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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단에서 대표적인 소설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문열씨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리스 신화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카로스는아버지가만들어준날개를달았습니다. 아버지가준것입니다. 그는아주자랑스럽게하늘을날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오만해진그는태양을향해더높이날고싶은마음이생겼습니다. 더자랑하고싶었습니다. 그렇지만그가단날개는단지초로붙여져있습니다. 태양을향해초로붙인날개로비상을시도합니다. 하지만, 이카로스가태양가까이가자태양의뜨거움에날개에붙어있는초가녹아내리자이카로스는 지상으로떨어지고맙니다. …’
여기서 소설가 이문열씨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유명한 소설의 제목을 따옵니다. 하늘을 나는 날개가 있지만 추락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자신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깹니다. 교회가 하나 되고, 가정이 하나 되고, 사회의 질서를 깨어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연합의 비결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빌 2:5)
그는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셨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이시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권위와 능력을 사용하기를 제한하셨습니다.
(2)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3)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높아지셨음을 밝혀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높아졌습니까?
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주셨습니다.
9절에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나님께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높여 주셨습니까? “지극히 높여” 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지다’ 는 의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서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능동적으로 자신의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제한하시고,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겸손하시고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나아가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 주셨습니까?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낮아지신 것은 스스로 하셨지만 높여 주시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낮아지시는 것은 능동적이지만, 높아지심은 수동적입니다. 올려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2024년 올해를 ‘선거의 해’라고 합니다. 한국의 총선이 있고, 미국과 러시아의 대선이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바이든 현 대통령과 트럼프 전대통령의 대결은 세계의 초관심사가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일꾼을 세우는데, 후보자들은 자신이 적임자요, 능력자요,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다고 자기를 뽑아달라고 합니다.
세상의 풍조는 높아지는 길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났고, 내가 능력 있고,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주시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겸손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돼 가장 높은 자리로 세워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세우고, 교회가 어려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임직자들은 자기가 잘나서, 당연히 임직을 받을 수 있는 경력과 능력과 수고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순간부터 날개 있는 추락이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는 고백 …. 철저히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에게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된 디모데에게 했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딤전 1:12)
감사하므로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가졌습니다.
성경에는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무수하게 약속해 놓았습니다.
시편 10:17 “겸손한 자의 소원을 높이 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147:6에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잠언 3:34에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29:19에“겸손한자가여호와를인하여기쁨이더하겠다”고했으며
잠언 29:23에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에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일렀으되 교만한 자를 물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잠언 15:33에 보면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겸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냥 두면 어김없이 스스로를 높이려고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높이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해주면 역정을 내고, 원망하고, 분노합니다.
여러분, 혹시나 나에게 그런 은근 슬쩍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아하, 내게 교만이 싹 트고 있구나’ ‘이제 나에게는 추락할 일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때에는 주님을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에게 나아가 가까이에서 주를 배워야 합니다. 닮아가야 합니다. 이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겨우 흉내 내고, 따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를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높여주십니까?
2. 예수님의 이름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9-10절을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이름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그 이름은 ‘예수’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어서 11절에 나오는 ‘주’라는 이름이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는데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누가요?
10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자, 땅에 있는 자, 땅 아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 땅에 있는 인간 그리고 땅 아래 지옥에 있는 마귀들을 다 포함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간에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그분의 이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분이 어떠하신 분이며 그분의 직책과 성질과 상태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보십시오.
(1)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날 때에 ‘이름을 예수로 하라’고 천사가 일러준 것입니다(마 1:21, 눅 1:30,31). 그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자이시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메시야와 동일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요 4:25-26).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그 이름을 알게 될 때에 피조물은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천국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외칩니다.
“나사렛 예수여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도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벌벌 떠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고 사람에게서 나오게 했습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귀신을 명하고 순종하게 하는가?”라고 놀라워했던 것입니다(막 1:27).
어느날가이사랴빌립보에서제자들에게묻기를“사람들이나를누구라하느냐?”제자들은예수님에게‘사람들이엘리야, 세례요한, 선지자들중의하나라고합디다’라고보고했습니다. 그때에예수님은제자들에게“너희는내가누구냐?”라고물었습니다. 이때에베드로가잽싸게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이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 16:16).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을 ‘주’(큐리오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에 보면 그의 말년에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누구 신지를 알고서 주님을 전하다가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청원합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주님과 같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거꾸로 달아주십시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살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는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생명을 겁니다.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고서 내 인생을 걸겠습니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이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높여주셨습니까?
3.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는데 11절에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이름 가운데 ‘주’는 최고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주이십니다. 주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헬라에로 ‘큐리오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로마제국의 시민들이 황제 시저의 신성함을 말할 때에 사용한 황제의 칭호였습니다. 시저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기위해 사용했습니다. “큐리오스 가이사” “가이사는 주이시다”라는 외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황제에게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용어는 오직 예수님에게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지 않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말로 인해서 환란을 당해야 했습니다.
로마정부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려낼 때에 “큐리오스 가이사”를 외치게 했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오직 예수님 만이 신성하시고 주이시기에 그렇게 외치지를 못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할 때에, 그 의미는 실제적으로 나사렛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연장 선상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이 고백은 육신의 부모가 알게 한 것도 아니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알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주(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냥 사람의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이 고백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도마가 예수님이 살아나심에 대해서 회의하고 의심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도마로 하여금 ‘네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를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했습니다. 이때에 도마는 의심을 떨쳐버리고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아도나이, 큐리오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주인, 나의 주권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예수님은 주권자가 되시고,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셔서 영광을 영원히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나의 주로, 통치자로, 심판주로 믿는 것입니다. 시인하십니까? 여기서부터 하나님 아버지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약속의 말씀 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 요한은 기도하기를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큐리오스 예수 마라나타’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을 높이 인정하고 찬양하십니다. 그 분을 높일 때에 영광을 돌려드립시다. 이것이 믿는 우리의 도리입니다.
찬송 /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오직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