풀리는 역사다. 바른 역사관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기본과 표준과 시금석과 시작과 끝을 삼고, 기록과 남겨진 유물 유적을 세심히 살펴 인위적인 허위를 가려내어 그 진실한 사실을 유추해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라는 인격적인 시금석으로 시험하면 그 정체가 드러난다. 어떤 말과 역사든 성경이라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면 그 진위가 금시 드러난다. 이러한 역사관과 원리로 한국고대사를 고찰하고자 한다. 성경을 바탕과 뼈대로 삼고, 중국의 기록과 한국의 기록과 드러난 유물과 유적들을 참조하되 허위와 과장을 벗기면서 한국고대사의 비밀인 신시·조선(神市·朝鮮)을 규명하고자 한다.
4. 밸렉 계열의 서방과 욕단 계열의 동방으로 나뉨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권이란 하나님이 그 장자권을 가진 자와 함께하며 하늘의 축복을 쏟아 붇는 것을 말함이다. 그 나머지의 자손들은 그 장자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에 동참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권이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통로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누리는 길은 없다. 노아 시대는 노아만이 하나님의 장자권을 가졌다. 노아가 축복하면 그 축복이 임하고, 노아가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임하였다. 이 축복과 저주는 노아가 임의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동역하는 것이다. 노아는 세 아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의 수치를 가린 셈을 축복하였고, 셈과 함께한 야벳을 그 축복에 동참시켰다. 불경하고 부모의 수치를 나팔 분 가나안의 아비 함에게는 저주를 내렸다. 이러한 장자권은 하나님의 진정한 장자권을 소유한 예수님을 예표하는 장자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온다.
노아의 장자권은 셈이 물려받았고, 셈의 장자권은 에벨을 통하여 그 두 아들에게 전해졌다. 에벨의 두 아들은 벨렉과 욕단이다. 이 두 아들에게 셈의 장자권은 전문화되어 둘로 나뉘어졌다. 비유하면, 벨렉의 장자권은 하늘에 속한 장자권으로 창세기 1장의 창조사역에 속하여 장래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속죄와 새 창조의 완성을 위한 장자권이다. 그러나 이방면에서의 창조와 구속과 새 창조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이며 새로운 창조다. 이러한 경험 이전의 사실을 우리의 경험과 체험으로 이끌기 위해선 동일한 장자권이지만 다른 장자권이 필요하다. 즉 욕단의 장자권은 땅의 장자권으로 창세기 2장의 창조와 예수님이 완성한 속죄와 새 창조를 우리가 경험하고 체득케 하는 능력으로서 성령님의 사역을 예표한다. 욕단의 장자권은 먼 후일에 한국 땅에서 일어날 구원의 현실적 완성을 위한 장자권이다. 이처럼 먼 후일에 일어날 그 구원사역을 위해 섭리적으로 장자권이 전문화되어 둘로 나뉘었다.
에벨이 아들을 낳을 무렵 하나님의 경륜적 섭리가 에벨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에벨은 큰아들의 이름을 세상이 나뉘었음이란 뜻을 가진 벨렉이란 이름으로 짓고, 작은아들은 작은자 및 단을 쌓는 자란 뜻인 욕단으로 불렀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사람의 이름에 계시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에벨이 나뉜다는 벨렉과 작은자가 단을 쌓는다는 뜻의 이름을 그 아들들에게 붙인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별이란 벨렉의 이름이 뜻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구원사적 섭리다. 벨렉과 그 형제인 욕단을 동서로 나누어 예수님 안에서의 다 이룬 구원과 먼 후일 동방 한국 땅에서 시작되고 완성될 그 구원의 현실적 완성을 위하여 예비한 나뉨이다. 둘째는 그 당대의 인류가 저지른 배도와 그에 따른 바벨론 문명에 대한 심판으로 인하여 전 인류의 언어가 혼잡되어 나뉘고, 인류공동체가 찢어져 나뉜 것을 말한다. 지금 세상의 많은 언어와 사상과 종교와 민족과 국가가 분열되어 싸우는 것은 배도에 따른 그 오만한 바벨을 심판함으로 말미암은 그 혼잡에 연유한다.
바벨 심판 전에 에벨의 아들인 벨렉과 욕단은 동서로 나누어졌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반드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성경에서 구원은 반드시 유대인을 통하여 난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 구원은 창세기 1장 노선의 본바탕이다. 그리고 동시에 창세기 2장이 있듯이 예수님의 구원은 반드시 성령을 통한 이 땅에서의 구현이 필요하다. 그리해야 그 창조와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벨렉 계열이 바벨 심판에서 분별되고. 먼 후일 동방의 한국에서 구현될 그 구원의 실현을 위한 욕단 계열이 바벨 심판에서 피해가는 은혜가 필요했다. 이 한국 땅에서 일어날 역사3기의 고봉문명과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 왕국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완성된 구원의 체험이 없다. 그러한 이유로 벨렉 계열과 욕단 계열이 심판 전에 동서로 나누어져야만 했다.
벨렉의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 당대에 바벨은 심판받아 찢어졌다. 구세주로 가장한 바벨의 니므롯은 구세주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지 않는 구세주란 없는 법이다. 지금까지 바벨의 니므롯 노선에 속한 구세주가 많다. 그들은 구세주가 아니다. 니므롯이 심판을 받았듯이 그들도 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벨렉의 의미는 인류 편에서 누가 구주인가? 많은 사람 중에 분별하여 참 구세주를 찾아가는 의미도 있다. 많은 사람 중에서 분별하여 찾아가면 구주가 될 사람이 없다. 오직 예수만이 구세주가 된다. 하나님 편에서는 구주를 세우시는 은혜의 역사가 있고, 사람 편에서는 누가 구주인가? 많은 사람 중에 나누고 조사하여 미혹 당하지 않고 유일한 구주를 찾아 믿고 순종하는 과제가 있다. 이런 과정 중에 미혹 당하여 실족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혹 당하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인류 유일의 시금석인 예수다. 그 말씀인 성경이다. 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미혹 당한다.
구주를 찾고 난 다음에는 하나의 깊은 과제가 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생활은 그 말씀과 계명대로 살 수 없다. 예수와 믿는 자는 현실에선 따로따로다. 로마서 7장에서 한탄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이 있을 뿐이다. 욕단이란 이름이 의미하듯이 작은자가 되어 성령님을 보혜사로 모시고 날마다 회개와 감사와 찬양의 제단을 쌓는 생활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은혜와 그 말씀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동일한 다른 사역이 필요하다. 이때 예수와 나는 하나가 되고, 예수가 다 이룬 것이 다 나의 것이 되고, 창세기1장 같이 경험이전의 예수 안에서의 구원과 새 창조가 비로소 나의 현실이 된다. 그리하여 나는 새사람이란 감격이 절로 나오게 된다.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때 하늘에는 하나님이요. 내 안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이 실감된다.
이 역사役事는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사 사도행전에서 시작한 사역이다. 그 이후 20세기 동안 수많은 성도 중에서 일부 성도들이 심령에 임한 천국에서 더 나아가 침노하여 빼앗은 천국 안에서 천국의 비밀인 말씀의 씨를 심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누렸다. 이 사역이 한국에서 다시 강력하게 일어날 것이다. 지나간 그 역사는 맛보기 같은 것으로 여길만큼 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욕단 계열은 먼 후일 한국 땅에서 일어날 이 일을 위한 예비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역을 만나야만 구원의 현실화가 이루어진다.
5. 욕단은 요(堯)이며 단군(壇君)이다.
서방 벨렉 계열에선 세상과 구별되는 길을 밟아 구주 예수 탄생을 예비하였다. 동방 욕단 계열은 이 땅에서의 그 구원의 현실을 예표로 보여주었다. 욕단 계열의 그 역사적 사실은 이렇게 중요하다. 하나의 손이 손등과 손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 둘은 표리를 이루어 하나의 구원에 관하여 예표적인 그림을 구성한다. 성경 창세기는 창조와 인류역사의 기원을 밝힌 책이다. 그 사실과 반대되는 기록들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본 사실을 과장하고 거짓으로 꾸며낸 흔적일 뿐이다. 홍수 이후 전 인류 시원적 종족과 그 거주지를 밝힌 창세기 10장에서 욕단은 열세아들을 낳고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기록하였다. 단 몇 절의 기록이지만 욕단의 중요성은 그 이름의 의미와 함께 그의 아들이 성경에서의 기록 중 가장 많은 아들인 열세아들이었다는 것으로 표시되고 있다. 아들의 많고 적음은 하나님에게 받은 축복의 크기에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거주지인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라는 기록도 중요한 비밀을 담고 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곳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메사는 아마 지금의 이란고원 어디에 있을 것이다. 이란의 메슈하드라는 도시는 혹 그 당시의 메사일지 모르겠다. 중동에서 이란인은 이웃나라에 사는 아랍인과는 다른 민족이다. 아마 그들은 욕단의 후손으로 우리와 같은 종족일 확률이 높다. 그 까닭으로 이란 사람들이 한국인을 좋아하고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원인이 되는지 모르겠다. 스발은 지금의 시베리아일 확률이 높다. 시베리아는 시빌이라 불렀다. 신라에서 자신의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서라벌이라 불렀다. 서라벌은 한문으로 고치면 신라(新羅) 즉 새 나라라는 뜻이다. 이것은 비록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그 사실의 흔적들은 민족의 심층에 새겨져 때때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인 것 같다. 스발->시빌.시베리아->서라벌(신라)->서울이라는 것은 다 하나의 뜻을 가진 말이다. 새로운 땅, 새로운 나라라는 말이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살기 어려운 동토인 시베리아를 왜 새로운 땅인 스발이라 불렀을까? 아마 먼 후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민족이 주도적이 되어 전 세계를 평화의 공동체로 건설한 뒤 새로운 땅, 새로운 나라, 지상천국인 교회·왕국(敎會·王國)을 건설하는 환상을 보았을 확률이 높다. 그리하여 한반도로 이동해 왔던 욕단족의 핵심인 우리 민족이 그 환상을 은연중에 나타내어 서라벌, 서울이라 불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이동로는 홍수 이후 소아시아의 아라랏 산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옮겨오다가 넓고 살기 좋은 시날 평지를 만나 다 그곳에 머물 때 욕단 일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일차 집결지가 이란고원의 메사였다. 그곳을 서방에 살고 있는 벨렉 계열과의 교류와 바벨문화 이동을 차단하는 관문으로 삼았을 것이다. 욕단의 열세아들 중에서 한 아들 가족을 남겼을 것이다. 그들이 고대 고레스(키루스)의 바사(페르시아)의 조상이 되었을 것이다. 포로된 이스라엘인들의 해방과 무너진 성전 중건의 사명이 바사의 고레스에 맡겨진 까닭도 이와 같은 신앙과 역사에 연유함이 있을 것이다. 메사에서 사마르칸트를 지나 카자흐고원을 경유하여 우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 북방을 진행하다 시베리아 바이칼 근처에서 한참이나 머물렀을 것이다. 그곳에서 먼 후일의 역사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살기 어려운 동토인 그곳의 이름을 새로운 땅, 새로운 나라란 뜻인 스발이라 불렀을 것이다. 일부는 남고 나머지의 전 욕단족은 살기 좋은 곳인 만주로 이동하였다. 이란고원부터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고, 만주, 한반도는 그 당시에도 이미 욕단족의 영유지역이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10장이 가리키는 그 당시는 바벨 심판 전이라 언어와 말도 하나였다. 욕단이란 말은 요(堯)와 단군인 단(壇)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로 중국에서 말하는 요와 한국에서 말하는 단군은 한 사람으로서 욕단이라 밝혔다. 발음뿐만 아니라 뜻도 같다. 욕단의 이름에는 작은자 및 단을 쌓는 자라는 이중의 뜻이 있다. 한문에서 요(堯)는 垚(요)와 兀(올)로 짜인 글자다. 즉 요(堯)라는 그림은 작은자가 위에 세 스승을 모신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멀리 있는 높은 사람이란 뜻으로 요임금이라 불렀다. 단군인 요는 즉 욕단은 중국인에게 그렇게 멀리 있는 존엄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단군에서 군을 뺀 단(壇)은 바로 제단을 쌓는 자란 뜻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요와 단군은 성경에서는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을 욕단이라 밝히고 있다. 垚(요)는 세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삼황(三皇)이란 전설과 한국의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풍백 우사 운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땅을 말하는 토(土)와 임금이 아닌 사(士)는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늘과 임금은 아니지만 가장 닮았다는 뜻이다. 그 하늘과 임금의 수단이란 뜻이다. 兀(올)은 세 사람을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요(堯)자신을 말한다.
중국 전설에서의 삼황과 단군신화에서의 삼사란 성경의 인물인 노아와 그 아들인 셈과 셈의 자손인 어떤 족장일 것이다. 그 이유는 노아와 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벨 심판을 피해가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홍수 심판 전에 하나님을 경외한 에녹은 휴거 당하였고, 대부분의 족장들은 죽어 심판을 겪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며 성경의 원리다. 두 번째 이유는 홍수 이전 세상에서 에녹은 구원 사역을 마치고 부활 승천한 예수님을 예표 하였고, 노아는 성령으로 이루는 이 땅에서의 구원 현실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아는 동방에서 새로운 지상천국의 예표를 지도할 책임이 있었다. 가나안의 배도와 니므롯의 폭력으로 건설된 바벨론을 피해서 동방에서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지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옛 신시·조선(神市·朝鮮)이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인도와 노아와 셈과 셀라일 세 조상들과 욕단인 요단군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워진 동양에서 유일한 고봉문명으로 옛 이스라엘왕국과 중세의 가톨릭교회문명 공동체와 같은 구원노선의 문명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어 버렸다.
홍산문명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요하지역은 홍수 심판 이후 아라랏산에서 시작하여 이란고원을 거치고 시베리아에서 잠시 머물다가 만주로 이동해 정착한 욕단족인 요단군족의 정치경제적인 공동체가 형성된 그 당시 이후의 문명유적일 확률이 높다. 중국 전설과 사서에서 기록한 요순의 정치적 이상시대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얼마 동안 이곳을 중앙으로 해서 이란고원부터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욕단족의 연락과 연합과 다스림이 행해졌다. 이곳에서 파견된 우(禹)가 황하 치수에 성공하여 중국이 건설되었다. 욕단일문인 요단군족의 삶이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되자 노아와 셈과 셀라와 욕단은 하나님을 모시고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정치경제를 넘어선 교회·왕국(敎會·王國) 건설의 비전과 목표를 세웠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풍백 우사 운사와 삼천무리가 태백산 산정에 도달하여 신시(神市)를 열었고, 단군은 조선을 건국하였다. 신시와 조선은 유대인 보다 먼저 이스라엘과 같은 문명을 건설하였다는 의미다. 이리하여 동방에서의 역사1기 고봉문명은 완성되었다. 동양에서의 유일한 고봉문명이다. 많은 인류형제와 이별하고 수많은 산과 강을 건너 건설한 위대한 문명이었다.
6. 정치적 이상을 성취한 요단군시대
성경에 욕단에 관한 기사는 단 몇 줄 뿐이다. 한국과 중국은 욕단시대 즉 요단군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사실을 잊어 버렸다. 다만 중국에서는 전설과 공자로 말미암아 요단군의 정치적 부분에 관한 기사만 요순이라는 항목으로 전해지고, 한국에선 그 정치적 부분을 잃어버린 대신에 그 종교적 부분만 그것도 정사가 아닌 단군신화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에 먼저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이 형성되어 있다. 성경을 뼈대로 삼고 한국과 중국의 조각난 기록을 참조하면서 제자리에 놓고, 단군시대의 정치 종교를 포함한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이란고원 메사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바이칼지역을 경유하여 살기 좋은 만주의 요하지역에 정착했다. 아마 수십 년이 걸렸을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머물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욕단족의 일부가족은 그 땅을 정착지로 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욕단족은 여러 땅에서 나누어지는 아픔도 겪었을 것이다. 먼저 시날 땅에서 벨렉 계열의 형제들과 수많은 인류형제와 헤어지면서 사랑하는 연인이 찢어지고, 우정도 뒤로 돌리는 아픔도 있었을 것이고, 미운정 고운정 다든 이웃과의 별리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심과 형제들과 헤어진 아픔을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근원가가 되어 사랑가 이별가 수심가로 맥박치고 있다. 아리랑이 신앙가인 것은 잊어버렸다. 아리랑은 하나님이랑->하나님의 영이랑->얼이랑->알이랑->아리랑으로 변해온 신앙가다.
요하지역에 정착하고 난 뒤에 가장 시급한 것이 먹고사는 경제 문제이며, 넓은 지역에 흩어진 종족의 연합과 통일성 유지와 소통이었을 것이다. 말은 그 넓은 땅에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기마민족이란 이것에 원인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활이 더하여져 무적의 무력으로 변화되었다. 동족 상호간의 윤리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체계의 확립이 절실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중국에서는 삼황오제의 전설로 전해졌다. 성경에서의 노아 셈 셀라는 중국에서는 삼황(三皇)인 복희씨 신농씨 금천씨로 변형되고, 한국에서는 풍백 우사 운사로 표현되고 있다. 복희씨(伏犧氏)는 글자 그대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경배하는 모습이고, 신농씨(神農氏)는 농업 즉 경제를 맡은 농부의 모습이고, 금천씨(金天氏)는 윤리와 손익과 선악을 분별하는 재판을 담당하였다. 욕단인 요는 정치를 담당한 제왕의 모습이다.
