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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재승형제 말씀을 들으니까 필리핀에 가면 무슨 일을 낼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그 정열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나는 이 형제와 평생을 같이 살게 된 것을 정말로 기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재승형제가 아니었으면 오늘 이 대구교회가 없다. 왜냐하면 CCC에서 밀려나온 후에 갈데가 없었다. 나는 충북 재천에 집이 있었다. 그나마 갈 데가 있었다. 그렇지만 대구에는 아무데도 있을 데가 없었다. 자취하는 학생들 몇 명뿐이니까 가 있을 데가 없었는데 재승형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재승형제도 객지고 나도 객지인데 나 혼자 그냥 갈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승형제가 어떻게 결정이 되면 그때 나도 옮기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남은 것이 오늘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재승형제와 염경선 자매가 없었으면 오늘 우리교회가 없다. 참 신기한 일이다. 너무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서울에 있다가 대구에 왔는지 그것도 참 비밀한 일이고 만나자 마자 어떻게 그렇게 좋아하게 됐는지 그것도 신기한 일이다.
요즘 MZ세대들이 만나면 그냥 짝 붙던데 우리도 만나자마자 그렇게 됐다 .이번에 필리핀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다. 미샥을 만나러 가는데 그가 사는 데가 해발 1000미터라 필리핀이지만 그렇게 덥지 않다고 한다. 기후가 아주 좋고 그런 조그마한 도시다. 가정도 아주 좋고 필리핀 사람들 대부분이 대가족이다.
미국에서도 보면 대가족인데 가족끼리 다 화목하게 사니까 대가족이 함께 살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이 미샥이 교회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자매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지금 혼자 있는 총각이다. 누구든지 지원자가 있으면 용감하게 손을 들어 말해라. 손들면 안 되니까 재승형제에게 비밀하게 말해라.
예전에 준재 형제가 나왔는데 누구 결혼할 사람이 없냐고 하니까 한 처녀가 용감하게 손을 들고 일어났다. 내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둘이 같이 살고 있다. 아주 리브가 같은 여자다. 내가 가겠습니다. 필리핀에 복음의 씨가 떨어졌는데 혼자 있으니까 외롭고 잘 안되는가 보다. 그래서 협력자를 찾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광고이다. 재승형제가 이 말을 해야 하는데 안하고 가서 내가 하는 것이다. 해발 1000미터 필리핀에 서 해발 1000미터이다.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정말 놀라운 복음이다. 며칠 전에 제주에서 경진형제가 왔다. 아주 바쁜 형제다. 관광버스를 하고 있어서 쉬는 날이 거의 없는데 쉬는 날을 틈타서 일부러 나를 만나러 왔다. 무엇 때문인가? 예수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우리는 이 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발견된다. 이런 복음의 내용인데 기독교 안에서는 예수님이 피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피조물이라고 하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됐다. 말 때문에 걸린다면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엊그제 누가 간증을 하는데 그 간증을 듣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야,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우리는 하나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으로 지으신 피조물들이다. 이러면 간단하다. 예수님만 그렇다고 하면 또 문제가 생기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러면 어디에도 틀리지 않는다. 새 피조물이다. 그러면 되겠구나.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잃어버렸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 그냥 아무나 보고 한 말처럼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이다.
언제 잃어버렸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길에 가다가 만나도 모른다. 한집에 살아도 모른다.
제자들을 봐라. 부활한 예수님과 사십일을 같이 있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그랬는데 떠나는 날 그랬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또 그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예수를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사람들이 묻는 말은 부활하지 않을 때 묻는 말을 그냥 묻고 있다.
그러면 같이 살았어도 모른다는 얘기다. 같이 살았지만 모른다는 것이다. 왜? 다 잃어버렸다. 우리의 원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생각이 날 리가 없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눈으로 확실히 보지 않으면 모른다.
옛날에 내가 미국에 처음 갔다 오면서 망고라는 과일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와서 얘기를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더라. 아무리 설명을 잘 한다고 해도 안 먹어봤으니 알겠는가. 이것 같다. 이것처럼 생겼다.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더라. 그래서 아하, 사람이 안다는 것은 보는데서 오는구나. 보는데서 오는구나. 언젠가 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유추해서 아는 것이다.
