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시 방한에 때맞춰 나온 포상금 발상도 그런 광기를 부추겼을 것이고, 직업 경찰관들이야 승진 문제로 위에서 압박을 가하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시민을 짓ㅤㅂㅏㅀ은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순사와 고등계 형사들 밑에서 먹고 살겠다고
시작했던 한국인 순사들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근대 경찰 제도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한 때문이다. 8월 5일과 6일,
그들을 보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폴란드의 유태인 게토에서 살아남겠다고 나치의 개가 되어 동족 유태인을 학대했던 유태인 경찰들1과 강제 수용소에서 나치의 동족 학살을 돕던 "카포"들이 떠올랐다2.
그 유태인 경찰들도 "생존"을 위해 동족을 때리고 차고, 뇌물을 받으며 부패해갔다. 경쟁 위주, 실적 위주가 낳은 폐해다. 이미
경찰은 시민을 위한다는 생각은 버린 것 같다. 지난 10년에 비해 경찰은 확실히 새롭게 태어난 것은 맞는 것 같다.
소회는 적당히 쓰고, 8월 5일 본인이 찍은 사진 위주로 정리해볼까 한다. 모든 현장을 다 지켜본 것은 아니어서 빠진 부분도 있고 그렇지만 양해바란다.
8
월 5일, 16시에 서울역광장에서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안티이명박카페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이것저것 장비를 챙겨들고
서울역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울역광장에서는 전혀 집회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경찰이 차벽을 설치하고 서울역광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중에는 얼마 전 창설된 21세기 경찰 기동대(속칭 "백골단")도 있었다. 서울역광장 앞에서
집회가 그렇게 두려웠나 싶었지만, 멀지 않은 하얏트 호텔에서 부시가 머물 예정이었으니 그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어쨌건 서울역광장은 검은 옷의 남자들로 가득했다.
이
2장의 사진이 8월 5일 17시 경의 서울역 광장 모습이다. 지하철에서 서울역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에도 방패를 세운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 바로 옆에는 휴가 나온 해병대원 한 명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
있던 집회 참가 예정자로 보이는 사람은 모두 합해 30 ~ 40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 평일 낮이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도저히
집회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청계광장에서 무차별 연행이 자행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광장에 앉아
있는 사람도, 근처 인도에 서 있던 사람도 일단 무작정 경찰 버스에 태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소식과 함께 17시 부터
다른 단체에서 신고한 집회가 보신각에서 열린다는 소식도 함께 가져왔다. 결국 서울역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종각으로 이동했다.
17
시부터 열린다는 집회는 도착해보니 17시 30분으로 되어 있었다. 민노총 이름이 새겨진 익숙한 무대 차량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경찰도 있었다. 경찰은 길 건너편 구 국세청 건물 앞 작은 광장에 부대 별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속속 모이고 있었다. 숫자는
많치 않았다.
제
일 왼쪽은 얼린 생수를 1000원에 팔고 있던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가운데 사진은 국세청 건물쪽에서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이다.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걸 보니, 뉴라이트와 CJD의 논리대로라면 저들은 빨갱이다. 제일 오른쪽 사진은
표명렬 예비역 장군이 회장으로 있는 평화재향군인회에서 나온 노인들이다. "내무반에 한겨레 보내기 운동"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내가 자리를 뜰때까지 보신각 앞에 모인 사람들은 고작 200여명 정도로 보였다. 더 쳐준다고 해도 300명? 더운 날씨때문이라
생각하고 나 역시 근처 커피집에 들어갔다. 내가 다시 나왔을때는 불과 1시간 20분만에 인파는 수만명이 되어 있었고, 그들은
청계광장으로 행진을 벌였다.
