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ould Like to Become a Human> -
the Undiscovered Gem Beyond Film Criticism
이용관, Yong-Kwan Lee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교수,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 Professor, Chungang University>
1. 들어가면서
어제 아내와 작은 말다툼을 벌였다. <간첩 리철진> 때문이었다. 10여 일 전부터 비디오를 빌려 놓으라고 거듭 부탁했었는데, 정작 원고 마감일이 훨씬 지나도록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말로는 우리 동네 ‘영화마을’에 <간첩 리철진> 비디오가 10개나 있는데도 빌리러 갈 때마다 모두 대여 중이었다는 것이고, 나는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가 반가우면서도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10일 동안 그 10개 중에서 하나도 빌리지 못했다는 것은 성의 부족에 다름 아니라고 힐난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어디 시내 사무실 근처에서라도 다시 확인해 보라고 쏘듯이 대꾸했다.
그런데 사실은 얼마 전에 사무실 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어렵게 1박 2일의 조건으로 빌렸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날 피할 수 없는 술자리에서 유달리 취했었다. 물론 아내는 나의 어처구니없는 전과를 알지 못한다. 늘 그랬듯이 나는 다만 그녀의 성의 부족을 탓함으로써 짐짓 원고의 지연을 합리화시키려는 뻔뻔스러운 얼굴을 숨겼을 뿐이다.
<간첩 리철진> 비디오는 물론 영화관의 기억에만 의존하기가 불안한 다른 원고를 쓰기 위해서 필요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이 글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얻었다. 영화작품을 비디오로 본다는 사실의 모순,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각별한 주의와 장치의 부재, 그 부재를 망각한 채 횡행하고 있는 비평과 인용. 어쩌면 우리는 카프카의 ‘성’처럼 가보지도 못한 텍스트의 실체를 상상하면서 그 권위나 허위를 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바로 그랬기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나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사실은 텍스트의 균열점들이 바로 나 자신의 거울 이미지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비디오’ 언저리에서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간첩 리철진> 사건은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다시 보도록 했다. 마치 이제야 ‘너도 인간이 되라’는 듯이.
2. < 나도 인간이 되련다>의 언저리
<나도 인간이 되련다>와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 경성대 학생들과 함께 유현목 감독 작품론 ‘닫힌 현실 열린 영화’의 발간을 위해 자료 정리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유현목 감독의 작품들 중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었는데, 특별히 비디오로 출시된 것 중에 이 작품이 있었다. 그렇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의 <나는 고백한다>식의 제목에 이끌려 호기심만으로 감상했을 뿐 별다른 인상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그저 제법 잘 만들어진 반공영화라는 기억이 오래 갔을까. 심지어는 재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故 유영길 촬영감독 회고전’을 위해 그의 작품 목록을 살필 때에도, 그의 데뷔 작품인 것을 알면서도 과거의 기억 때문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해 상영 목록에서 아주 무심하게 제외시켰다. 그 후 몇몇 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중요성이 간혹 강조되기는 했지만 바쁜 일정에 묻혀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대학원 수업에서 표현주의에 대한 강의 때마다 대표적인 예로 제시했을 뿐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못난 감식력과 부주의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그리고 지난 겨울 ‘유현목 회고전’을 준비하고자 영상자료원에 보관중인 그의 전 작품을 제작년대 순으로 볼 때 다시 <나도 인간이 되련다>와 만났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도입부의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 텍스트의 수준이나 촬영의 미학이 제대로 파악될 리가 없었다. 프린트 상태에 대한 판단도, 연기자들의 열연도, 심지어는 내용조차 뒤죽박죽이어서 내가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오늘 다시 두 개의 비디오를 틀어보았다. 한 손에는 어렵게 구한 녹음대본을 들고. 과거 16년 동안 틈틈이 보아 왔던 테이프는 1983년 5월 10일에 삼부 비디오 프로덕션에서 출시한 것이고,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해 원래의 시네마스코프 화면 규격대로 촬영한 것은 현재 보관중인 프린트 필름이다. 두 판본을 녹음대본으로 확인해 보니 의외로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녹음대본에 표시된 ‘권’ 수를 기준으로 하면 삼부 프로덕션의 비디오에는 타이틀 시퀀스와 1권의 신1(S# 1)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었고, 반면에 프린트 필름에는 신6에서 9까지(S# 6~9)가 전부 빠져 있었다. 그리고 두 판본을 합치면 정확하게 녹음대본과 일치했다.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제는 계속된다. ‘닫힌 현실 열린 영화’에서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찾아보면 단평 하나만 수록되어 있을 뿐 여타의 참고자료는 후기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평을 읽노라면 다시 한번 어리벙벙해진다. 그 필자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백석봉의 직업이 작곡가인데도 화가라고 했고, 그가 이데올로기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다가 처연하게 죽어 가는 것을, “자유가 그리워 탈출할 것을 시도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만 것으로 평했다. 요컨대 영화를 보지 않은 채, 비평이 아니라 줄거리 자체를, 서지자료에만 의존해서 창작해낸 것이다.