삼황의 황(皇)이란 것은 진리에 부합한 말과 덕(德)이 엄청나다는 것이고, 오제의 제(帝)는 정의로운 권력과 덕치가 엄청나다는 뜻의 한문이다. 그 중국적인 기록이 상서의 요전이며 사마천 사기에서의 오제본기 요순항목이다. 요가 지도자로서 덕을 세워 이웃에 미쳐 전 공동체를 감화시키는 법, 관리를 세우는 법, 역법을 정하여 자연에 따른 일을 조율하는 법, 치산치수법, 후계자 선별 및 양육법 등, 중국기록에서 요에 관한 기록에는 새로운 시대 건설의 패러다임이 가득하다. 2000년 뒤 사마천이 사기에서 중국 건설자로 표현한 황제(黃帝)는 허구다. 바벨족인 중국인을 높이기 위하여 바벨 역사를 가져와서 꾸민 족보이다. 황제(黃帝)는 성경의 니므롯의 사적 바로 그대로다. 후한무치의 전형이다. 그러한 결과로 중국은 부정부패와 사기가 가득한 사회가 되었다. 한국과 중국, 만주, 몽고, 중앙아시아, 이란 등의 전 지역을 통괄하는 최초의 공동체 창설자는 욕단인 요이며 단군이다. 그 국토의 한계가 없다는 천하사상(天下思想)은 중국이 여기에서 빌려간 정치사상이다. 이것이 패권적으로 변형된 것이 중화제국주의다. 타락해간 한국인은 이러한 정치사상도 잃어버렸다. 요가 단군인 줄도 모른 채 지금까지 그 시대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잘못 알고 있다.
욕단인 요는 성경에서 표시한 것 같이 작은자란 자기 인식이 깊었다. 겸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깊어지면 자기자신을 비우게 된다. 그리하여 노아 셈 셀라인 하나님의 선지자를 말미암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받아 순종하였다. 이는 신앙적인 성경의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도덕과 정치의 표준으로 요순을 꼽고 있다. 공자의 조술요순(祖述堯舜)이란 말은 이를 표현한 말이다. 그 사상을 인본적인 체계로 서술한 책이 중용이다. 중용(中庸)이란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없는 중국적인 표현이지만 그 실상은 요순이 마음에 모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음성을 주의하는 신앙의 외면적 표현이다. 안으로는 신앙이요. 밖으로는 도덕으로 자신을 극기하면서 하루하루 조심하고 근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마음과 생활이 되었다. 그 결과 정치를 잘 할 수 있었다. 정치는 아무리 뛰어난 지혜가 있어도 사심의 극복이 없다면 결단코 좋은 정치는 없다. 정치란 너와 나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진 권력과 자원을 분배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위정자의 극기다.
그리하여 그 광대한 지역에 평화가 넘치고, 물질은 풍성하고, 서로의 윤리성이 지켜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 바로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부른 “우리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은(立我烝民), 그대의 지극함 아닌 것이 없다(莫匪爾極),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不識不知), 임금의 법에 따르고 있다(順帝之則)” 라는 강구가무(康衢歌舞)가 있고, 배불러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부른 “해가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쉬고(日入而息), 우물 파서 마시고(鑿井而飮), 밭을 갈아 먹으니(耕田而食),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帝力于我何有哉)” 라는 물이 흐르는 것 같이 자연스런 정치를 노래한 격양가(擊壤歌)가 있다. 동방에서 정치적 이상을 이룬 유일한 시대이다.
요는 시시때때로 물줄기를 바꾸고 범람하는 황하를 다스리기 위해 먼저 곤을 파견했으나 실패하였다. 요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태백산으로 옮긴 후 요의 정치를 물려받은 순은 곤의 아들 우를 보내어 황하를 다스리게 했다. 우는 불철주야 쉼 없이 노력하여 황하를 다스려 치산치수에 성공하였다. 요순을 제(帝)라 부르고 우의 왕조인 하와 은과 주나라의 임금을 왕(王)이라 불렀다. 즉 요순의 제후국이란 뜻이다. 중국은 한국인이 개척한 땅으로 유럽인이 개척한 미국과 비슷하다. 황하를 위시한 치산치수에는 근면한 실용의 지혜와 수많은 사람이 군대같이 움직이는 조직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중국 땅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위에 요가 정착하여 중앙지를 삼았던 만주의 요하지역은 욕단인 요단군이 한반도의 태백산으로 옮긴 탓에 요하지역은 부제(副帝)인 순이 다스리는 부도(副都)가 되었다. 이러한 연고로 순은 요하지역에서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그 권위는 중국 땅의 우에게 옮겨 갔다. 이것이 중국 역사의 시작이다.
성경에서 욕단의 형인 벨렉의 수명을 239세라 한다. 그 형제인 욕단도 비슷한 수명일 것이다. 한국인인 최치원은 욕단인 단군의 수명을 약 270세라 기록하고, 중국인인 사마천은 욕단인 요의 수명을 약 120세 또 순의 수명은 100세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사마천이 구성한 역사의 틀과 기록은 많은 오류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어 모든 사실을 인본적으로만 보고, 지나친 중국 중심의 사관이다. 동방 고대에서 중심은 신시·조선(神市·朝鮮)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것이 없다. 그런 연고로 사기의 고대사는 소설에 가깝다. 중국의 입맛대로 짜깁기한 고대사가 되었다. 사기에서 요가 순에게 선양(禪讓)한 기록이 있다. 요가 순에게 선양한 뒤 28년을 더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28년이나 더 살았다는 기록은 사리적으로 모순된다. 한국에서 단군의 연대를 말하면 반드시 요의 연대와 비교해서 말한다. 요 25년 혹은 50년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한국인 중국인 할 것 없이 요단군의 진실은 몰랐다는 표시이다.
그 조각을 다시 구성해보면 요가 만주에 정착한 뒤 50년에 걸쳐서 정치적 이상인 태평성대를 이룬 뒤에 그 정치를 순에게 물려주고 하나님의 선지자인 풍백 우사 운사의 지도로 한반도 태백산으로 옮겨 교회·왕국(敎會·王國) 즉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는 사실의 조각일 것이다. 욕단인 요단군은 광대한 지역에 평화를 건설한 뒤 다시 더 높은 비전을 위해 이동하였다. 후손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깊은 삼천 엘리트와 함께 태백산으로.
7. 역사시대 구분론
신시·조선(神市·朝鮮)은 교회·왕국(敎會·王國)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 전에 역사의 대략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창조가 먼저 있고, 그후에 타락이 있다. 사람이 타락하여 그 창조질서를 어기는 타락된 문명이 일어났다. 그 타락 이면에는 사람을 꾀는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감언이설이 있다. 지금 세상에서 난무하는 선악 간의 사상과 그 이면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상품을 만들어 사고 파는 시장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명품이 있으면 그것을 모방한 짝퉁이 있다.
홍수 심판 이후, 노아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고 행하고 일한 그 신앙체계가 뒤에 등장하는 고봉문명의 원형이다. 노아 이후에 인류가 타락하자 그 타락을 타고 가나안의 배도와 니므롯의 폭력으로 건설한 바벨문명이 뒤에 등장하는 골짜기문명의 원형이다. 바벨 심판 이후, 어둡고 혼란하고 분열되고 우상숭배로 덮인 세상에서 벨렉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역사1기 고봉문명의 시작이 되는 사람을 삼았다. 그 후손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그리고 모세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해방되고, 유일한 하나님에의 신앙체계를 세워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회가 되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전 세계적인 영향력이 미친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다. 세계의 중심국이었다. 이 문명이 진정한 역사1기의 고봉문명이다. 이 고봉문명의 주도적인 세력인 유대인이 점점 타락하여 그 문명이 해체되었다.
그 후에 그 고봉문명에 자극받아 눈 떠진 변경의 민족들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를 거쳐서 로마문명이 들어섰다. 이것이 역사1기 골짜기문명이다. 이 문명은 스스로는 건설할 수 없다. 반드시 고봉문명에 자극받아 그 문명에 도전하고 인본적으로 변형하여 성립된다. 특색은 우상숭배가 판을 치고, 밤에는 음란한 갖가지의 일들이 벌어지고, 권력과 명예와 부는 독과점 되어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어 절대 다수의 서민들의 삶은 황폐화 된다. 그 결과 한 맺힌 반란이 일어난다. 로마에서는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와 그 무리들의 반란이다. 오늘 역사2기의 세속문명인 자본주의 문명에서의 반란은 마르크스가 창안하고 레닌과 그 무리들이 일으킨 공산주의 혁명이 이에 속한다. 대의명분보다 각자의 이익을 신봉하는 관계로 국론과 여론이 각자의 이익에 기반을 두어 천만 갈래로 쪼개진다. 그 문명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자연파괴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고 실패하고 늙어지고 힘없어 저절로 무너진다. 이것이 고대 로마문명으로 대표되는 모든 골짜기문명의 실상이다.
이 세속문명의 교활함은 선진 문명인 고봉문명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어둠으로 색칠하여 덮어버리고, 타락한 교회를 포로로 삼고 교인들을 그 사회의 동력원을 삼는다. 바벨론과 로마제국 발전의 원동력은 이스라엘인과 그리스도인이었다. 지금의 미국이 주도하는 문명도 그 동력원은 그리스도인이다. 미국에 그리스도인이 없었다면 지금같이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 결단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동양의 세속문명인 중국문명은 옛 조선왕국의 핵심인 한국인을 그 중심적인 동력원을 삼았다. 중국 역사에서 순수한 한족(漢族)의 역사는 영토가 축소되고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보잘것없는 문명이었다. 몽골지역과 만주지역의 민족이 한족(漢族)을 대신하여 중국정권을 잡을 때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지금의 광대한 땅의 중국도 우리 여진족이 만든 나라다. 현재 중공의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10여년 전부터 중국에 들어간 한국 제조업의 공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중공이 핍박하는 가정교회가 왕성한 것이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바벨론에 금이 곳곳에 박혀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문명권에 속한 유대에서 탄생하셨다. 그 짧은 인생을 통하여 예수님이 보여 주시고 성취한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엄청난 것이다. 그 사실을 성경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 기록하고 있다. 믿음이 아니고는 볼 수 없다. 첫째로 하나님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언행이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나아갈 수 없다. 둘째로 인류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담당하여 그 심판을 십자가에서 받고 대신 인류의 구속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죄 한 번도 짓지 아니한 의인처럼 인정된다. 셋째로 새로운 창조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사람으로 재창조되었고, 천지 만물도 모두 새롭게 재창조 되었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새창조인 재창조는 처음 창조보다 천만배 이상이다. 그 재창조는 한없이 위대하다. 이 모든 사실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이 복음을 들고 바울은 유럽에 건너갔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2기 고봉문명의 시작이었다. 그 복음이 점점 왕성해져 그리스도인들의 수많은 희생과 피 흘린 순교의 과정을 거친 뒤 로마제국을 덮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라는 교회가 유럽과 소아시아 곳곳에 세워졌다. 로마제국이 무너졌을 때 그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구제와 질서와 학문과 진리를 세운 것이 가톨릭교회였다.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유일한 권위와 진리와 실력을 가진 세력이 되어 그 사회를 보호하고 조율하고 구제하는 기관이 되었다. 그 결과 중세 유럽은 가톨릭교회에 기초한 사회가 되었다. 이후에 로마가톨릭교회라는 왕국이 일어났다. 이것이 역사2기 고봉문명이다. 사람, 조직, 국가, 역사, 문명은 장점으로 일어나고 단점으로 망한다. 중세 천 년을 유지한 로마가톨릭문명은 암흑이 아니라 대단한 문명이었다. 토인비도 장점이란 관점에서 보면 로마가톨릭교회제도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조직이라 말하고 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가진 것도 틀림없지만, 중세 천 년을 유지한 것은 위대한 힘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고봉문명은 교회·왕국(敎會·王國 )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신앙체계인 구약교회와 서양 중세시대의 가톨릭교회와 단군조선에서의 신시(神市)가 이에 속한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순종할 수는 있지만 날마다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와 주위의 이질적인 세력인 외국의 위협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권력자와 왕국을 원한다. 이것은 몸을 가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약점에 속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도 인간 왕을 원하는 모순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기반한 왕국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왕을 세울 때 그 왕은 권력남용으로 형제들인 백성을 종처럼 부리게 될 것이고, 백성의 재물을 불가피하게 탈취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왕의 실정으로 백성들이 괴로워 부르짖어도 그 제도를 폐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처럼 인간을 왕으로 세운 왕국은 많은 약점을 갖기 쉽다. 그러한 약점으로 처음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하여 그 당대 최고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도 왕권이라는 인간 분수를 넘은 권력을 가진 탓에 오만해졌다.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많은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 그로 말미암아 점점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이방나라 문화에 심취하게 되고 우상숭배라는 치명적인 죄에 빠졌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떠나고 그 결과 실패와 실정이 쌓였다. 그 후계자들은 더 타락하여 왕국이 쪼개지고 결국에는 멸망하여 그 문명이 해체된다. 이와 같이 중세의 가톨릭교회 사회에서도 로마가톨릭교회라는 왕국이 설 때 일반적인 가톨릭교회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헤게모니 장악과 세속적인 통치를 위하여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로마교회 수장인 교황무오설과 성모마리아의 중개설로 인한 성모숭배와 미신에 속한 성인숭배 등을 더하였다. 이리하여 면죄부 발부와 과도한 건축과 성직자의 타락으로 신뢰를 잃고, 그 사회도 따라서 우상숭배로 나아가 십자군전쟁 등이 일어나고, 음란하고 문란한 사회가 되어 그 고봉문명이 해체되었다.
동양에서의 유일한 고봉문명의 왕국인 옛 조선의 건국은 이스라엘왕국과 로마가톨릭교회와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신시(神市)라는 교회에 기반하여 단군이 조선이라는 왕국을 건설한 것은 같지만 그 왕국의 건설에 있어서 위험성은 어떤 좋은 변화가 있어서 없어진 것 같다. 이것은 단군이 신시의 신단수 아래의 어두운 동굴에서 백일이라는 시간 속에 호랑이 같은 인간성을 곰이 여자가 되는 신앙성이 이겨 인간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이 상징은 사심을 극복한 단군이 오직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한 여인같은 신앙인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안으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러한 강고한 신앙적인 핵심이 있기 때문에 외면적으로 주어진 왕권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것이 후계자의 선발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옛 조선의 광대한 지역에서의 평화와 긴 시간에 걸쳐서 계속된 역사의 원인이라 생각된다.
가톨릭교회가 기반이 되고 로마가톨릭교회 왕국으로 구성된 역사2기 고봉문명의 주도적 세력이 타락하여 그 문명이 해체되었다. 이를 대체한 현재의 서구문명이 역사2기 골짜기문명이다. 이 문명도 로마가톨릭문명의 틀 속에서 배우고 모방하고 인본적으로 변형하여 건설된 것이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정치혁명을 통하여 세워진 세속문명도 이젠 그 수명이 다 되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중이다. 새로운 문명이 등장할 것이다. 역사3기의 고봉문명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순종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역사를 건설하는 힘이 아니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를 진행하고 주도하고 섭리하는 힘과 긍휼이 없다면 역사3기의 고봉문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동양에서 2000년간 수많은 왕조가 일어나고 쓰러지는 역사가 되풀이 되었듯이 현 서구문명이 더 타락하여 지옥 같은 모습이 계속될 것이다.
서양에서, 1기에는 이스라엘 문명이 2기에는 기독교 문명이 일어난 관계로 세속문명도 따라서 고대의 그리스·로마라는 1기 세속문명과 현재의 구미라는 2기 골짜기 문명이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신시·조선(神市·朝鮮) 역사1기 고봉문명이 나타나고 해체되었다. 그 뒤 중화제국이라는 역사1기 세속문명이 일어나 2000년이나 계속 되었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힘이 들어오지 않아 역사2기 고봉문명도 없었고 따라서 역사2기의 골짜기 문명도 없었다. 있는 것은 중국이 주도하는 지겨운 역사1기 세속문명만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2기 골짜기 문명의 유럽과 미국이 침략하자 상대도 되지 않고 무너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전 세계가 미국이 주도하고 정치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핵심이 된 역사2기 세속문명에 정복당하여 겨우 끼어들었지만 이제는 그 멸망을 함께하고 있다.
고봉문명이 먼저고 세속문명은 뒤에 일어난다. 고봉문명이 해체되면 그 문명의 변경지역에 사는 민족들이 분발하여 배우고 모방하고 변형하여 세속문명을 일으킨다. 또 이 세속문명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여 새로운 고봉문명을 요청하게 된다. 이리하여 역사3기까지 나아간다. 그 이후에는 천년왕국이다. 그 이후에는 요한계시록에 밝혔듯이 새 하늘, 새 땅,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역사는 완성된다. 이것이 역사 진행과 발전의 원리다. 동양에서 거의 2000년 이상이나 계속된 중화문명은 반드시 모방하고 근거하는 앞선 고봉문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고봉문명 없인 골짜기문명인 중국문명도 없다. 이 고봉문명이 신시·조선(神市·朝鮮)문명이다. 한국인은 이 문명을 일으킨 핵심민족이다.