을
지로로 가는 줄 알았던 행렬은 광교에서 방향을 바꿔 청계광장으로 향했다. 태평로와 동아일보 사옥 주변에는 경찰 차벽이 설치된
상태였지만, 광교 방향으로는 차벽이 없었다. 그곳을 향해 수만명이 한꺼번에 움직여 청계광장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보
신각에서 청계광장까지 짧았던 거리행진의 선두에는 강기갑 의원을 비롯한 민노당 지도부가 앞장서고 있었다. 출발한 지 15분 정도
밖에 안되어 시위대는 청계광장에 진입했다. 경찰은 2주 연속 집회때마다 모전교에도 차벽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지만, 이날은 완전히
실패였다. 보신각에서 출발한 수만명이 청계광장을 가득 메우는 바람에 뒤늦게라도 차벽을 세울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다. 경찰이
초저녁부터 색소가 섞인 물대포를 쏘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도 초장에 이렇게 뒷통수를 맞은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청
계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그리고 깃발들의 모습이다. (19시 05분) 막 시위대가 청계광장에 진입한 직후의 모습이고, 무대도
없었다. 그런 거 준비할 틈도 없는 기습이었다. 결국 봉고차 한 대가 왔고, 진행자는 그 봉고차의 지붕에 올라가서 집회를
이끌었다. 그러고 있는데 한쪽이 소란스러웠다.
태
평로 쪽은 일찌감치 막혀 있는 상태였지만, 인도는 일부 열려 있었다. 경찰 버스가 사각형으로 둘러싼 건물은관광안내소다.
관광안내소를 저렇게 4면으로 버스로 막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뭏튼 저 얼마 안되는 틈으로
나오던 노인들이 욕설을 퍼부어댔고, 또 매우 불쾌해진 시민들이 그에 맞서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사진 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고, 욕설과 고성 위주의 말싸움이 전부였다.
시
위대와 그리고 그들을 찍는 카메라 1대. 저 카메라는 이 날 청계광장의 모습을 어떻게 찍었을까? 시위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늘었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18시에 저렇게 청계광장을 가득 메울 수 있는 수만명이 모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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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6분, 동아일보 사옥 앞에도 당연히 버스와 버스로 완전히 막았던 경찰이다. 여기서 마찰이 일었다. 청계광장으로 수만명의
시위대가 들어오자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유모차 부대가 청계광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들을 가로막고 섰다. 계속
항의를 하고, 겁에 질린 여자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시민들은 청계광장을 빠져나가려는 시민들을 가로막고 통행권을 짓밟은 경찰에
분노하여 지휘관을 부르며 길을 열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유지부동이었다. 항의가 거세지고 기자들도 달려오자 앞쪽에 있던 일부
아주머니와 아기들이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곧 길은 다시 가로막혔다. 여기가 무슨 홍해도 아니고.
항
의하는 아주머니와 그냥 길만 계속 가로막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 전의경들을 앞에 내세우고 지휘관은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민들이 계속 지휘관을 불러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자아이 하나가 엄마와 떨어져 경찰들 뒤에 있는 것
같았다. 한 아주머니가 경찰에 전화를 했지만, 전화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전화를 받은 직원은 계속 딴청을 부리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계속해서 울고 있는데도 그 소리가 왜 안들리냐고 그 아주머니는 항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지부동인 듯
했다. 전화를 받은 경찰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힘없겠지.
항
의하는 시민들을 채증하고 있는 경찰. 집시법의 채증 관련 예외 규정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채증을 해도 되는 상황인지
무척 의심스럽다. 길을 빼앗긴 시민들은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계광장을 빠져나가려던 것 뿐이다. 그런데 저렇게 채증을 해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길
을 막은 전의경들 중 고참인듯 했다. 다른 사진에도 찍혀 있지만, 이들은 계속 난감한 표정이었다. 명령과 항의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지금 그들이 가로막은 길을 열고 닫을 권한은 그들에게 없으니 말이다. 항의하는 시민들도 그걸 알기에
지휘관을 계속 찾았지만, 10분 이상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
이 열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전경들이 모두 아래를 쳐다보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보다 조금 뒤쪽에는 아이의
손과 발이 보일 것이다. 그 아이는 어찌하다가 엄마와 떨어져 경찰들 뒤에 있게 된 남자 어린이로, 전경 하나가 품에 안아서
데리고 오는 중이다. 전경들이 내려다보는 것은 여자 아이 였던 것 같다. (사다리가 없어서 정확하게 이들이 뭘 보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속으로 무엇을 생각했을까? 다음에 군복무하게 되면 자기들 후임이 되기를 바랬을까?