우리도 원래 그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러니까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디서 봤나?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사람, 거기서 우리가 본 것이다. 얼른 보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십자가에 달리니까 그냥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어? 이런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겠는가? 그래서 지금까지 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이천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 사람을 왜 버려두고 있겠는가? 봐도 모르니까 그렇다. 봐도 모르니까. 한 번도 안 본 사람이니까 모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뭔가 좀 다른 사람일줄 알았다. 세상 사람과 다르고 인간과 좀 다르고 뭔가 그런 표적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하고 너무 똑같다. 예수님만 그런가? 우리도 똑같다.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면 못 내려오고 죽는다. 내려올 수 있으면 왜 죽나. 내려올 수 있다면 왜 죽겠나.
일부러 죽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부러 죽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죽을 줄 알고 출발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여섯 시간 매달려 있어봐라. 그래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니까 괜찮다? 그러면 왜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렸습니까? 하겠는가. 그런 대답을 들었던지 그런 확신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왜 나를 버렸냐고 하겠나.
그런데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옛날에 이것을 해석하기를 야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자기 인생 전체를 다 내 놓았으면 도대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예수밖에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예수 외에 누가 이런 말을 하겠나. 참 아름답게 해석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분과 나는 더욱더 멀어지고 말았다. 왜? 나는 절대로 그렇게 못할 사람이다. 절대로 그렇게 못한다. 내 개념 속에 그런 것이 없다. 그러니까 그분과 나는 천리만리 구만리 떨어져 버린다. 존경스러울지는 모르지만 하나가 안 된다. 놀라운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안 된다. 하나가 안 되면 그분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공자님을 만나보면 나하고 하나 되자는 말을 안 한다.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된다. 그렇게 길을 가르쳐 준다. 석가모니에게 가면 마찬가지이다. 길을 물으면 그래, 잘 왔다. 의심부터 해라. 그리고 실제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그래서 참선으로 유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고, 이렇고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더니 바요나 시몬아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구나.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돌아서서 바로 예수님이 죽음을 얘기하니까 절대로 있을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랬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분을 안다고 할 수가 도저히 없다.
나는 오십년을 예수만 바라보고 왔다. 그런데 모른다. 몰라도 나는 10%인지 1/100%인지 그 정도를 가지고 살았다. 완전히 안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먹고 살았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분을 모른다. 어떻게 물로 포도주를 만들겠나.
그런데 여기서 아니다. 해버리면 나는 그분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하면 맹꽁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서 내 작은 경험을 인용해서 그랬다. 내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모르겠지만 이 예수라는 분이 내 인생에 개입하니까 잔치 집처럼 풍성해지더라. 이렇게 해석을 했다. 그러니까 나도 살고 여러분도 살고 그랬다. 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먹고 살았다. 안 것이 아니고 어떻게 내가 살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을 해서 먹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세상에서 제일 편한 교회고 자유로운 교회고 어디가면 교회를 자랑할 수 있고 이런 교회였다. 왜? 내가 먹고 내가 산 것을 얘기했으니까 딴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쉬웠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분 자신은 모른다. 90%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당연하지. 사람도 분량이 다른데 그분을 내가 어떻게 다 알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신화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내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신화로 덮어진 사람이다. 포장된 사람이다. 이 말에 내가 깜짝 놀라서 예수 사실은 뭐냐? 사실은 뭐냐? 모두 신화고 역사라고 한다면 사실은 뭐냐? 그래서 사실을 추구하다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됐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었던 것은 야 이제 좀 가깝네. 옛날에는 천리만리 구만리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야 만질 수도 있겠네. 내가 알 수 있겠네. 이 생각이 들어서 나는 너무 좋아서 교회 앞에 얘기했는데 아무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자꾸자꾸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가보니까 와 이런 인간도 있구나. 이렇게 바닥 친 인생도 있구나. 나도 출발이 바닥이다. 여러분에게 여러 번 얘기한데로 내일 아침에 밥을 먹을지 못 먹을지 모르는 그런 현실 앞에서 내가 굴복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영원히 그것이 안 없어진다. 어떤 경우도 안 없어진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것이 나에게 안 없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두렵지 않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때 나를 불렀다. 그래서 지금은 두렵지 않다. 무슨 일로 내가 밀려난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이 또 나를 부르실 것이니까.