8. 신시·조선(神市·朝鮮)은 교회·왕국(敎會·王國) -Ⅰ
[단군이 신시(神市)의 교화로 형성된 사회에서 왕국을 건설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먼 후일인 근대에는 이씨조선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군이 세운 조선을 다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 혹은 단군조선이라 불렀다. 필자는 이를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 부른다. 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말이 그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만주지역을 기점으로 하여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이란고원, 중국에 걸친 욕단 즉 요단군족의 광대한 영역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미암는 도덕이 기초가 되고, 물질도 풍성한 평화 공동체가 건설되었다. 이를 일러 요순지치, 태평성대, 우순풍조라는 말로 그 시대의 평화가 구전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적 욕구로서는 거의 충족된 사회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소원과 경륜은 그러한 평화보다 훨씬 높고 깊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노아와 셈과 셀라와 욕단과 그 핵심적인 후손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갈망하는 지상천국을 건설하고 싶은 소망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것이 천하태평을 이룩한 요가 순에게 물려주고, 하나님의 섭리하심 안에서 노아와 셈과 셀라인 삼사(三師)의 지도와 욕단 즉 단군의 지도로 신앙심 깊은 핵심 후손 삼천무리가 한반도 태백산으로 옮겨 신시를 열고 조선을 건국한 까닭이다. 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은 보통 나라가 아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신앙을 말미암아 말씀이 도덕이 되어 실천되는 그런 신인합일(神人合一)적 공동체다. 제정일치의 공동체다. 교회·왕국(敎會·王國)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인류역사상에 세 문명만 있었다. 신시·조선(神市·朝鮮)과 구약의 이스라엘과 바울의 유럽선교로 시작된 가톨릭교회공동체이다.
모든 일과 문명이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로 일어난다.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눈다. 일반계시는 천지 만물과 인간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고,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일반계시는 보통 이성으로 판단되는 것으로 그 질서를 지키면 성공하고, 어기면 실패하는 보편적 일반적 법칙이다. 일반적인 문화가 여기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원죄 이후의 모든 인간은 양심이 화인 맞아 그 눈이 매우 흐리다. 그 실천 능력도 약하다. 그런 까닭에 그 이치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실천력도 부족하여 유혹에 넘어져 실패와 패역의 길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특별계시는 보통계시와 중요계시와 직접계시로 나눌 수 있다. 보통계시는 믿는 자의 보통 일상적인 생활에서 양심을 거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에 속한다. 중요계시는 모세가 구약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계시를 받고, 바울이 신약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계시를 받은 그런 특별한 계시다. 직접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말씀한 예수님이다. 계시의 차원에 따라 그 사역의 차원도 달라진다. 하나님이 사람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원죄 이후 다시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을 이루고 새 창조를 완성하셨다. 이것이 직접계시다. 모세와 바울로 말미암은 중요게시로 교회는 설립되었다. 일반적인 신앙생활은 보통계시로 영위된다. 보통계시로 말미암는 신앙생활을 보통 믿음이라 말한다.
욕단인 요(堯)가 성취한 평화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중의 보통계시로 말미암았다. 보통계시란 신앙인이 보지 못하고 믿는 일상적인 믿음이지만 그 믿음의 힘은 굉장하다. 그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눈 앞의 산을 옮긴다. 이성과 신앙양심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기에 이룩한 평화공동체였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도덕과 창조질서에 따라 이상적인 시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더 높고 깊은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교회·왕국(敎會·王國) 건설에는 하나님의 더 높은 임재와 계시가 필요하다.
모세가 출애굽하여 구약교회를 설립하고, 바울이 신약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더 깊고 높은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가 필요한 것과 같은 중요계시가 필요하였다. 그 흔적의 하나가 단군신화이며, 그리고 보이지 않던 참전계경과 삼일신고와 천부경이 갑자기 후세에 나타나 수정 보완되어 전해진 것도 또 하나의 흔적일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자료들은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 번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많은 흙이 묻듯이 결손되고 숨겨지고 왜곡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다 그러한 까닭이 있다. 그러므로 세심한 주의와 판단이 필요하다.
한단고기와 같은 위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들이 역사적 사실과 전승들을 육신적으로 해석하여 자의적으로 과장하고 변개하여 허위로 기록한 것들이다. 성경 창세기를 모방 모조하여 거짓으로 새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든 수메르 신화와 같은 종류다. 그 특색은 신앙이 없는 관계로 하나님 세계를 볼 수 없고, 또 마음 깊은 속에서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리에 많은 우상을 갖고 와 하나님을 가린다. 또 그 하나는 인간을 분수 이상으로 높인다. 한단고기에서 환인 하나님을 인간으로 격하시킨 것은 그러한 연유로 일어난 거짓말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거짓말로 마음대로 늘린다. 수메르 신화와 한단고기에서 창세기를 앞선 시간과 한민족 역사를 고무줄 같이 늘여 9000년이다, 1만년이다,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한단고기의 일부와 부도지와 수메르 신화를 읽어보면 그런 냄새가 진동한다. 비유하면 몇 조각의 금이 섞인 허섭스레기 더미라 보면 된다. 금이 조금 있듯이 역사적 사실은 조금 있다. 그 외는 다 과장이며 거짓이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된 신화는 그 참된 사실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된다. 수메르 신화에 심취하면 바른 신앙에서 떨어지고, 한단고기와 같은 위서에 빠지면 한국역사의 시원을 오해하게 된다. 이단사설은 그 해악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중요계시의 내용이 모세오경을 포함한 구약성서로, 신약시대에는 복음서와 서신들로 구성된 신약성서로 기록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반면에 타락한 유대인은 국토를 잃어버렸다. 타락한 한국인은 그 계시와 역사를 잃어버렸다. 그 대신에 한 조각의 땅은 갖고 있다. 이는 일면의 깊은 섭리적인 이유가 있다. 단군신화는 그 중요계시의 사실이 신화라는 캡슐에 담기어 전해진 것이다. 그 해석은 육신적으로 하면 틀린 해석이 되고, 성서적 신앙관으로 풀어야만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 단군신화는 이 중요계시의 흔적이다. 그 신화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환인 환웅의 하나님 세계와 둘째로 환웅의 인도와 풍백 우사 운사의 지도로 삼천 무리가 신시(神市)를 건설한 부분과 셋째로 곰이 여자로 변화되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신앙적 상징과 단군이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요계시는 모세가 받은 중요계시보다 약 700년 앞선다. 이러한 하나님의 새로운 임재와 중요계시로 말미암아 건설된 신시·조선(神市·朝鮮)은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한 교회·왕국(敎會·王國)이었다. 광대한 영역과 긴 시간에 미친 영향력은 크고 인상이 깊어 선민(選民)이라는 영어의 chosen은 발음 그대로 조선이다. 또 그 하나의 유물인 고인돌은 영어로 dolme 돌멩이다. 영어의 돌멩이(dolme) 보다 고인돌이 훨씬 상세한 뜻이 있다.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의 깊이를 나타내는 하나의 예라 할 것이다. 우리의 언어에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바울은 성경 로마서 1장 중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라는 말씀으로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을 원초적으로는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민족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는 말씀이 지적하듯이 불신자가 되어 우상 숭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민족 중에서 불신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신앙관을 발전시킨 두 민족은 타락 전의 유대인과 한국인이다. 유대인은 그 하나님을 엘 혹은 엘로힘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창조주로 불렀고, 그리고 사람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시는 의미인 여호와로 불렀다. 여호와는 오늘 성령으로 인류와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고 교제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모세에게 불꽃 중에 나타나 계시하기 전까진 어떤 민족에게도 계시하지 않은 이름이다. 이 여호와의 이름에는 모든 이름과는 차별되는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불렀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정상적인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죄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일무이한 창조주 하나님을 하느님 혹은 하늘님이라 불러오고 있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인(桓因)이라 불렀다. 한글 발음으로 환은 하늘을 상징하는 “ㅎ”과 환한 광명을 뜻하는 것이다. 한문으로 桓은 굳세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유대인이 부른 엘과 같은 의미다. 즉 환한 광명 자체이며 힘 있고 굳센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 하나님은 유일한 인격이되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것을 삼일 하나님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 신관은 오직 하나님이 계시하심으로만 알 수 있는 높은 진리다. 그만큼 한국인은 그 민족 시원의 역사에서 영성이 밝았다.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유대인은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으로 어렴풋이 알았다. 한국인이 알았던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군신화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는 환인으로, 서자 하나님으로는 환웅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은 독자라 표현한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인성을 입은 성령 하나님은 서자라 부를 수 있다. 서자란 죄 있는 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지만, 예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양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환웅을 환인의 서자라 부른 것은 성령이 인성을 입고 구원사역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者)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매,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의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이를 신시(神市)라 일렀다. 이 분이 환웅천왕이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면서,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맡아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이 때, 신(神)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서 먹었다. 삼칠일(三七日) 동안 몸을 삼가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범은 능히 몸을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자기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檀樹) 밑에서 아이 배기를 빌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요(堯)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일연이 단군신화를 삼국유사에 기록한 것은 칭기즈칸 몽골의 천하정복과 고려 침략에서 보인 몽골족이 가진 힘의 원천인 텡그리 신앙에 격발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몽골족은 욕단족의 일 부족으로 단군시대의 그 신앙은 흐려졌고 타락되었으나 그 끈은 놓지 않았고, 선민의식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연은 고려시대의 한민족은 몽골에 침략을 당하여 굴복되었으나 그 근원에서는 더 위대하다는 잠재된 민족적 자각이 눈떠져 그 증거로 단군신화의 전승을 찾아내어 삼국유사에 기록하였다.
그 구전신화가 중국사서인 위서와 한국사서인 고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란 것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연은 인도에서 전래되어온 불교도였다. 인도문명은 지극히 타락한 문명으로 인간이 원초적으로 알고 있던 유일신을 수많은 우상과 우상숭배로 바꾼 죄 많은 문명이다. 그러므로 인도의 역사와 현실은 저주받은 흔적이다. 일연의 단군신화의 불교적 해석은 대단히 해롭다. 환인 하나님을 인도와 불교에서의 하나의 우상인 제석(帝釋)으로 해석하여 우리 민족 전래로 믿어온 하나님을 오해하고, 모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의 말과 기록은 성서적 표준으로 분별함이 필요하다.
환웅이 인간세상을 탐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세상 사랑하심을 표현한 말이다. 환웅을 환인 하나님의 서자로 칭한 것과 비슷한 구절이 성경 창세기 3장의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구절과 로마서 8장의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다. 환웅(桓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인 성령님을 한국적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환웅의 사명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문자적으로 풀어보면 사람을 확대하여 그 사람이란 그릇에 물을 붓고 또 부어 가득하여 철철 넘치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성경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적 수양과 수련의 차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은 목표가 있다. 성경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라 말하고, 2장에서는 흙과 같은 사람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영으로 변화된 사람이라 말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는 신적인 존재로 변화되어 들려 올림 받는 것을 말한다. 이런 높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문명과 나라와 사람과 환난과 천지만물과 시간과 사연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엄청난 은혜와 숭고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생으로 오셨다. 그 이름이 예수다. 역사3기에는 동일하되 다른 역사를 하실 것이다. 이때 홍익인간으로 예시한 그 실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삼위태백산과 천부인 세 개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상징적으로 물질적인 태백산을 말하는 것이 되지만 그 실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성을 입고 역사하는 세 역사적 현장을 말함이다. 그 하나는 구약에서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로 말미암아 계시한 것과 그 이면적 역사인 신시·조선(神市·朝鮮)에서 중요계시로 임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은 예수님으로 오셔서 직접적으로 계시하시고 구속과 새 창조를 완성을 사실을 말함이다. 그 셋은 한국 땅에서 시작할 역사3기의 고봉문명인 평화세계 건설과 교회·왕국(敎會·王國) 건설을 말함이다. 천부인 세 개는 거울과 북과 칼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믿는 마음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실천력으로서의 성령충만과 그 사역 체계로서의 하늘 직분과 리더십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사역은 이 세 개의 천부인으로 역사하신다. 성경에서 인(印)이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런 특별한 중요계시가 단군족에게 임하였다. 정치적인 이상시대를 넘어 새로운 하늘질서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환웅의 임재 아래 풍백 우사 운사의 안내와 단군의 지도로 그 광대한 욕단 종족의 영역에서 뽑힌 하나님에게 목숨을 건 삼천무리가 태백산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神市)를 열었다. 오늘의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이상적인 교회(敎會)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한국역사의 시원(始原)이다.
9. 신시·조선(神市·朝鮮)은 교회·왕국(敎會·王國) -Ⅱ
[단군이 신시(神市)의 교화로 형성된 사회에서 왕국을 건설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먼 후일인 근대에는 이씨조선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군이 세운 조선을 다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 혹은 단군조선이라 불렀다. 필자는 이를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 부른다. 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말이 그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신시(神市)는 홍수 심판 이후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교회다. 그다음으로는 모세에게 주어진 계시로 말미암아 설립된 이스라엘교회다. 이 둘은 율법시대의 교회이다. 신약시대에도 교회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에서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이며, 둘은 사도행전 13장에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각 지역에서 시작한 이방인의 교회이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예루살렘교회는 표면적 간판적 교회이며 고대한국의 신시와 신약의 이방교회는 이면적 실질적 교회이다. 창조에도 이와 똑같은 두 종류의 창조가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창세기 2장의 창조가 있는 것은 다 그러한 원리로 말미암았다. 비유하면 손은 손등과 손바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룬다. 손등은 손을 대표하고 손바닥은 그 실질이 되어 모든 작업이 손바닥의 활동으로 일어난다.
율법시대와 복음시대 똑같이 교회의 설립은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이 사역자들보다 더 전면에 나타나고 강력한 움직임이 있다. 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몸이며 신부인 특별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역사를 하되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영역과는 다르게 강력한 역사와 임재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사람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바울은 교회에서 베드로나 바울이나 어떤 사람이든지 내세우는 것을 큰 죄라 질책했다. 홍수 이후 바벨탑 심판 전에 욕단족이 이란고원에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골을 거쳐 만주에 정착하여 요순의 태평성대를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전면에 나타나시지 않았다. 다만, 안내역인 노아와 셈과 셀라와 지도역인 욕단과 그 종족의 내면에서 역사하셨지만 임재를 드러내시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인 신시(神市)를 건설하는 시점부터는 하나님 자신을 강력히 드러내셨다. 이것이 단군신화에서 민족 이동과 요의 태평성대 건설까지는 기록이 없고, 환인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환웅의 태백산 강림으로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설립 과정만이 나타난 까닭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대의 한국인을 자신의 사랑하는 짝을 삼고자 이 도령이 춘향을 찾듯이 찾아오셨다. 자신의 몸과 신부를 삼으려고 특별한 임재와 계시로 찾아 오셨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필요하였다.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찾아오셨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는 “나를 따라오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는 말씀으로 갈릴리 어촌으로 찾아오셨고, 교만한 사울을 거리에서 만나 그 오만한 마음을 부수고 작은 바울을 만들면서 찾아오셨듯이 풍백 우사 운사를 찾아오셨다. 동방의 태백산으로 가서 신시를 건설할 그 뜨거운 소원으로 찾아오셨다. 성전에 누운 사무엘을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면서 찾아오셨듯이 제사장이 될 욕단인 단군을 찾아오셨다. 그들은 환웅 하나님을 모시고 태백산으로 가서 신시 건설에 순종할 사명에 하나가 되었다. 그 넓은 욕단족의 영역에 흩어져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삼천무리에게 환웅 하나님은 꿈과 환상과 묵시로 찾아오셨다. 이것이 환웅이 삼천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산정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셨다(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는 신화의 실제다.
교회를 구성하려고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그런 까닭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심각한 일이 된다. 비근한 예를 든다면 한 남자의 애인이나 신부가 되면 아무 남자를 만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구약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가야만 되었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물에 잠기는 침례 의식을 치러야 한다. 침례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표시이며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서 산다는 표시다. 이처럼 삼천무리는 정든 땅, 정든 가족, 정든 이웃과 이별하고, 익숙한 산업을 손에서 놓고 태백산으로 이주해야만 했었다. 오늘의 태백산은 어디일까? 오직 예수 이름 안에 있다. 오직 예수 이름 안에서 산다는 신앙이 그 표시다. 오늘 이런 그리스도인은 적다. 그런 까닭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없어 영향력이 없어졌다. 교회는 세상에서 단 하나의 하나님의 몸이며 하나님의 여자이다. 그 위치는 모든 만물 위다. 천사보다 높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는 강력하고 특별하고 뜨겁다. 모든 희생을 한다. 죽기까지 한다, 그것이 구주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다정하다. 다정한 애인 같고 신랑 같고 수컷 같은 남자의 모습 즉 환웅(桓雄)이라는 이름으로 오셨다.
태백산 산정에 신단(神壇)이 있고, 신수(神樹)가 있는 신시는 성경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모습이며, 성경의 끝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서 완성된 에덴동산의 예표다. 이처럼 신단수는 성경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계시의 최고봉이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알게하는나무가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 중심이 있는 것을 말한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선악나무는 인간 자신을 상징한다. 이 둘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피조물인 사람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물을 떠난 나무 같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첫 사람인 아담이 하나님인 생명과를 먹지 않고 자기 자신인 선악과를 먹고 죽었듯이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이다. 자기 자신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연고로 아담도 실패했고, 모든 인류도 실패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것은 영적으로는 죽었다. 이것을 원죄라 한다. 그 마지막은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스라엘 사울왕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할 때 적군에는 골리앗이라는 천하무적의 장군이 있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골리앗은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해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을 비웃을 때 사울왕과 이스라엘은 떨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이란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하여 스스로 무너뜨릴 사람이 없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인본적인 모든 사상과 행위는 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를 드러내는 골리앗 같은 것으로 선악을알게하는나무다. 이 선악나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보면 선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세계적 성인들이 세운 종교와 철학과 도덕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은 악한 것으로 모든 악한 사상과 범죄 행위들이 이에 속한다. 모든 인간 사상은 선과 악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선과 악은 다 하나의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이룬다. 선악나무의 이면에는 옛 뱀 즉 용으로 상징되는 마귀가 있다. 마귀도 원래는 광명의 천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아름다운 자신을 바라보다 악하고 죽음에 잠긴 사단이 되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고 주장할 수 있는 지혜와 고유 권한이 있다. 피조물이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침범한 행위가 된다. 소경이 인도자가 되면 시궁창에 빠질 수밖에 없듯이 죄악과 사망에 빠지고 만다.
