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잠잠히 계시지 마소서.
말없이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하느님
(시편83,2).
시편은 하느님의 관심을 호소하면서 시작한다.기도 시편은 보통 하느님께 귀 기울여 주시라는 긍정적인 간청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하느님께 말없이,잠잠히,또는 조용히 계시지 말라는 부정적인 간청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여기서는 침묵과 관련된 세 개의 유의로들,곧“잠잠히”,“말없이”,“가만히”,와“계시지 마소서”의 사용으로 부정적인 간청이 강조된다.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침묵을 지키신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그들은 하느님을 그들에게 약속하고 용기를 주면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경험해 왔다.그래서 그들의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들을 돌보는 분으로 믿었다.그런데 그런 하느님이 원수들 앞에서 침묵하시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용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시인은 하느님이 행동을 개시하라고 기도한다.하느님은 백성의 죄를 뿌리 뽑기 위해 그들에게 화를 내시지만 또한 그들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동정도 베푸신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 83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83편은 이스라엘 백성이,하느님을 거슬러 동맹을 맺은 주변 민족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위기 앞에서 하느님께 원수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이다. 시인은 적들이 죽임을 당하고,수치를 당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란다.이런 간구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리지만 구약성경에서는 흔하게 나타난다.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적들의 ‘죽음’은 주님께 대항하는 공격자들의 모욕에 대한 벌이고,그들의 죽음이 희생자들에게는 안전한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인이 원수의 죽음과 수치를 간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수치’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릇됨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인도할 올바른 기초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해주고 그들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그들이 내내 부끄러워하고 놀라 얼굴을 붉히며 멸망해 가게 하소서”(18절).이런 기도를 그리스도인들이 바칠 수는 없다.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평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인정하게 하고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온 백성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악의 세력을 쳐부수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시인이 자신을 괴롭히는 민족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간청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께 불충하고 반역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원수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고 이스라엘의 이름이 기억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과 일하심에 대한 공격이다.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원수들이 주님을 유일하신 하느님으로 알아보기를 기원하며 악의 세력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점은 이해될 수 있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23-2 시편42-89/전봉순著/바오로딸)
Ⅳ.인간의 충만함을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
189.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어도 안 되며 경제가 효율 중심의 기술 지배 패러다임에 종속되어서도 안 됩니다.공동선을 고려할 때 오늘날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삶,특히 인간의 삶에 봉사해야만 합니다. 제도 전체의 검토와 개혁을 위한 확고한 결의 없이,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은행을 구제하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을 금융의 절대적 지배를 재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이러한 지배에서는 미래가 없고,장기간에 걸쳐 많은 비용을 치른 피상적인 회복 이후 결국 새로운 위기가 닥칠 뿐입니다.2007-2008년의 금융 위기는 윤리 원칙을 더 잘 존중하는 새로운 규제를 수립할 기회였습니다.그렇지만 이 위기에 대응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낡은 기준들을 재검토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생산이 늘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흔히 상품에 그 실제 가치에 일치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하는 경제적 변수들이 작용됩니다. 이는 종종 특정 상품의 과잉 생산을 초래하고,환경에 불필요한 피해를 입히며 지역 경제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옵니다.또한 금융 거품은 일반적으로 생산 거품을 야기합니다.결국 사람들이 실물 경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지만,실물 경제야말로 생산의 다각화와 증진을 촉진하고,기업들이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해 주며,중소기업의 발전과 일자리 창출를 가능하게 합니다.
190.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환경 보호는 오로지 금전적인 손익 계산을 바탕으로 해서는 보장될 수 없고 환경은 시장의 힘으로 적절하게 보호하거나 증진시킬 수 없는 재화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기업이나 개인의 이윤 증대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는 마술적 시장 개념을 거부해야 합니다.이윤 극대화에만 집착하는 이들이 미래 세대에게 남결 줄 환경의 영향에 대하여 차근차근 생각하기 바라는 것이 과연 현실적이겠습니까?이윤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틀 안에는 자연의 순환,자연의 쇠퇴와 재생의 시기,또는 인간의 개입으로 심각하게 변형될 수 있는 생태계의 복잡함에 대한 생각이 들어 설 자리가 없습니다.게다가 생물 다양성은 기껏해야 착취 가능한 경제적 자원의 창고로 여겨질 뿐이며,사물들의 실제적 가치,인간과 문화에 주는 의미,가난한 이들의 관심과 필요에 대해서는 진진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91.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면,진보와 인류 발전을 비이성적으로 저지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이면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천연자원의 지속 가능한 이용을 증진시켜려는 노력은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기적으로 볼 때 또 다른 경제적 이익을 낳을 수 있는 투자가 됩니다.시야를 넓혀서 보면 혁신적이고 환경에 덜 영향을 미치는 다양화된 생산 방식이 유익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는 또다른 가능성의 길을 여는 일이 됩니다.인간의 창의성과 진보에에 대한 꿈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새로운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192. 예를 들어, 좀 더 창의적이고 바람직한 생산 방식의 발전은, 현재 소비에 대한 기술 투자가 과도한 것에 견주어 인류가 직면한 시급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투자에는 소홀한 것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여기에서 재사용,개조,재활용과같은 현명하고 유익한 방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또한 도시의 에너지 효율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생산의 다각화는 인간 지성이 창작과 혁신을 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동시에 환경을 보호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합니다.이는 인간의 고귀함을 다시 피워 내는 창의력이 될 것입니다.삶의 질이라는 용기와 책임을 발휘하며 지성을 발휘하는 것이 더 고귀하기 때문입니다.반대로 새로운 소비 기회와 즉각적인 이윤만을 위하여 자연을 훼손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존엄과 창의력이 모자는 천박한 일입니다.