이래서 예수님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됐다. 야, 내가 밑바닥이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네. 하나님 아들이라고 까지 칭송을 받았던 사람, 자기 스스로도 그렇다고 대답을 했던 사람, 이 사람이 지금은 이런 대답도 할수 없고 저런 대답도 할 수 없고 꼼짝없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다. 아이고, 내려오지 못했다는 말은 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만 빼면 좋을텐데, 왜 그 말을 꼭 넣느냐고 한다. 그 말을 빼버리면 내가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빼고 나면 내가 할 말이 없다. 할 필요가 없다. 그 말 때문에 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나는 계속 할 것이다.
우리 안에서도 그런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나는 그 말을 해야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내려왔으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냥 죽었으면 무슨 문제가 되겠나.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인데 이러면 그만이다.
내려왔으면 아이고 사람이 아니네. 이렇게 될 것이니까 나하고 상관이 없고 내려올 수 없는 그 점이 나하고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우리하고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듣기 싫은 것 같은데 그 자리가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자리다.
그러니까 야 절대로 만질 수 없었던 그분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났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이 알고 보면 아무 말도 아니다. 말장난 같다. 아니 내려오지 못하니 죽지. 이러면 아무 말도 안 된다.
그런데 그것을 씹으면 씹을수록 나도 그렇지. 나도 그렇지. 저 사람하고 나하고 이렇게 같을 수가 있는가! 하나님 아들이냐고 물을 때 그렇다고 하고 죽음을 향해 갔던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나하고 같다니.
여러분 잘 생각하라.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으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했으면 안 죽는다. 그렇지 않다고 말했으면 아 그러면 그렇지. 풍설이구나. 이러고 끝났을 것인데 그렇다고 대답해서 죽은 것이다. 이 말을 안했으면 안 죽는다. 이 말을 안했으면 그 무서운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 그 분은 그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죽을지라도 안 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왜 그런가? 만일에 여기서 아닙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 살아났다면 예수님이 오신 일이 말짱 다 헛일이 되고 만다. 미친놈이 되고 만다.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 그렇지 않겠나. 요즘 정신과에 과대망상증 환자다.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과대망상증 아닌가.
그러니까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한 말이다.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가 여기서 이분을 만날 때 우리는 빼도 박도 못 한다. 도망갈래야 갈 데가 없다. 나는 안 그런가? 여러분은 안 그런가? 잘 생각해봐라. 여러분은 거기서 예외가 있는 사람인가?
나 혼자라고 하자. 그러면 여러분은 예외인가? 내가 과대망상증이라든가 과대축소증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아닌가? 내가 모른다고 그러면 여러분은 아닌가? 나도 사람 여러분도 사람이다. 어디로 갈 데가 없다. 이제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데가 없다. 도망칠 수가 없다.
도망치면 나는 그냥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허황한 사람이 된다. 도망치면 똑똑한 사람이 될 것 같지만 도망치면 진짜로 멍청한 놈이 된다. 왜냐하면 사실을 놓고 아니라하고 갔으니 그보다 멍청한 놈이 없는 것이다. 잘 생각할 일이다. 내가 똑똑한가? 아니면 내가 미련한가? 잘 생각할 일이다. 그
런데 의외로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가? 하고 받아들이는데 똑똑한 사람은 이상하게 못 받아들인다. 똑똑하면 더 잘 받아들여야 하는데 똑똑하니까 더 못 받아들인다. 이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이보다 똑똑한 일이 없는데 똑똑한 사람이 이것을 안 받아들인다. 자기 똑똑한 것이 별것인줄 안다.