오직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다윗만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골리앗이 큰 덩치를 뽐내며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을 비웃을 때 다윗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하면서 달리며 물맷돌 다섯을 골리앗에게 던졌다. 골리앗은 물맷돌에 맞아 이마가 뚫려 죽었다. 이것은 예수 구원을 상징하는 하나의 비유다. 이처럼 오직 인간 자신을 이긴 분은 예수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 33년간 인생을 살 때 인자(人子) 즉 철저한 사람의 입장으로 사셨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 죄짓지 않았다. 이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다. 이를 구속이라 한다. 그리고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였다. 이것은 인류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승리하였다는 표시다. 그리하여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해결하였다. 인류 역사상에 오직 한 분이다. 이 예수만이 구주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실을 단순히 믿고 예수를 믿으면 된다. 그리하면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다. 예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된다. 믿음으로 그것은 다 내 것이 된다. 믿음의 길 외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예수를 증명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되는 책으로 읽으면 지혜가 되고, 지식으로 읽으면 지식이 되고, 힘으로 읽으면 힘이 되고, 능력으로 읽으면 능력이 되고, 생명과 호흡으로 읽으면 생명과 호흡이 된다. 예수를 만유라 부르는 까닭이다.
태백산 산정에 있는 신단(神壇)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해결하였다는 것의 상징이고, 신수(神樹)는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있어 우리의 생명이 된 예수의 상징인 생명나무이다. 신시의 신단수가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마나 높은 계시인가! 한국인의 조상이었던 그 당시의 삼천무리는 날마다 단에 나아가 양과 같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신수에 나아갔다. 그때는 율법시대라 출애굽기 26장 30절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라는 성경 구절처럼 하나님이 보여주신 식양대로 실제의 그림자를 세웠다. 신단수(神壇樹)는 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아가면 은혜스러운 속죄와 생명이 쏟아졌다. 이것이 신시라는 교회생활이다. 삼천 무리가 환웅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왕으로 섬겼다(是謂桓雄天王也). 인간왕 없이 환웅이 천왕으로 있는 이상 세게가 신시다. 약 700년 뒤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와 모세의 지도로 출애굽 하여 광야를 거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약 400년간 하나님의 인도와 사사들과 제사장들의 지도로 교회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 것과 동일한 역사(歷史)다. 다만, 차이점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강력한 외부적인 임재로 말미암아 마음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율법이 장점이었고, 신시에서의 한국인은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미암아 내적인 도덕이 장점이었다. 그 인본적인 반영으로 말미암아 서양에서는 철학이 발전하였고, 동양에서는 도덕이 발전하였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선지자로 삼아 대언하게 하시고, 단군을 제사장으로 삼아 신시를 다스렸다. 환웅의 선지자인 삼사(三師)는 하나님의 말씀을 각 방면으로 표현한다. 풍백(風伯)의 풍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육신적인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낳는 영적 출생을 담당하는 선지 직분을 표시하는 것이다. 풍백은 노아로서 그 당시 전 인류의 유일한 조상이므로 백(伯)이란 큰 어른이란 말을 붙여 존경을 나타내었다. 우사(雨師)는 논밭에 심어놓은 곡식을 비가 내려 자라게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들에게 아침이슬 같고 철 따라 내리는 비 같이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 직분을 표시하는 것이다. 비를 맞고 곡식이 쑥쑥 자라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사의 은혜로운 말씀의 대언으로 성장하였다. 운사(雲師)는 하나님의 존엄한 임재를 표시하는 말이다. 푸른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떠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무언가 존엄한 대상을 대하는 감정이 생긴다. 성경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여 구름 타고 승천하셨다. 운사는 선악과 손익을 판단하는 사법적 기능을 가진 선지 직분의 이름이다.
서방에서 약 700년 뒤에 이스라엘의 구약교회의 선지자는 모세 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풍백 우사 운사가 가진 선지 직분의 세 부분을 다 담당하였다. 예수님 이전 율법시대에서 모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역사1기 고봉문명의 대표권을 이스라엘이 가진다. 역사2기 고봉문명도 이스라엘에 연유하여 건설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완성도 이슬라엘 민족이 담당하였다. 하나님이 신시·조선(神市·朝鮮)문명의 기록 망실을 묵인하신 것도 이런 까닭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조각의 한국 땅을 보존케 하신 것도 깊은 섭리가 있다. 그 까닭은 역사3기 고봉문명의 건설과 복음시대의 완성은 한국 땅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출발하여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판단을 보여주시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에 달렸다. 성경 출애굽기 제사장 항목에서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을 어깨에 메고 가슴에 새겨 모든 형제의 이름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여 그 문제의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사장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나오는 것이다. 야곱의 꿈처럼 땅에서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있어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것 같이 신시 즉 교회생활이란 야곱이 본 사다리처럼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된 것이다. 교회생활이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의 되풀이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과 같은 것이 교회생활이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 간의 주고받는 생활의 연속으로 인간으로선 이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생활이 없다. 이런 생활 속에 하나님의 것을 섭취하여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 간다. 신시에서 삼천무리는 점점 하늘 사람으로 변해 갔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론이 제사장 직분을 맡았고, 신시에서는 단군이 제사장 직분을 맡았다. 그 직분이 한국 고유의 이름으로 단군(壇君)이다. 환웅은 선지자로 풍백 우사 운사를 세우고 제사장으로 단군을 세워 하늘에 속한 사역조직을 구성하였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이 교회 사역조직을 구성하였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환웅의 사역은 오늘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면서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실제를 예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양육하여 거룩케 하고자 모든 자원과 권력을 사용하신다. 이것이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을 주재한다는 것의 실제다. 이처럼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였고,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웠고, 바로와 그 군대를 수장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이스라엘을 염병으로 치셨고, 사사시대에는 잘못하면 주위의 적들이 이스라엘 침략을 허락하였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축복하였다. 제사장 엘리 가문의 심한 잘못을 응징하여 죽였고, 풍년과 흉년을 주셨고,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셨다. 이스라엘의 타락이 극심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다.
오늘의 세상은 홍수로 심판받은 그 세상보다 더 패괴하고, 오늘의 교회 사역자는 타락한 엘리 가문보다 더 심하고, 오늘의 교회는 이스라엘보다 더 심한 타락으로 세상에 포로 된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 그 포로 됨도 모르는 깊은 어둠에 잠겨있는 현실이다. 오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극심한 양극화와 북한의 저주와 중국 땅의 사막화와 아프리카의 극심한 빈곤과 사막화와 사기경제로 인한 금융위기로 무너지는 미국일극체제의 세계도 다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받는 심판의 표시다. 회개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과 교회의 현실이 그만큼 심각하다. 예언자란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듣고 회개하면 기회가 있다. 신시의 삼천무리와 그 후손들은 거의 천년에 걸쳐서 하나님의 역사를 주재하는 대권에 회개하였다. 그것이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이 광대한 영역에서 긴 시간으로 지속된 원인이다.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대권을 행사하시는 것은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성경에서의 표현인 말씀과 성령 충만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 예수의 몸과 신부를 세우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때문이다. 그 길을 단군신화에서는 인간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을 주장하여 재세이화(在世理化)를 이룸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율법시대에는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설명하고 한국인은 참전계경에 보이는 것처럼 도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의 복음시대에는 말씀과 성령 충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의 율법에서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풀면 수백 수천 가지의 율법이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세 조항과 안식일 조항과 여섯의 인간사 조항이다.
첫째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긴다. 둘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않는다. 셋은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는다. 넷은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시고 복 주신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룩히 지킨다. 다섯은 부모를 공경한다. 여섯은 살인하지 않는다. 일곱은 간음하지 않는다. 여덟은 도둑질하지 않는다. 아홉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열은 탐내지 않는다. 이는 완벽한 율법이다. 이 율법을 마음 자세인 도덕으로 풀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실한 마음을 기본으로 하여 신의로 자신을 극기하면서 사랑하고 구제한다. 그리고 화복이 있고, 보답과 응보를 받는 것이 있으므로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까? 이것이 참전게경의 내용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도덕과 법을 지키기 쉽다. 그리하여 모든 도덕을 쌓으면 환웅이 전폭적으로 임재하여 이상세계인 재세이화(在世理化)가 이루어진다.
성경 출애굽기의 구성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은 출애굽 부분이고, 둘째 부분은 십계명 부분이고, 셋째 부분은 성막을 건축하는 부분이다. 그 성막이 완성되면 하나님이 강림하여 그 성막에 충만하신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성막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 권위를 표현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곳이다. 신약시대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 몸인 교회도 성전이다. 단군신화에도 성경 출애굽기 같이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환웅을 모신 삼천무리가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이주한 부분과 인간 삼백육십사를 지킨 부분과 재세이화 부분이다. 재세이화는 출애굽기에 있는 성막에 하나님이 강림하셨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것 같다.
이리하여 신시에는 태백산에 이주하여 인간사 삼백육십여가지의 도덕을 갖춘 뒤 재세이화라는 성막이 건축되고 환웅의 임재가 있었다. 이리하여 신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와 권능과 빛이 충만한 하나님의 도시 신시(神市)가 되었다. 환웅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빛과 능력과 도덕이 내려와 신시의 시민들은 다 각자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졌다. 그리하여 농부가 밭에 곡식을 심어 가꾸어 결실하여 시장에 내어놓고 자랑하고 교환하고 판매하듯이 하나님을 누려서 결실한 부분을 전람하고 서로 교환하여 서로의 유익한 교제가 있었고, 즐거움은 더욱 다채로웠을 것이다. 이것이 시장이라는 일면을 갖고 있는 신시(神市)의 의미다. 이 신시의 삼천무리가 한국인의 조상이다.
10. 신시·조선(神市·朝鮮)은 교회왕국(敎會·王國) -Ⅲ
[단군이 신시(神市)의 교화로 형성된 사회에서 왕국을 건설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먼 후일인 근대에는 이씨조선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군이 세운 조선을 다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 혹은 단군조선이라 불렀다. 필자는 이를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 부른다. 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말이 그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朝鮮)은 신시교회의 교화 속에서 나온 왕국이다. 교회·왕국(敎會·王國)으로서 조선과 이스라엘왕국과 로마가톨릭교회는 같은 종류의 고봉 왕국이다. 인류 역사상 현재까지 단 세 왕국뿐이다. 이스라엘왕국은 모세의 선지자 직분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 예배체계로서의 사회인 이스라엘이 약 450년 뒤에 사사시대를 거친 뒤 일어난 왕국으로 초대 왕 사울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다윗왕으로 말미암아 확립되었다. 예수의 탄생과 말씀과 사역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기독교가 바울의 선교로 말미암아 유럽 각지에 교회가 설립되고, 그 후 교부시대를 거치고,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에 가톨릭교회가 왕성해졌다. 그들의 뛰어난 신앙행위로 인하여 그 사회가 가톨릭교회공동체로 변화되어 갔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가톨릭교회에서 하나의 유력한 교회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정학적 역사적 인간적인 특별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왕국으로 변신해 갔다. 이 로마가톨릭교회가 가톨릭교회 세계에서의 왕국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특색은 외면은 교회이되 실상은 왕국이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가톨릭사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왕국으로 변신하여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신시를 기반으로 한 조선왕국은 이내 건국되었다. 그 이유는 신시를 구성한 삼천무리가 단군의 후손들이었고, 욕단인 단군의 뛰어난 신앙심과 인격과 지도력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제사장인 단군이 왕을 겸하였다. 제정일치의 체제가 된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 이상적인 실상을 말하면 제사장이 왕을 겸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까닭으로 예수는 선지자이며 제사장이며 왕이다.
왕국이나 어떤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선 최고 지도자를 어떠한 사람을 어떻게 세우고, 그 하부조직을 어떠한 사람을 어떻게 뽑아 구성하는 것은 그 왕국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사역자들이 뼈가 되고 다수의 구성원은 살이 되어 하나의 사람을 이루듯이 국가와 조직을 구성한다.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과 과정은 여러 가지다. 오늘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왕국으로서의 수명은 벌써 끝났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살아 있는 왕국이 아니라 그 왕국의 기념물이다. 그러므로 교황에 과도한 비중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사는 시작과 끝이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살 때가 있다. 죽은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미라로 만드는 것은 그 해악이 작지 않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단군신화 중반 부분에 곰과 호랑이가 신웅(神雄)에게 기도하여 호랑이는 실패 하였지만 곰은 한 사람의 여자로 변하여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것은 단군이 제사장과 왕이 된 과정을 신화로 설명한 것이다. 또 조선왕국에서 그 후계자와 지도자들을 뽑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단군의 마음속에 호랑이 같은 육신적인 마음과 곰과 같은 신앙심이 있었다. 이런 구조는 모든 믿는자의 실상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자의 육신적 마음에는 많은 갈망이 있지만 단 한 줄로 표현하면 하나님같이 되어 유아독존하고 싶은 탐욕이다. 이를 호랑이로 표현한다. 반면에 믿는자의 신앙심은 이러한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를 신화에서는 곰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즉 신성한 사람이 된다. 이를 여인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여인이란 하나님을 한 분의 남자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성경 잠언에서는 신앙인이 말씀을 듣고 성숙하여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지식과 은혜를 받고, 동시에 세상과 육신적인 선악과의 교훈을 멀리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뒤 결국에 한 사람의 현숙한 여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으로 그 결말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도 사랑 없이 살 수 없지만 하나님도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그리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사람에게 주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이 율법에서 예시되었고, 복음에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의 완성이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이다.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대표적인 사랑이다. 감미로운 최고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의 남자가 되길 원하신다. 인류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의 여인으로 삼고서 생명 다하여 사랑하기 원한다.
곰이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변화되는 비결이 단군신화에서는 동굴에서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만 먹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을 받고 변화되는 깊은 비유이다. 지도자는 그 구성원이 걸어가야 할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다. 먼저 체험한 사람이다. 모세가 먼저 광야를 거친 뒤 이스라엘 무리들을 광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광야는 거친 환경과 인공이 없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는 과정을 상징한 것이다. 그것을 더욱 좁히면 햇빛을 보지 않는 동굴이 된다. 원칙상으로 광야에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지도자는 이 절망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된다. 이 절망을 거치지 않고는 사람이 안 된다. 성숙한 신앙인이 안 된다.
모세 인생 전반기 40까지는 애굽 왕족의 신분과 뛰어난 재주와 기백으로 영웅이었다. 아마 그 당대 세계에서 제일의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웅이란 것은 결국 사람을 죽이는 길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광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단군도 압축된 광야인 동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곳에서 자기 자신을 다 내려놓아야 올바르고 성숙한 인간, 지도자가 되는 길을 밝게 되는 것이다. 광야와 동굴은 세상 사람과 절연하는 것이다. 식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을 내어놓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것이 참 인간, 참 신앙인, 참 지도자로 가는 길이다. 일광(日光)을 보지 않는 것은 인간 지혜와 지식을 내려놓는 것을 말함이다. 인간의 지혜란 결국 구원의 지혜는 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런 일광(日光)이 아닌 하나님의 빛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음식이 세상의 음식이 아닌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였다. 반석을 쳐서 터져 나오는 물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고 흘린 피를 예표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는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님과 그 말씀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상징한다. 쑥의 주효용은 약용으로 상처와 병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마늘의 주효용은 강장제다. 그러나 먹기 좋은 음식이 아니다. 이같이 동굴 속에서 먹는 쑥과 마늘은 광야에서 먹는 반석의 물과 하늘 만나와 같은 의미의 음식이다. 반석의 물 같은 쑥을 먹어 원죄와 스스로 지은 모든 허물을 씻었다. 그리하여 마음과 몸의 병을 고쳤다. 병의 궁극적인 근원은 죄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으면 많은 병이 떠난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병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사리의 흐름이다.
만나 같은 마늘을 먹어 하늘의 영양으로 하늘 사람으로 변해갔다. 이 쑥과 마늘은 예수가 흘린 구속의 피와 생명이 되는 그 말씀을 예표한다. 그러나 쑥과 마늘 먹기가 어렵듯이 그 과정이 일반의 인간성으로는 싫고 어렵다. 우리 인간이 본래 가진 성질이 아니고 하늘에서 주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믿는자를 싫어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다. 자연스런 인간의 약점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지나쳐 증오하는 것은 선악나무에 뱀이 붙어 있듯이 그 증오의 감정은 악한 세력에 점령당하였다는 표시다.
