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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과 보호 없이는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전도연이라는 본능을 지탱하는 것은 몇 번을 리와인드시켜도 맹목적인 사랑이다. Photographed by Kim Sang G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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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목한 건 그녀의 어린 아이 같은 면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찍은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현장에서는 푸른색 파카 왼쪽 가슴에 ‘3학년 2반 전도연’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여름 더위가 시작할 때 찍은 좰스캔들좱에서 꼭 쥐고 있던 생수통에도 ‘전도연’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촬영장에서 본 전도연은 언제나 “네~ 감독님~!”하고 말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어리광을 부렸다. 전도연은 영화를 그리고 그 영화를 창조해 가는 감독을 아이처럼 믿고 따르고 사랑했다. 아이는 아이인데, 싫증을 내지 않고 집중하는 아이, 더 많은 사랑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 즐거움을 감염시키는 아이. “전 어렸을 때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자아도 없고 꿈도 없었어요. 엄마 아빠가 연세가 많으신데다 언니 오빠와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당신들 생각대로 억압돼서 자랐거든요. 친구집에 가 본 적도 없고 심지어 교회도 못 갔고, 학교 아니면 집만 왔다 갔다 했어요. 존슨 앤 존슨 CF 찍고 데뷔해서는, TV엔 15초밖에 안 나오는 일을 밤 새우고 한다고 집에 와서는 타박을 받았는 걸요(웃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진부하게 떠드는‘변신의 귀재’라는 별명이 그녀의 영화에 대한‘천진난만한 열의’, 쉽게 상처받고 쉽게 감동하는 ‘아이 같은 감수성’에서 나온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최고의 여배우잖아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하고 대답한다. 그녀에게 ‘우회적’ 혹은 ‘외교적’ 표현은 쓸데없다. 겸손이나 교만은 세상을 잘 아는 어른들의 태도다. 전도연에게 곤란한 질문을 해보라. 그러면 교묘하게 피해가는 대신, “언니~” 혹은 “오빠~”를 부르며, 주위 사람에게 구조 요청을 할 것이다. 영화 현장에서 그녀는 늘 두려움을 모르고 뛰어든다. 물론 약간 엄살은 부리지만. 엄마와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위험에 처한다면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전도연은 어른의 몸인 채 아역 배우의 영혼으로 몰입한다. 그리고 순진한 본성으로 획득한 아홉 편의 필모그래피. 감독들은 매번 업그레이드 된 전도연이라는 신용카드를 여봐란 듯이 내놓았다. 그렇게 오랜 정절을 깨고 내장 속까지 흥분이 스며들게 하는 정사(<스캔들>), 불륜인 채 아침 식탁 위에서 남편에게“콩나물국 시원하지?(좰해피엔드좱의 애드립이었다!)”, 두뇌 깊은 곳까지 서늘하게 식혀버리는 유전인자로 폭죽 같은 놀라움을 안기는 이 ‘여배우’의 업적의 중심엔 과연 무엇이 있는 걸까? | |
아워 글래스 실루엣을 연출하는 바이올렛 컬러의 벨벳 재킷과 스커트는 커스튬 내셔널(Costume National),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리본 모양의 귀고리는 레쿠(Les Koo), 실버 클러치백은 지미 추(Jimmy Choo). 네크라인 부분이 V자로 깊게 파인 초콜릿빛 원피스는 클로에, 모피 코트는 사바티에(Sabatier).(오른쪽) “제가 관심 있는 건 사랑 얘기뿐이에요. 제가 출연한 아홉 편이 다 사랑 얘기예요. 전 사랑이 없으면 너무 슬퍼지고, 할머니가 된 것 같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이>도 여성 액션 무비다, 펄프 누아르다, 그러시는데 저한텐 사랑 얘기일 뿐이에요. 가령 독불이(정재영)가 수진이(전도연)와 경선이(이혜영) 두 여자를 무지막지하게 때려도, 차이가 있어요. 경선이는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지만, 수진이는 주먹으로 안 때려요. 저한텐 그 차이가 너무 중요해요.<해피엔드>의 최보라와 일범이(주진모)의 사랑도 그래요. 아기한테 수면제 먹이고 나갈 만큼 최보라한테는 가슴에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은 거거든요. 너무 슬픈 장면이, 일범이가 아이 업고 가다가 그래요. “우리 그냥 같이 죽을래?”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들 최보라를 팜므 파탈이다, 센 여자로 보지만, 누구나 숨기고 있는 욕망, 결혼했는데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를 보여줬기 때문에 불행해진 거예요. 아, 그래서 나도 결혼 일찍 하지 말아야지…(웃음).” 전도연이 스크린에서 가장 빛날 때는 사랑에 빠져 정말 ‘또라이’처럼 허우적 거릴 때다. 