지금도 여기 혹시 그런 분이 있으면 깊이 생각해라. 어느 것이 똑똑한 짓인가. 이 사람을 보고 아 나도 그 사람이네. 이렇게 시인하는 것이 똑똑한 것인지 아니면 야 휘황한 소리하네. 하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인지, 누가 똑똑한 사람인가. 똑똑한 체 해 봤자 헛일이다. 어차피 사실인데 어쩌겠는가. 어차피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싫으나 좋으나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남이 아니고 나인데 어쩌겠는가. 나 자신 아닌가. 여러분 자신 아닌가. 어찌할 방법이 없다. 도망치면 비겁한 놈이 되는 것이다. 멍청한 놈이 되는 것이다. 죽으나 사나 시인해야 한다.
그래서 일단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놓고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마지막에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 놓고 이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이다. 모른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니까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은 사람이다. 아담은 그 후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 자기 얼굴을 보일 수 없으니까 하나님에게 갈 때는 제물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물을 원하시겠는가. 아담의 얼굴을 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간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 얼굴이다.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이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제물을 어떻게 드리느냐 어떤 제물이 더 확실한 제물이냐 이러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니겠나.
살았을 때는 고기 한 번도 안 사온 아들이 죽은 후에는 돼지 잡고 소 잡고 해서 난리를 친다. 그것을 죽은 사람이 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나. 야, 이놈아 너 거짓말 그만해. 너 거짓말 그만해. 내가 다 알아. 조상이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겠나. 사람이 제물로 자기를 가리려고 한다는 것은 아주 간사한 짓이다. 아주 간사한 짓이다.
얼굴을 당당히 보일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한다. 그러려면 이 자리를 시인해야만 얼굴을 당당히 내놓고 내가 이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입니다. 나는 잘못 알았습니다. 이러고 돌아가야 된다. 그것이 정직하고 참된 것이고 진실이다.
왜 휘장을 치고 깜깜한 방에 계신 줄 아는가? 하나님이 사람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나무 뒤에 숨은 사람이 두려워서 그렇다. 숨어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우리가 모른다. 숨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엇을 하는지 모르니까 위험하다.
밤에 찾아오는 사람이 왜 무서운가? 숨어 있다가 오니까 그렇다. 멀리 찾아온 사람이 왜 무서운가? 숨어 있다가 오니까 그렇다. 남의 말 엿듣고 있는 사람은 무섭다. 왜? 그 사람이 엿듣고 와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남 몰래 다니는 사람은 두려운 사람이다. 얼굴이 보인 사람은 두려운 사람이 아니다.
다 자기를 공개한 사람은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나도 그렇네. 그러면 우리가 얼굴이 벗겨진다. 나도 그렇습니다. 하면 내 얼굴이 다 벗겨진다. 그런데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미 숨어버리면 못 찾는다. 하나님도 찾을 수가 없다.
와서 어떻게 무슨 행패를 부릴지 모르니까 단단히 잠그고, 제사장보고 일 년에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와라. 그것은 죽은 자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죽는 자만 나를 만날 수 있다. 산 놈은 나를 못 만난다. 내가 두려워서 못 만난다는 말이다. 피가 없이는 만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셨을 때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숨이 끊어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한다. 왜? 이제 알만 한 사람을 만났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죽은 사람을 보니까 이제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처음으로 진실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휘장을 찢어버렸다.
하나님도 두려운 사람이 있다. 그것이 숨어 있는 아담이다. 우리가 만일 숨어 있다면 하나님이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하나님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내가 어떻게 내 얼굴을 내 놓겠나.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 나네. 이 사람이 바로 나구나. 이러면 하나님이 벌써 아신다. 뭐라고 안 해도 벌써 다 아신다. 그러면 하나님하고 금방 친해지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을 찾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고 있다. 이천년은 그만두고라도 창세 이래 지금까지 찾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가까워지는 일, 같이 하는 일은 아주 쉽다. 너무 쉬운 것이다. 얼굴만 내 밀면 되는 것이다. 얼굴만 내 밀면 되니까 너무 쉽다. 아니 금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가. 은을 가지고 오라 하는가. 우리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얼굴을 그냥 내 놓아 봐라. 그 말이다. 얼굴을 좀 보자 그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두려워 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나를 두려워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시겠나. 어림도 없다. 하나님이 당하려고 오시겠나. 절대로 올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하나님 만나기가 너무 쉽다. 너무 쉽다. 나 여기 있습니다. 하면 된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 앞에서 나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줄 아는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시인하는 날,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맘대로 하는 세계가 그때 온다.