기삼칠일(忌三七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곰이 여자로 변신되는 세 조건이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고, 기삼칠일(忌三七日)하는 것이다. 100일의 약속 기간이 있다. 그러므로 기삼칠일(忌三七日)을 삼칠 즉 21일 뒤에 곰이 여자로 변하였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백일의 기간과 모순된다. 즉 21일이라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군신화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없이 풀리는 것이 아니다. 기(忌)란 말은 보통 죽은 사람이나 왕 같은 존엄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 자세를 가리킨다. 존경하되 꺼린다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말이다. 기삼칠일(忌三七日)은 엄청난 비밀이 담긴 말이다. 이스라엘과 한국 고대에서 삼(三)이란 것은 삼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칠(七)이란 것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고 안식하여 복 주신 날을 기념하는 말이다. 칠이란 말은 창조의 과정과 완성을 표시한 말이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안식한 일곱째 날을 기념하는 날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룩히 지킨다. 십계명 전반부인 1~3계명까지의 하나님을 숭배하고, 4계명인 이미 창조를 완성하여 끝낸 것을 기념하는 즉 마음에 새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미 천지 만물은 다 창조된 부족함 없는 창조세계다. 이미 나와 너라는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완성된 완전한 사람이다. 이것을 마음에 꼭 새겨 그 인식이 굳어져 잠재의식까지 변하면 나머지 인간사인 5~10계명은 쉽게 행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을 주시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집하여 지킨 까닭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한 성경 창세기 1장에서는 여섯째 날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고 창조를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안식하였다. 이리하여 이미 창조는 다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다시 창세기 2장의 창조가 필요하다. 창세기 2장의 창조는 1장에서 다 이루어진 그 창조를 인식하고 믿고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비유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존재를 창조하였다는 것이고, 2장의 창조는 1장의 창조를 인식하는 눈이 되어 그런 존재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완성된 창조가 3장에서 선악나무를 감아 있는 뱀의 말에 미혹되어 선악과를 따먹고 사람은 죄를 범하였다. 이리하여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완전한 창조를 잃어버렸다. 싸움에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듯이 사람은 그로부터 마귀의 종이 되었고 삶도 그러한 죄의 삶을 살았다. 이것은 예수 밖의 모든 사람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구주가 필요하다.
복음은 이 실패를 회복하고 처음 창조보다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새 창조를 완성한 것을 말한다. 예수가 복음이다. 예수의 죽음 속에는 실패한 옛 세상, 옛 사람, 죄, 마귀, 사망이 다 포함되어 죽어 무덤 속에 묻혔다. 예수의 부활 속에는 새 세상, 새 사람, 새 생명,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영원한 생명이 다 있다. 이것을 믿으면 다 우리의 것이 된다. 성경 창세기 1장에 있는 모든 사실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창조로 다 있다. 이것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볼 수 있다. 믿으면 다 우리의 것이 된다. 뭐 하나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완벽한 새 창조다. 구약에서의 안식일을 지키듯이 이제는 다 이루신 예수만 바라보면 된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폐지되었고,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안식일이다. 이리하면 성령이 보증이 되고, 믿는 자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길로 인도한다.
복음에도 창조처럼 두 부분이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창조한 첫 세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을 회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가 멸망당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이 실패를 회복하고 새로운 창조를 하는 길 만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사람이 죄를 지어 창조질서를 어기고 팔려 마귀의 종이 되었다. 이런 죄인을 속량하는 데는 오직 죄 한번도 짓지 아니한 인간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이미 죄인이다.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인 선악나무와 그를 주장하는 사단에서 이길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 살면서 죄 한번도 짓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죽어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과 속량제물과 인간 자아란 선악나무와 그 자아를 꾀고 주장하는 사단을 해결해야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는 약속을 인간 원죄장인 창세기 3장부터 “여자의 후손이, 여자가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약속을 줄기차게 하셨고 친히 인간의 아들로 오셨다. 이분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예수님이다. 인류 중에서 유일하게 죄와 관계없는 독특한 출생으로 오셨다.
그리하여 성장하여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하고 죽기까지 죄 한 번도 짓지 않았다. 죄의 뿌리인 자아와 마귀에 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승리한 사람이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였다. 그 순결한 피는 인류의 모든 죄가 용서 받는 속죄의 제물이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모든 구속과 구원을 이루고 새로운 창조가 되었다. 예수 안에 새로운 창조의 모든 사실이 다 있다. 이런 자기 확신으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 요한복음에서 외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 이미 예수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영단번에 이루어진 믿음의 도다. 이미 우리의 새로운 존재와 실상은 바로 예수 안에 있다. 예수가 우리의 실상이다. 우리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새 창조로 완성 되었다.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완전한 사실이다. 이것이 구약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안식일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첫 부분이다.
성경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있은 뒤에 창세기 2장의 창조가 따라 나오듯이, 십계명중 안식일 계명인 4계명 뒤에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을 망라한 5~10계명이 나오듯이 복음에서의 둘째부분이 나온다. 성령이 강림하여 창세기 2장 보다 더 위대한 새 창조인 복음의 실제화를 일으킨다. 이미 예수 안에 다 이루어진 복음을 살아내는 믿음의 실천이 나온다. 그리하여 모든 믿는자 위와 안에 성령이 임재하여 예수 생각과 의지와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바로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예수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삶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믿는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발적인 소원이 일어나고, 유약한 인간성을 이기는 견고한 의지도 생긴다. 자기 자신을 이긴다.
그리하여 땅에 심은 곡식이 익고 결실하면 창고에 거두어들이듯이 성숙한 신앙 인격은 들려 올림 받아 신랑 예수와 공중에서 만나 잔치를 하고 영원한 즐거움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휴거다. 휴거는 반드시 땅에서 신앙 인격이 성숙한 자만이 받게 되는 은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예수를 영단번에 믿는 믿음의 도와 동일하게 중요하다.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그런 연고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 하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믿음 생활에서 실패하면 그 영단번에 이루어진 믿음의 도가 흐려진다. 비유하면 성경 창세기 3장에서 죄를 지은 결과로 창세기 2장의 둘째부분의 창조사실과 창세기 1장의 첫째 부분의 창조가 사라졌다.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6장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란 엄중한 경고가 있다. 반드시 현실에서 신앙생활이 성공해야 되는 이유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 안에 다 이루어진 구원과 새 창조를 변함없이 굳건히 믿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것이 믿음생할의 기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스라엘인들은 그 그림자인 안식일을 거룩히 지켰고, 신시의 한국인은 그 그림자인 기삼칠일(忌三七日)을 지켰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창조를 완성하여 안식을 기념한 7일째를 거룩히 지켰다는 의미가 존경하면서도 꺼린다는 뜻인 기(忌)에서 잘 표현되었다. 축소하면 동굴, 확대하면 광야에서 기삼칠일 즉 안식일 굳게 지키면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 곰이 여자로 변한다. 복음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성령 충만하여 예수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호랑이는 기삼칠일(忌三七日)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곰은 기삼칠일(忌三七日)하여 성공한 것은 삼일 하나님과 이미 다 이루신 그 창조의 완성을 믿고 굳게 지켰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을 굳게 믿은 복음의 예표이다. 기삼칠일(忌三七日)은 이렇게 중요한 말이다.
단군의 인격에서 호랑이와 곰이 같은 굴에 살듯이 하나의 공동체 속에도 호랑이 같은 사람과 곰 같은 사람이 섞여 산다. 지도자로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가? 그 공동체의 운명이 좌우된다. 신시·조선시대의 지도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 구성한 것이 동굴에서 곰이 여자로 변하였다는 신화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지도자를 뽑는 관행이 겉모습에 치중하여 남을 희생하여 자신만 살찌우는 호랑이보다 더 영악한 여우들만 뽑아 구성하였다. 그 까닭으로 부정부패와 양극화가 극심하고,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올라갔다 더 비참하게 내려오는 경제현실이 되었다.
지도자란 자기 자신이라는 아집이 없어야 한다. 그런 아집을 없애려면 대부분 처절한 밑바닥 경험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선된 대통령들도 대부분 산전수전 겪고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수련만 가지고는 선악의 파도가 몰려오는 정치적 현실에서는 금시 밑천이 드러나 이기적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나라와 국민을 손해 끼치는 정치가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신물 나도록 경험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망하든지 변하든지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시·조선시대는 환웅이 지도자를 선발하고 훈련하는 불견일광백일(不見日光百日) 과정이 있었다. 이것이 신시·조선(神市·朝鮮)시대가 오래 계속된 하나의 이유다.
곰이 변하여 여자가 되고, 그 여자가 기도하여 환웅의 아내가 되어 단군왕검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최고봉을 노래한 신화이다. 하나님과 교회의 지극한 사랑을 솔로몬과 술람미에 빙자하여 부른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못지않은 사랑의 노래이다. 신화에 담긴 비유의 실상을 풀어보면 단군의 신앙 인격이 자신을 이긴 사람으로 성숙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잠언에서 말한 인간적인 유혹을 피하고 모든 잠언을 실천하여 현숙한 여인 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유용한 재주를 갖춘 신앙 인격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에 주어지는 책임과 능력이다. 이것은 누차 말하듯이 곰이 변하여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단군의 인격 속에서 육신적인 마음이 제해지고 오직 신앙심이 발전 성장하여 환웅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인격이 되었다는 사실의 신화적 서술이다.
복음서에서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사도가 되는 이치와 같다. 이리하여 환웅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단군은 단군왕검(壇君王儉)이 되었다. 단군은 한국적 대제사장의 명칭이고, 왕검은 왕임금이라는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각국의 왕들보다 상위의 왕인 황제와 같은 의미로서 교황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사역의 본질을 밝힌 말이다. 단군이 거쳐 온 이란고원,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골 그리고 중국에 수많은 형제와 임금들이 있을 것이나 단군으로서 모든 형제와 백성을 마음에 품고 어깨에 메어 기도할 것이고, 왕검으로서 모든 임금들을 단속하고 검속하고 다스려서 그 광대한 영역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둘 것이라는 뜻이 단군왕검(壇君王儉)이다.
그리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했다. 국토는 그 광대한 욕단족의 영역의 일부인 한반도와 만주로 국한했다. 수도는 왕임금이 거주하는 의미인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하나님의 교회인 신시를 둘러싼 호위조직으로서의 왕국인 조선이란 이름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군이 동굴에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새롭게 영접하니 어두운 구름과 안개가 물러난 뒤 환한 해가 빛나고 맑고 밝은 바람이 부는 새로운 세상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열 개의 해와 열 개의 달이 밝게 빛나는 광명천지와 같고, 신선하고 싱싱한 기분으로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을 조회(朝會)하고 예배하는 나라. 홍수 심판 때 고기 같은 방주를 타고 심판을 통과한 은혜와 예수의 속죄를 상징하는 양을 가슴에 품고 죄속함을 받고나니 그 결과로 아름다운 나라. 그러한 의미가 조선(朝鮮)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영향력은 전 동양의 근원적인 문명이 되었다. 각 왕국과 조정을 표시하는 말이 조선의 조(朝)이다. 수많은 문무 관원들이 모여 아침에 임금을 뵙고 정치를 하는 곳이 조정이라는 조선의 의미다. 옛날 동양의 전 영역에서 조선왕국에 바친 예물을 뜻하는 말인 조공(朝貢)이 속국이 종주국에게 예물을 바치는 뜻으로 일반화되었다. 알게 모르게 조선이 동양의 시원인 것을 증거하는 말들이다. 그 전성기는 무려 일천 년에 계속되었다. 나라의 수명을 단군신화에서 1908년이라 한다.
11.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제도와 생활상
팔조금법은 한서 지리지에 고조선의 국법을 소개한 것으로 팔조금법 중
1.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2.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3.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 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세 조목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규원사화에는
1.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
2.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라.
3.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4.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5.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6.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7.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8.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이 같은 팔조금법으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이 팔조금법은 근본이 빠진 부족한 법이다. 땅 위에 하늘이 있듯이 팔조금법은 하늘에 속한 법이 빠졌다. 단군신화의 기삼칠일(忌三七日)을 하늘에 속한 법으로 보고, 팔조금법을 땅에 속한 법으로 여겨 그 실상을 밝힌다. 하늘에 속한 근본법은 삼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둘째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한 날을 기념하는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어찌하여 변개할 수 없는 이미 완성된 불가능의 영역으로 다만 경외하고 믿는 도리 밖에 없다. 그 반대는 불신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군신화에서 기(忌)라는 말로 그 의미를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팔조금법에 이 네 조목을 더한 것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온전한 국법체계일 것이다. 이는 뒤에 나온 이스라엘의 십계명과 거의 비슷하다. 비슷한 것이 당연하다. 한 분 하나님이 동방의 신시·조선(神市·朝鮮)에 계시하고, 서방의 이스라엘에 계시한 그 율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시·조선(神市·朝鮮)의 법체계는 기삼사일(忌三四日)과 팔조금법을 조합하여 십조금법이라 말 할 수 있다. 아래와 같다.
1.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 섬기라.
2.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4.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한 날을 기념하는 안식일을 지키라.
5.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6.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7.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8.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9.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10.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이 십조금법을 지키면 복을 받았고, 이 십조금법을 어기면 화와 저주를 받았다. 율법의 정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한국의 참전계경의 팔조목에 화복이 보응된다는 것도 같은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다. 율법이란 이렇게 엄한 것이다. 성경 신명기 11장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 와 같이 잊을 수 없도록 축복은 그리심산에서 저주는 에발산에서 선포하라는 이벤트를 명하였다.
환웅 하나님이 신시에서 풍백 우사 운사를 통하여 주신 예수의 상징인 신단수, 십조금법으로 대표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도덕체계, 단군이 대제사장되고 3,000무리가 하나의 유기적 조직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체계를 이루었다. 천군(天君)이라는 봉사자들을 보내어 소도(蘇塗)라는 신시의 축소형인 교회를 각 지역에 세웠다. 한반도와 만주는 그 중앙지역이 되고,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이란고원과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범 한국인의 전 영역에 그 교화가 확산되어 갔다. 환웅 하나님을 천왕으로 모신 이 땅에서의 왕국인 조선의 다스림이 단군왕검의 지도력 아래 삼한관경이라는 왕국체계로 확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의 중앙정부가 서울에 있는 것 같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은 한반도와 만주와 몽골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와 이란고원과 중국이라는 광대한 영역에 흩어져 사는 욕단족 즉 광의의 한국인의 단하나의 성전(聖殿)이며 단 하나의 중앙정부이다. 한반도와 만주는 직할 영지이며, 그 나머지의 넓은 지역은 욕단족 각 부족의 생활 터전이라 말할 수 있다.
소도(蘇塗)는 문자적으로 죄를 씻어 소생한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에 잠깐 친구와 부산 명지강에서 붕어낚시를 했었다. 주로 강 수변에 수초가 밀집하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 고기기 쉬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처럼 소도(蘇塗)란 강에 수초가 우거진 곳에 물고기가 사람의 눈을 피하여 쉬면서 떨어져 있는 먹이(禾)를 먹고 정신을 차리는 것을 형용한 것으로 그 당시의 교회인 소도를 잘 형용한 말이라 하겠다. 국어사전에 이렇게 소개한다. “삼한 때에,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聖地). 여기에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나라 안 곳곳에 이에 딸린 신읍을 따로 두고, 신관이 있어 영고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군'이 봉사의 신사를 주재(主宰)하였으며, 이곳은 특히 숭엄(崇嚴)한 성역으로 다루어져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逃亡) 오면 그를 잡아갈 수 없었다.“
소도(蘇塗)는 신시의 가르침과 교화를 펼쳐가는 기관으로 오늘의 교회와 비슷하다. 이스라엘의 도피성과 비슷하다. 그 후 이스라엘인의 회당은 도피성의 전통을 이었을 것이다. 소도와 도피성과 회당과 교회는 근본적인 성질에서 같다. 다만 시대와 문명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레위족은 제사직분을 맡고, 레위족 중에서 아론 가문은 제사장 직분을 맡았다. 제사장 가문인 아론 가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였고, 레위족은 각 지파의 땅 곳곳에 있는 도피성에서 하나님에게 제사 지내어 예배하였다. 그들은 각 지파가 나누어 준 성과 초장을 받아 살았다. 그들의 성을 도피성이 불렀다. 피치 못할 살인을 지은 죄인이 그 성으로 피하여 오면 율법에 따라 ‘피는 피로’ 갚는 원리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형벌에서 보호하였다. 구속을 성취한 예수의 상징이다. 예수 믿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는 그림자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소도가 그러한 뜻을 가진 예배 중심의 성읍이다.
고인돌은 신시와 소도에서 하나님에게 제사지낸 제단이었다. 그 당시에는 흙으로 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고, 혹은 돌로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제단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속죄를 받은 십자가상의 죽음을 상징한다. 지금 발굴되고 있는 고인돌은 신시·조선(神市·朝鮮)에서 사용한 제단과 후세에 사용한 제단과 멋모르고 무덤으로 사용한 돌과 기타의 이유로 사용된 돌이다. 하나님에게 사용한 제단용으로서의 고인돌은 다듬지 않은 돌이다. 그러므로 발견된 고인돌 중에서 제단용의 고인돌을 분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대의 분별을 측정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고인돌이 한곳에 무분별하게 난립되어 발견된 곳은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정상적인 예배는 예배 중심지에 고인돌이 있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므로 한곳의 많은 고인돌은 제단용이 아닌 것이 많이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고인돌 분포도가 한국 땅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한반도가 하나님에게 제사지낸 중심지역이라는 의미다. 신시는 그 당시 세계 유일의 중심제단이었다. 이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과 이스라엘의 영향으로 고인돌은 전 세계로 퍼져갔다.
삼한관경(三韓管境)은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정치적인 다스림을 표시한 말이다. 삼한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 마한은 몽골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와 이란고원 지역, 변한은 중국 지역이다. 국사교과서의 한국고대의 한반도 남단의 삼한은 원래의 광대한 영역에 있었던 삼한이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조선이 멸망되고 난 이후의 쪼그라든 삼한이다. 한(韓)이란 문자를 살펴보면 조(朝)를 가죽으로 둘러싼 형태다. 즉 한이란 것은 조선왕국을 보위하는 정치적 조직이란 뜻이다. 한(韓)은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때에 군장(君長)을 이르던 말이라 사전에 기록하고 있다. 몽골의 칸은 이에서 나온 말이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왕을 겸한 이름이지만 단군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고 있는 것은 단군이 왕보다 제사장 직무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삼한으로 나누어 그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였다.