그들을 찍고 있는 한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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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43분, 경찰은 결국 저 조그만 틈도 버스로 막기 시작했다. 유모차부대는 아이를 되찾고 나서 별 수 없이 모전교쪽으로 해서
청계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들에게 어이없던 것은 유사 군복을 착용한 어떤 노인은 신분을 물어보지도 않고 당연히 홍해가
갈라지듯이 길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그 노인은 시청광장에서 열린 동원된 집회에 참석한 노인이었다. 카메라를 들이댔을때는 이미 그
노인은 경찰들 틈으로 사라진 후였고, 그 후 경찰은 아예 버스를 밀착시켜 길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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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9분, 종로구청 가는 길이다. 이미 물대포와 경찰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빨리 물대포가 시민들과 가까운 곳으로 밀고 들어온
것은 못본것 같다. 이미 19시 40분에 경찰은 차벽 뒤에서 매우 단호한 어조로 해산 경고 방송을 했고, 종로에 물대포를
배치했다.
20시 06분, 물대포 앞에는 전의경들이 배치되었고, 물대포 옆에는 여경들이 배치되었다.
20
시 09분, 달리기 시작한 경찰들. 모전교쪽으로 첫번째 진입을 시도했다. 반대편에서도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다시 뒤로 물러났다. 후방에 있던 시민들은 경찰 진입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소라기둥앞에서는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른다.
20시 10분 경, 중년 남성 1명이 여기서 연행되었고, 5분 뒤에는 종로구청 방향으로 오른쪽 인도에서 전경이 치고 지나가자 왜 치냐고 항의하던 여성 1명이 연행되었다. 다른 1명은 연행 직전에 시민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모
전교 입구까지 내려왔던 경찰이 도로 종로구청 방면으로 후퇴하자 이번에는 기자들이 우르르 경찰 앞으로 몰려왔다. 시위대는
모전교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좌우측 인도에는 수십명의 시민들(시위 참가자와 그냥 지나가던 시민들)이 몰려 있었고, 얼핏 보기엔
그들보다 많은 수의 기자들은 경찰 앞에 섰다. 좀 웃긴 광경이지만, 경찰과 기자들이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이 사진은 20시
21분에 촬영했다. 2분 뒤, 경찰은 처음으로 색소 물대포를 쏘았다.
발
사 순간과 하늘을 가르는 빨간 물줄기. 선명한 빨간색은 아니고 갈색에도 가까운 빨간색이었다. 1차 살수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물대포에 섞인 색소가 어떤 색인지는 충분히 알만했다. 하지만 나중에 종로에서 살수한 색소 섞인 물은 매우 선명한 빨간색이었다.
살
수가 있은 지 7 ~ 8분쯤 지나 "한미FTA저지 기독교 대책회의" 깃발을 선두로 촛불교회 목사와 관계자들이 촛불을 들고 경찰
앞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경찰의 폭력진압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었다.
20
시 33분, 촛불교회 관계자들이 자리를 잡고 서자마자 두번째 살수가 시작되었다. 이번 살수는 색소를 섞은 것은 아니었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얼마 쏘지도 않았다. 1분도 채안된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내 시야가 물줄기에 가있는 사이 경찰은 연행을 시도했는데,
이때 경찰이 연행하려 한 사람들이 촛불교회인지 여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온 사방에서 고함과 플래쉬 터지는 소리, 플래쉬 빛들이
번쩍번쩍하면서 상황 파악이 잘 안되었다.
왼
쪽 사진을 보면, 촛불교회 목사는 뻘쭘하게 서 있고, 기동복을 입은 경찰들은 앞에 대원의 옷깃을 잡고는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촛불교회 관계자들은 오른쪽 사진처럼 연좌에 들어갔다. 경찰이 이때 시위대를 연행하려 한 건지, 시위대를 인도로 몰아내려고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무렵에 종로쪽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들이 인도를 따라 다시 수m 전진하여 인도에 있던 시민들을 청계광장으로 밀어냈다.
경
찰 움직임이 이상해서 뒤로 가보니 어느 틈엔지 모르게 청계광장의 시위대는 모두 빠져나간 후였다. 그들은 다시 보신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는 전혀 다른 길로 해서 종로2가로 향했다. 이 사진은 20시 49분에 찍은 것이며, 청계광장에 있던 시위대가
모두 빠져나간 것을 안 경찰이 급히 구보로 보신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모전교쪽은 차벽으로 막힌 상태는 아니었지만, 아래쪽
물길과 위쪽 길 양쪽으로 해서 한꺼번에 이동한 것 같다.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렇게 빠져나갈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누구
보신 분 제보 좀....). 경찰은 또 시위대에 2번째로 당한 꼴이 되버렸다. 뛰기 싫어하는 나는 천천히 보신각으로
걸어갔다(다이어트도 좋지만 그 짐을 들고 뛰기는 좀 무리인지라...).