아니 이라 봐도 그 사람, 저리 봐도 그 사람,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하나님이 보면 얼마나 반갑겠나. 가득 찬 것이 그 사람이 가득 차 있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이 사람을 봐도 그 사람 저 사람을 봐도 그 사람 다 같은 사람이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뭐 대골 짓고 궁궐 짓고 경복궁 짓고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그 사람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다. 나라이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면 저절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너무 쉽다. 너무 쉽다.
위치만 바꿔지면 너무 쉽다. 그러면 나도 남을 알고 남도 나를 안다. 하나님도 나를 알고 그러면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누가 묶어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기가 숨기니까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율법 율법이라는 방식으로 다루었다. 그것도 좀 멀다. 율법, 율법 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좀 멀다. 유대인들에게는 맞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좀 먼 얘기이다. 나도 나도 해야 한다.
옛날에 양반 댁에서 밥 먹을 거리가 없게 되었다.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장사하는데 자존심상 도저히 자신이 없다. 굴비 한 짝을 사서 바로 나갔는데 굴비장사 뒤를 따라간다. 법성포 굴비요. 굴비요 하면 뒷사람이 나도 나도 했다고 한다. 나도 나도 해야 한다. 그러면 앞에 사람의 굴비가 떨어지면 나도 나도 하는 사람의 굴비라도 살 것이 아니겠나. 앞에 사람 굴비 다 팔고 나면 뒤따라가는 사람 굴비 살 것이 아니겠나.
나도 나도 라도 해야 한다. 말을 못하면 나도 나도 하고 따라가라. 그것은 양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갓 쓰고 안방에 앉아서 긴 담뱃대 물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굴비 짝을 짊어지고 가면서 나도, 나도 만하고 있는데 안 사가겠나. 사간다. 영락없이 장사를 한번 해보면 그 다음엔 용기가 나서 장사를 한다. 여러분 한번 해보라. 그러면 그 다음부터 용기가 나서 한다.
아까 나와서 인사하던 주윤숙. 나한테 와서 참 밥해주느라 수고를 많이 한다. 나는 나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그랬더니 자기 얘기를 들으니 항상 거리감이 있고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간증할 때 나도 했더니 말이야. 그렇게 좋아한다. 나도 했더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도 했더니 지금은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안되면 그렇게라도 해봐라. 그러면 좋아진다. 왜? 사실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입으로 외치기만 하면 되냐고 하는데 사실은 늘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 사실이 아닌 것은 입으로만 말하면 안 되지만 사실이니까 밎져야 본전인데 왜 못하겠는가. 그냥이라도 하라고 하면 하면 되지 밎질 것이 뭐가 있는가. 사실인데.
우리복음은 전하기 쉽다. 쉬우니까 쉽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이 간단한 말 같지만 이 말이 아주 중요한 말이다. 그렇게 안 된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말만 그러지 그렇게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된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새로운 사람을 처음 만나도 너도 사람 나도 사람 간단하고 쉽다. 사람 만나는 지평이 확 넓어진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유는 소유대로 있지만 그 말이 아니고 그 소유를 내가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노력해서 능력으로 얻어 놓은 것이다. 그것 말고, 그것 말고 그 소유 말고 소유로 보면 차이가 많다.
이병철씨 하고 나하고 소유로 비교가 되겠나. 이병철씨는 그만 두고라도 비교가 되겠나. 그런데 소유로 말하지 말고 존재로, 나도 그 사람 너도 그 사람 그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기 때문에 넓어진다는 것이다. 존경할 것은 존경해야 한다. 능력도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해보니까 장사를 해보니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된다. 앞에 사람은 다리가 하나 없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장사를 얼마나 잘하는지 자기 돈으로 시작했다가 다음에는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한다. 외상을 가져다 장사를 하고 그것도 넘쳐나니까 그 돈으로 이자놀이를 한다. 이자가 얼마인가 하면 당시에 이자가 제일 싼 것이 월 삼부다. 연 36%다 이런 고리대금이 없다. 그것이 돈이 돈을 또 낳더라. 남의 돈을 가지고 이자까지 놓는다.
