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하고 싶었는데사정상 빠졌습니다. )
배달겨레의 한 자손으로 동 시대를 살아 온 우리들
보지는 직접 듣지는 못랬어도 우린 가운데 중심으로 뿌리 내린 같은 문화권 역사를 공유하며 살아 온 한 자손이기에
흘러온 역사 중에는 아직도 억울해 갈 곳을 못 찾고 허공을 헤메일 것 같은 애틋하고도 가엾은 우리 조상들의 혼령들
그분들의 흔적을 찾아 지난 날에 그 영광 그 아픔 서름을 절절한 가슴으로 우린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내 것에 대해 알고자 함도 바로 이에 있으며 내 땅에 있는 돌 풀 한포기 또한 조상의 얼인 글자 한자 그림
한점 조각 하나 하나가 바로 우리의 자존감인 것을 왜 잔작 무관심 속에 흘려 보냈을까 하는
의영 부영 살아 온 세월이 안타까워서라도 이렇게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모여있는 것이리라.
맑은 미소로 매화 향기 흐르게 하는 감사한 벗님들
추운 겨울에 가슴에 모닥불 을 피워 훈기를 보내주시는 따뚯한 우리님들
낮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듯 밤에는 꽃을 본듯 꿈길에도 곱게 비칠 정겨운 님들
그저 바람인 우리들
한줄기 석양 빛의 걸린 듯 스러지면 그만인 것을
오늘은 지나간 추억으로 아련하게 무지개 빛으로 빛나 우리들 가슴에 그리움으로 풀솜 피듯 곱게 피어 날 것이다.
부디 올해에도 건강하시어 더욱 즐거운 나날 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낭만 새해 인사드림
원구단 황궁우
고종임금님이 이곳에 제를 지내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한 곳
이로 인해 대한 재국이 탄생되었고 임금님은 황제가 돼셨다.
지금 원구단터에 남아 있는 황궁우는 광무 3년(1899)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건물이다.
여기에는 신위판을 봉안하였고 이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과 야명성위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오성·이십팔수·오악·사해·명산·성황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우사·풍백·뇌사·오진·사독·대천·사토의 자리를 두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게 되고 그 터에는 현재 있는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된다.
현재 원구단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이 석고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무늬가 있다. 네이버 펌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재탄생한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대한민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로서
지층은 창고와 상궁방 주방 등의 준비실로 구성되었고 1층은 공식행사를 위한 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생활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전통적인 궁궐은 편전과 침전이 분리되어 있는데 석조전은 이를 한 공간에 둔 서양식 궁전입니다.
석조전 구상 당시에는 고종의 침실로 계획되었으나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 계속 머물러 실제로는
사용치 않았다고 하며 1907년 유학을 빌미로 일본에 끌려갔던 영친왕이 1911년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흉거시 귀국하여 석조전에서 임시 거처하였으며 영친왕은 이후 1922년까지
귀국할때마다 석조전을 숙소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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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중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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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깔끔하게 장식된 중앙홀 벽면. 인테리어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중앙홀 정면의 접견실 문. 문 양편으로 배치된 화병은 일본 도쿄의 구. 영친왕 저택에 남아 있는 화병을 본떳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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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홀 한켠에 있는 대리석 탁자 모서리의 화려한 금색의 천사 모습. 이 탁자는 모조품이 아닌 당시의 그대로 물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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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홀 한켠에 마련된 귀빈대기실. 황제를 만나기 전에 순서를 기다리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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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대한제국 선포"를 설명하는 방에 걸려 있는 황룡포를 입은 고종.
고종은 1897년 10월12일 환구단에서 황제에 등극한후 새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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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알현하는 공간인 "접견실".
석조전 실내중 가장 화려하고 위엄있는 공간으로 다른 방과 달리 이화문(李花紋, 오얏꽃무늬)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하였습니다.
이화문은 태극기, 무궁화와 더불어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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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문이 화려하게 장식된 접견실 벽체.
신임 외교관이 고종을 폐현(알현)하려면 걸어가면서 3번 인사해야 했으며 나갈때에는 뒷걸음치면서 3번 인사를 해야했는데 이를 가장 힘들어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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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계단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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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황금색으로 꾸며진 황제 침실.