193. 일부 경우에 지속 가능한 발전이 새로운 형태의 성장을 가져오지만,또 다른 경우에는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성장을 놓고 볼 때,우리가 속도를 어느 정도 줄여 합리적 한계를 설정하고, 더 나아가 너무 늦기 전에 되돌아가는 것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다른 사람 들이 인간 존엄에 맞갖은 삶을 살 수 없는데도,소비와 파괴를 더욱 늘리는 사람들의 형태는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그러한 까닭에 이제 세계의 일부 지역이 불경기를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다른 지역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지원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기술적으로 발전한 사회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여 좀 더 검소한 생활 방식을 실천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4. 새로운 발전 모델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세계적 개발 모델”을 바꾸어야 합니다.이는 “경제의 의미와 경제 목표를 고찰하여 그 역기능과 오용을 바로잡는 것”에 대한 책임 있는 성찰을 의미합니다.일종의 타협책으로 자연 보호와 경제적 수익의 균형,또는 환경 보존과 발전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이러한 주제에 관하여 적당히 타협하게 되면 단지 불가피한 재앙이 조금 늦추어질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발전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더 나은 세상과 전체적으로 더 높은 삶의 질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기술과 경제 개발은 발전으로 볼 수 없습니다.경제가 성장해도 종종 인간 삶의 질이 실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환경이 악화되고 식품의 질이 실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환경이 악화되고 식품의 품질이 떨어지며 일부 자원이 고갈되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논의는 흔히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순단이 되고 맙니다.이는 생태에 관한 담론의 가치를 금융과 기술지배주의의 논리에 흡수시키고,기업의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은 흔히 일련의 마케팅과 이미지 관리의 활동으로 축소됩니다.
195. 이윤 극대화의 원칙은 다른 모든 시각을 외면하며 경제개념을 왜곡합니다.이는 생산이 늘기만 한다면 미래 자원이나 환경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벌채로 생산이 늘기만 한다면 한 지역의 사막화,생물 다양성의 훼손,오염의 증가로 발생하는 손실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다시 말해 기업들은 비용의 극히 일부만을 계산하여 지불하며 수익을 냅니다.“공동의 환경 자원을 이용하는 데에 드는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다른 민족이나 미래 세대가 아니라 그 이용자가 온전히 부담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도록”할 때에만 윤리적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시장이 또는 계획 경제를 추진하는 국가가 자원을 배분할 때에 현재의 필요를 위한 정태적 현실 분석만을 제공하는 도구적 이성이 개입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정치형’과‘사법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정치형은 하원-탄핵소추.상원-탄핵심판 모델이다.정치형은 정치적 책임추궁을 위한 징계 절차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때문에 탄핵 사유가 형사 기소 범죄에 한정도지 않는다,“탄핵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처방이다” 사법형은 의회-탄핵소추.헌재-탄핵심판모델이다.의회의 권력 남용 우려,법치주의 요구,객관적 판단 등의 필요성 때문에 정치성을 좀 더 덜어내야 하는 차원에서 등장했다.제도의 기본 틀을 변형해 의회 비중을 낮췄다. 이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강한 사법형에 속한다. (54쪽)
대부분의 나라에서 탄핵 절차를 까다롭게 해놓은 까닭은 간단하다.탄핵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과정이고 남용되기 쉽기 때문이다.이 남용의 위험성 때문에 탄핵 과정에 사법부를 개입시키기도 하지만 말했듯이 효과 면에서 차이는 별로 없다.게다가 사법부에 최종적인 탄핵 결정을 맡기는 것은 선출된 대통령을 축출하는 정치적 부담을 선출되지 않은 소수의 재판관에게 맡긴다는 점에서 민주성이 덜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이렇게 되면 사법부로서도 탄핵심판 과정에서 어쩔 수 없어 정치적 고려를 할 유인을 갖게 되고,정당들도 최종 결정의 부담을 회피하면서 당파적 이익을 위한 탄핵에 나서는 동기가 커지게 된다.정치의 사법화,‘정치의 탈정치화(depoliticization of politics)’,사법의 정치화가 횡행하게 된다는 얘기다.이런 흐름이 계속 심화되면 의회의 대의.숙의 기능이 악화하면서 결국 정치가 쇠락하고,삼권분립마저 형해화한다.(56쪽)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아름다운 가을날의 정취를 느끼며,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