나는 점점 줄어져서 아침에 문을 열수 없게 돼 버렸다. 그래서 서로 보기가 민망하다. 서로 민망하니까 아침에 인사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일찍 어떻게 한술을 먹으면 높은 고지에 있는 동네 예배당으로 올라가서 아무도 없는 마루방에 혼자 뒹굴뒹굴 하다가 온다. 낮에 못 내려오니까 낮에 안 보려고 해거름에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하고는 멀어지고 먼 사람하고는 가까이 하고 이렇게 되더라.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누가 나보고 무식하다고 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그렇지 너가 나보다 얼마나 많이 배웠는데 너가 나보다 많이 알지. 당연히 많이 알지. 당연히 많이 알지. 그렇지 않나. 고등학교 나온 사람보다 대학교 나온 사람이 많이 알고 대학교 나온 사람보다 대학원 나온 사람이 많이 알 것이고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서도 그것을 시인해야 나도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다.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너가 재수 좋아서 그렇지 이러면 밥도 못 먹는다. 그런 사람은 밥도 안준다. 그러니까 진실할 때 진실할 때 나만큼 무슨 일을 할 수 있다. 분수를 알아서 살 수 있다. 그러면 밥은 안 굶고 살 수 있다. 부자 되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그런데 밥 먹는 것은 할 수 있다.
우리 복음은 쉬운 복음이다. 쉬운 복음, 아주 쉬운 복음이다. 그런데 왜 못 맏아들이냐? 똑똑해서, 헛 똑똑해서 못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심하게 목을 쪼아야지. 똑똑한가? 멍청한가? 이것이다. 발이 하나 없으면 없다고 해야 진실한 것이지 발이 하나 없으면서 있는 체 하면 그것이 똑똑한 것이 아니다. 진실한 것도 아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된다. 꼭 두 개 가지고 살라는 법이 없다. 뭐가 문제가 되겠나. 이제 하나님 앞에 섰는데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나.
그래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하다. 그러니 실컷 하라고 해라. 같이 맞불 작전 하고 싶지 않다. 너는 안그러냐 하고 같이 싸울 마음이 없다. 내가 잘못한 것은 내가 받아야지.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수술한지 1년 6개월이 넘었다. 이런 사람도 드물다. 그러면 내가 벌 받는 모양이다. 내가 잘못해서 벌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난다. 내 업은 내가 받아야지 누구 딴 사람보고 받으라 하겠나. 받아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실컷 하고 돌아다녀라. 맘대로 해라. 파멸에 이를 때까지 해라. 내가 파멸에 이를 때까지 해라. 목표는 그것이다. 다른 것이 없다. 그러니까 실컷 해봐야지.
내가 무슨 수로 못하게 하겠나. 내가 어떻게 그 화를 피하겠나. 나는 피할수 없고 당해야 한다. 그래도 내 할 일은 따로 또 있다. 그렇다고 못하지 않는다 나는 내 할 일을 그냥 한다. 죽을 때까지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한다. 나는 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못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이것은 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게 잘못한 일도 있고 잘한 일도 있다. 한 가지 잘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하고 다 잘하는 게 아니다. 한 가지 잘못해도 한 가지는 잘할 수 있다. 판이 바꿔지면 다른 판에 가면 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여러분 팔자 바꾸기 어렵지 않다. 판을 바꿔라. 그러면 팔자가 바꿔진다. 하나님 나라에도 그런 문제가 있는가? 그런 문제가 없다. 문제 자체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판을 바꾸는 생활을 해보니까 야 이것 참 신기하네. 어제까지 돈 돈 돈, 돈 아니면 안 되는 세상에서 여기오니까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고 공부 공부 공부 공부하라는 것이다. 돈은 어디 가버리고 없다. 오죽하면 내가 배 바닥에 숨어있었겠나. 아무도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가 스스로 두려워서 요나가 배 바닥에 있었던 것처럼 배 바닥에 숨어 있었다. 고동을 불고 배가 떠나니까 그때 나왔다. 갑판에 올라가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때 그 부끄러움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원래 바탕이 그런 사람이다. 세상에 나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은 딴 판이다. 딴판인데 왜 옛날 판에 붙잡혀 살겠나.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새것을 준 이유는 새롭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의 창시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다. 새 생명의 주다. 하나님이 하나인데 왜 둘이냐? 이 생명의 하나님도 있고 새 생명의 하나님도 있다. 주라는 말은 그런 말이다. 생명의 주다. 생명의 주다. 예수는 내 새 생명의 주이다. 내 새 생명의 하나님이다.