보신각 앞에서 어떤 시민이 만들어온 영어 피켓 한 컷.
보
신각에서 종로3가 방향으로, 도로에 나가보니 강기갑 의원과 민노당 당직자들이 다시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들 옆에는 한
어머니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같이 했다. 경찰의 기습 진압 이후 그 어머니와 유모차는 보지 못했다. 그저 별 탈없기를 바랄
뿐이다. 강기갑 의원 일행이 마주한 것은 물대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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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일 새벽 이후 어김없이 등장하는 노란색 물대포다. 이 차량이 구형이라고 알고 있다. 이 물대포를 중심으로 앞뒤로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진 오른편에 파란색으로 반짝하는 것이 보일텐데, 헬멧 뒤쪽에 각 부대별로 부착한 부착물이 플래쉬를 받아 빛난
것이다.
이
무렵부터 경찰의 1차 진압이 있을때까지 경찰 및 시위대의 위치다. 경찰 일부가 시위대 양쪽에 포위당했지만, 시위대1도 사면으로
포위당한 상태다. 이 대치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참고로, 시위대2와 중간에 낀 경찰의 위치는 대략적인 것이다. 시위대2는
주로 대학생들 위주였다. 이들은 청계광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 모여서 이곳으로 행진을 한 것 같다. 청계광장에서는 보지 못했다.
물대포는 이날 본 것은 4대였다. 세종로 방면으로 2대, 그리고 중간에 낀 경찰쪽에도 2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21시
14분, 종로2가쪽에서 상호 대치하고 있는 경찰과 시위대다. 왼쪽 사진이 상황도에서 시위대2라 표시한 시위대고, 오른쪽 경찰은
중간에 낀 경찰이다 이 두 집단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이격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채 30분도 안되어 경찰이 시위대1을 먼저
침으로써 끝나버렸다.
경
찰이 진압을 개시할 무렵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강기갑 의원이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 중에
경찰이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공당의 대표이며, 현역 국회의원인 강기갑 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으니 경찰이 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들 긴장을 풀고 있었던 것 같다. 7월 26일이나 8월 2일같은 경우, 경찰이 진압 움직임을 보이자 시민들은 스크럼을
짜며 대비했지만, 8월 5일에는 전혀 그런 것도 없었다. 이때도 물대포도 필요없었고, 쓰지도 않았다. 내 앞에 있던 시민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인도로 뛰기 시작했고, 사거리쪽에서는 깃발들이 한쪽으로 황급히 달리는 것이 보였다. 공황 상태에 빠진
시위대는 일제히 좌우 인도로 흩어졌다. 초저녁에 2차례 시위대에 어퍼컷을 먹은 경찰이 이번에는 스트레이트를 날린 셈이다. 경찰
지휘부는 종각역 4거리와 종로2가사이에 포위된 경찰이 먼저 당하기 전에 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21시 27분, 보신각쪽 인도다. 시민들은 인도로 밀어붙이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지도 못했다. 그저 일방적으로 방패에 맞고 두들겨맞으며 밀려났다. 오른쪽 사진에서 경찰 한 명이 방패를 수직으로 세워 시위대의 등을 가격하고 있다.
21시 27분, 중년 남성 한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세게 팔을 붙잡혔는지 "팔 부러진다!" 라며 계속 소리쳤다.
그 뒤를 인권연석회의에서 나온 사람이 무자비한 연행에 항의했으나, 경찰은 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이 남성은 호송차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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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8분, 사거리 중앙에는 여전히 민노당 당기와 강기갑 의원 일행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기자들이
2중 3중으로 거의 스크럼을 짠것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다리가 없는 카메라 기자들은 저렇게 어떻게든 한 컷이라도
건져보고자 높이 들어 사진을 찍었다(저 포즈로 좋은 사진 얻기는 정말 힘들다). 좀 전에 있었던 경찰 진압 과정에서 강기갑 의원
일행도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당직자들은 다시 원래 들고 있던 현수막을 피려고 했다. 하지만 기자들이 하도 몰려서 결국 피지는
못했다. 오른쪽 사진 우측 중앙에 강기갑 의원의 머리가 보인다.
