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월요일) 사순절 35일차 - 백부장이 간청한 것
말씀제목
- 백부장이 간청한 것
말씀본문 - 마태복음 8장 5-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개역개정)
말씀묵상
백부장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로마 군대 장교입니다. 이방인이었던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합니다. ‘간청하다’는 헬라어 ‘파라칼레오’의 뜻은 절박함, 절실함입니다. 그가 절박한 것은 중풍병으로 고통당하는 종 때문입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종을 소유물이 아닌 한 생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고통당하는 생명에 대한 아픔을 함께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에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백부장이 바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청은 절박함입니다. 사실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그러합니다.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간청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백부장이라면, 천부장, 만부장으로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본문에 간청하는 사람을 백부장으로 말한 것은 바로 성공을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을 설정해 두신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방인 백부장은 자기의 유익을 간청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종의 아픔을 마치 자신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종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백부장의 종이 앓던 병은 중풍병입니다. 그런데 역시 명사가 아니라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되어 있습니다. 형용사 ‘파라뤼티코스’의 뜻은 ‘마비된’입니다. 왜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기록되어 있을까요? 종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주인에 의해 억눌린 사람, 마비된 사람입니다.
단지 종만이 아닙니다. 로마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있는 피식민지 이스라엘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의존성, 타율성만 있을 뿐 자율이, 사고와 판단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로마 군대 백부장은 이 괴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누워서”, “괴로워하다” 모두 수동태입니다. 놀랍습니다. 지배자인 로마의 백부장이 그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지배자는 지배를 누릴 뿐 지배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모릅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의 상처를 모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은 그 기득권을 누리느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피식민지 백성을 마비시킨 죄를 알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죄는 대개 병으로 표상됩니다. 놀라운 것은 이 백부장, 이 죄, 이 병을 치유할 분이 누구인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아와 정확하게 부릅니다.
“퀴리에! 주님!”
결국 이 병은 기득권자인 백부장의 믿음으로 치유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간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마비됨을 보고 누구의 마비됨을 간청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주신 권한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주신 것입니까?
찬송
201장 참 사람 되신 말씀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기득권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고, 거기에 만족하질 못하고 더 크고 더 높은 권세를 달라고 기도하고 간청할 뿐, 나로 인해 마비된 이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이들을 마비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힘을 가지고, 마비된 이들, 고통하는 이들을 위해 간청하게 하소서. 세상을 찾아가 나를 위해 구하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가 저를 위해 간구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