고종의 침실로 꾸며졌으나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계속 머물렀고 일본에 끌려갔던 영친왕이 귀국할때마다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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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침실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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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황제가 사용한 사기로 만든 물주전자와 사기 대야 그리고 향수 등의 작은 투명한 용기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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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사용했던 세면대와 양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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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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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책을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방으로 꾸며졌던 황제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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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책을 보거나 내빈을 접대하는 방으로 꾸며진 황후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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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거실의 책상. 석조전 가구는 모두 영국 메이플사의 가구인데 상당히 품격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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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으로 꾸며진 황후 침실
순헌황귀비(엄귀비)의 침실로 계획되었지만 준공 다음해에 별세하여 사용치는 못했고
대신 영친왕비인 마사코(方子)가 일본에서 귀국했을때 몇차례 사용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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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홀의 중앙은 비어 있지만 남쪽에는 테라스로 나갈 수 있게 여러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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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쪽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석조전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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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을 영국산 오크로 장식하였다는 1층 소식당
중앙홀 그리고 접견실과 함께 원래의 실내장식 그대로 귀빈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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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12석 연회 자리가 마련된 1층 대식당.
공식행사후 만찬을 베푸는 공간인데 서양식 만찬장으로 꾸며져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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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는 외국인이 참석하는 연회에는 대부분 서양식 코스 요리가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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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만찬장 서양식 코스요리의 메뉴가 어떤 것이 나왔는지 각국의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사뭇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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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봤던 곳인데 유리 벽 너머의 벽은 실제 석조전의 원형입니다.
특히 왼쪽의 밧줄이 칭칭 감아진 두 개의 직선은 배수관인데 동파를 막고자 새끼줄을 꼬아 감아놓았던게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위 사진과 해설은 해찬솔님작입니다.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왕실 가계도
이하응 대원군
고종황제
이 때에는 대한 제국의 황제로
황제 즉위식을 가진 다음 곤룡포가 이니라
황룔포를 입으셨다고 하신다. 즉 황제의 빛깔인 누런 황금빛깔의 색을 ?...
그리고 왕의 곤룡포나 황제의 곤룡포, 세자의 곤룡포는 용의 발가락의 갯수가 달랐다고 합다.
황제는 5조룡, 왕,황태자는 4조룡, 세손은 3조룡
원래 태조 이성계는 왕조를 열었다는 뜻으로 청룡포를 입었으나 나머지 왕들은 모두 홍룡포를 입었고
세자는 중국에 칙서로 인정을 받으면 홍룡포, 받지못하면 청룡포를 입었다고합니다.
옷도 남이 나라에 의해서 입었다니 분노에 앞서 서글픈 생각이 난다. 이 낭만 열 받아서...
그후 왕실에 존칭도 바뀐 것을 올려본다.
< 변한 호칭>
대왕대비→태왕태후→태황태후
왕대비→왕태후→황태후
대비→태후
왕→대군주→황제
왕비(후)→왕후→황후
└시호에는 왕후라 하였으나 원래 본 호칭은 왕비입니다.중국의 속국이었으므로 그렁 것 같습니다.
왕세자→왕태자→황태자
왕세자빈→왕태자비→황태자비 등
명성황후 민씨 순종 친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나쁜 일본 인간들, 미우라 일본 공사는 사무이라와 일부 조선군을
포섭하여 남의 나라 궁궐을 무단 침입 하여 세자(순종)를 칼등으로 때려 기절시키고
고종 에게 협박 하고,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석유를 뿌려 태워버린 크나큰 범죄자 일본이다.
순헌황귀비 엄씨(영친왕 친모)
8세에 황실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상궁이 되었다.
고종임금 아관파천때 고종을 모신후
후궁이 되어 영친왕(이은)을 낳았다.
세상을 떠났다.