진한의 진(辰)은 별, 아침, 동방, 천자 등의 뜻으로 신시·조선의 영역인 한반도와 만주지역이다. 마한의 마(馬)는 말이 살찌고 달리기 좋은 광대한 초원지역인 몽골을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와 이란고원 지역이다. 변한의 변(弁)은 모자를 쓴 계급적인 구별이 있는 뜻으로 중국의 황하를 개척하기 위해서 군대조직과 같은 조직을 결성하여 황하를 다스리면서 중국을 개척한 중국 지역을 가리킨 말이다. 그러므로 전제적인 국가조직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이 영향력을 잃은 뒤 중국이 신시·조선(神市·朝鮮)에서 분리 독립하여 중화제국을 일으킨 큰 까닭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삼한이라는 광대한 영역에 교회는 단 하나의 신시이며 국가는 단 하나의 조선이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국토는 이스라엘의 국토와 같이 일정하다. 조선의 국토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이다. 그 외 넓은 동양 지역은 욕단인 단군의 각 부족의 땅이 된다. 이란 고원에 한 아들 부족이 살았을 것이고,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와 몽골을 지날 때 또 몇 아들로 이루어진 부족들이 머물러 살았을 것이다. 욕단인 요가 만주요하 지역에서 태백산으로 이주할 때 순(舜)을 중심으로 또 한 부족이 남았을 것이다. 중국을 개척하기 위하여 우 중심인 곤의 일족이 보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광대한 영역에서 단군왕검의 정치적 다스림이 삼한관경이다. 삼한이란 말은 그 넓은 지역을 분할하하여 다스렸다는 의미이며, 조선문명을 가죽으로 싼 것같이 부드럽게 영향력을 발산하라는 뜻이다.
관경(管境)이라는 말로 다스림과 관리원칙을 밝히고 있다. 관(管)이란 문자는 관리한다는 뜻 위에 대나무를 두고 있는 글자다. 대나무란 올바른 관료의 자세와 다스림을 상징한다. 대나무는 외형이 쪽 곧다. 안이 비었다. 마디마디가 있어 전체를 지탱한다. 겉은 굳세다. 움직임이 유연하다. 이처럼 삼한관경의 다스림은 곧고, 안으로 자신이란 아집을 버리고, 마디처럼 조직을 지탱하는 중심이 되고, 굳세어 백성을 보호하고, 외부적인 영향에 유연히 대처하는 지혜로 다스렸다. 관경의 경(境)이란 문자는 땅의 중심이 아닌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 백성의 소유와 활동을 간섭치 않고 지켜주는 의미다. 누가 이런 관리자와 다스림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조선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몽골에서는 임금을 한(韓)과 동의어인 칸으로 부른다. 한국인은 대대로 조선과 한국이라는 말을 귀중히 여긴다. 중국에도 한(韓)으로 표시하는 나라가 있었고, 아마 중국 자신을 가리키는 한(漢)도 한(韓)을 선망한 관계로 지은 동음이어일 것이다.
문자는 말과 달리 직접소통과 기억이 선명하여 오래가는 세상에서는 별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거의 900세 까지 살았던 홍수 심판 이전의 세상에는 아마 문자가 없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홍수 이후의 세상에서는 그 심판의 영향으로 현저히 단축된 수명과 기억력의 쇠퇴와 거짓말이 횡행하는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문자의 창조가 절실했을 것이다. 어떤 발명보다 문자의 창조가 어렵다. 문자의 창조의 순서가 그림문자로 시작되고 소리글자로 발전된다. 글이 가장 필요한 곳은 종교와 권력의 중심지일 것이다. 먼 곳에 교화를 펼쳐나가고 정치적 명령에 가장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문은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에 한국인이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 전설에서는 복희씨의 신하 창힐이 만들었더라 한다. 복희씨는 노아인 풍백을 가리키는 중국말이다. 한문에는 하나님을 믿는 성경적인 요소가 많다. 보일시(示)는 삼일 하나님이 하늘 위에서 내려 오심을 형용한 글자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관계되는 여러 문자에 이 보일시(示)가 들어있다. 옳다는 의(義)는 나라는 사람 위에 양이 있는 그림으로 양을 잡아 속죄하여 용서받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그림이다. 배를 뜻하는 선(船)은 여덟 식구가 배를 타고 홍수 심판을 넘었다는 글이다.
한문의 발음도 한국인이 가장 정확하게 발음한다. 한 글자 한 음절로 발음하는 것은 한국인뿐이다. 예를 들어 중공의 수도 북경(北京)을 중국인은 그 발음 기호대로 북경으로 발음하지 못하고 베이징이라 발음한다. 일본인도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다. 김치를 기무치라 발음한다. 한국인이 초성과 중성과 종성으로 조화된 발음을 가장 잘 낸다. 한글은 그러한 한국인의 말과 소리를 잘 표현한 글자다. 그러나 한문은 인간의 자연스런 소리에 대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에 관한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글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동방 욕단족의 언어가 혼잡되어 언어의 다름을 따라 분열되었을 때도 소리에 기반한 문자가 아니라 사물에 기반한 문자이기 때문에 언어가 달라져도 그 해석과 사용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자는 고대 전 동방족의 첫 글자로 사용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한문을 사용했다. 그림글자 즉 한문 같은 뜻글자는 인간의 모든 말을 표시하기는 어렵다. 한글은 말과 발음을 표현치 못하는 것이 없다. 앞으로 머잖아 한글이 전 세계의 표준문자가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연고로 한문은 무려 5만자가 넘는다. 원래 한문은 보조 기능으로 만들어진 글자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언어정책은 한글이 주가 되고 한자는 보조가 되는 온전한 정책을 취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국어다. 말이란 소리와 사물의 양쪽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수많은 한자 중에서 필요한 한자를 선정하여 교육함이 좋을 것이다. 한자는 말의 소리를 담는 글이 아닌 까닭에 한국인은 한문을 이두화하여 말을 표시하였고, 나아가 세계 제일의 문자인 소리글자 한글을 만들었다. 일본인은 한자 일부의 핵을 빌려 그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인은 한문을 계속 사용하였다. 그 계속된 한문 사용으로 인하여 한문으로 된 고대문화의 축적과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렸다. 그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 이후 동양에서의 주도적인 문화 건설에 많은 공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한문은 중국인의 문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문을 중국의 문자로 장기간 사용한 결과 말과 글이 달라서 오는 손해가 작지않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문맹이 많다. 문자로 하는 의사소통이 불편하다. 문화 발전에 많은 장애가 된다.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한자를 간자체 등으로 소리글자 화하는 노력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언어로 말미암아 앞으로 문명창조와 전파와 누림이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이 가장 유리할 것이다. 일본은 그다음이 될 것이고, 중국이 가장 뒤질 것이다. 사람은 말이고, 말은 글이다. 그러므로 국력은 글의 우수함과 그 글에 저장된 문화의 질과 양에 좌우된다.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소리글자로 우수한 글자이면서 사용한 기간도 수세기가 넘는다. 그만큼 쌓여진 문화저장량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영어권이 세계를 리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영어의 우수성과 쌓여진 문화저장량에 따른 결과라 볼 수 있다. 중국은 한문을 계속하여 사용한 관계로 그 축적된 문화역량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근대까지 동양문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한문으로 축적된 문화역량은 그 시효가 끝났다. 지금 공자왈 맹자왈 하는 시효가 지난 그 문화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간자체 등으로 한문의 간소화와 새로운 문자를 실험하고 있다. 아마 일본 같은 그러한 종류의 글자를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적 문맹의 해결과 의사소통의 목적은 이룰 수 있어도 문화의 축적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은 오랫동안 후진국의 수준에 머물 것이다. 언어의 효력은 단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한자의 핵을 빌려서 저들만의 문자를 만들었다. 만요가나에서 히라가나로 또 가타가나로 발전했다. 벌써 1000년이 넘었다. 그러므로 그 문화의 축적이 100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러한 까닭으로 일본은 근대에서 중국과 한국을 정복하는 등 동양 제일의 문화와 실력을 쌓았다. 그 언어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한국인의 세기다. 한글을 창제한지 500년이 넘었고, 한글사용이 100년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한글로 문화축적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한글로 된 옥편과 언어사전과 문화사전이 이미 세계 제일에 도달한 것이 있다. 우수한 글자와 쌓은 문화역량으로 이제는 언어면에서 볼 때에 세계 제일로 갈 수 있는 준비는 어느 정도 되었다. 여기에 한국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사람이 변화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정치공동체만 건설할 수 있다면 앞으로는 한국주도의 세계체제가 될 것이다. 확언할 수 있다.
드디어 신시·조선(神市·朝鮮)의 문명권에도 말이 혼잡해졌다. 원래 인간의 말과 언어는 하나였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 자신을 높이면 언어가 혼잡해지고 공동체는 찢어진다. 그 찢어진 언어가 하나로 회복된 사건이 아주 잠깐이지만 성경 사도행전 2장에서의 오순절에 성령 강림 후에 일어났다. 인류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믿고 성령충만할 때 인간의 언어는 다시 하나로 회복될 것이다. 바벨 심판 전에 욕단족은 동방으로 이주했다. 그러므로 욕단족이 하나의 언어로 말하는 시간이 서방보다는 훨씬 길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욕단족이 하나님 모시기를 등한히 하고 자기만 바라보고 일문 일신의 이익과 안일을 추구할 때 언어는 혼잡해져 쪼개지고 공동체는 찢어졌다. 이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도 저물어 갔다.
현존하는 언어 중에서 한국말과 이스라엘말이 바벨 심판 전의 그 하나인 언어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언어이리라 추정한다. 그 바벨 심판 이전의 원래 언어 즉 욕단족인 단군족이 죄지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기 전의 그 언어를 잃어버린 결과가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중요한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원래의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 세계의 문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에서 바벨 심판 후에 하나님이 벨렉 후손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다시 임재하시고 계시하지 않았다면 벨렉계열의 민족들도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성경적인 역사와 기억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다시 임재하심이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 되었고. 모세에 임한 강력한 계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한국민족에게는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었다. 그것이 한민족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역사적 사실과 기억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이유다. 그 이후 실패와 좌절과 축소를 거쳐서 사대주의로 중국을 섬겼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미국에 종속당하여 미국과의 일체화를 추구하는 한미FTA를 구걸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성경에서 하나의 종족이 여러 민족으로 나뉘고, 여러 나라로 나뉘는 이유로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로 꼽고 있다. 여러 민족이 나뉘고 여러 나라로 나뉘지는 가장 큰 요소가 혈연이고, 그 다음은 언어가 달라지면 나뉘지고, 그 다음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서 나뉘어지고, 최후로 나뉘어지는 것은 정치적 동기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과 북한은 혈연도 같고 언어도 같고 지역도 같지만 정치적 이념으로 분리되었다. 잘못하면 남한에서 동서로 나뉘고, 극심한 양극화로 부자와 서민으로 나뉘어 망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로 광대한 지역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동일한 종족의식을 가졌던 범 한국인은 각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나라로 쪼개어져 나갔다. 만주 동북부에 살았던 읍루는 언어가 달라져 주위의 한국인과 싸우다가 끝내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은 한반도와 만주에서 살았던 동일한 우리 민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읍루와 같이 언어가 달라져 같이 살 수 없어 일본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와 단군시대에 일어난 민족 대이동의 관성에 따라서 바다를 건너 남북의 아메리카 땅으로 이주해간 인디언도 언어가 달라진 우리 민족이었을 것이다.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도 있을 것이다. 핀란드 헝가리 등…….
모든 재산 중에서 토지는 근본이다. 인간은 몸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토지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기본권이다. 신체가 없는 사람이 없듯이 토지 없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법이다. 그러므로 경제법 중에서 토지법은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하여 결과적으로 이웃을 가난케 한 사람의 죄를 엄중히 꾸중하고 경계하고 있다. 성경에서의 부자란 이런 공평한 토지 소유 위에서 하나님을 잘 섬겨서 축복받고 좋은 아이디어와 열심히 일하여 그 결과로 부자 되는 것만 인정한다. 이러한 원리로 일한 아브라함은 그 당시의 나라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부자는 이렇게 되는 것이 양심의 가책도 없고, 이웃에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토지법을 위반하여 된 탈취적 부자들이다. 대한민국의 부자는 더 심하다. 그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그 관리인들과 고급 지식인들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기득권이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국민과 서민이 사용하는 국민이란 뜻도 다르다. 의사소통도 드디어 정부와 기득권이 헌재를 앞세워 종부세를 무너뜨리고 이자를 붙여 그것도 급속히 시행하는 환급금 등으로 말미암아 그 단절이 극심하여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듯하다. 기득권 체제의 마지막 버팀돌인 조세의 공평성을 무너뜨리고 그 자그마한 이익을 붙잡고 좋아하는 어리석은 한국의 기득권이 연민스럽다. 그 어이없음에 분노보다 불쌍한 감정이 먼저 든다. 전 정권에 대한 복수를 이루었다하여 환호하는 그 어리석음이 가엾다. 종부세는 전임 정권이 과도한 세금을 매긴 점과 일가구 일주택의 거주목적으로 소유한 사람에게는 세금폭탄일 수 있지만 부동산 투기로 날을 새는 대한민국의 여건상 필요한 법이다. 그러므로 공정하게 고치고, 세금 폭탄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아직 없애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도 헌재에서. 영국왕실이 자신의 기득권을 희생한 명예혁명으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반면에 무능과 탐욕의 극한으로 달리던 이조의 왕족과 양반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이 한국의 기득권은 사라질 것이다. 토지법의 문란은 반드시 혁명을 부른다.
오늘 시대에 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는 불공정한 토지법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토지법을 성경에 기록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실천하였다. 서방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 이스라엘이다. 이 토지법이 시행될 때의 이스라엘은 인권이 확립되었고, 거지와 도둑과 창녀가 없는 나라였다. 광야와 서쪽으로 지중해변에 이르기까지 동북쪽으로는 유브라데스강까지 그들의 영토로 주셨다. 가나안인과 헷족속이 점령한 그 땅을 하나님을 의지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인과 헷족속과 전쟁하여 승리하여 얻었다. 그 싸움의 분량이 여호수아는 지도자인 관계로 그 전 지역의 주권과 싸워 승리하였고, 각 지파는 지파의 몫으로 정한 땅에 나아가 전쟁하여 승리하여 차지하였다. 그 부족과 가문은 그들의 분량만큼 노력하여 차지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취하는 방법이다. 오늘 땅이 없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하여 여호수아 같이, 각 지파 같이, 각 가문과 개인 같이 주어진 분량대로 싸워 이겨 차지해야 한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의 토지법도 이와 같은 원리로 개척되어 각 부족과 가문과 개인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을 모방하여 건설된 중국 주나라의 토지법이 정전법(井田法)으로 이 토지법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신시·조선(神市·朝鮮)의 토지법은 이스라엘과 같은 토지법이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이승만 시대에 농지를 농부들에 나누어준 농지법의 개혁이 없었다면 6·25 때 북한에 져서 공산화 되어 비참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이 하나님이 정하신 토지법을 지킨다면 경제는 발전하고 공동체 의식은 더욱 강화되고 윤리가 바로 서는 세계 제일의 나라가 될 것이다. 확언할 수 있다. 영국임차 시절의 홍콩은 이와 비슷한 제도로 전 시민이 잘 살았다. 이러한 제도를 지킨다면 시집장가 못 가는 일이 없고. 거지가 없고, 도둑이 없고, 창녀가 없다. 이리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12. 신시·조선(神市·朝鮮)의 멸망
신시·조선(神市·朝鮮) 초기 시대에는 이란고원과 우랄산맥을 서방과 동방을 나누는 기준선으로 삼고 볼 때 서방은 바벨탑 심판으로 언어가 혼잡해져 각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나라로 쪼개어져 시날평지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과 아프리카와 동쪽으로는 인도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거주하였다. 이란고원부터 우랄산맥 이동의 광대한 동쪽영역에는 욕단족이 지역에 따라 부족단위로 모여 살았다. 서방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 우상숭배와 거짓말과 폭력과 탈취가 판치는 어두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방은 하나님의 임재와 노아 셈 셀라인 풍백 우사 운사와 욕단인 요단군의 지도로 일대 문명을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전 지역의 주민이 배가 불러 땅을 치고 배를 두드리면서 격양가(擊壤歌)를 불러 태평성대를 노래하였다. 나아가 한반도 태백산에는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그 당시 유일한 교회·왕국(敎會·王國)이 건설되어 해가 10개 달이 10개가 있어 빛나듯이 환한 광명천지가 되었다. 그 당시 유일한 고봉문명이었다.
역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명하는 역사1기 고봉문명과 그 문명의 멸망과 해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역사1기 골짜기문명으로 세속화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생으로 오셔 말씀이 성육신된 것을 믿는 복음시대의 역사2기 고봉문명이 2000년 전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사도시대 교부시대 가톨릭교회시대를 거쳐 로마가톨릭교회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역사2기 고봉문명 말기에 유럽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거쳐 역사2기 세속문명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이 패권을 차지한 현재의 세계체제까지 왔다. 이것이 역사2기 골짜기문명이다. 그러나 미국주도의 이 세계체제는 지금 무너지는 중이다. 이 세속문화가 극한까지 발전하고 타락하여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이 체제를 인류와 지구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역사3기 고봉문명이 건설될 것이다. 역사3기의 고봉문명은 먼저 전 세계적으로 격양가를 부르는 평화의 세상을 건설할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 충만하여 예수의 삶을 바로 이 땅에서 그대로 살아낼 것이고, 그 결과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한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성전이 건설될 것이다.