머리카락을 쿠킹 호일로 감싸 염색하면서 ‘여인 2’라는 익명의 아이디로 컴퓨터 통신세대의 사랑법을 연기할 때(<접속>), 깡패(박신양)에게 눈 멀어 성당에서 눈물 콧물 짜내며 결혼식 올릴 때(<약속>), 동그란 이마를 드러낸 채 아이를 업고, 시골 학교 총각 선생님(이병헌)을 짝사랑할 때(<내 마음의 풍금>), 주근깨 투성이 얼굴에 그 예쁜 종아리로 제주도 돌담길을 통통통 뛰어다니며 우체부(박해일)에게 줄 부침개를 걷어올 때(<인어 공주>), 바람둥이(배용준)의 사랑 게임에 빠져 빨간 머플러를 남긴 채 얼음구덩이 속으로 퐁당 빠져버릴 때(<스캔들>), 심지어 벙어리인 채로 도시에서 온 청년(소지섭)에게 가슴앓이 하다 녹차밭 언저리에서 죽어가던 베스트셀러 극장(<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에서도. 그 ‘사랑’이라는 순진한 본성 어디에 내숭이 끼어들 새가 있었나. <피도 눈물도 없이>를 함께 촬영했던 이혜영은 예의 그 카랑카랑한 비음으로 전도연을 정의해 버렸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촬영할 때, 남산 한옥마을 마루에서 가채를 쓴 채, 이미숙은 말했다. “도연이는 장애인도 할머니도 할 수 있는 여배우예요. 자기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근성이 없는 여배우라면 죽었다 깨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난 요즘도 가끔 <약속>을 보고 울어요. 그 똑부러진 여의사가 남자랑, 깡패랑 결혼해서 살겠대잖아요. 세상에 그런 아픈 사랑이 어디 있어요?” | |
애정과 보호 없이는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전도연이라는 본능을 지탱하는 것은 몇 번을 리와인드시켜도 맹목적인 사랑이다. “가장 미치겠을 때는 내가 연애를 못하고 있을 때. 연애는 끝없이 계속 하고 싶은데… 내가 엄마 아빠에게 받은 게 감수성… 그런데 감정은 실제로 자꾸 써야 발달하는 거거든요.”이 여자를 끝까지 책임지겠음’이라는 각서를 쓰고, “나 살다가 죽을 거면 은하랑 살다 죽을래”라고 엄마 앞에서 바보처럼 우는 시골 총각 황정민의 맹목적인 순애보 <너는 내 운명>의 은하는, 결국 사랑의 시험이라는 야곱의 사다리로 향한 그녀의 마지막 판타지 같은걸까. “모르겠니? 나 걸레야!” 다방 레지에다 에이즈까지 재앙처럼 닥친. 결국은 나 이래도 사랑받고 싶다고 방백하는. 좰너는 내 운명좱의 박진표 감독은 전도연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전도연은 실제 부부인 70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나와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하는 박진표 감독의 따뜻한 러브 스토리 <죽어도 좋아>를 보았고, 금세 아이처럼 감독을 따랐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죽을 때까지 보호자가 돼주는, 70대가 돼도 결코 누추해지지 않을, 사랑의 온화한 열기가 전달될 거라 믿으면서. “나는 비디오 테이프로도 내 연기를 다시 안 봤어요. 연기적으로 자꾸 부족한 것만 보이니까. 근데 뭐랄까.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는 것처럼, 영화도 그래요. 저더러, 전도연은 영화에서 안 보이고 배우 전도연만 보인다, 그러죠? 근데 전 영화에서 제가 보여요. 나는 늘 보호받고 싶어하는구나. 주체적으로 독불 장군으로 그렇게 못 살고, 자꾸만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어하는구나. 그 모습을 확인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내 영화 보기가 싫은가 봐….” | |
그리고 여배우의 일상을 파파라치처럼 밖에서 관찰한다는 컨셉의 촬영 중, 사진작가 김상곤의 렌즈가 다급하게 거리를 좁힌 건 그즈음이었다. 작은 어깨 위로 검은색 브래지어 끈이 흘러내리고, 흰빛 이마가 파르르 경련하며 파란 신경선을 가닥가닥 드러냈다. 아! 저 이마. 사랑을 잃으면 금세 공포에 사로잡히는 아이처럼, 거부된 관능을 물리적으로 폭발시키는 저 이마. 닦으면 닦을수록 다른 표정을 드러내는 마법의 램프 같은. “그래요. 이 앞짱구 이마. 만약 내 이마가 좁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리고 한글 문법의 의성어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어린 망아지같이, 어깨가 요동치며 입천장까지 발열하는 웃음. “어렸을 때 좰슈퍼선데이좱라고 임백천 씨하고 쇼 프로그램 MC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PD 선생님이 그랬어요. “너는 얘기 하지 말고 웃고만 있어라. 사람들은 네가 깔깔 대고 웃는 모습을 좋아한단다.” 그것은 조금도 신비롭지 않다. 송어만큼 작고 귀여운 상어처럼. 이지 리스닝 계열의 그 높고 낙관적인 음색. 상냥한 채로 다부진. “20대 때는 술을 많이 마셨어요. 사람을 사귀는 데 너무 서툴러서… 전 친구도 한두 명밖엔 없고,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일하는 재미를 알게 된 건 20대 중반부터. 일을 할 때 내 자신이 가장 빛나는구나, 그런 각성이. 그런데 어느 순간 남자 배우들 위주의 시나리오만 나와서 상처도 받고 슬럼프에도 빠졌고. 난 에너지가 이렇게 많은데… 나 하나를 위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구나. 작년에 MBC 영화대상에서 황정순 선생님 보고 저 울었어요. 내가 13년이나 정말 치열하게 일했는데, 배우로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 줄도 모르겠고, 이젠 시집가는 일밖엔 없겠다, 탄식했던 게 송구스러워서. 황정순 선생님 보니까… 아, 내가 한 게 없구나,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나중에 그분처럼 영화제에서 공로상, 그런 거 받을 수 있을지 아님 결혼해서 살더라도 더 치열하게 살자, 그런 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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