강
의원과 당직자들은 그 자리에서 연좌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사과가 있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면서. 하지만 그 후 강의원과
지도부, 당직자들은 명동성당에 나타났는데, 사과를 받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명동성당 앞에서 이들 중 당직자 5명이
연행되었다.
시민들은 인도로 밀려났고, 도로에는 경찰과 기자들만 섰다. 하지만 시민들은 다시 탑골공원에서 시위대2에 합류했다. 아마 종로2가 뒷골목을 통해서 이동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경찰들 뒤를 쫓아갔다.
왼쪽은 상황 수습 후 대열을 정비하는 경찰들이며, 오른쪽은 탑골공원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물대포의 뒷모습. 이 물대포들은 종각4거리 진압때까지 시위대1쪽을 향해 섰던 차들인데 U턴하여 천천히 종로2가로 기동대와 함께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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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3분, 탑골공원 4거리. 이곳에 도착한 물대포는 좌회전하며 낙원상가로 향했다가 거기서 다시 U턴하여 섰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시위대가 종로2가 사거리를 점거하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7월 26일 종각역 사거리에서처럼 3면
포위 공격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이날 시위대는 횡단보도 건너 사거리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거리 중앙에는 많지 않은
숫자의 시위대와 칼라TV를 비롯한 취재진들이 섰을 뿐이었다.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경찰은 정면 승부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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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04분, 지난 7월 26일, 수많은 연행자가 나왔던 버거킹이 있는 곳 인도로 의경 중대가 갑자기 밀고 들어왔다. 인도에 있던
시민들이 "여긴 인도니까 내려가라"며 항의했지만, 경찰은 버거킹 벽에 붙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가운데 사진 중앙의 녹색 포스터
앞에 선 안경낀 사람은 내가 아는 한겨레 기자인데 시민과 경찰, 그리고 벽 사이에 꽉 끼어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중. 갑자기
경찰이 인도로 밀고 들어와 미처 피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난 22시 13분, 낙원상가쪽에 있던 물대포가 다시 살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색소가 섞이지 않았지만, 몇 초 뒤에 색소섞인 물을 쏘기 시작했다.
곧 바로 색소 섞인 물이 발사되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 발사한 색소 섞인 물은 무척 빨갛다. 얼핏 보면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빨간 물감은 피와 달라서 투명하다. 저게 진짜 피라면 바닥의 차선은 보이지 않을 거다. 물
대포 발사는 약 3분 정도 계속되었고, 그 다음에 바로 검거 작전이었다. 경찰들은 달리면서 시민들을 연행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1차 목표는 색소가 묻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날 색소 섞인 물을 가장 많이 맞은 사람은 녹색 조끼를 인권연대회의
사람들이었다. 물대포가 발사되는 동안 시민들은 사정거리 밖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며 뒷걸음질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3분여 밖에
쏘지 않은 것도 그때문인 듯싶다. 그러자 경찰은 우의를 입고 있으면 일단 "묻지마 연행"을 하기도 했고, 어떤 경찰 지휘관은
여성 시위자가 자기를 꼬집었다는 이유로 연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지휘관을 꼬집을 수 있는지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스킨 푸드" 매장 사건은 아시는 분들 많을테니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경찰 몇 명이 시위대를 쫓아
가게로 쳐들어갔고, 그 뒤를 곧장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내가 본 것은 기자들이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부 시민들은
인도에서 스크럼을 짜며 경찰이 더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가게 안쪽에도 시민들이 여성 시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들어가서
소동이 커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가게 주인, 경찰에 피해보상 소송을 하겠다고 했고, 승리하시길 빈다.
한
겨레 신문 기사에도 기자들과 마찰이 곳곳에서 벌어졌다고 나왔지만, 이 양반도 그 마찰의 희생양이다. 이 사람은 정식 언론사
기자인데, 경찰에 무슨 짓이냐며 항의하는 중이었다. 폭행을 당했는지, 카메라를 경찰이 쳤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전의경들이 몰려왔고, 일부 기자들은 경찰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는 이후 이곳을 나와 잠시 청계광장에 들렀다. 청계광장으로 가는
도중, 탑골공원과 대각선 맞은편에서 경찰과 시민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
찰이 인도로 올라오려 하자 시민들이 내려가라며 못올라오게 막고 있는 것이다. 일부 언론보도에 "포장마차 장사 좀 하게
내려가라"라며 시민들이 항의하자 포장마차 주인들이 좋아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곳 같다. 어떻게든 인도로 올라오려던 경찰과
어떻게든 차도로 내려보내려는 시민들 사이 몸싸움은 치열했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경찰이 좁은 인도로 마구잡이로 올라오려 하는 것에
불만을 토했다.