이처럼 고봉과 골짜기, 신성과 세속으로 돌고 돌면서 역사3기까지 발전한다. 그 후 천년왕국 시대가 되어 이 땅에서 신앙인격이 성숙하여 들림 받은 인격은 죽음이 다시 없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다스리는 직분을 맡을 것이다. 그 나머지 전 인류는 천년왕국에 모여 최종으로 인류라는 곡식이 익어 결실하여 창고인 천국에 나아가거나 예수를 불신한 결과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가 되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타거나 둘 중의 하나로 결정될 것이다. 그 전까지 역사는 달도 차면 기우고 밤이 가면 낮이 오듯이 돌고 돈다. 돌고 돌면서 앞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신시·조선(神市·朝鮮)의 마지막 단락이 어지럽다. 주나라 호왕이 나오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나오고, 수도가 몇 번이나 이전되고, 단군이 이리저리 옮기고, 숨고, 1500년 만에 나라를 잃고, 1908년 만에 죽었다.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역사1기 동방 고봉문명의 멸망과 해체의 기록이다.
고대의 역사를 개관하면, 역사1기 서방 고봉문명인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서방 권과 동방 고봉문명인 신시·조선(神市·朝鮮)을 중심으로 한 동방 권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고봉문명이 멸망한 뒤 그 인문적 반영으로서의 역사1기 골짜기문명 지역은 서방 권에서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시날평지(메소포타미아)를 중심한 중동지역과 유럽지역과 인도지역이다. 동방 권에서도 세 지역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한반도 및 만주지역과 중국지역과 몽골을 중심으로 한 초원지역이다. 서방과 동방이 만나는 교차지역으로서 동방 권인 이란지역과 서방 권인 이란 북부의 스키타이지역을 더 구별할 수 있다. 서방에서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 하나의 인류가족이 바벨 심판결과 언어의 혼잡으로 여러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나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그 언어가 언제 나누어졌는지? 서방과 같이 일시적으로 나누어졌는지? 아니면 여러 민족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 시간이 서로 다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가족의 나뉨의 결정적 계기는 언어의 혼잡이다.
그러나 추정할 수 있는 간접적인 근거자료는 있다. 인류가 타락하여 언어가 갈라진 사례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를 잘 믿을 때 혼잡 된 그 언어가 하나로 회복된 사례가 성경에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바벨에서 하나인 언어가 일시적으로 혼잡 될 때와 같이 성경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일시적으로 언어가 하나로 회복되었다. 또 하나의 예는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방언통역이 있다. 이 방언의 은사는 일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믿음의 분량 따라 주시는 성령의 주권적 은사다. 방언은 결국 언어가 다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로 나아간다. 그 받는 시간은 방언 받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처럼 동방에서 언어의 혼잡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전 욕단족의 부족마다 다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부족이 어느 시점에 언어가 달라져서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졌을까? 어떤 나라가 가장 먼저 언어가 달라졌을까? 어떤 민족이 가장 늦게 언어가 달라졌을까? 이를 증거하는 역사적 사실은 언어가 혼잡하면 그 공동체가 찢어져 수많은 나라로 나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또 어떤 지역의 어떤 민족이 역사1기 골짜기문명을 일으킨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신시·조선(神市·朝鮮)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보는 마음의 강도와 시간적인 양과 매사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하는 것이 줄어짐에 따라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 영향력이 줄어드는 정도에 따라 동방의 광대한 영역에 살고 있는 많은 부족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타락장인 성경 창세기 3장과 같이 생명나무인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선악을알게하는나무인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마음과 생활과 인간관계가 타락되었다. 그리하여 하나인 본래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혼잡 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이라는 공동체와 욕단 종족의 일체감에서 멀어져 갔다. 언어의 불통에 따라 서로 헤어진 민족이 되어 남남이 되어갔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서로 남남이 되고, 서로 야만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가 서로 언어가 다른 민족을 짱깨, 중국땟놈, 양놈, 짐승 같은 황인종, 오랑캐, 흉노, 북적, 남만, 서융, 동이, 조센징, 왜놈이라 욕하게 되는 것이다.
동방 권에서는 이란고원에서 살던 페르시아 민족이 가장 먼저 언어가 혼잡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이 있는 한반도와는 가장 먼 지역이고, 주위의 민족들이 서방 권에 속한 불신민족들이고, 메대는 여러 민족이라는 말로 공동체가 찢어져 많은 나라로 나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장 먼저 역사1기 골짜기 문명을 건설하였다.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는 마호메트와 최제우 같이 신비적인 체험을 하였다.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와 동학은 유일신 신봉의 외형은 갖추었으나 하나님의 임재는 없다. 교주들은 신비적인 체험과 천사들의 계시가 있다. 그러나 기적은 없다. 생명은 없다. 이것이 인본적 일신교의 특색이다. 엄격히 말하면 구원의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외형만이라도 강력한 힘이 있다. 마호메트교는 사라세제국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민족은 정치적으로 메대·바사라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여 그 당시 세계 중심지역을 다 정복하였다. 고레스는 메대·바사의 건설자로 성경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켰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케 했다. 고레스와 메대·바사는 오늘 한국에서 일어날 역사3기 고봉문명 건설과 전 세계 평화 공동체 건설과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가 충만한 인간으로 구성된 성전을 건설할 예표다.
그다음은 중국지역에서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다. 중국지역은 한반도의 신시·조선(神市·朝鮮)과 인접한 지역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받고, 변한이라는 삼한관경의 부드러운 간접통치를 받은 지역이다. 그러나 황하 개척은 강력한 왕권이 요청되었다. 강력한 왕권은 그 타락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우(禹)의 하(夏)왕국이다. 타락하여 탕(湯)의 은(殷)왕조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은나라는 점점 하나님 경외함을 잃고 미신과 복술에 빠져갔다. 갑골문자는 그러한 타락의 증거일 것이다. 그 말기에 주라는 폭군이 일어나 미신과 무당숭배와 주지육림의 극한에 빠져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다. 중국지역의 모든 민심도 떠났다. 한국인이었던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워 주문왕을 기다렸다는 것은 그 민심이반의 단적인 상징이다. 주문왕, 주무왕, 주공으로 대표된 그 가문은 불세출의 영웅 가문이었다. 그리하여 강태공의 힘을 빌려 은왕조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을 모방하고 도전하여 인본주의적 주문화(周文化)를 완성했다.
주나라는 바벨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하나님을 배도한 바벨문화를 가지고 신시·조선(神市·朝鮮)시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은나라 변경인 장안으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러나 중국을 위시한 전 동방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벨문화를 조심스럽게 숨기고 신시·조선(神市·朝鮮) 문화를 배웠고, 도전했고, 변형했다. 그리하여 주왕국은 한국인이 개척한 중국지역에 있어서 트로이 목마의 역할을 다했다. 신시·조선(神市·朝鮮) 고봉문명을 은연중에 바벨론적 인본문명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가문에서 자기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리하여 중국지역의 한국인은 주나라의 이단을 받아들였다. 소도에서 하나님에게 제사지내고 봉사하던 천군(天君) 대신에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직분으로 유가(儒家)를 새로 만들었다. 이것이 유학의 원형이다. 공자는 그 유가의 상징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던 신앙을 다 잃었다. 그 결과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다. 결정적으로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과 절연되었다. 그 결과로 중국지역의 공동체가 찢어져 수백 년 동안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그 난세를 잠재우고 평화를 건설하고자 몸부림친 것이 공자로 대표되는 제자백가쟁명의 사상이다. 공자는 인문적인 입장에서 주나라를 계승하여 고대의 사상을 종합하였다. 모든 인문사상은 하나님이 없는 도덕을 세우고, 정치적으로 평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 임재 없인 진정한 도덕과 평화 건설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자는 14년 동안 늙은 몸을 끌고 철환천하했으나 실패했다. 공자는 한국남성과 중국여성의 혼혈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으로서 후회가 없을 수 없다. “나는 은나라의 후인이나 주를 따르겠다.” 또 존주양이설을 제창하여 이단인 주나라를 존주(尊周)라 하여 높이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시·조선(神市·朝鮮)과 그 주위의 민족들을 양이(攘夷)라 하여 의도적으로 비하했다. 그런 역사관을 담은 춘추를 짓고 나서 “나를 칭찬할 이도 춘추로 말미암고, 나를 벌주는 이도 춘추로 말미암을 것이다.” 공자는 신시·조선(神市·朝鮮)에 큰 죄를 지은 죄인이며, 민족의 반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으로 신시·조선(神市·朝鮮)문명이 해체되어가는 시점에 골짜기문명의 중요한 기둥인 인문적 사상을 완성하여 중국인의 상징이 되었고, 세계적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학문적 결과인 유학이 동양을 2000년 동안이나 움직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은 의지할 곳 없어서 때론 불교, 때론 도교, 때론 사이비에 몸을 맡겼다. 이것이 중국지역의 역사1기 골짜기문명의 인문사상이다.
그 정치제국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여 군국화에 성공한 진이 차지하였다. 진시황의 진을 거쳐 한나라가 건설되어 한무제의 한제국으로 완성되었다. 한무제의 한제국(漢帝國)은 내면은 냉혹한 법가사상과 외면은 의사종교인 동중서의 유학을 입혔다. 이것이 집권 왕조의 철학과 종교이다. 한무제는 신시·조선(神市·朝鮮)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남월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북쪽으론 몽골 초원지대의 패자인 흉노를 압박하여 한 구석으로 몰아넣어 동방의 패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한제국은 그 후 2000년간 계속된 중화제국의 원형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제국으로 뻗어간 한나라는 역사적으로도 중국역사의 원형을 만들었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의 구조가 동양 역사의 화강암과 같은 기본 틀이 되었다. 이후의 모든 역사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자의 인문사상과 한무제의 한제국으로 상징되는 제국과 역사서가 중국의 세 기둥인데 그중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것은 어쩌면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일지 모른다. 사기는 시간상으로 동양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질과 양과 구성과 내용이 갖추어진 정사이며 그 문장이 천고의 명문인 까닭일 것이다.
원래의 중국은 한국인이 개척한 지역으로 오늘의 미국과 같이 많은 이민이 몰려와 대국이 되었다. 핵심민족은 한국인과 바벨인인 중국인이다. 모세의 지도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중동에서 일부 민족의 이동이 있었다. 그때 중국에 건너온 바벨인이 지금 중국민족의 조상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인 “여호와”를 계시로 밝히기까진 어떤 민족도 그 이름을 몰랐다. 그러므로 신시·조선(神市·朝鮮)에서도 몰랐다. 그러나 중국에는 흙으로 사람을 창조한 여와란 전설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았다는 증거다. 이 여와를 극심한 불경으로 더러운 모양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모세 이후에 중국으로 이주해온 바벨인이란 단적인 증거다. 그리고 중국인의 심벌은 용으로 이 용은 마귀의 상징으로 바벨론의 심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죄를 지은 바벨인인 중국인은 저주를 받아 비록 한국인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중국을 차지하였으나 한 번도 행복한 시대가 없었다. 그 심령에 악한 세력이 있어 부정부패와 거짓과 혼란과 억압이 관습이 되었다. 그 결과 재주와 능력이 부족한 민족이 되었다. 공산화로 그 심령과 땅은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 회개하지 않고는 중국인의 행복은 없다.
그러한 일면으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중국의 역사를 변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영웅인 니므롯을 황제(黃帝)라 이름 짓고 중국 땅에서 저들의 조상으로 세워 원주민으로 위장 하였다. 중국으로 이주해왔을 때가 대략 기원전 1300년경일 것이다. 그전에 활약한 사람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인 요순과 하나라와 은나라를 황제(黃帝)의 족보 밑에 우겨넣어 그들의 민족으로 변장시켰다. 그러므로 사기를 읽어보면 사마천이 당대에 역사의 실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주고받는 협상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 사례의 하나는 순은 동이인으로 인정하고, 한국인인 요는 중국인으로 변개하였다. 이것은 싸움에서 살을 주고 뼈를 꺾는 원리와 비슷하다. 중국인의 전형인 유방의 강적인 항우를 보고 놀라 순과 같이 눈동자가 겹쳐있는 중동이라면서 그 격렬한 기백과 재주와 갑작스런 성공의 까닭은 혹시 동이인이라서 그런가? 의문을 표시하는 구절도 있다. 항우는 한국 사람이다. 중국인은 정치에 능하고 한국인은 무력에 능하다. 다만, 범 한국인의 중심지인 한반도는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유전으로 종교력이 특장이다. 오늘에도 양국이 싸운다면 한국이 이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해가 주무대인 세상에서는 끝에가서 생명을 건 무력보다 사기꾼 같은 협상에 능한 정치가 이길 때가 많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저들 외는 다 오랑캐와 야만이라 이름 지어 동북공정의 원조가 되었다.
몽골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원지대는 로마제국의 내해인 지중해같이 유라시아 대륙의 내해이다. 이 지역은 한곳에 정착하여 살긴 힘이 든다. 계절 따라 목초를 찾아 이동해야만 살 수 있다. 일교차가 심하다. 그런 가혹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먹고살기 바빠 문화를 육성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자연환경을 넘어서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크다. 중동의 사막지대와 비슷한 환경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핵심이다. 욕단족의 몇 부족이 머물러 시작된 초원 생활은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로운 인화로 환경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삼한관경의 마한의 정치체제로 조선의 다스림 안에 있었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종주권 안에서 필요한 물자의 교환으로 부족함 없는 생활이었다. 이란고원과 한반도를 잇는 긴 초원에 말을 이용한 역참으로 그 넓은 동방 권의 교통로가 되었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그들도 타락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흐려졌다. 이리하여 이들의 언어도 혼잡해졌다. 갑자기 동호, 월지, 흉노, 선비, 오환 등 많은 부족이 나타나는 것은 초원지역에 하나의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공동체가 찢어져 분열된 증거의 하나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기울어 갔고, 그 정통신앙이 샤머니즘화 되어갔다. 조그마한 소부족 단위로 생활하다 보니 직접소통으로 생활하는 사회였고, 인공이 거의 없어 새로운 단어가 필요 없었다. 글이 필요 없는 사회다. 이것이 초원지대의 골짜기문명이다. 초원지대의 최초의 제국은 흉노제국이다. 이 흉노제국은 중국의 진한제국보다 무력이 강하여 그들을 침략하여 승리하였다. 한무제가 나타나기까지 중국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져 중국을 부끄럽게 하였다. 중국인은 이들을 흉노(匈奴), 흉측스럽고 시끄러운 노예라는 이름으로 모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불렀을까? 서양에서 이들을 훈족이라 부른다. 아마 이 훈이라는 말은 한(韓)이 변성된 발음일 것이다. 즉 한이다. 조선을 감싼 한이다. 한이 민족명으로 훈이 되고 왕의 이름으로 칸이 되었다. 그들은 중국과는 싸웠으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사는 한국인에게는 깊은 친밀과 우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싸움을 피하였다. 후세의 칭기즈칸의 몽골은 고려를 솔롱고스라 부르면서 귀히 여겼다. 신시·조선이 무너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같은 종족이란 동질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적인 인문사상에 물들어진 한반도보다 단순한 생활을 한 몽골지역이 그 의식을 더 오래 간직하였다.
동방의 중심지역인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신시·조선(神市·朝鮮)과 서방의 이스라엘 왕국과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가 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것에 있다. 이것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역사1기 고봉문명에서 역사2기 고봉문명으로 나아가고, 역사3기 고봉문명을 건설한 뒤 천년왕국 시대를 열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완성까지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진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멈춘 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인간적 목적을 추구하기 쉽다. 이것이 고봉문명이 해체되어 멸망하고 골짜기문명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도 활용하여 역사의 진전이 되게 하신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차지한 뒤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 이는 그만큼 신시·조선(神市·朝鮮)이 약해져 주무왕이 조선을 도모하겠다는 의도를 반영하는 사건이다.
그리하여 단군이 대응한 사실을 단군이 이에 장당경에 이주하였다(壇君乃移於藏唐京). 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통 이렇게 해석한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단군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밑에 있는 장당경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틀렸다. 장당경은 황해도 구월산이 아니다. 장당경은 욕단인 요단군이 태백산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만주 요하지역에서 동방의 천하를 다스린 제일차 수도였다. 장당경의 장(藏)은 감추어지고 숨겨진, 당(唐)은 중국에서 요를 상징하는 별칭이다. 그러므로 장당경은 구월산의 밑에 있는 곳이 아니라 요가 태백산으로 이주하기 전의 수도이름이다. 태백산으로 이주한 뒤에는 한반도의 왕검성이 신시·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전 동방의 수도가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요가 정치적 태평성대를 이룬 첫 중심지 당경(唐京)은 숨겨지고 감추어진 옛 요임금의 수도였다는 뜻으로 장당경이란 이름으로 불러졌다.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세울 때 단군은 한반도 구월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옛날 요가 천하의 제왕으로 통치한 만주 요하의 당경으로 이주하여 그 역사의 시원을 깨우쳐줌과 동시에 신시·조선이 전 동방의 종주국이라는 것을 시위하고 보여주었다. 이리하여 주무왕의 도모는 좌절되었고. 기자는 조선에 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기자조선은 실질이 없는 명칭만의 기자조선이다.