정리해 보자. ‘닫힌 현실 열린 영화’에 실린 위의 단평은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한국영화 70년 대표작 200선’에서 빌려온 것이다. 공사에서 당시에 위촉한 필자들은 약 20편씩 할당을 받아 원고를 썼는데, 그들은 당연히 영화를 보지 않은 채, 혹은 기억이나 서지자료에 따라 줄거리를 재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듯한 단평까지 첨필했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 작품론을 발간하기 위해 한 여름 내내 노력했던 나는 달리 마땅한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작품을 보거나 그 단평 자체를 면밀하게 살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재수록했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영화 70년 대표작 200선’과 ‘닫힌 현실 열린 영화’의 대부분의 글과 자료들이 신빙성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비극적 회의에 봉착한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책들을 왜 만들었을까.
3. 대본과 영화의 언저리에서
다행히 녹음대본을 구했기에 이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따라서 촬영대본까지 구할 수 있었다면 몇 가지 더 확인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9권의 마지막과 10권의 첫부분(S# 115~S# 115A)에 묘사된 장면들이 그렇다. 실종된 약혼녀 복희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백석봉은 나타샤의 안내를 받아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그녀와 상봉한다. 그러나 그녀는 모진 고문으로 이미 실성한 상태였기에 석봉은 절망해서 돌아선다. 이어지면 나타샤의 침실, 석봉과 나타샤의 격렬한 섹스가 접사화면들로 제시되는데, 테마음악과 복희의 절규가 그 화면 위로 흐른다.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절정을 이루는 이색적인 몽타주 시퀀스이다. 관념덩어리들이 전편에 출몰하는 반공영화에서도 유현목은 이처럼 멋진 영상적 표현을 즐긴다. 그래서 이영일이 그를 가리켜 ‘영상으로 사고하는 작가’라고 했을 터. 그러니 촬영대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면, 따라서 시나리오 작가의 창작인지 감독의 데꾸빠쥬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귀중한 분석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적어도 시나리오는 영화가 아니라는 저 유명한 작가론적 선언을 상쾌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작과 각색과 감독과 촬영에 이르는 작가론적 특성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촬영대본과 녹음대본과 필름은 필수적이다. 친일경력에 시달리는 유치진의 반공이데올로기와 토착적 리얼리즘의 한계를 살피는 데도 그렇고, 젊은 시절 날카로운 시적 평론의 정수를 보여주었던 여수중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떤 재능을 발휘했을지도 궁금하며, 촬영감독 유영길이 자신의 데뷔작품에 어떻게 임했을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의기투합이 텍스트로 분출돼 나온 것을 감상하고 느끼면서 채록대본(reader’s script 또는 continuity script)을 작성해서 남겨 놓으면 훗날 언젠가 텍스트와 영화인들이 모두 재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국영화 80년사를 운운하면서도 정작 한국영화학과 영화사는 부재한 시공에 허탈하게 서 있지 않은가.