이날 연행은 곳곳에서 있었다. 종로3가에서 경찰 버스 안에서 연행자가 구타당하는 동영상도 떴는데, 그 여파인지 경찰은 연행자를 버스에 태울때 방패로 벽을 쳤다. 차벽에 이어 방패벽이다. 사
진이나 동영상 촬영을 막기 위해서다. 이들은 카메라 방향에 따라 방패 위치를 바꾸며 촬영을 방해했다. 결국 누가 잡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건 뭐 날라오는 화살막기 위해 거북대형으로 전진하는 로마군단도 아니고. 이 광경은 시위대가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 종로2가에서 물대포를 따라 명동쪽으로 가다가 찍은 것이다. 일부 시민들은 명동성당으로 모였고, 일부는 퇴계로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또 게릴라 시위를 벌였는지는 모르겠다.
자정 즈음, 명동성당으로 오는 강기갑 의원과 시민들. 명동성당에 먼저 와 있던 시민들이 박수로 이들을 맞았다. 강기갑 의원의 표정은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것 같다.
강
의원 일행은 명동성당 앞 계단에 저렇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나도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8월 6일 새벽 3시, 명동성당 앞 계단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길가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무차별
연행해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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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이명박 정권과 아돌프 히틀러 정권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역사책과 영화에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에도 이 유태인 경찰이 등장한다.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이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 스필만과 안면이 있는 유태인 경찰이 그를 대열에서 빼내 살려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스필만의 가족을 포함한 게토의
다른 유태인들은 스필만을 빼낸 그 유태인 경찰의 손에 의해 열차에 태워져 강제 노동과 가스실이 기다리고 있는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로 "이주"당했다 (나치는 "이주"라고 표현했다) [본문으로]
첫댓글그 다리쪽 모전교 쪽에 있었는데요. 견찰들이 큰도로쪽과 작은 도로쪽 기억자로 막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밀려 오니까..다른쪽도 막아야 한다 하고 하다 보니 구멍이 생긴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루루 몰려가서 종각쪽 청계천 옆 도로(?)로 밀고 갔습니다. 다시 중간에 자르더군요. 항상 우리가 가두 나갔던 그 도로쪽에서 잘랐었는데 다시 구멍이 생기길래 구멍으로 밀고 나와서 종각쪽으로 나왔습니다. 사거리에서 있다가..많은 시위대사람들이 나오더군요.청계광장 쪽에서요..그래가지고 가두행진 할줄 알았더니 그냥 안하고 버티고 술레잡기 작전을 한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날 견찰들 약이 바짝 올랐을 겁니다.ㅋ
첫댓글 그 다리쪽 모전교 쪽에 있었는데요. 견찰들이 큰도로쪽과 작은 도로쪽 기억자로 막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밀려 오니까..다른쪽도 막아야 한다 하고 하다 보니 구멍이 생긴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루루 몰려가서 종각쪽 청계천 옆 도로(?)로 밀고 갔습니다. 다시 중간에 자르더군요. 항상 우리가 가두 나갔던 그 도로쪽에서 잘랐었는데 다시 구멍이 생기길래 구멍으로 밀고 나와서 종각쪽으로 나왔습니다. 사거리에서 있다가..많은 시위대사람들이 나오더군요.청계광장 쪽에서요..그래가지고 가두행진 할줄 알았더니 그냥 안하고 버티고 술레잡기 작전을 한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날 견찰들 약이 바짝 올랐을 겁니다.ㅋ
화덕내가 풀풀 나는 땡볕 더위에 시커먼 제복을입고 시커먼 무장을하고 무슨 불구덩이로 들어갈일있나*하늘에서 불벼락으로 저꺼무딕딕한눔덜에게 쌍벼락이나 속션하게 쎄리갈기쉽솨요 제발 비나이다 그래두 덩신안차리면 다리몽뎅이를 부러트립시요 늑슨하게 아작내쉽시요 꼭 소원성취하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