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녹다
소설가/손흥규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에 딸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
날이 흐린 탓에 보름달인데도 밝지가 않았다
우리는 함께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달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주고
싶었기에 무슨 표현을 고르면 좋을지 잠시 고민을 했다.
어쨋든 그럴듯한 비유를 찿아보려 애쓰는데 딸아이가 아무렇지도 함께
말하는거였다.
"아빠.달이 녹았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혀끝에 맴돌던 모든 말들이 스르르 녹아버렸다
그래.달이 녹았구나
그보다 더 그럴듯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을것만 같은 말이었다
이토록 간명하고 순진하고 투명한 말을 잃어버린 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이 내가 보는 세상과 퍽 달라보여서이다
같은 세상을 보고 있음에도 아이들의 눈에 더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보다 더 비밀스럽고 아름답다는 사실 앞에 고요히 무릎꿇고
싶어서이다.
아이들의 말은 시인의 말에 더 가깝고 그건 곧 우리 모두 한때 시인이었다는
뜻이기도 할 거다
그에 비하자면 정치인의 말은 얼마나 졸렬한가.
일본불매운동이 시작된 이후 국회의원같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읽으면서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막말이다.거칠고 상스럽다.
그들도 어린시절이 있었을테고 흐린날 달을 가리키며 달이 녹았다고 말할 줄도
알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의 언어에서 누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언어는 앙상하기 이를데 없고 혐오의 감정 이외에는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어를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언어로 이 세계가 더 거칠어지고 상스러울테니까.
막말이라고 해서 다 거칠고 상스러운 건 아니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설을 듣고도 웃는 이유는
욕설에 담겨있는 진심을 헤아릴 수가 있어서이다
친한 친구들과 이따금 비속어를 나누는 사람은 친구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 말의 내부에도 있음을 안다
진짜 막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소설가/손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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