4. 다시 비디오 언저리에서
TV화면과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차이는 상식보다 훨씬 컸다. 그 중에서도 장면화의 미학이 문제였다. 삼부 프로덕션의 비디오는 심지어 누구 작품인지, 누가 출연하는지도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화면에 보이는 인물들이 출연진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각색은, 촬영은, 조명은 누구인가. 그렇게 비디오의 익명성은 영화학도에게 극도의 스릴을 제공한다.
비디오는 일단 중년용이다. 중년 이상의 관객이라야 그것이 한국영화이고 그 속의 인물들이 추억의 명배우들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들에게 배우들의 이미지는 가슴이 벅차도록 그리운 기억의 산물들이다. 고뇌하는 지식인 김진규, 청순 순박한 고은아, 한국 최고의 육체파 여배우 김혜정, 악역으로 많이 알려진 이예춘의 지적이면서도 용맹한 반공유격대장 역할, 언제나 호방한 대장부 장동휘, 산뜻하고 정이 많은 황해 등등이 한 작품 속에서 열연을 펼친다. 주연, 조연, 단역이 모두 저마다의 개성으로 객석을 압도하던 저 시절은 정말 멋있었다. 하지만 비와 먼지가 가득 찬 TV화면으로 보면 그저 반공영화의 일그러진 추억들과 후시녹음의 어설픔과 잡음들만이 신경을 거스른다. 이제는 대부분 고인이 된 저 멋진 배우들을 두 번 죽게 하는 현실을 책임질 수 있는 자 그 누구인가.
아마도 작은 TV모니터 화면이나마 시네마스코프 화면 형태로 본다면 훨씬 달랐을 것이다. 물론 삭제된 것도 복구된 상태로. 그러면 서사구조도 화면의 품격만큼 차분하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장면화의 미학들이 스타이미지까지 돋보이게 만들어 신세대들에게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중년의 관객들은 역시 그때가 한국영화의 전성기였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신세대들은 신기해 하면서 경외감을 느낄 것이다. 반공영화인 듯 한데도 저토록 시적인 구도와 서정성이 풍만하고, 유려한 촬영과 의미심장한 장면화의 상징이나 도상학이 매력적임에 흠뻑 취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고은아가 김진규의 말에 따라 골방을 열고 한복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뒷모습과 거울 이미지가 동시에 제시되는 장면화는 상징과 도상성이 혼연일체가 되는 영상적 흡인력을 힘껏 뽐냈을 것이다. 아깝게도 삼부 비디오에는 어두컴컴한 골방의 윤곽과 고은아의 뒷모습만을 보여주면서 촌스런 대사를 전달할 뿐이다. 원래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는 그 대사조차 매력적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또는 도입부에서 고은아와 접선자가 한 화면으로 제시되는 모습은 그 상황의 긴박성과 은밀함과 해방공간의 자연풍경이 인물들과 유의미하면서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비디오화면에서는 양측의 인물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애꿎은 나무들만 황량하게, 왜곡상으로 부각된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형태로 본 관객이라면 누구도 이 작품을 단순한 반공영화라고 폄하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는 반공영화라도 만만치 않은 수작이라고 여운을 남겼을 것이다. 게다가 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질 때마다 제 3회 남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이라고 자막으로 표시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각별한 감독이나 촬영스타일이 펼쳐질 때마다 제 2회 서울신문문화대상 감독상 수상작이라고 알려주면 또 어땠을까. 더욱이 인상적인 구도나 장면화에 제 7회 청룡상 조명상 수상작이라고 제시했으면 어떠했을까. 그런 영화상들이 얼마나 권위있었던 것인지는 불문하고라도 최소한의 관심집중은 유도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한국영화사상 5,000여 편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 200선에 선정된 까닭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실재하지 않은 채 그것의 못난 변종만이 관객에게 추하게 기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5. 작가론의 언저리
서사구조의 도입구가 엉망으로 전달되다 보니 그 내러티브의 힘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인과율이 처음부터 길을 잃게 되고, 따라서 긴요하게 쓰인 몽타주 효과의 견인력까지 볼품 없다. 피아노 위의 꽃병이 그렇고, 라이트 모티프로 기능하는 분수대가 특히 그렇다. 보는 이에 따라 다소 과잉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의미의 측면은 명료하다. 희망과 좌절, 행복과 불행, 내면심리와 외적현실의 갈등, 그리고 복선과 암시의 실타래들이 도처를 연결시키면서 서사구조의 비약과 중복을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진기한 몽타주 시퀀스나 카메라 움직임을 통한 지표적 기능은 가히 유현목답다.
