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이뿐 아니라 -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이 단산된 사라에게서 성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도 성취 되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아 폐경된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약속 안에서 성취된 것과 같이 또 다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택되었음을 나타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 혹자는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된 것이 그 외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는 종의 자녀이며 하나는 주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가 순수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신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똑같은 환경과 신분 속에서도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 아버지와 한 아내의 태 속에서 잉태된 쌍둥이의 선택과 유기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그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잉태되어 같은 날 태어나게 된 동일한 환경과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약속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리브가에게도 주어졌으며 그의 약속은 육신적 후손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에 의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취됨을 보여준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 - 이들은 육체적으로 쌍둥이라는 합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선악을 구별할 수도 없는 무능력한 조건 속에 있다. 바울은 태어나기 전 상태의 동일함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
한편 나지도 아니한 때에 선택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이 태어날 자의 행위에 근거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행위가 선택받기에 합당할 것인지 불합당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선택이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보다 분명하게 뒤에 나오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는 표현이 이를 반증한다. 바울은 지금 한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역사적 사실을 제기함으로써 혈육의 관계를 떠나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택하신다라는 말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필연적으로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에 근거할 뿐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어떤 자들은 간과하며 또 어떤 자들은 선택하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 이들 두 사람이 모두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절대적 권위를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바울은 창 25:23 중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창세기 본문에서 두 아들에 대한 계시는 바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주제로 전개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절에 사용된 '큰 자'와 '어린 자'(토 엘랏소니)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혹자는 창세기의 본문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은 분명히 개인에 대한 섬김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주장하는 이는 창세기에 사용된 '국민'이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보다 근본적인 출발에서 개인에 대한 예언임을 주장한다. 또한 혹자는 이 예언은 에서와 야곱 개인들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증거로서, 에서는 그의 생애 중에 야곱을 섬기지 않았다는 점과 실제로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속박 되어 있었음을 제시한다. 실제로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이후에 형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다녀야 하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또한 형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대한 해설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민족 또는 후손에 대한 예언이라는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의 개인에서 출발한 예언이 궁극적으로 메시야 왕국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통시적인 시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애 속에서 동생이 장자권을 이어 받는 것이나 에돔 족속이 속박되는 것으로 제한하기보다는 보다 큰 약속 속에서 예언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은 장자권 양도와 에돔 족속의 속박 등과 같은 역사적 성취뿐만 아니라 메시야 왕국이 궁극적으로 불의로부터 승리할 것을 계시하고 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바울은 말 1:2, 3을 인용하여 개인들에게 예언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여기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셈어적인 개념을 가진 '미워하였다'라는 말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미움'이란 말은 단지 에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자신의 특별 은총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심을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또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분과 기득권을 가진 유대 민족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섭리로 버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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