요한 1서 마지막에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고 한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고 한다. 절대로 신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 요한1,2,3서인데 마지막에 가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고 한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것인가?
새 사람에게는 실제적으로 새로 시작한 분이니까 하나님이다. 새 사람을 시작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그러니까 창조자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없는데서 생겼다. 마찬가지로 나는 없었는데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하나님이다. 예수가 내 하나님이 될 때가 있다. 내가 새 생명으로 태어날 때 그러니까 말이 실제 안에 들어오면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다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피조물이 됐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게 됐으니까 그는 이 생명의 주가 된다. 만유의 주가 된다. 더 말하면 끝이 없이 길어지니까 한번 해봐라. 안되어도 한번 해봐라.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르니까 해봐라.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이러면 이것은 아무나 해도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이러면 뭐가 또 들어붙어서 뭐라고 하니까 그것은 치우고 말 바꾸면 된다. 아무렇지 않다. 이래 말하나 저래 말하나 그 말이 그 말이다. 생명은 이렇다. 살아 있는 것이니까 앞에서 봐도 고기고 뒤에서 봐도 고기다. 앞에는 고기인데 뒤에는 짐승인 그런 물건이 있는가? 없다.
사실을 얘기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사실을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거짓말이다. 남보고 이러니저러니 할 것도 없다.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 진실 안에서는 내가 진실하게만 살면 된다. 누가 뭐래도 그렇게만 살면 된다.
교회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내가 염려하는데 왜 자기들이 염려하는가? 안 그런가? 교회 염려는 내가 하니까 안해도 된다. 아니 누가 교회 염려를 나보다 더 하겠나. 한번 생각해봐라. 우리 교회에서 누가 나보다 대구교회를 더 염려하겠나. 나 혼자 할 테니까 다른 사람은 염려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은 그 짐을 짊어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오늘 이런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확 벗어버려라. 책임은 내가 질것이니까 벗어버려라. 이단 되면 내가 이단 되지 자기가 이단이 되나. 잘못되면 내가 잘못되지 자기가 잘못되는가. 염려 걱정 그것이 무거운 짐이다. 왜 안 해도 될 남의 짐을 짊어지고 낑낑거리겠나.
남의 짐을 지고 수고한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했다. 이제 벗고 가도 되겠지. 걱정 말고 해라. 내가 걱정하고 있으니까 내가 왜 살아 있겠나. 그 걱정 하라고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없거든 또 누가 걱정하면 된다. 걱정할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만 걱정하면 된다. 조금도 걱정 말고 해라.
필리핀에 가서 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한다. 쉬운 복음, 만민이 함께 할 수 있는 복음이 그 집안에 전부 전파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처음에 말한 데로 시집 갈 사람은 용감하게 나와라. 내가 가겠다고 나와라. 미샥이 제일 좋아할 것이다. 자기가 필리핀 사람이니까 우리에게 그런 말하기도 그렇고 어려우니까 못한다. 우리가 해줘야지 누가 하겠나.
이번에 재승형제가 필리핀에 갈 때 여유 있는 사람은 여비도 좀 도와주시고 그렇게 하면 좋겠다. 세 명이 같이 간다고 하니까 노자 돈이 많이 들 것이다. 혼자 가기 그러니까 셋이 가고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니 좋은 결과가 오기를 기다리겠다. 씨를 뿌리고 오면 된다. 씨 뿌리는 자로 다녀오기를 기도 하겠다. 그만하자. 너무 길어진다