그런데 끊어진 시퀀스와 내용의 반 이상이 잘려나간 TV화면이 분수대나 페치카의 불꽃 따위를 다만 섹스와 연결시킬 뿐이고, 상황의 추이와 반응에 강력한 아우라를 제공하는 작가론적 앙각들은 초기 표현주의 장면들처럼 우스꽝스런 과장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에 비유된 바람개비만이 내러티브의 과잉과 만나 신파적 과장으로 확대되어 관념덩어리 자체의 토로인 양 속단하게 만든다. 요컨대 작가론적 징표들은 있되, 비판적으로만 읽히도록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오페라 공연이나 자아비판, 또는 정신병동 시퀀스처럼 다소 어색한 일부를 제외하면 유현목의 작가론 목록의 앞자리에 놓아도 무관한 작품이었다. <오발탄>의 대사나 행동을 연상케 하는 김진규의 모습들은 그 특유의 고뇌하는 실존적 인간을 대변하면서, 이예춘을 통해 행동하지는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몰골을 강화한다. 세트와 조명을 활용하는 장면화는 간단없이 신의 구원을 환기시키면서 구제받지 못하는 영혼들의 절규를 응시한다. 그의 구원은 다만 마지막 순간을 통해 가능성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 날카로운 화면화와 몽타주들이 웅변적으로 복무한다.
게다가 그가 통과의례를 겪은 길들은 시적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그래서 관념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도 용케 그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작가의 투혼이 인상적으로 배어 나온다. 그렇기에 다시 이영일의 표현을 음미하게 된다. 사르트르가 문제 삼았던 미에 의한 구제의 가능성이 여실히 엿보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면서
<나도 인간이 되련다>가 개봉되던 해에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 한 해 전에 김신조 일행이 넘어왔고 또 시체가 되어 실려 갔던 마을에 살고 있었다. 나는 ‘멸공’, ‘초전박살’, ‘때려잡자 김일성’ 등의 구호가 도처에 널려 있는 환경 속에서,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반공탑 위에 횃불이 타고 있는 경기도 지정 반공학교에 다니면서, 그리고 모두가 남북이산가족임이 당연한 교실에서 날마다 반공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런 내가 성년이 되어서, 그것도 영화학도로서 이 영화에 유다른 애증을 지녔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까지 수십 번을 보아도 그 허보다는 실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투사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비교적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반공영화만으로만 치부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 유현목의 반공이데올로기가 먼 이웃의 시각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부모세대는 물론 우리 모두의 엄연한 현실이었음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을. 최소한 그들이, 특히 유현목이 영상언어로 그런 관념들과 치열하게 싸워 온 것만큼 그것을 오늘의 비평언어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후시녹음 따위의 기술적 미비로 인해 그의 미학이 과잉으로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의식의 과잉과, 서사장치의 과잉과, 대사의 과잉, 게다가 열악한 산업적 기술적 요인까지 겹친 결과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신파적 과잉’이라는 한국영화의 미학을 존재케 했을 것이다. 그러길래 리얼리즘과 표현주의적 영상을 이토록 치열하면서도 성공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조차 그 동안 신파에, 과잉에, 반공까지 곁들여진 가작쯤으로 잊혀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러길래 김기영같은 ‘과장의 미학’조차도 기이하고 괴력한 신파적 과잉의 미학으로 재평가하는 우를 범했던 것일 게다.
다시 10년이 흐른 뒤에 또 이 작품을 만나면 그때는 한국적인 과잉과 과장의 미학으로 산뜻하게 갈무리할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영화 스스로가 현실에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학도가 매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신할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원본대로 복원된 필름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그때는 엉터리 자료들이 사라져 버린 후일까. 아니 그 동안 나는 변함없이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사랑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