그러나 그 후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신시·조선의 조선왕국은 멸망하고 위만조선으로 대체되었다. 다만, 신시의 단군이라는 제사장직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위만이 대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위만조선은 신시와 단군의 제사장직을 보호하였다. 이것이 단군신화에서 후에 단군은 장당경에서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다(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라는 기록이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한무제가 보낸 장군들에 의하여 BC 108년 우거왕(右渠王)이 살해되고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이리하여 신시·조선(神市·朝鮮)이 멸망되었다. 한무제는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중심지역인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갑자기 만주와 한반도에 수많은 부족의 이름이 나온다. 이는 신시·조선(神市·朝鮮) 지역에 언어의 혼잡이 일어난 뒤 나타난 결과이다. 서방에서는 이스라엘 왕국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망하였고, 동방에서는 신시·조선(神市·朝鮮)이 한제국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그리하여 역사1기 고봉문명이 서방과 동방에서 사라졌다.
한반도 만주 지역에 살았던 한국인은 역사1기 골짜기문명을 건설하지 못하였다. 아마 역사1기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의 광명이 너무 커서 감히 골짜기 문명은 만들지 못하였을까? 아님 역사1기 고봉문명 건설에 힘을 다 소진하여 남은 에너지가 없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한 뒤에 타락하면 힘을 못 쓴다. 이것이 한국이 그 이후부터 계속 실패하고, 좌절하고, 축소당하고, 식민지가 되고, 미국에 종속당한 오늘까지의 이유일 것이다. 또 중요한 원인은 중국지역의 골짜기문명 제국인 한나라에 정복당한 것이다. 싸움에서 패하면 그 종이 된다. 이는 법칙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미군정으로 건국되어 미국에게 꼼짝 못하는 것처럼. 이리하여 한반도 만주 지역에 중국문명이 물밀듯 밀려왔다. 불교를 받고, 도교를 받고, 유학을 받아 간신히 골짜기문명으로 삼았다.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지역에서 일어난 강건한 고구려가 한나라의 세력을 물리치고 광개토대왕이 주위의 부족들을 정복하여 이 지역에서 제국을 세웠다. 아마 이 당시의 한반도와 만주는 세계 어떤 지역보다 인구가 많았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의 제국이 고구려이다. 그렇게 강성한 고구려도 결국 중국 당제국에게 멸망되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약소민족으로 전락되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결과 유대인은 나라를 잃었고, 한국인은 역사를 잃었다.
13.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끝내면서.
한국고대사의 비밀인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역사를 더듬어 가면서 느낀 점은 역사3기 고봉문명 건설의 조그마한 초안을 엿본 기쁨이다. 오늘 이 땅에서 시작할 평화세상 건설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를 믿어 성령 충만 받아 하나님 경륜의 구현인 교회·왕국(敎會·王國) 건설의 예표를 본 것은 귀중한 수확이다.
넓고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류가 살기 위해선 단 하나의 섬을 찾아가야 살 수 있듯이 수많은 구세주라는 허명과 극한에 도달해 무너지는 골짜기문명을 벗어버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에게 돌아와 예수를 믿는 길밖에는 없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세상 건설과 새로운 교회·왕국(敎會·王國)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이다.
이 기초 위에 성령 충만을 받아 욕단인 요단군이 걸어간 그 길인 겸손한자가 되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 말씀을 고백하면서 실천하는 길뿐이다. 이리하면 역사3기의 고봉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 쌓은 많은 실패와 불경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징계가 나타나고, 땅에서는 인재로 문명과 환경과 제도와 신용과 사회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역사2기 골짜기문명이 무너지는 모습이다. 이 폐허 위에 역사3기 고봉문명 건설을 시작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절감한다.
앞으로 우리는 한쪽에서는 기존사회가 무너지는 괴로움과 불편과 아픔을 보면서 동시에 새 아침이 밝아오는 새로운 역사의 건설을 볼 것이다. 한국인은 역사3기의 고봉문명 건설의 담당자가 될 사명을 맡았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춘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설 수도 있고, 거절하는 자유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선택은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모든 사람의 길은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고봉문명의 기초인 평화로운 세계 건설은 믿는 자와 모든 사람이 동역하여 일어날 역사적 과업이다. 이러한 고봉문명의 기초가 건설되면 공중의 모든 새가 깃들이는 우람한 나무와 같이 신자와 불신자 모두 즉 온 인류가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이 평화로운 공동체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다스리심 안에서 예수의 계시와 성령 충만으로, 율법시대 서방 이스라엘에서의 교회·왕국(敎會·王國)과 동방에서의 교회·왕국(敎會·王國)인 신시·조선(神市·朝鮮)으로 예표된, 인류역사 이래로 품어온 꿈같은 소원, 지상천국인 교회·왕국(敎會·王國)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고대사의 비밀] 13.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끝내면서.|작성자 김덕원
신시·조선(神市·朝鮮) 이후 시대에 대한 조그마한 단상
일본 고대 어떤 기록에 가야서라벌이라는 글이 있다. 서라벌이라는 이름을 먼저 쓴자는 가야일 것이다. 가야는 신시·조선을 회복한 신앙문명이었기 때문이다. 가야(伽倻)는 '하나님의 영이 더한 사람이 높은 언덕에서 신성한 말씀에 귀를 귀울인다.'는 뜻으로 지금의 교회라는 말과 비슷하다. 이것을 불교에서 차용하여 사원이라는 뜻으로 가람(伽藍)이라 한다. 서울의 원형은 서라벌로 많이들 해석한다. 신라 사람들이 서라벌을 한문으로 옮길 때 신라(新羅)라 하였다. 그들은 서라벌과 신라는 말은 달라도 뜻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한국말로는 서라벌이요. 그 뜻을 한문으로 해석할 때는 새로운 나라라는 신라(新羅)이다. 성경에서의 스발은 이스라엘식의 발음이고, 서라벌은 한국식의 발음이다. 시빌은 시베리아라 부르고 있는 것을 왜 그렇게 불렀을까? 근원을 올라가니 시빌이라는 발음에 닿고 있다. 서로 매우 비슷한 발음이다. 서쪽 이스라엘에서 스발, 중간 시베리아 땅에서 시빌, 동쪽 한반도에서 서라벌이라 불러진 것 같다. 이정도의 차이는 언어가 다른 지역에서의 차이로서 그 발음이 아주 비슷하다. 동일하다 할 수 있다.
성경에서의 스발을 신라인은 서라벌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나라이름도 서라벌 즉 새로운 나라, 새로운 가라(伽羅)인 신라(新羅)라 이름 하였다. 스발 즉 서라벌은 고대 우리 민족의 이상이다. 민족 이동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본 민족장래의 빛나는 환상이었다. 수천 년 뒤 새로운 땅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그 꿈을 보았다. 그리하여 신라는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이 해체되고 가야·백제가 쓰러진 후 그 비원과 꿈을 담고서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이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이 해체되어 멸망할 때 그 중심부족은 한반도 남단의 삼한부족이다. 시간이 흐르면 덜 귀중하고 가벼운 것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어떤 땅이 물에 잠길 때 낮은 곳부터 잠기듯이 많은 것은 잠기고 높은 곳만이 남는다. 이처럼 많은 것을 잃고 삭제당한 가야는 김(金)이라는 지도자의 성(性)을 남겼다. 고대에 있어 김(金)은 지도자의 성이며 태양의 겸칭이다. 일본이라는 국명도 여기에 연유한다. 신라는 민족 미래의 환상인 서라벌이란 이름을 남겼다. 가야와 신라는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의 핵심 부족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유풍이 가장 많았고 그 풍속 유지 기간이 길었다.
그 원인으로 중국을 통하여 전해진 불교가 고구려과 백제에서는 큰 저항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서 들어왔다. 일본이 명치시대에 유럽문명을 받을 때 화혼양재(和魂洋材)라는 일본정신 위에 서구문명을 수용하여 동양에서 일대강국이 되어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고자 광분했다. 신라는 일본보다 먼저 그러한 원리로 신시·조선(神市·朝鮮) 정신 위에 중국문화를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힘으로 삼국을 통일하였고, 천년신라 문명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신라도 신시·조선(神市·朝鮮) 정신을 거의 다 잃었다. 최치원은 그 마지막 불꽃이었다.
고구려는 한무제가 조선(朝鮮)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세운 지역에서 일어나, 강건한 상무정신으로 다물(多勿)을 국시로 하여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광개토왕 때에 만주를 다 회복하고, 남쪽으로는 겉으로 신라의 청원을 받아들인 모습으로 가야·백제를 정벌하였다. 그리하여 옛 신시·조선(神市·朝鮮) 지역에서 패권국이 되었다. 그러나 가야·백제 지역인 삼한지역을 정복하진 못했다. 곳곳에 사는 잔존 가야·백제 세력에게 혼이나 얼굴이 벌거지도록 화를 내면서 한강 이북으로 철군했다. 그 왕족의 성을 김(金)으로 못하고 비슷한 고(高)로 한 것은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적통이 아니라 방계라는 표시이다. 백제도 그러하다.
백제는 넓은 평야지대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부족이 섞이고, 한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그러므로 삼한시대에는 세력이 강성하여 대대로 삼한의 패자 진왕(辰王)을 배출하였다. 뒤에 고구려 영웅가문의 왕자가 임금이 되고, 부여가 몰려와 임금이 되고, 일본과의 유대가 돋보인 나라이다. 그 시대의 다부족 다문화지역이다. 신라보다 먼저 발전하였고 국력도 강한 고구려와 백제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것은 신시·조선(神市·朝鮮)시대의 정신과 유풍이 강한 뿌리로 새겨져 있는 그 당시의 우리 민족에게 뭔가 부족하게 보였던 까닭도 큰 원인일 것이다.
그 반면에 신라는 서로 단군의 핵심부족이라는 공유의식을 갖고있는 가야와의 병합이 쉬웠고, 삼국시대의 모든 백성은 다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하여 삼국통일의 대의명분인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도 전 국민적으로 소유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그러한 통일의식이 더욱 강렬하였다. 그리하여 거국일치하여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바탕 위에 김유신과 김춘추로 대표되는 지도층은 스스로 희생하고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그러한 모범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물다. 그 위에 신라는 빼기보다 더하는 통합의 세력이었다. 신라와 가야가 통합되었고,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유전과 중국문화가 통합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연하다.
혹시 넓은 땅과 중국과의 항쟁의식이 강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강력한 한국이 되었으리라는 추정을 일부에서 하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고구려는 중국이 점령한 한사군지역에서 일어난 관계로 문화보다 군사에 치중한 군국주의의 나라였다. 강력한 군사력은 있어지만 신시·조선(神市·朝鮮)시대의 정신과 유풍이 부족하고, 내적으로는 민족의식이 부족하고, 문화력과 정치력과 외교력이 부족하여 아마 발해의 경우에 보듯이 결국 중국에 멸망당하여 한국인의 민족국가의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는 작았지만 단군의 후손이라는 우월의식과 민족적 자아가 굳세어 강대한 중국적 세력속에서도 민족적 자아와 국토를 유지할 수 있는 신라천년이라는 황금문화를 이루었고, 한국인의 민족국가 원형이라는 강력한 전통을 남겼다.
왜(倭)는 언어가 달라진 까닭에 대부분 일본으로 이주해 갔다. 아직 건너가지 아니한 왜(倭)는 울산 포항지역에 잔존하여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신라를 괴롭혔다. 그러나 왜(倭)는 광개토대왕 이후에 일본으로 다 건너갔다. 왜(倭) 즉 일본인은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 말기에 언어가 달라진 우리 민족이다. 일본의 신도(神道)는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린 뒤 천지만물과 뛰어난 인격에 대한 우상숭배로 흘러간 흔적으로 보인다. 몽골지역에서의 텡그리 신앙과 비슷하다. 아마 이런 연유로 몽골지역에서의 강력한 무력과 일본의 표독스런 무력이 비슷한 까닭이리라 생각한다.
신시·조선(神市·朝鮮)인은 다 단군의 후손이다. 그 뒤에 씨족과 부족이 나뉠 때 김(金)은 지도자가 갖는 성으로 묵인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 후에는 가야의 김수로왕이 처음으로 표시하여 지도자임을 주장하였다, 삼국사기에 김수로왕이 신라의 석탈해왕을 꾸중하였다는 구절은 그 증거일 것이다. 신라는 그 뒤에 김알지가 표시하고 그 후손이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몽골지방 왕족의 성을 金이라 표시할 수 있다. 만주와 몽골지역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왕국들은 금(金)과 관계된 것으로 이름 하였다. 일본왕실의 성도 김(金)이다.
중국 한나라 시대 훈족의 포로된 왕자인 김일제의 김이란 성을 갖고, 신라 왕족의 조상이라 하여, 신라는 훈족이 세운 왕국이라 함은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이다. 삼국시대는 신분사회이다. 신라는 신시·조선(神市·朝鮮) 문명 유전을 가지고 있는 자부심 많은 부족이다.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의 태백산과 그 제단, 서라벌이라는 나라이름, 화백회의, 왕권이 박(朴) 석(昔)에서 고조선 시대의 지도자가 갖는 성인 김(金)으로 이동, 화랑도의 원형 등이 그 사례들이다. 몽골의 훈족보다 더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는 자부심의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훈족 김일제의 후손은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다.
삼국시대에 알에서 지도자가 태어난 탄생설화는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시림들의 영적 출생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삼국초기의 지도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란 뜻이다.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초기는 그만큼 신시·조선(神市·朝鮮)의 전통이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라에서 알지와 몽골지역에서의 왕비족을 알씨 연씨라 한 것은 고귀한 후손 즉 왕을 출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알지나 알씨가 몽골에 근원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연유한 말이다. 신시·조선(神市·朝鮮) 시대의 역사를 모르면 동양 역사의 시원을 모르게 된다. 그리하여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정한 틀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사대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되어 일제식민지를 거쳐 미국에 종속당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미FTA는 그 극점이다. 또 민족자존을 높인다는 것이, 훈족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의 왕이 되고, 신라는 훈족이 세운 왕국이라는 망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나치면 한단고기 및 대륙조선설 같은 과장과 거짓에 흘러가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은 민족 시원의 역사를 잃은 자의 슬픔이요. 병이다.
[출처] 신시·조선(神市·朝鮮) 이후 시대에 대한 조그마한 단상|작성자 김덕원
첫댓글 대단하십니다,,,,,생각지도 못한글 ,,,감사합니다,,,,,
저도 지금 절반쯤 읽어가는데 놀라고 있습니다.
정독을 하려니 시간이 좀 걸리네요 ㅋㅋ
요즘 보기 드믄 역작입니다.
이 글은 2009년 1월 30일에 작성한 글이군요.
2001년 봄에 처음 출간되었고 2005년 가을에 증보 출간된
"또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
메사, 스발의 위치, 스발과 서울 그리고 욕단과 벨렉의 분리에 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본 카페
< http://cafe.daum.net/ALILANG/ETMX/3 >
< http://cafe.daum.net/ALILANG/ETMX/7 >
< http://cafe.daum.net/ALILANG/ETMX/5 >에 책의 원고가 게재돼 있습니다.
네 자료 감사 합니다.
한민족 고대사를 성경적으로 풀이한 점은 높이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또한 목사님의 노고 또한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노아가 풍백이면서 복희씨이고 한반도까지 왔다 신기해요!
성경은 이스라엘 에 족보에 불과하다...!!!
우리민족에 뿌리역사 족보가 "환단고기" "규헌사화" 이다......!!!!!
성경은 유대인족이 풀어나가면 되는것이고 ,,,,@@@@@
우리민족에 역사와 얼 전통 은 우리 고서와 한, 중,일,
유물 유적 고서와 역사를 비교분석함으로서 밝혀지고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역사와 얼을 찾는오류를 범해서는 않될것이며
선전선동 해서도않되며
우리에 역사를 부정하는
망령된 오류를 범하지말고
종교로서 자신들에 종교관속에서 참이든 거짖이든 자신들의 믿음에 몫이다..!!!
성경에 어디 우리민족에 역사에대하여 기술된것이 있으며.....!!!!
목사님들은 교육하는가..!!
역사는 종교지도자들에 몫이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 가..!!!
우리민족에 "환국기" 를 보라....!!!!
1, 김수은 해설 "부도지" 를 보면 우리에 창세 기를 볼수 있으며.!!!
2, 환단고기, 규헌사화, 단기고사 를 뿌리로 역사를 성찰할것이며..!!
3,"천부경" 을통해 우리 민족에 율법을 깨달을 것이며..!!!
4, "삼일신고" 우리민족에 하느님 (하나님, 하늘님, 한얼님, 한알님,상제님, 천주님.천지신명....)관, 천당관,인간관, 우주관, 과 우주에 삼라만상 속에 인간의 위치를 깨달을 것이며..!!!
5, "참전계경" 을 통하여 인간에 도리를 실천할것이며..!!!
6, 정감록,송화비결, 미륵경,을 통하여 미래의 계시를..!!!
기득권층이 부패가 만연한것은 사실입니다만 부패한것은 비단 기득권층만이 아니라 전국민의 병입니다...심지어는 작은 곳곳의 가게들 조차도 제대로된 세금 안내고 카드쓰면 돈더받는게 만연한 국민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서민들은 살기 힘들다?
ㅎㅎㅎ 참...대한민국은 명실공히 oecd국가중 빈부격차가 적은 나라에 속합니다..
가장 적은 나라는 아니지만 빈부격차가 심한나라가 절대 아닙니다.
이런것은 통계나 자료를 보고 객관적으로 공부하셔야합니다. 선동되는 말에 선동 되서는 안되요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이민족이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가 나는 악질기득권이 판치는 나라로 오해해선 안되죠.
여긴브라질멕시코필리핀
이아닙니다.대한민국은....
좋은 내용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