귀인 양씨 (덕혜옹주 친모
그 당시 양씨는 30세때 30년 연상의고종과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고종 환갑이되는 1912년 귀인 양씨에서 옹주를 낳았다.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33세 때 순종
순종 은 1907년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뒤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는데 일제에
국권을 빼았겨 폐위된후 16년동안 창덕궁 낙선재서 머물다 1926,4,25일
53세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순정 효황후
순종의 비 인 순정효황후는 낙선제와 석복헌에서 생활하다 1966년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시대 전체를 한으로 점철된 세상을 살아온 비운의 옹주
그러나 노후에는 그래도 내 나라 왕궁 그것도 어릴 때 살던 낙선재에서 보내는 행운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 덕혜옹주 **
덕혜옹주 돌사진
나라 잃은 서름을 이 어린 고명딸 재롱으로 고종께서는 늙으나마 재미를 보고 살게한 뎍혜옹주.
덕혜옹주 유치원 다닐때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 황제가 환갑의 나이에 본 고명딸 이었다.
고종은 옹주 4살때 덕혜란 호를 지어 덕혜옹주로 불렀다.
덕수궁 준명당을 유치원으로 개장하여 덕혜옹주 친구들들과어울리게 하며 사랑스럽게 고명 딸을 키웠다
덕해옹주 7살에 고종 승하 하신후 오빠인
순종을 아버지 처름 여기며 자랐다고 한다.
덕해옹주 14살의 나이에 강제로 일본유학을 보낸 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신경쇠약에
걸려 고생한 비운의 황녀 였다.
유치원에서
일본 강제 유학 가기전 시절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
진흙발아래 처참하게 웅개진 순수하고 어린 영혼
덕혜옹주 14세 때 모습
일본으로 강제 유학 보내 일본 소학교(우측에서 2번째 덕혜옹주)
덕혜옹주 일본인과 결혼
정략 결혼처럼 비극이 어디 있었을까
왕가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쓰리고 아리다,
아픈 곳이 어디 왕실사람뿐이겠는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또한 같았으니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한다.
한때나마 행복했을까?????? 잔잔한 미소가 고우시다.
1962년 환국하는 모습(여객기 서 내리고 있다)
고향의 땅을 밟는 순간 그 감회를 무엇이라 말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말 못할 수 없으리오
창덕궁 낙선제와 수강재서 생활하던 덕혜옹주
세월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인고의 모진 세월을 살아 내느라 얼마나 고되고 한 됐으리
철천지 한 오뉴월에도 서리로 서리 서리 서리엇을 삶
원망과 한이 눈에 분노로 이글거린다.
※ 이분들은 거의 낙선재에서 살고 계셨던 분들이다. 글 사진 네이버펌
2015년 1월 3일 낭만씀
카페 게시글
♡―탐방후기 사진 등
을미년 첫 역사탐방 중 대한제국 왕실 인물도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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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1
15.01.0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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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럽고 힘들어던 우리의 지난날 낭만님 의 글을 통하여 다시 한번 마음으로 다짐해 봄니다
나라가 강건해야 나도 있지요
마음에 담아감니다
낭만님 탐방은 안갔어도 가본 사람보다 더자세히 쓰셨습니다
진귀한 자료 . . . 스크랩하여 저의 컴에 저장하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고종 황제께서 회갑나이에 덕혜옹주를 보셨다니 아주 건강하셨나 봅니다.
커피도 즐기셨다 들었습니다.
손에 닿을듯 얼마 지나지 않은 우리나라 과거사 비운의 역사 새삼 슬픈 마음입니다.
감사해요;;
언니 새해 복 마니받으세요;;
덕혜옹주 모습이 고종황제를 꼬옥 빼닮았네요;;
귀한 자료올려주셔서 감사합닞다
덕분에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낭만님 감사합니다...
슬픈 역사를 다시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네요.
우리 민족은 언제나 똘똘 뭉쳐 단결 할려는지.........
귀한 사진 잘 보았습니다.
아~~~맺힌 한이여,,,,깨어라!!
뜨거운 피가 흐르는 대한의 자손 낭만님의 가슴으로 쓴 이글이 덕혜옹주의 한이 조금은 풀릴것 같습니다.
곶감같은 낭만님의 글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